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하네요 2

기타 2023. 12. 30. 16:51

BTS Dynamite Official MV.

 

집게손이 전세계로 퍼진 이유.

 

영어로 가사를 써서 전세계적 히트를 기록하고, 유튜브 10억뷰를 달성한 BTS의 다이너마이트에 이런 음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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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하네요

기타 2023. 12. 26. 14:08

좀 전에 끝난 49ers vs Ravens의 MNF (Monday Night Football)

 

Christmas 저녁에 C형 손가락이라뇨. 그것도 이렇게 길게 의도적으로, 미국 TV 최고 프라임 타임, 전국 카버리지 프로그램에 내보내다니. 

 

abc 방송국과 NFL, 볼티모어 레이븐스 어떻게 하죠? 

 

 

 

다시 체크해보니까 한 번만 보여준 것도 아니고, 아래 클립에서 보듯, 제 속도로 보여준 다음에 정확히 보이지 않으니까 위의 슬로우 모션 정면 샷으로 리플레이한 것입니다. Ravens 수비수 중에 태극기를 헬멧에 부착하고 나오는 한국계 Kyle Hamilton이 있는데, 이게 우연일리가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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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표현의 한계

정치 2023. 12. 21. 04:53

어떤 표현은 혐오 표현이고 어떤 표현은 아닌지를 얘기할려는건 아니다. 그 원칙과 기준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어디까지를 허용할지 강한 선호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혐오 표현도 표현의 자유로 허용되고 어떤 상황에서는 허용되지 않는지, 미국에서 대략 확립된 잣대가 있으니, 이 번 기회에 그 기준을 알아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하버드, MIT, 펜실베니아대 총장들이 의회로 불려가서 반유대주의 표현이 대학에서 용인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유대인을 인종청소해야 한다 (calling for the genocide of Jews)"는 선동이 대학의 행동 지침 (code of conduct)에 위배되는가라는 질문인데, 총장들의 대답은 "케바케"였다. 

 

이 때문에 의원들과 많은 국민들이 화가났고, UPenn 총장은 사임했고, 하버드 총장은 재신임을 받았지만 표절 이슈가 제기되어 있다. 

 

그런데 대학 총장들의 케바케 답변이 미국의 이전 판례에 비추어보면 틀린 답이 아니다. 미국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표현의 자유를 중시한다. 포르노도 표현의 자유에 의해 보호받는다. 혐오표현도 예외가 아니다. "유대인은 싹쓸어버려야 한다"는 주장도 상황에 따라 표현의 자유로 취급된다. 

그런데 이런 혐오표현이 표현의 자유인지, 아니면 규제 대상인지를 정하는 원칙이 하나 있다. 바로 일대일(one to one)이냐 아니며 일대다(one to many)이냐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발언하는 일대다 언명은 설사 혐오 표현이라도 개인의 자유의 영역이다. 하지만 대상을 특정하여 혐오 표현을 하는 일대일(one to one)은 규제의 대상이다. 후자는 개인의 자유와 안위를 위협하는 범죄가 될 수 있다. 여기서 다대일 (many to one)은 왜 없냐고 질문할텐데, 화자는 항상 한 명이다. 여러 명이 똑같은 소리를 해도 글과 말은 한 명(내지 한 그룹)이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one to one과 one to many로 구분된다. 

 

한국의 예를 들면 "20대 개새끼론", "한남", "386 똥팔육" 등은 일대다 표현으로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 하지만 특정 개인에게 혐오표현을 쏟아부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 번 넥슨 집게손 사태에서도 다수가 한 명의 여성을 지목하여 일대일 혐오표현을 쏟아내었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일말의 인식이라도 있다면 동참할 수 없는 범죄 행위다. 

