미디어스 한윤형 칼럼.


...  ‘일베’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잉태되었는지를 따지지 않고 그저 그들을 ‘패륜’으로만 단죄하려는 이들은 ‘물구나무선 일베’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일베’를 패륜으로 몰고 그들을 배제하는 것은 혐오발언이 난무하는 지금의 사회문제를 해결하는데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일베’에 대한 배제의 몸짓으로는, 결코 혐오를 넘어설 수 없다.


한윤형 칼럼의 장점은 나누고 구분해서 세밀하게 따진다는데 있다. 그 때문에 그의 칼럼은 읽으면 즐겁다. 하지만 이 번 칼럼은 좀 덜 나누고 따진 듯 하다. 


1.


일베의 원인을 따지는 것과 일탈을 저지른 일베 회원에 대해 대처하는 방식은 다른 차원이다. 한윤형도 이 두 개가 분명히 다른 차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결론은 두 개 차원을 뒤섞고 있다. 


한윤형의 주장은 배제로는 혐오를 넘어설 수 없다라는 건데, 배제의 정당성은 <혐오의 극복 여부>가 아니라 혐오를 표현한 자에 대한 <사회적 대응으로써 적절한가>가 되어야 한다. 한윤형이 예로 든 지존파의 사례를 든다면, 지존파의 행위를 이해하고 그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할지라도, 지존파가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그게 사형인지는 논란이 될 수 있어도--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 아닌가?

배제가 구조적 문제의 해결책으로써 한계를 가진다고 지적하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그 한계가 배제를 비난하는 근거가 되는 건 적절치 않다.


혐오는 사회구조에 의해 재생산되지만 "우리 안의 일베" 논의에서 자주 거론되듯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심리적 기제가 작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혐오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 심리적 기제를 억누르는 (설사 효과가 완벽하지 않더라도) 장치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 장치가 사회에 따라 형사법이 될 수도 있고, 공적 지위에서의 박탈이 될 수도 있다. 혐오 발언을 한 사람을 배제하는 사회적 전통은 설사 그것만으로 혐오를 근절할 수 없더라도 혐오의 사회적 재생산을 막는 한 부분이다.


좋은 사회정책이 좋은 형사정책이지만, 좋은 사회정책이 아니라고 형사정책을 비난하는 건 논리적 오류다. 사회정책이 좋다고 형사정책이 필요없는 것도 아니다. 혐오 표현에 대한 대응으로 사회적 배제는 반드시 필요하다.


2.


일베가 문제가 되는 데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주로 노대통령을 폄하하는 패륜적 표현으로 얘기되는 정치적인 것, 다른 하나는 집단에 대한 혐오다. 이 두 가지는 다르다. 전자는 혹자에게는 기분나쁘더라도 일정정도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집단에 대한 혐오는 국가에 따라 직접적으로 형사 처벌하거나, 다른 범죄가 혐오와 관련되어 있을 때 가중처벌한다.


일베를 비난하는 데는 이 두 가지가 섞여 있다. 전자만이 문제라면, 이명박 박근혜에 대한 모욕적 표현을 일삼는 진보를 "물구나무선 일베"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집단에 대한 혐오 발언에 대한 배제는 이와 무관하다. 어떤 진보적 논의도 일베와 같은 집단에 대한 혐오를 드러낸 적이 없다. 혐오 발언을 일삼은  집단에 대한 혐오를 드러낸 일베를 배제하는 논리는 일베의 반사 이미지가 아니다. 집단 혐오에 대한 사회적 대응이다. 이를 정치적 표현의 감수성과 함께 논의하여 뒤섞는 건 물타기다.


일베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이 두 가지를 구분하지 않고 뒤섞어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지적할 수는 있다. 혐오는 별로 문제 삼지도 않으면서 정치적 입장 때문에 과잉 반응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둘을 나눠 지적하지 않으면 그 지적은 많은 물타기 논리가 그렇듯 일베 옹호로 귀결되기 쉽다.


