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에서 Korpi & Palme (1998) 이후 재분배 정책의 효과와 그에 대한 태도에 대한 연구가 수 없이 이루어졌다. 특히 근래에 계급에 따라 재분배 태도가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한 연구가 많다. 

 

한국 사회 보수화에 대해 공감하는 분들도 꽤 있는 듯 하다. 트윗에서 손민석 선생은 한국 사회 보수화의 특수성에 대한 주목할만한 의견을 내기도 했다. 

 

그런데 한국 사회 보수화의 특수성은 다른 사회에서도 관찰되는 보편적 현상이 다른 형태로 발현되는거지, 다른 사회에는 없는 현상이 한국 사회에서만 나타나는건 아니다. 어느 사회나 그 나름의 특수성이 있다. 특수성을 이해하려면 보편성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래야 뭐가 특별난건지 알지. 한국 사회의 보수화는 한국 사회 불평등의 객관적 변동에 대한 정확한 인식만 있다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다. 일단 보편성이 뭔지 알아보고, 그 다음에 (다른 측면의 특수성도 물론 있겠지만) 사회심리의 인구학적 측면에서 한국 사회의 특수성을 알아보자.  

 

아래 그래프는 Fernandez & Jaime-Castillo (2018, Social Forces)에서 따온거다. 27개 국가의 1985-2010에 걸친 ISSP 서베이를 통합한 데이터를 이용한 연구고, 데이터에 한국도 포함되어 있다. X축은 표준화한 국가별 재분배 정도, Y축은 재분배에 대한 지지도다. 그래프는 국가별로 재분배 수준이 높아질 때, 각 계급별로 재분배에 대한 지지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준다. 

 

보다시피 상위계급일수록 재분배 수준이 높아지면, 재분배에 대한 지지도가 낮아진다. 전체 계급을 하나로 묶어서 국가단위로 분석하면 재분배 수준이 높아질수록 평균적으로 재분배에 대한 지지가 낮아진다. 개별 국가의 특수성을 통제하기 위해 국가 간 효과를 통제하고 국가 내 변화를 봐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한국이 복지국가화하고 재분배 수준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의 재분배에 대한 선호도가 낮아지고 그에 따라 정치적으로 보수화되는건, 다른 국가에서도 관찰되는 보편적 현상이다. 

 

 

그런데 위 그래프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왼쪽 3개 계급과 오른쪽 3개 계급의 차이다. 일반적으로 왼쪽 계급이 경제적 상위계급이고 오른쪽 계급이 하위계급이다. 이 논문의 분석은 객관적 계급(베버리안 계급 구분)이지만, 예상컨대 주관적 계층지위로 나누어도 결과는 비슷할 것이다. 주관적 계층 지위가 높을수록 재분배 수준이 높아질 때 정치적 태도가 보수화되고, 계층 지위가 낮으면 재분배 수준이 높아져도 정치적 태도의 보수화 정도가 약하다. 

 

한국의 인구학적 특수성은 다른 국가와 달리 지난 15~20년간 주관적 계층 지위가 높아졌다는거다. 이렇게 주관적 계층 지위 인식이 단기간에 크게 높아진 경우를 (제가 과문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한국 외에는 알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주관적 계층 지위 인식은 큰 변동 없이 안정적이다. 한국은 그렇지 않다. 

 

위 그래프에서 재분배 수준이 높아지면 재분배 지지도가 낮아지는 관계를 "계수효과", 계급 지위에 따라 재분배 지지도가 다른걸 "구성효과"라고 하면, 한국은 계수효과에 더하여, 시민의 주관적 계급 지위가 높아진 구성효과가 모두 보수화의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아래 포스팅의 그림 III-6에서 보여주듯, 주관적 계층 지위의 평균은 0~10점 분포에서 5.8이다. 다수의 응답자가 자신의 지위는 경제 하층 보다는 상층에 가깝다고 느낀다. 상위 계층으로 갈수록 자신의 재분배의 수혜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자신을 상층으로 느끼는 응답자가 크게 늘어서, 위 그림의 오른쪽에 위치했던 사람들이 왼쪽으로 이동했다. 계수효과로 인한 보수화와 구성효과로 인한 보수화가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재분배의 통시적 개선에 따라 일반적으로 예측되는 보수화 보다 그 속도가 빠르다. 