 

예전에 윤지선 박사가 한남유충이라는 논문을 썼을 때, 연구 윤리 위반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윤지선 박사의 그 논문도 학술지에 실리는 철학 논문인지는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연구 윤리의 측면에서 그 논문은 용납할 수 없다. 연구의 대상이 된 행위자를 특정하여 거짓 정보로 해를 가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대일 발화는 학문의 자유의 영역, 표현의 자유 영역을 넘어선 책임을 동반한다. 

 

여기서 일대일 발화라도 표현의 자유를 좀 더 광범위하게 인정하는 대상이 있으니, 바로 공인이다.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라는 표현은 공인에 대한 "평가"에 해당하기 때문에 무죄였다. 하지만 뿌리의 노동자들은 공인이 아니다 

 

국가마다 표현의 자유로 허락하는 혐오 표현의 수위는 조금씩 다르다. 한국은 포로노 금지 등에서 보듯, 적어도 일부 영역에서는 규제가 강한 편이다. 

 

개인 자유 보호를 위해 일대일 혐오 표현에 대한 좀 더 강력한 규제와 처벌이 필요하다. 이 번 넥슨 사태에서 일대일 혐오 표현 행위에 가담했거나, 이 행위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개인의 자유와 안위를 위협하는 범죄자거나 범죄자의 편이라는걸 알 필요가 있다. 한남이라는 표현에는 뚜껑이 열리지만, 페미를 은근슬쩍 스리슬쩍 하겠다는 개인이 당하는 실체적 위협에는 무감각하다면, 본인은 자유주의와 거리가 멀고 집단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절어 있는건 아닌지 돌아보는게 좋다. 

 

SNS에서 글쓸 때 이 정도 조심은 해야하지 않겠는가.  

 

 

 

Ps. 이렇게 얘기하면 이 블로그에서 아무 표현이나 쏟아내는 분들 있을텐데, 하버드, MIT, UPenn 총장이 문제된게 바로 그 지점이다. 세 학교는 공립이 아니라 사립이라 좀 더 많은 규제의 자율성이 있다. 헌법적으로는 케바케라도 반유대주의 표현을 학교 내에서 금할 수 있는 자율성이 있다. 그런데 왜 그 자율성을 행사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블로그도 개인 블로그다. 존칭을 사용하고 가능한 점잖은 표현을 쓰라면 그렇게 하는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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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다를까, 양비론자들이 나타난다. 넥슨 사태 등에서 나타난 일련의 행태가 메갈 같은 반사회적 여성운동의 반작용이고, 따라서 자기는 어느 한 쪽이 틀렸다고 쉽게 판단하지 않는다. 메갈이 너무 나간 부분이 있기에 일부 여성이 당하는 것이 한편으로 고소하기까지 하다. 피해를 당한 여성의 편에 서서 한 쪽이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는 사람은 갈등을 해결하기보다 조장한다는거다. 

 

이렇게 한 쪽 편을 들지 않으려는 태도에 대해서 여러 격언들이 있다. 황희 정승에 대한 칭찬처럼 중립적 자세의 미덕을 찬양하기도 하고,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가 예약되어 있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연탄불 함부로 차지말라는 싯구는 중립이 아닌 열정에 대한 찬양이다. 씹선비라는 (블로그 포스팅이 아니면 쓰지 않을) 단어에 어떤 면에서 중립적 자세에 대한 비난의 의미도 들어 있다. 

 

도대체 어떤 태도를 취하는게 맞는걸까? 객관적이면서도 열정적이고, 중립적이지만 지옥의 뜨거운 자리에 가고 싶지는 않은게 사람들의 일반적 희망사항 아니겠는가. 

 

저는 이를 구분하는 잣대가 "구조적 불평등"에 대한 인식에 있다고 본다. 

 

세상만사를 일화의 연속으로만 보면,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갈등은 회피의 요소지, 돌파의 요소가 아닌게 되어버린다. 현재의 남녀갈등에서 남성의 억울한 측면이나 일화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어떤 현상이 우연적 요소로 일어나는 특수한 일화인지, 구조적 현상의 반복으로  드러난 한 전형인가라는 판단이다. 억울한 일을 당한 개인을 볼 때, 전자인지 후자인지에 따라 가능한 객관적이고 중립적 태도를 취할 지, 한 쪽 편에 써서 지옥의 뜨거운 자리를 피할지를 정할 수 있다. 