한윤형은 자신의 과거 글을 인용하여 혐오와 정치적 호오를 구분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바로 다음 문장에서 여성,호남혐오의 패륜과 쥐박이, 닭근혜와 같은 표현의 패륜을 동일 선상에서 취급하고 있다. 그 자신이 지적한 차원이 다른 문제를 뒤섞은 것이다. 한윤형의 "물구나무선 일베" 비판은 세밀히 따지지 않고 일베의 두 차원을 뒤섞은 결과가 아닌가?


3.


그럼 면에서 한윤형이 적절히 지적했듯 윤완주 선수에 대한 징계와 KBS 기자에 대한 논란은 결이 다른 문제다. 자세히 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그 징계가 "노무노무 일동차렷"이라는 표현 하나 때문이라면, 징계가 과하다고 생각한다.


대중을 대상으로 일정 퍼포먼스를 해서 밥벌이를 하는 직업은 정치적 사회적 논란에서 적절치 못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계약서에 그런 내용이 들어 있기도 하다. 사회적 품위 어쩌고 하면서. 윤완주 선수의 표현이 그 계약 내용을 위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윤완주의 경우 <징계 수위의 적절성>이 의문이다. 윤완주의 표현이 집단에 대한 혐오를 드러낸 것도 아니고 특별한 정치적 함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닌, 단순한 표현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윤완주 선수 문제와 KBS 기자 사건이 왜 어떻게 다른 차원인지 세밀하게 구분해야 한다. 나는 한윤형의 글에서 윤완주에서 KBS 기자 문제가 다르다고 얘기하면서, 왜 배제가 능사가 아니라고 얘기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전자의 배제는 잘못되었지만, 후자의 배제는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배제가 혐오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지 못한다고, 배제를 정신승리로, 문제를 직시하지 못한 결과로 치환시키는 것은 이상하다. 


문제를 정확히 인식해도 인식하지 못해도, 근본적인 해결책을 알고 있어도 그렇지 못해도, 집단 혐오 발언자의 공공 부문에서의 배제는 가능하다. 차원이 다른 문제다.


4.


한윤형의 글과는 별도로 나는 미디어스의 집단 혐오 문제에 대한 인식이 충분히 깊지 않다고 본다. 미디어스는 KBS 기자에 대한 정보를 먼저 접하고도 보도하지 않았다. 공익성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집단에 대한 혐오 발언을 일삼는 개인이 준세금에 해당하는 시청료를 걷는 조직, 그것도 객관성과 윤리성을 요구하는 직종에 선발되었고, 그렇게 선발된 이후에도 혐오 발언을 계속하였다. 이게 공익성이 없는 사안인가?


다른 언론사에 의해서 보도되자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논쟁을 촉발시켰다. <혐오 발언의 사회적 배제>라는 공공적 의제에 해당되는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스를 이를 보도하지 않았다.


5.


마지막으로 <우리 안의 일베> 논의가 일베를 키웠다는 주장이 틀렸다는 한윤형의 주장은 맞는 말이긴 하나 별 의미가 없다. 


<우리 안의 일베> 같은 류의 주장을 경계하는 이유는 바로 집단 혐오 문제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정치적 표현의 자유 문제와 섞어서 물타기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일베 현상을 이해하는게 집단 혐오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논리로 흘러갈까 경계하는 것이다. 


6.


그래서 결론은,


쥐박이, 닭근혜와 노알라는 다르지 않지만, 이들 표현과 여성혐오와 호남혐오는 다르다. 이건 우리들만의 논리가 아니라, 보편적인 인권의 논리다.


근본적이지는 않더라도 이 혐오 정서를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고민이 바로 혐오 발언자의 공공 부문에서의 배제다. 이보다 더 구체적이고 당장 시작할 수 있는 대안이 있는가?




ps. 이 블로그에 일베에 대한 글을 여러 번 (예를 들면 호남혐오는 요기, 지역문제는 요기, 여성혐오는 요기) 썼는데, 대부분이 일베 현상의 사회구조적 원인, 그에 근거해 그들의 행위를 "이해"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 구조적 문제에 대한 이해 노력이 없었다는 비판은 사절.

Posted by sov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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