 

그리고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한국에서 자신을 상층으로 여기는 정도에서 청년층과 장년층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객관적 위치가 동일한 상태로 통제하면, 실제 위치 대비 자신의 위치를 상층이라고 인식하는 정도가 중년층이나 노년층보다 청년층에서 강하다. 거기에 20대 남성은 자원 배분의 원칙으로 평등 보다는 능력에 따른 분배를 선호한다. 그러니까 20대 남성은 자신이 경제적 약자라서 재분배로 보호 받아야한다고 생각하는게 아니라, 자신이 상층인데, 마땅히 받아야할 몫을 받지 못하고 재분배 때문에 (장애인이나, 여성, 시험도 통과 못한 비정규직 등에) 뺏기고 있다고 여길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2021 & 2023 KGSS 자료로 소득수준별 지지 정당을 분석해 보면 소득 수준이 높은 층에서 보수 정당을 지지하고, 소득 수준이 낮은 층에서 진보 정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20대에서 뚜렷하다. (이렇게 세분하면 표본수가 작기 때문에 대략적 감을 잡는 통계 정도로 봐야)

 

보수 지지율 20대  40대  70대+
  여성 남성 여성 남성 여성  남성
소득 하층 18% 44% 40% 39% 61% 63%
소득 상층 32% 66% 40% 46% 60% 82%
(격차: 상-하) 14%p 22%p 0%p 7%p -1%p 19%p

 

그럼 이런 흐름 속에서 20대 여성은? 20대의 성별 격차를 이해하는 분석틀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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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선거에서 당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했던 발언이다. 많이 알려진건 아니지만, 21대 대선에서 권영국 후보가 이 질문을 다시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네, 상당히 나아졌습니다". 

 

이희영 선생의 페북 포스트 덕분에 사회통합실태조사 보고서를 여러 개 살펴봤는데, 아래 그래프는 2013년 이후 각종 경제 한계 상황을 경험했다고 대답한 비율이다. 보다시피 박근혜, 문재인 정부 기간 동안 경제적 한계 상황을 경험했다는 응답이 대폭 줄었다. 윤석열 정부에서 조금 늘었지만.

 

20대에서 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학비문제는 2014년에는 16%가 학비 때문에 어렵다고 답했는데, 문재인 정권 말기인 2022년에는 2% 정도 밖에 안된다. 2024년에 늘었는데 그래도 5% 미만이다. 식비, 병원비, 실업, 공과금, 집세 모두 과거대비 한계 상황에 놓였다는 비율이 대폭 감소했다. 그러니 현시점에서 권영국 후보의 저 질문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다.  

 

 

위 질문은 한계상황에 대한 것이고, 중산층은 자신의 처지가 나빠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의 전반적 경제상황이 얼마나 안정적인지 묻는 질문에 만족한다는 응답이 지속적으로 늘었다. 이희영 선생의 분석에 따르면, 이 추세가 연령대별로 다른 것도 아니다. 전연령층과 계층에서 성별을 불문하고 개인의 경제 안정성이 괜찮다고 답하는 비율이 늘었다.  

 

 

그러니 자신의 계층지위에 대한 인식도 점점 높아진다. 이 결과는 KGSS, 통계청 사회조사에서도 공통으로 관찰된다. 2013년에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 인식이 10점 만점에 4.7로 중간 이하였는데, 지금은 5.8로 중간 이상이다. 좀 과장해서 해석하면, 계층적 약자가 아닌 계층적 강자의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비율이 더 높아졌다. 

 

 

자기 자신만 좋아졌다고 느끼는게 아니다. 한국의 정치, 경제적 상황이 상당히 만족스럽다고 느낀다. 2013년에 3.8이었던 정치상황 만족도가 2024년 윤석열 정부에서 5.1이었다. 2016년 박근혜 정부 말기에는 만족도가 2.8에 불과했다. 윤석열 탄핵이 왜 박근혜 탄핵보다 더 어려웠는지 사회적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은 원래 안전한 곳으로 여겨졌지만, 자기 동네 지역을 넘어 사회 전체가 상당히 안전하다고 더욱 그렇게 느낀다. 2016년에 10점 만점에 4.3이었던 사회 안전성 평균이 2024년에는 6.4로 2포인트 이상 올랐다. 

 

 

뿐만 아니라 모든 측면에서 기회가 공정하다는 응답이 늘었다. 교육기회, 취업기회, 복지혜택이 공정하다고 느끼는 비율이 늘었고, 분배구조, 대기업/중소기업 관계도 공정하다는 응답이 늘었다. 

 

 

이상의 결과를 보면, 한국인은 과거보다 개인적 경제상황, 사회 전체 상황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고, 그러니 당연히 변화보다는 이대로 쭈~욱을 선호할 수 밖에 없다. 