 

갈등에 대한 판단은 이 구조를 파악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한국의 남녀갈등이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에 대한 여성들의 저항으로 생긴 것인지, 구조적 차별은 없는 제로섬 밥그릇 싸움, 내지는 오히려 남성들에 대한 구조적 차별을 하려다 역풍을 맞은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다. 

 

이건 많은 부분에서 가치관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 판단의 영역이다.

 

제가 실증주의적 통계 방법론에 입각해 사회문제를 분석하는, 어떤 면에서 가장 중립적이고 무향무취의 입장을 가지기 쉬운 접근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몇 가지 이슈에 대해서 어떤 분들에게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명확한 입장을 가지는 이유다. 그래서 명백한 구조적 차별과 불평등 현상을 별 근거도 없이 중립적으로 대하며 양비론을 펼치는 사람들을 보면, 지적으로 게으르다고 생각한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적 태도를 가진 사람들에게 예약된 이유는, 중립이라는 태도로 실제로는 구조적 차별과 불평등을 존속시키는데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조적 차별에 대한 판단을 못하는 지적 게으름과, 이로 인해 실제로는 구조적 차별을 존속시키는 사악함의 이중 오류를 범한다. 게으름은 성경에서 규정하는 7대 죄악 중 하나다. 게으름으로 인하여 구조적 차별에 대한 의분을 가지지 못했으니 이 또한 잘못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로 차별의 존속에 기여했으니, 탐욕에 종사했다고 할 수 있다. 가히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를 차지할만하지 않은가? 

 

그러니 중립적 태도나 훈장질이 씹선비인지 아니면 미덕인지는, 그 태도를 뒷받침하는 구조적 문제에 대한 인식을 판단하면 된다. 자신의 태도나 입장을 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짜증나고 불쾌하지만 일화로 넘겨야할 사안인지,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목소리를 높여야할 사안인지는 구조적 문제와의 관련성으로 판단하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갈등을 잘 해결한다는 것은, 구조적 불평등을 기득권층의 지나친 저항없이 해소한다는 것이다. 문제를 덮어서 구조적 불평등을 지속시키는게 아니다. 어떤 방법으로 구조적 불평등을 해소하는게 좋은지는 입장이 갈릴 수 있는 또 다른 차원의  큰 이슈지만. 

 

 

 

Ps. 그렇다고 구조적 문제가 항상 명확한 답이 있다는 주장은 절대 아니다. 구조적 문제를 선험적으로 규정하거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연구 주제나 입장을 제한하려는 일부 움직임에 대해서 매우 걱정스럽게 생각한다. 

 

Pps. 그러면 구조적 문제, 구조적 차별에 대해 어떻게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는가? 일단 사회학 대학원 입학 원서를 찾아보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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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슨 게임에 집게형 손가락 그림을 기획하고 그린 사람은 40대 남성이라는게 밝혀졌다. 

 

이 순간, "은근슬쩍 스리슬쩍 페미"해주겠다는 여성의 "의도"와 넥슨 게임의 집게형 손가락 그림의 연관성은 그 의심을 하는게 민망할 정도로 개연성이 사라졌다. 집게 손가락 모양이 워낙 일반적인 자세이기 때문에 그런 의심을 하는 것도 타당한 것은 아니지만, 발화자와 행위자가 다른 사람이라는게 드러난 후 눈꼽만큼의 논란의 여지도 사라진다. 

 

이 판단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둔한 사람은 세상에 없다. 일상 생활이 가능한 모든 사람들이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지금도 의혹을 제기하고 여전히 남혐이 문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성적 사고나 논리, 판단이 망가진게 아니라, 도덕, 윤리, 규범에 결함이 있는거다. 후자의 결함이 전자를 망치고 있다. 

