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대학교수 시국선언 실명제 / 안영춘

 

조국 교수를 둘러싸고 서명자의 명단을 모두 공개하지 않는 성명서가 나오는걸 보니 한 마디 하지 않을 수가. 

 

미국에 있으면서 시국 선언에 몇 번 참여한 적이 있는데, 모두 실명으로 했음.  

 

한 번은 미국에 있는 상당수의 사회학자들이 참여한 성명서가 있었는데, 저는 참여하지 않았음. 많은 분들이 저도 당연히 서명했을 거라 생각. 참여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서명 참여자 명단을 익명으로 처리한다고 했기 때문. 나중에 주도한 몇몇 분들의 이름이 언론보도에 공개되었지만, 서명을 받을 때는 어떤 주체가 서명을 주도하고, 누가 문서를 작성했는지도 공개되지 않았음. 어떤 분들인지 대충은 알고있지만, 한 번도 공식적으로 공개한 적이 없음. 전체 명단은 아직도 서명을 주도한 몇 분만 가지고 있음. 

 

당시 성명서에 서명한 사람들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서명에 참여함으로써 불이익이 돌아올 수 있는데, 특히 대학원 재학 중인 학생들의 불이익이 클 수 있다는 것. 

 

세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인데 이 포스팅에서는 익명성에 주목 (나머지 두 가지는 아래 추신에서 간단히 언급). 

 

저는 학자가 서명을 익명으로 하면 안된다고 강하게 믿음. 학계에 테뉴어가 있는 이유도 학자는 자유롭게 자신의 학문적 의견을 밝히고 그로 인해 불이익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 정치 참여도 마찬가지. 책임성(accountability)은 정치 참여와 조직 행동의 기본임. 

 

2016년 이화여대 점거 농성에서도 얘기했듯, 단체 명의로 내는 성명서가 아니면 개개인 모두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endorse하는게 정상. 당시 이화여대 사태 때, 지도부 없는 민주주의라고 시위에 참여하는 학생들 전체가 익명으로 남았음. 총학생회장만 법적 제재를 받았고. 다른 한 편, 이대 시위에 반대하면서 익명으로 점거 농성을 비난하는 광고가 일간지에 실린 적도 있었음. 시위에 찬성하는 측도 반대하는 측도 모두 대학의 의사결정이라는 공적 행위, 특히 평생교육이라는 큰 교육정책과 관련해서 익명으로 여론전을 펼치는 기괴한 모습. 

 

 

 

 

민주주의에서 익명성이란 표현의 자유과 조직적 부정행위의 고발을 위한 것이지 집단적 행위의 주체를 감추기 위한 수단이 아님. 

 

현재 온갖 SNS에 일기장에서나 쓸 기록을 남기고, 스마트폰을 쓰면서 자신이 방문한 장소, 시간, 관심사의 상당 부분을 노출시켜서 프라이버시의 영역이 되어야 할 부분을 공공의 영역에 남김. 이와 반대로 다른 어떤 분야보다 상대적으로 엄격하게 공공의 영역이 되어야 할 정치적 행위와 조직행동은 익명을 유지할려는 아이러니한 대비가 벌어지고 있음. 이 대비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정확히 잘 모르겠음. 

 

전세계적으로 떠오르는 혐오의 확산도 익명성에 기반한 정치 행위의 확산이 일정정도 기여했다고 생각함. 

 

1차 대전이 벌어진 이유 중의 하나가 대중매체의 발전으로 동일한 언어를 쓰고 비슷한 phenotype을 가진 동족의 확인. 그로 인해 마을 단위의 공동체가 아닌 민족국가로, 제국의 지배가 아닌 민족국가의 지배로 이행. 이와 유사하게 익명 의견 표현의 확산으로 혐오와 차별의 의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언어와 생김새를 넘어 의견일치의 동족을 확인한 것이 최근의 전세계적인 배제의 정치 확산에 일부 기여했다고 생각.

 

기우일 가능성이 크다고 믿지만, 의사표현의 익명성을 넘어 정치참여의 익명성으로까지 넘어가는 것은 아닌가라는 염려. 극단적 사례지만 KKK처럼 가장 비민주적이고 반시민사회적 정치 조직이 익명성을 띄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억해야. 책임성(accountability)을 배제한 익명으로써의 정치 참여는 민주주의와 civility라는 사회발전의 진보에 역행하는 것. 

 

 

 

 

Ps. 익명 서명의 또 다른 문제는 정보의 비대칭성. 정보는 공개하는게 최선. 누가 서명했고 누가 안했는지를 일부만 아는 것 자체가 권력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있음. 조국을 둘러싼 보수학자들의 서명도 익명으로 하게되면 누가 서명했고 안했는지 일을 주도하는 사람만 알게됨.   

 

Pps. 아마 전체 명단을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불이익으로부터 일반 서명자를 보호하기 위해서일 것.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사회적 영향력이 더 크지만, 정치 참여와 책임에서 모든 개개인은 지위와 신분에 관계없이 동등하다는 것을 알아야. 정치에 참여하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모든 학자가 학계 내에서의 지위와 영향력과 무관하게 동등하게 책임있는 주체임. 서명을 주도한 자신의 이름을 공개하고 타인의 이름을 감추는 것은 정치 참여의 동등한 주체로써 다른 서명자를 인정하지 않고 타자화하기 때문. 

Posted by sov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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