 

한국사회 전반의 보수 선호 증가는 불평등이 증가하는데 좌파의 대안이 없어서 그에 대한 반발로 극우 내지는 더 심한 보수파를 지지하는게 아니고, 경제 상황이 좋아지고, 사회가 안정화되면서, 여기서 변화하지 않는걸 바라는, 그야말로 다른 대안을 들이밀지 말라는 보수화일 가능성이 높다. 파괴적 보수화가 아니고, 바꾸지 말라는 보수화다. 영어로 ain't broke, don't fix it, 한국어로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라는 보수화. 열심히 급진적 개혁하는 것 보다 차라리  술만 먹고 아무 것도 안하는걸 선호하는 보수화다. 

 

20대 남성의 보수화를 두고도 20대의 노동시장 양극화, 신자유주의를 외치는 분들이 있는데, 동의하기 어렵다. 위에 보여준 경향이 20대는 다른걸로 생각하는가?

 

20대 남성의 보수화는 한계 상황에 몰려서 내지는 과거의 20대 대비 절대적 처지가 안좋아져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이들이 평등의 촉진에 반발하는 형태의 보수화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인국공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보수화라는 얘기다. 그런 면에서 전체 인구의 보수화와 결이 다르다. 

 

진보 아젠다는 이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기획해야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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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에서는 페미니즘에 대한 태도를 제외하면 20대 남성의 의견이 다른 집단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정책과 비전을 제시하면 이들이 바뀔 수 있다는거다. 

 

과연 그럴까? 

 

두 가지 측면에서 20대 남성이 다른 집단과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자. 하나는 정당 지지율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 재분배, 인간에 대한 이해 등등의 여러 태도들이다. 우선 정당 지지율부터. 

 

아래 그래프는 20대 남여의 40대 같은 성별 대비 보수정당 지지율의 연도별 격차 변화를 보여준다. 정당 지지율을 범보수 대 범진보로 나누었고, 범보수 지지율만 본거다. 보다시피 20대 남성의 40대 남성대비 보수화 경향이 뚜렷하다. 이 경향은 최근에 시작된게 아니고, 2003-2013 사이에 꾸준히 관찰된다. 조국 사태, 문재인 정권에 대한 실망, 2015년 이후 페미니즘의 부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경향이다. 2014-2018사이에 반대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2021년 이후 전반적 보수정당 지지 경향이 확연히 나타난다. 

 

20대 남성과 달리, 20대 여성에서는 40대 대비 보수로 더 쏠리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지지 정당의 측면에서 20대 남성의 보수화가 명확하다. 

 

그렇다면 20대 남성이 보수적 면모를 보이는 것은 페미니즘 하나고, 나머지는 다른 집단과 다르지 않은가?

 

아래 표는 2021, 2023년 KGSS의 여러 항목을 20대, 40대 성별로 나눠서 본거다. 붉은색 굵은 표시가 4개 집단 중 가장 보수적인 의견이고, 색깔 표시없이 굵은 표시가 그 다음으로 보수적인 집단이다. 15개 항목 중에서 20대 남성은 11개 항목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4개 항목에서 두 번째로 보수적이다. 다른 집단은 항목별로 차이가 있지, 일관되게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이지 않다. 20대 남성은 페미니즘만 빼면 다른 집단과 의견이 다르지 않은게 아니라, 많은 항목에서 일관되게 보수적이고, 이 보수성에 걸맞게 지지정당이 바뀐거다. 

 

 그럼 하나하나 어떤 항목들인지 보자. 아래 표에서 항목을 A~G로 구분했는데, A는 경제정책, B는 공평성, C는 노인에 대한 태도, D는 인간에 대한 이해, E는 정치태도, F는 여성문제다.

 

20대 남성은 소득격차를 줄이는게 정부 책임이라는 인식이 가장 낮고, 국민연금은 고소득자의 기여분이 많으니 그 사람들이 더 받는게 공평하거나 못사는 사람들이 더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인식한다. 경제자원 배분에서도 얼마나 기여했는가를 고려해야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고려하는게 가장 중요하다는 비율은 11% 밖에 안된다. 40대 남성이나 20대 여성은 어려운 처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응답이 20대 남성 대비 3배 가까이 된다.   

 

20대 남성이 어느 집단보다 공평성에 대한 감각이 높아서 현재와 같은 정치 태도를 가진다는데, 그것도 의문이다. 모두가 공평하게 대우받는게 중요하다는 질문에서 20대 남성이 다른 집단보다 공감하는 정도가 낮다. 다른 집단과 큰 차이가 있는건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집단 대비 20대 남성이 공평성을 중시하는 응답이 가장 낮다.  

