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사태

기타 2016. 8. 12. 05:54

또 한 번 어그로를 끌겠지만 나는 이화여대 사태를 좋게만 보지는 않는다. 


학생들의 행동을 조금이라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모든 시각에 대해 반여성의 이미지를 덧씌우는데, 사안이 그렇게 단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부의 반응이 반여성주의적 마초적인 것은 맞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한 쪽의 편을 들기에는 여러 짜증스러운 일들이 섞여 있다.  




우선, 이대 학생들의 초기 농성은 "감금"이라는 명백히 불법적, 인권 유린 행위를 동반했다. 교수와 교직원들은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은데, 학생들이 막아서 못나갔다. 나는 이 행위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감금된 상태에서 학대를 당하지 않았어도 감금은 감금이다. 감금 피해자들은 경찰에 23차례나 신고를 했고, 언론 보도에 따르면 경찰 조사에서 가해자 처벌 의사 역시 밝혔다. "다만세"를 부르는 여학생이 했어도 감금은 징역5년 이하에 처하는 중범죄다. 감금 피해자가 멀쩡히 걸어나오고 학생들 중 탈진한 경우가 있다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멘션들이 있던데, 정상이 아니다. 


많은 시위가 거주물에 대한 점거를 동반하지만, 극단적인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감금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점거 외에 감금이 상징적으로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이 번 시위는 전반적 여론이 의아할 정도로 학생들의 불법 감금 행위에 대해서 애써 무시하며 반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감금죄 수사에 총장이 압력을 행사토록 요구하는 학생들의 무리수도 아마 우호적인 사회적 여론에 편승한 것일테다.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의 불법 행위 현장에서 국정원 직원인 여성이 사무실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것을 두고 감금(법적으로 이 국정원 직원은 감금이 아닌 것으로 판결났다)이라고 분노하던 여론은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이 번 사태에 총학생회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무척 다행스럽다. 아마 운동권 총학생회가 관여했으면 보수 언론으로부터 인질극을 벌인다고 난도질 당했을 것이다. 


이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한국 사회가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뿐, 그 원칙에는 별 관심도 없는 듯하여 씁쓸하다. 





이 번 사태에서 학교 측에서 평생교육 단과대 설치를 철회한 가장 큰 이유는 1,600여명의 경찰을 동원한 후폭퐁 때문이다. 하지만 경찰 동원은 불법 감금을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학교 측의 미숙한 대응 때문에 여론이 학교 측에 불리하게 형성되었지만, 감금의 불법성에 촛점을 맞추어 여론을 충분히 환기한 후 경찰 투입을 요청했으면 사태의 전개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감금 행위가 없었다면 경찰을 동원한 학교 측의 행위에 동감할 수 없겠지만, 감금이 있는 한 이해할 구석이 있다. 





일부에서는 사건 초기에 이대생 집단행동의 심리적 배경에는 이대 순혈주의가 있다고 비판하였다. 아마 이대 순혈주의가 상당히 영향을 끼치기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타당한 문제 제기가 아니다. 순혈주의가 이대만의 문제도 아니다. 거의 모든 대학에 순혈주의가 있다. 모든 사회적 행위의 동기가 순수 그 자체여야 하는 것이 아니다. 명분이 옳다면 동기가 불순해도 옳은 건 옳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대는 평생교육 단과대 설치를 백지화 했다. 학생들이 요구하던 가장 큰 목표가 달성되었다. 설사 부분적으로는 이대 순혈주의에 심리적 기반을 두었다 할지라도, 이 결과는 이대생들이 한국 대학 교육의 모순을 짚고 승리를 거둔 위대한 순간이라고 여러 언론에서 칭송하였다. 나 역시 동의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승리의 긍정적 측면이 확대 재생산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애초의 목표가 달성된 후 이대생들은 운동의 동력을 두 가지로 이끌 수 있었다. 하나는 학내 문제에 치중하면서 이대 순혈주의를 강화하는 쪽으로, 다른 하나는 한국 대학 교육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개혁, 개선을 유도하는 쪽이다. 


농성을 계속하며 나오는 학생들의 요구를 볼 때 이 사태의 전개는 안타깝게도 후자보다는 전자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언론에 보도된 내용으로 보면 현 시점의 이대 사태는 대학의 구조적 문제와는 별 관계가 없는 순수한 학내 문제로 바뀌고 있다. 이대생, 이대졸업생과 학교 당국의 알력 문제. 


이루고자 하는 다른 목표도 없이 수사 중단과 총장 사퇴를 요구하는 것은 대화 요구도 아니다. 사퇴 외에는 아무런 요구도 없는 사람과의 대화는 쉽지 않다. 합의할게 없지 않나.   


현 시점에서 평생교육 단과대 설치의 정당성과 대학의 변화 방향에 대한 논의는 이대 점거 농성에서 실종되었고, 총장이 얼마나 진정성있게 사과하냐는 문제만 남았다. "사퇴가 곧 사과"라는 주장이 이를 대표한다. 


이대생들이 한국 교육 문제를 선도적으로 제기하고 이끌어갈 책임은 없지만, 그들이 한국 대학의 구조적 문제점을 짚었다고 칭찬을 받은 그 만큼, 이러한 전개는 충분히 비판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모르는, 언론에는 잘 보도되지 않은 다른 요구 사항이나 진행 사항이 있나? 

Posted by sov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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