 

예전에 논란이 되었던 KBS 조사가 있다. 기회가 되면 자신의 것을 나누겠다는 질문에, 다른 집단은 소득이 높아지면 그렇다는 응답이 높아졌는데, 유독 20대남성들만 소득이 높아질수록 더 인색해졌다. 젊은 남성의 도덕관에 심각한 적신호가 들어왔다는 조사결과다. 현재의 사태는 이 조사가 적어도 현실의 한 단면을 상당히 잘 반영한 조사였다는걸 보여준다. 

 

논리적으로 설득할게 아니라 그런 목소리를 내면 안된다는걸 사회적으로 익힐 수 있도록 고립, 징치, 설득, 계몽하는게 필요하다. 

 

사회학 논술 주제로 많이 나왔던 뒤르켐의 아노미론이 있다. 가치 공백이라는 사회적 현상이 자살이라는 지극히 개인적 선택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논리다. 뒤르켐을 포함한 초기 사회학자들의 가장 큰 연구 질문은 급격한 사회변동 시기에 어떻게 사회적 통합을 유지 내지는 개혁해서 새로운 사회적 안정을 이루는 것인가였다. 여기에 대한 뒤르켐의 답이 아노미론, 기계적 연대에서 유기적 연대로의 전환, 노동 분업 같은 것이었다. 

 

작금에 벌어진 넥슨 사태를 비롯한 일련의 사건들은 청년 남성들의 아노미, 즉 무규범 상태가 근원일 가능성이 높다. 논리적 판단을 못하는게 아니라 도덕적 판단을 못하는거다. 변화하는 사회적 현실과 그에 따른 새로운 규범을 수용하지 못하고, 과거의 규범과 기대에 발묶인 도덕적 아노미 상태가 아닌가 싶다. 

 

왜 청년 남성들만 유독 아노미에 빠진걸까? 아노미 상태는 사회 전반적으로 나타나는걸로 생각하기 쉽지만, 청년 남성의 도덕적 아노미는 과거에도 관찰된 적이 있다. 이건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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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프로그램과 예능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지만, 나영석 PD가 대단하다고 느낀적이 두 번 있는데, 하나는 삼시세끼고 다른 하나는 알뜰신잡이다. 특히 후자는 삼프로라든가, 물리학 예능, 아트 예능 등 지식 예능 프로그램의 선두 주자가 아니었던가 싶다. 

 

이렇게 요즘은 전문가들이 나와서 지식을 뽐내는 예능이 오락 프로그램의 하나로 소비되는데, 과거 최고의 지식 예능은 장학퀴즈였다. 장학퀴즈가 뭔지 못들어본 분들도 많을거다. 고등학생이 나와서 단답형 문제를 풀던 TV 프로그램이다. 기장원을 하면 교복을 만들던 선경(요즘 SK)에서 4년 장학금을 줬을거다. 고등학생이 나오던 장학퀴즈와 나름 전문가들의 수다인 알뜰신잡의 출연진 차이가 지난 30-40년 사이 한국 대중 교육의 양적 질적 향상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고교 지식 수준의 상식 풀이가 아닌, 전문가들이 나와서 물리학, 생물학, 역사학, 미학의 지식을 풀어놓고 대중들도 그걸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지식예능이 대중 프로그램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지식 예능을 즐길 수 있는 대중이 필요하다. 한국 대중 교육의 성공은 지식 예능 프로그램 탄생의 필요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변화와 더불어 최근 넥슨 게임 C형 손가락 모양 삽입과 같은 모지리들이나 빠져들만한 논란도 늘었다. 무슨 이유에선가 본인들은 C형 손가락 모양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만, 그와 같은 음모론은 음모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황당한 논리다. C형 손가락 모양은 너무 자연스러운 포즈라 도처에 만연할 수 밖에 없다. 이 자연스러운 포즈에 음모론적 의미를 부여하니 사고가 엉망이 된다.