 

또한 20대 남성은 어느 집단보다 노인에게 혜택을 주는것에 반대한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태도에서도 20대 남성은 사람은 대체로 남을 돕는편이라는 인식이 낮고 (20대 여성도 마찬가지), 타인을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다른 집단 대비 인간은 선하다고 믿지 않으며, 불쌍한 사람을 봤을 때 동정심을 별로 느끼지 않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 (절대적으로는 물론 낮다). 

 

다른 설문에서도 보여지듯이 20대 남성은 민주주의와 독재 중에서 고르라고 하면 민주주의를 고른다. 하지만, 지도층을 따르는 질서정연한 국민이 필요하다는 기술에 어느 집단보다 더 동의한다. 인권보다 법질서를 중시하는건 40대 남성이 가장 높은데, 20대 남성이 40대 여성과 함께 그 다음이다. 

 

외국인에 대한 태도는 20대가 가장 부정적인데, 20대 여성은 범죄에 대한 우려, 20대 남성은 경제권을 뺏긴다고 생각한다. 

 

아내는 자신의 경력을 추구하기 보다는 남편의 경력을 도와야 한다는 기술에 20대 남성은 26%가 동의해서, 40대 여성 다음으로 높다. 40대 남성보다 20대 남성의 태도가 더 보수적이다. 

 

정리하면, 재분배, 민주주의, 이주민과 여성에 대한 태도, 인간에 대한 이해 모든 측면에서 20대 남성이 일관되게 보수적이다. 20대 남성의 지지정당이 보수적으로 변한 것은 이러한 태도와 일치하는 변화다. 이러한 전반적 태도를 봤을 때 가까운 미래에 일부 정책의 변화를 통해 20대 남성의 태도가 바뀔 것으로 기대하는건 지나친 낙관이리라. 

 

항목 20대 40대
남성 여성 남성 여성
A1. 소득격차 해소는 정부 책임이다 (%) 50 60 57 58
A2. 고소득자가 국민연금 더 받아야 (%) 55 27 42 41
A3. 경제자원 분배에서 성과/모두공평/어려운 처지 중 어려운 처지 고려가 우선 (%) 11 29 32 21
B. 모두가 공평하게 대우받는게 중요하다 (7점 척도) 4.84 4.97 5.00 5.04
C1. 노인의 정부 혜택 과다 (%) 63 49 56 63
C2. 노인은 사회에 부담 (%) 58 50 45 48
D1. 사람은 대체로 남을 돕는다 (%) 55 54 59 59
D2. 타인을 신뢰할 수 있다 (%) 37 46 43 49
D3. 인간은 선하다 (7점 척도) 4.59 4.69 5.00 4.99
D4. 불행한 사람 봐도 동정심이 없다 (%) 12 10 6 6
E1. 인권보다 법질서가 중요 (%) 50 44 57 50
E2. 지도층 따르는 질서정연한 국민이 필요 (%) 34 21 26 28
F1. 외국인 이민자가 범죄율 높인다 (%) 61 65 52 55
F2. 외국인 이민자가 일자리 뺏는다 (%) 43 37 28 24
G. 아내는 남편 경력을 도와야 (%) 26 12 20 28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건, 여러 번 얘기했듯이, 다른 집단도 과거보다는 보수적으로 바뀌었다는거다. 위 표의 첫번째 항목인 소득격차는 정부 책임이라는 기술에 2000년대 초반에는 거의 80%가 동의했다. 

 

 

Ps. 20대 남성에서 높았던 이준석 지지율은 이러한 가치 경향의 반영으로 해석하는게 맞지 않을지? 계엄에 반대하는데, 민주당은 싫어서 선택했다고 해석할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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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남성이 보수화 내지는 극우화 되었다는, 인구 집단에 대한 간단한 상태 기술에 동의하는게 이렇게 어렵다. 이 자체도 아마 분석의 대상이리라.  

 

가능태를 주장하는 논리 중 하나가 젊을 때는 보수적이다가 나이 들면서 태도를 바꾼다는거다. 구체적으로 80년대생들이 20대 때는 보수적이라고 욕먹었지만, 지금은 열렬한 진보주의자가 되었다는 사례도 든다. 또 다른 분은 연령, 코호트, 시기 효과를 구분해서 데이터를 보라고 충고도 하고. 

 

당연히 데이터와 다른 연구를 보고서 하는 주장이다. 

