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찰의 물대포에 시위자가 사망하는 일은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바람직한 일은 아니고, 훈련을 통해 막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시위 현장에서 경찰도 흥분해서 과잉 반응하는 일은 다반사다. 물대포를 직사한 경찰도 물의 위력으로 사람이 죽을 것으로는 생각치 않았을 것이다.  


한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는지 보는 것은 이런 "사고"가 아니라 이 사고를 어떻게 수습하고 처리하는가에 있다. 시위가 빈번하면 사고는 피할 수 없다. 


이 번 백남기 농민의 부검을 둘러싼 논란은 우리 사회에서 국가기관과 시민사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 건 민주주의의 법률이나 작동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그 작동의 일부로 역할하는 주체들의 책임성 문제다. 





한 국가의 공적 영역을 구성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국가고, 다른 하나는 시민사회다. 시민사회라는게 운동권 시민 단체나 어버이 연합 같은 극우 단체를 얘기하는 것만이 아니다. 의사협회, 변호사협회 등의 직능단체가 모두 시민사회다. 


전문가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시민단체의 힘은 실로 막강하다. 변호사 법률 사무소를 오픈할려면 지역 변호사협회에 등록해야 하는데, 이 협회가 국가 기관이 아니라 시민단체다. 재판이라는 공적 활동의 자격 조건이 시민사회에 의해 결정된다. 


미국 대학원에 진학할려면 토플과 GRE를 봐야 하는데, 이 시험을 주관하는 기관은 공공기관이 아니라 사적 비영리 시민 단체다. 미국에서는 의대의 허가도 사적 기관에 의해 주도된다. 의대 학력 인증 기관이 국가가 아니라 시민단체다. 


이러한 사적 전문가 단체가 공적 영역을 구성함에 따라 한 국가의 공공성은 국가기관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시민사회와 국가기관에 의해 중첩적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개인 전문가는 때로는 매우 독특한 위치에 서게 된다. 의사는 개인이지만, 죽음의 원인에 대한 의사의 판단은, 죽음이라는 매우 개인적 사건을 사법기관의 개입이라는 매우 공적인 사건으로 바꿔 놓을 수 있다. 


이 경우 조직이나 권력자의 압력을 차단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인류가 알아낸 최선의 방법은, 전문가에게 독립성을 부여하고, 조직은 가이드라인만 부여할 뿐, 구체적인 판단은 개인의 양심에 맞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검사는 검사동일체 원칙에 의거해 상부의 명령이 하부에 관철되지만, 판사들은 개인의 판단에 의해 판결을 내린다. 상부의 지시에 의해 판결이 바뀌지 않는 것이 적어도 원칙이다. 때로는 판사의 편견에 의해 황당한 판결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 방법이 재판의 불편부당성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다. 


조직은 원칙만 정할 뿐 판단은 개인이 한다. 


그런 면에서 사망진단서는 의사 개인의 판단에 의해 발부하는 것으로, 백선하 의사의 사망진단서를 서울대에서 고칠 수 없다는 원칙은 옳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고려할 점이 있다. 


하나는 이 번 사망진단서가 의사 개인의 양심에 따른 판단이었냐는 것이다. 백남기 농민 사망진단서를 발부한 레지던트가 사망진단서 작성 시 개인의 양심이 아닌 상부나 외부의 압력이 작용했다는 상당히 농후한 정황증거들이 있다. 


사망진단서에 본인의 판단이 아니라 <'진료부원장 신찬수 교수, 주치의 백선하 교수와 상의해 사망진단서를 작성했다'>는 이례적 메모를 진단서에 남겼다. 백남기씨의 사위는 사망진단서를 작성한 레지던트가 전화 통화에서 병사가 맞냐고 세 번 물었다고 증언했다. 현재 그 레지던트는 잠적 중이다. 


의사 개인의 판단과 위배되는 윗선의 압력은 의사 개인이 발부하는 사망진단서 작성 시 개인 전문가의 양심에 따른다는 원칙에 위배된다. 백남기 사위의 증언, 사망진단서에 남겨진 기록, 전화 통화 기록 등은 조직이 위력을 발휘하여 양심을 꺾도록 만들었다고 의심되는 정황 증거다. 진단서가 양심에 따른 최선의 판단 결과가 아니라 상부의 압력에 의한 강압의 결과라면 이는 무효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두 번째 고려할 점은, 이렇게 상당한 정황 증거가 있을 때, 시민사회와 조직이 무엇을 하는가이다. 내가 이 번 사건이 백선하 의사의 개인적 일탈이 아닌 "서울대병원"이라는 조직 전체의 문제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 서울대는 압력을 부인하고 있다. 


이윤성 교수가 위원장을 맡았던 서울대 병원 특위에서 밝혀야 할 점은, 백선하 의사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언론플레이하는 것이 아니라, 레지던트가 발부한 사망진단서가 외부나 상부의 압력없이 양심에 따라 제대로 작성되었는지 밝히는 것이 되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윤성 교수 역시 비난을 피할 길이 없다. 


이윤성 교수가 언론에서 밝힌 개인 의견은 그의 개인 의견일 뿐이다. 특위위원장이 개인 의견이나 밝혀서 뭐에 쓰나. 그의 행동은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동의하지 않는 병사라는 황당한 판단을 내린 조직을 보호하는 행위일 뿐이다. 특위의 결론은 압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윤성 교수는 이 결론에 책임이 있다. 





한 가지 크게 다행인 점은 대한의사협회에서는 심폐정지는 "절대로 사망원인이 될 수 없다"는 공식입장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대한의사협회의 이 번 입장표명은 매우 중요하다. 상당수의 의사들이 백선하 교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제 서울대병원과 의사 조직체가 해야 할 일은 이 번 사망진단서 작성에 상부나 외부 압력이 있었는지를 밝히고, 그에 걸맞는 징계를 해야 한다. 만약 압력이 전혀 없었는데도 레지던트와 백선하 교수가 그런 식의 진단서를 발급했다면 그들은 기초적인 의학 지식 미달로 조직에서 퇴출되어야 한다. 잘못된 판단으로 국가 전체를 혼란에 빠뜨려 놓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넘어갈 수는 없다. 




ps. 부검영장을 발부한 판사의 처세도 비난받을만 하나, 의사의 진단서가 병사라면 영장 발부를 거부할 논리적 근거는 떨어지는 것 아닌가? 


pps. 이 번 사건에서 박근혜 정부의 경찰과 검찰이 보인 황당함이란... 

Posted by sov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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