 

음모론은 "의도"에 기반한 설명으로, 세상만사의 원인을 제공하는 매우 단순한 논리이다. 광범위하게 퍼진 그런 음모라는게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게 가장 큰 결함이다. 음모의 존재 여부를 직접 검증해야 하는데, 그걸 안하고 한 두 가지 에피소드와 같은 사건에 근거해서 심증이 있다고 믿는다. 더 큰 문제는 그 심증은 여러 반증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메갈리아 음모론도 정확히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애초에 그런 음모가 없는데, 그 음모가 만연하다고 잘못된 가정을 하는 순간, 편견에 빠져서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고 사고방식이 망가진다. 드러난 증거에 맞춰서 판단하고 의견을 조정하는게 아니라, 누군가의 더 깊은 음모가 아닌가 빠져든다. 

 

지식 예능과 음모론 탐닉과 같은 모순된 두 현상이, 교육의 증가와 동시에 나타나는 이유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일시적으로 남혐이니, 역차별이니 하는 주장이 주목을 끌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여러 분야에서 발전해 왔고, 추가적 발전을 모색하는 사회다. 저출산과 고령화로 노동인구가 줄어드는 사회에서 여성, 노인, 외국인의 노동시장 참여가 생존의 대안이다. 이들이 좀 더 노동시장에서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해야 사회적 생존이 가능하다. 속도와 규모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이렇게 움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번 사태와 같은 퇴행적이고 반동적인 주장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기는 어렵다.

 

존재하지 않는 음모를 신봉하고,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리는 사마귀가 되어봤자, 아프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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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케티 등의 학자들이 개발한 World Inequality Database (WID)의 2022년 자료가 업데되었다. 한국 자료가 업데된건 아니지만, 이 번 기회에 한국의 상대적 위치를 대략적으로 살펴보자. 

 

가끔 한국의 불평등이 전세계 최고 수준이라거나, 적어도 선진국 내에서는 최고 수준이라는 주장을 접하는데, 아래 그래프를 보면 그게 아니라는걸 알 수 있다. 타국가와 비교해서, 한국의 상위1%나 10%의 소득점유율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고, 하위 50%의 소득점유율은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아래 그래프는 통시적 변화를 보여주는데, 청색이 한국, 주황색이 프랑스, 연두색이 미국, 붉은색이 전세계다. 일부 데이터에 근거해서 한국이 미국 다음으로 OECD에서 소득불평등이 높다는 주장도 있던데, 그렇지 않다. 현재 한국의 세전 소득 불평등은 아래 그래프에 사용된 지표로 봤을 때는 프랑스 수준이다.  

 

1990년대 초반에 비교해서 2008년까지 한국의 불평등은 상당히 상승했다. 하지만 그 이후 15년 동안 불평등이 더 증가한 것은 아니다. 가처분 소득으로 보면 2008년 이후 불평등은 오히려 감소했다. 한국의 불평등 증가는 1992-2008년 사이, 15년 동안 급격히 이루어졌다.

 

1992-2008 vs 2008 이후, 이렇게 두 시기를 나누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아는게 한국 소득불평등 변동의 핵심이지만, 이게 뭔지 잘 모른다. 심지어 가설도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 불평등이 커지고 있다는 인식은, 2008년 이후 더 심화된 것 같다. 

 

그리고 프랑스 대비 한국이 높은건 세전 소득불평등이 아니라 세후 소득불평등일 것이다. 과거보다는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한국은 세금과 분배의 소득불평등 감소 효과가 다른 나라보다 작다. 아래 그래프에서 한 가지 지적해두고 싶은 점은, 한국에서 상위 10%의 소득 점유율이 높아진 이유는 중위소득 대비 소득이 크게 높아져서라기 보다는 하위소득 대비 소득이 높아져서다. 하위소득이 낮아진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여성과 고령층의 노동시장 유입 요인도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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