 

청년 시절에 형성된 정치적 태도는 대부분 나이가 들어도 크게 변화하지 않는다는게 지금까지의 연구다. 달리 말해, 코호트 효과가 연령 효과보다 크다. 그러니 기존의 연구 상식을 받아들이면, 현재 보수적 태도를 보이는 청년 남성은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가정하는게 타당하다. 일부에서는 외국의 사례가 한국에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한국은 어떻게 변했는지 간단하게 살펴봤다. 

 

아래 표는 KGSS 2011-13 자료와 2021-23 자료를 이용해서 대략적인 출생 코호트의 대략적인 연령대 변화에 따른 정치 지지 성향의 변화를 체크한 것이다. KGSS에 어느 정당을 지지하는가, 아무 정당도 지지하지 않을 경우 조금이라도 호감이 가는 정당은 어디인가를 묻는 질문이 있다. 이를 이용해서 민주당 및 진보 정당 vs 국민의힘 및 보수 정당으로 크게 나누고, 지지정당 없음을 제외한 후 진보와 보수의 비율을 체크했다. 이래저래 다르게 코딩할 수 있는데 기본 결과는 대동소이하다. 

 

출생 코호트를 명확하게 특정하지 않고 "대략"이라고 하는 이유는, 2011-13년과 2021-23년 복수연도의 20대 이하, 30대, 40대, 50대로 나누어서 본 것이라 각각의 코호트가 정확히 해당 연도대의 출생코호트는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코호트는 1981년 이후 199년대 초까지의 출생자를 포함한다. 나머지 코호트도 아래 표시한 출생 연도대가 대다수지만 다른 연도대의 출생코호트가 조금씩 포함되어 있다. 

 

어쨌든 아래 분석에서 주목하는건, 10년 조사 간격 사이에 대략 동일한 출생 코호트의 정치적 성향이 얼마나 바뀌었는가다. 이런 식으로 반복적인 cross-sectional 자료를 이용해서 코호트 변화를 추적하는 분석 방법을 고상하게 Synthetic cohort methods라고 한다. 

 

보다시피 놀라울 정도로 안변한다. 일부의 주장과 달리 1980년대 코호트가 20대일 때는 보수적이다가 30~40대가 되면서 진보적으로 바뀐게 아니다. 대략적인 1980년대 코호트가 20대일 때 남성의 진보 지지가 56%였는데, 30대 때는 57%다. 코호트에 따른 일관성이 연령에 따른 변화를 압도한다. 여성도 마찬가지다. 거의 안변한다. 

 

현재 보수적 성향을 보이는 20대 남성이 앞으로 진보적으로 변화할 가능성은 이 전 코호트의 패턴에 따르면 높지 않다.

 

기존 연구를 보면 40대 이하에서는 나이가 들수록 진보적으로 변한다는 결과도 있지만, 그 정도가 작다. 일반적으로 코호트 효과가 연령 효과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많이 인용되는 한 사회학 연구에 따르면 젊은날에 형성된 정치적 태도가 거의 평생을 간다. 이런 결론은 여러 정치학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 것으로 안다(예를 들면 요기, 이 블로그 보는 정치학자들도 계실텐데, 그렇지 않다면 가르침을). 아래 표에서 보듯이, 초간단 분석으로 봤을 때 한국도 다르지 않다. 

 

그러니 한국의 현재 20~30대만 무슨 이유에선가 나이가 들면서 정치적 태도가 달라질거라고 가정할려면 그에 대한 상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진보에게는 암울한 결론일 수 있지만, 지난 몇 번의 선거에서 관찰된 청년 남성의 보수적 투표 경향은 앞으로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경향이 30대로, 40대로 확산될 것이다. 

 

어떤 진단이 옳았는지는 앞으로 빠르면 5년 늦어도 10년 내에 검증이 될 것이다. 현재 30대 남성도 20대 남성만큼은 아니지만 보수적 투표 성향을 보인다. 현재의 30대는 90년대생과 80년대생이 섞여 있다. 20대 남성 보수/극우화 진단이 맞다면, 5년 후에 대부분의 30대가 90년대생으로 구성될 때, 30대 남성의 보수적 투표 성향이 지금보다 더 명확해질 것이다. 

 

(한 편, 이 번 대선에서 40~50대의 이재명 지지율이 가장 높았던 이유는 한국에서 가장 민주당 친화적인 코호트인 1970년대생이 40~50대에 걸쳐있었던 이유도 있다.)

