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상도 의원의 자식이 퇴직금으로 50억을 받았다는 뉴스가 나오는데, 한 청년이 건물 외벽을 청소하다가 추락사하였다. 

 

경제학에서 쓰는 개념 중에 "통계적 생명 가치(Value of Statistical Life, VSL)"라는게 있다. 1만명의 노동자 중에서 1명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 소득 중 포기할 수 있는 금액의 사회적 총액이다. 이 개념을 소개하는 최근 칼럼으로는 퍼듀대 김재수 교수의 칼럼이 있다. 김재수 교수 칼럼에서 인용한 비스쿠시의 논문은 아마 요거 일거다. 김 교수의 칼럼에서 VSL을 설명하면서 건물의 유리닦기를 예로 든다.

 

코로나로 인한 락다운은 생명을 구하는 대신 경제적 손실을 가져온다. 하지만 통계적 생명가치로 따져보면 락다운이 충분히 경제성이 있다는 분석도 있다. 락다운을 해서 구하는 생명의 가치가, 락다운을 해서 잃어버리는 경제적 손실보다 금전적으로 크다. 

 

잔인하게 들리지만 통계적 생명가치로 정책을 결정하기도 한다. 환경 규제를 위해서 추가적 비용이 발생할 때 이 비용과 통계적 생명가치를 비교해서 비용이 더 비싸면 규제를 안하고, 싸면 규제를 하는 식이다. 

 

한국의 통계적 생명 가치를 구할려는 시도도 있지만 정부에서 프로젝트로 측정하고 정책에 반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비스쿠시 교수의 측정에 따르면 미국의 통계적 생명가치는 960만불이고, 한국은 470만불이다. 한화로 따지면 50억이다. 곽병채가 6년 일하고 받은 퇴직금과 같은 금액이다. 

 

그런데, 한국이 과연 노동자 1명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사회전체적으로 50억을 쓸 용의가 있는 국가인가? 

 

경향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매일 김용균이 있고, 2020년 산업재해 사망자가 882명이라고 한다. 비스쿠시 교수의 추정에 따르면 1인당 50억씩 총 4조4천억의 비용이다. 산업재해를 근절할 수는 없지만 (뭘해도 사고는 발생한다), 추가적 규제와 비용 투자로 사망자를 80% 감소시킬 수 있다면 3조5천억원이 더 들어도 비용편익에서 이득이다. 과연 한국 사회는 이 비용을 지불할 용의가 있는가? 

 

비스쿠시 교수의 추정은 미국의 생명가치에 한국의 경제 수준을 대입한 것이다. 미국인이 포기할 수 있는 소득의 탄력성을 한국 정도 발전 수준에 회귀식으로 대입해서 추정한 것이다. 미국인이 인식하는 생명가치를 한국인의 소득 수준에 대입한 셈이다.

 

그런데 한국은 곽병채 1인의 50억에는 나라가 들썩이지만, 노동자 1명 개개인의 50억 가치에는 안타까운 마음을 잠시 표명하는 것 뿐이다. 비스쿠시 교수가 추정한 한국의 통계적 생명가치가 50억이라는 숫자가 믿기지 않는 이유다. 비스쿠시 교수의 추정치에서 한국인 국민 소득은 믿을 수 있는 자료다. 이 자료를 신뢰할 수 없다면 이유는 단 하나. 한국인이 미국인 정도의 생명가치를 가진다는 가정을 믿기 어렵다. 한국은 생명가치를 훨씬 덜 중시하는 국가라는 얘기다. 

 

생명을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하나마나한 소리보다 (사회학에서는 생명의 돈 가치에 대해서 Zelizer의 생명보험에 대한 논문이 유명), 생명의 가치를 돈으로라도 표현해서 돈을 더 쓰게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 사람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사회적 노력이 적어도 곽병채의 6년 근무 후 퇴직금 만큼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Posted by sov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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