 

성별 출생 코호트 정치성향 연령대
20대 30대 40대 50대
남성 대략 1960년대 코호트 진보 - - 54.8 63.0
보수 - - 45.2 37.0
대략 1970년대 코호트 진보 - 58.2 56.9 -
보수 - 41.8 43.1 -
대략 1980년대 코호트 진보 56.0 56.9 - -
보수 44.0 43.1 - -
대략 1990년대 코호트 진보 42.7 - - -
보수 57.4 - - -
여성 대략 1960년대 코호트 진보 - - 56.6 50.4
보수 - - 43.5 49.6
대략 1970년대 코호트 진보 - 59.6 60.3 -
보수 - 40.4 39.7 -
대략 1980년대 코호트 진보 69.9 65.6 - -
보수 30.1 34.4 - -
대략 1990년대 코호트 진보 72.9 - - -
보수 27.1 - - -
보수 지지 비율 성별 격차 (남성 - 여성)
코호트 20대 30대 40대 50대
대략 1960년대 코호트 - - 1.7 -12.7
대략 1970년대 코호트 - 1.4 3.4 -
대략 1980년대 코호트 13.9 8.7 - -
대략 1990년대 코호트 30.3 - - -

 

한가지 명확히 하고 싶은 것은, 현재 나타난 20대 남성의 보수화가 현재의 20대에서 급격히 나타난 현상은 아니라는거다. 예전에도 한 번 분석한 적이 있는데 (요기), 경향적으로 20대에서 남성은 점점 더 보수적으로 여성은 진보적으로 바뀌어서 성별 격차가 점진적으로 커져왔다. 그 경향성이 최근 몇 번의 선거를 통해서 분명하게 확인된 거다. 

 

위의 표에서 두 번째 표를 보면 같은 연령대에서 최근 코호트로 올수록 남성의 보수 편향이 점점 커지는 것을 알 수 있다. 90년대생과 2000년대생에서 그 차이는 30%포인트를 넘어섰다. 20대 여성은 7:3으로 진보 우위인데, 남성은 4:6으로 보수 우위다. 

 

마지막으로 위 분석 시기에 이준석의 개혁신당은 없었다. 그러니 위 분석은 20대 남성은 보수화된 것이 아니라, 민주당과 국민의힘 모두를 싫어할 뿐이라는 진단에 대한 반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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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20대 남성 내부 다양성론에 대한 글을 쓴 후 몇 가지 직간접적인 반론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적지는 않았지만 아래 글에서  제 논리는 주로 20대 남성 내부의 개인 간 다양성론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런데 반론은 20대 남성 의견의 사안별 다양성이라는 개체 내 다양성론을 피더라. 

 

저는 이 논리도 허약하다고 생각한다. 

 

이 논리의 구조는 이렇다.

(1) 최근 20대 남성의 정치적 선택은 꾸준히 보수적이었다. 

(2) 페미니즘은 항상 극렬한 반대다 (여성혐오, 미소지니 의심). 

(3) 하지만 재분배, 성소수자, 탄핵, 계엄 등의 사안별로 보면 항상 극우적 내지는 보수적 의견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관찰 때문에 20대 남성이 보수화 내지는 극우화되었다고 할 수 없다. 

 

이 논리의 암묵적/명시적 전제는 (3)에 의해서 (1)이 바뀔 수 있다는거다. 그러니까 이 논리는 (1)의 지속성을 거부하고, (3)에 의해 (1)이 바뀔 수 있다는 희망회로를 돌리거나 (이를 "가능태론"이라 칭하자), (3)의 변수도 모두 보수적이지 않으면 (1)에도 불구하고 보수화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거다 (이는 20대의 성향을 알 수 없다는 주장이니 "불가지론"이라 칭하자). 여러 조금씩 다른 논리가 있지만 대부분 이 두 가지 범주에 속한다. 

 

저는 가능태론과 불가지론 모두 허약하다고 생각한다.  

 

먼저 가능태론이 왜 허약한지부터.

 

비교를 위해서 우선 20대 남성 펨코/일베화론의 논리 구조를 위의 변수를 통해서 살펴보자. 20대 남성이 일베화되었다는건, 20대 남성의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 반페미니즘이라는 주장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일베화론은 (2)가 설명변수이고 (1)이 종속변수인 인과관계의 로직이다. 여기서 (3)은 (1)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서로 상관이 없는, 통계방법론적으로 표현하면 orthogonal한 변수다. 여러 변수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가지지만, 이 의견이 정치적 선택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고 반페미니즘(여성혐오) 단일 변수가 정치적 선택을 지배한다. 이 논리는 적어도 최근 10여년간 일관되게 관찰된 (1)과 (2)를 연결시키는 논리다. 동의하든 안하든 개연성이 있다. 

 

이에  반해 가능태론은 일관되게 관찰되는 (1)과 (2)의 상관관계를 인정하면서도, (3)에 의해서 (1)이 바뀔 수 있다는 희망에 근거해서 논리를 핀다. (3)이 orthogonal한게 아니라 어떤 다른 조건만 주어지면 (1)을 바꾼다는거다. 20대 남성도 계엄에 반대하고 탄핵에 찬성했다는게 근거 중 하나다. 계엄에 반대하고 탄핵에 찬성하는걸 보니 20대 남성이 보수 투표에서 바뀔 가능성이 충분한데, 아직 그 조건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 논리는 이 번 선거에서 실제 계엄을 무산시키고 탄핵을 이루어낸 정치 세력으로 조금도 옮겨오지 않은 20대 남성의 부동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준석도 반계엄, 친탄핵이라고 하지만, 계엄과 탄핵에서 가장 활약한 세력이 민주당이라는걸 20대가 인식하지 못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집단포화를 입은 3차 토론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그 발언 때문에) 20대 남성은 이준석에서 가장 많이 투표했다.

 

이 논리를 진지하게 고려하기 위해서는 (3) 에 의해서 기존에 형성된 (2)-(1)의 인과관계가 끊어질 수 있는 논리적 조건을 제시하거나 이를 지지하는 과거의 사례를 가져와야 한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듣지 못했다. 통계적으로 보면 보수 투표에서 바뀔 가능성을 가진 20대 남성의 어떤 성향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다른 조건 변수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논리 구조 때문이 가능태론은 그 조건 변수를 제공하지 않은 제 3자(= 주로 민주당 아니면 진보집단)를 비난하는 논리로 전개된다. 가능태론은 말그대로 여러 가능성이 열린 논리이다. 웬만해서는 틀리기 쉽지 않은 논리이자, 동시에 명확한 주장이 없어서 유보적인 주장이다. 하지만 이 논리의 전제는 변화이고, 변화가 없다면 그리 의미있는 주장이 아니다. 가능태론은 현재로써는 화자들의 막연한 희망사항일 뿐이다. 계엄과 탄핵에도 불구하고 (1)이 지속된 이 번 대선 결과는 (3)과 관계없이 (2)-(1)의 인과가 강고하다는 증거가 아닌가?  

 

가능태론이 허약한 것은, 이 논리가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는걸 넘어, 이 논리의 반증이 많기 때문이다. 가능태론의 바람과 달리 실제 투표와 정치적 연합에서 (3)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2)와 같은 한 가지 사안에 의해서 (1)이 유지되는 현상이 빈번하게 관찰된다. 40-50대 태도의 다양성(예를 들어 이 블로그에서 계속 얘기한 보수화)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강한 신념 때문에 이들의 진보 정당 투표가 유지된다. 정치 현상으로 더 많이 관찰되는 것은 (3)에 의해서 (1)이 바뀌는게 아니라, (1)에 의해서 (3)이 바뀌는 것. 그러니까 자신의 의견과 지지정당의 정책이 일치하지 않으면 지지정당을 바꾸는게 아니라, 지지정당의 입장에 따라서 자신의 의견을 바꾼다. 가능태론보다는 펨코/일베화의 영역 확대가 더 많이 관찰된다. 최근 타국가를 살펴본 많은 연구들이 이 현상을 보고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가능태론의 설명력은 허약하다. 

 

 

불가지론은 가능태론과 그리 다르지 않은데, 좀 더 유보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논리적으로는 더 허약하다. 거의 다른 모든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한국은 대의제다. 개별적 사안에 대해서 유권자가 직접 투표로 결정하는게 아니라, 대략적인 지향성으로 대리인을 뽑으면 그들이 정책을 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인지 보수인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는 지지 정당이다. 민주주의와 복지가 중요하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투표는 민정당(= 전두환 정당)에 하고, 오세훈이 무상급식 없애자고 해도 뽑으면, 민주주의와 복지에 대한 우호적 태도가 무슨 의미가 있나? 

 

불가지론이 가능태론보다 더 허약한 이유는 (1)에 대한 설명 자체가 없기때문이다. 설명해야할 주요 현상(종속변수)을 설명의 요인과 섞어서 판단을 흐린다. 가능태론은 (3)에 의해서 (1)이 바뀔 수도 있다는 전제라도 있지만, 불가지론은 그마저도 없다. 

 

그런데 불가지론이 왜 인기를 끄는가? 불가지론에는 우리를 함부로 규정하지 말라는 당사자들의 외침이 들어있다. 누구나 자신을 한 가지로 규정짓기를 꺼려한다. 개인은 항상 다양하고 중첩적이니까. 이런 다양성은 여러 가능성을 가지기에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규정할 수 없는 자"는 절대자다. 아우구스티누스인가? 하여간 신이 누구인가를 논할 때 나오는 논리가 이거다. 트럼프도 자신을 예측할 수 없는 사람으로 이미지 메이킹하기 위해 무척 노력한다. 규정짓기에 대한 거부는 한 편으로 힘에 대한 숭배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무한한 가능성으로써의 자기애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불가지론은 20대 남성 당사자들의 논리가 되기 쉽다. 

 

 

Ps. 계엄이 해제된 직후 청년들 사이에 계엄을 비난하는 움직임이 있자, 이들이 정치적 각성을 했다고 상찬한 글들이 여럿 있었다. 희망이 드디어 현실이 되는 모멘트로 본 듯 하다. 가능태론이 맞았다면 이 번 선거는 결과가 좀 달랐어야 한다.  

 

Pps. 가능태론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논리이기도 하다. "우리 애가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해서." 무한한 가능태로 자식을 바라보는 엄마의 심정. 이런 심정에서 벗어나 20대 남성도 결과에 따라 평가받는 어른으로 대접하는게 좋지 않겠나 싶다.  

 

Ppps. 위에서 말했듯 (3)에 의해서 (1)이 바뀔 수 있다는 가능태론은 민주당이 (3)을 잘하면 (1)이 바뀔 수 있다는 논리로 쉽사리 전개된다. 잠재적으로 가능태론은 민주당 나빠요론으로 빠진다. 지난 총선을 통해서, 이게 작동하지 않는다는걸 이미 경험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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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대통령 선거 결과는 다들 예상하셨을 것. 화제는 20대 남성의 높은 김문수, 이준석 지지율인 듯. 아래 그래프에서 파란색이 이재명, 빨간색이 김문수, 주황색이 이준석이다. 이제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가장 극우적인 집단은 70대+가 아니라 20대 남성이다 (소스는 요기). 

 

 

여기저기서 한탄이 나오니, 늘상 그러했듯, 20대 남성 내부의 다양성을 근거로 20대 남성을 극우라든가 펨코/일베로 단순화해서 비난하지 말라는 주장도 나오는 중. 

 

이 번 글은 왜 내부다양성 논리가 이제는 폐기해야할 허약한 논리인지 논하고자 한다. 

 

거의 언급이 안되지만, 이철승 교수의 <불평등 세대>에 이런 논리가 나온다. 세대 내 불평등과 세대 간 불평등을 단순 비교해서 세대 내 불평등이 크다고 세대 간 불평등을 시대적 변화의 핵심으로 간주하지 않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는거다. 제가 세대 불평등의 가장 큰 비판자 중 한 명이었지만, 이 논리는 동의한다. 5년 전에 썼던 논문도 이 논리를 인정하고 통시적 변화에서 세대 간 불평등의 중요성을 본 것이다. 

 

이철승 교수의 논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거의 모든 집단 간 구분이 의미를 상실한다. 노동자와 자본가 모두 내부의 다양성이 큰데, 그렇다고 계급론이 의미가 없다는건가? 증가하는 (내지는 감소하는) 계급의 중요성이란, 설사 계급 내 다양성이 크더라도 계급 간 평균 격차의 통시적 변화에 대한 기술이다.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김문수가 좌파였던 시절의 노학연대는 노동자와 학생의 내부 다양성을 몰라서 하는 말인가? 현대 정치 분석에서 자주 사용되는 여러 인구 집단 간 coalitions은 모두 내부 다양성이 아니라, 다양성에 불구하고 드러나는 경향성에 대한 기술이다.

 

통시적 변화 뿐만이 아니다. 집단에 대한 기술도 마찬가지다. 거의 항상 집단 내 다양성이 집단 간 격차보다 크다. 집단 내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드러나는 집단 간 평균의 격차를 집단 간 차이로 기술하는 것이다. 집단의 특성을 말하는 사람들이 집단 내 다양성을 몰라서 그러는게 아니다. 내부 다양성이 크지 않은 대규모 집단은 없기 때문에, 집단 내 다양성 논리는 항상 옳다. 달리 말해, 내부 다양성 논리는 심지어 틀리지도 않는 논리다. 이 자체로 보면 검증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논리 자체가 안된다. 

 

그렇다고 집단 내 다양성이 전혀 의미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집단의 평균적 특성에 대한 기술과 다양성에 대한 강조가 경쟁할 때, 두 논리 중 어느 논리가 실제 행동과 결과 예측에 도움이 되는지 봐서, 다양성에 대한 기술이 결과 예측에 더 적합하면 집단에 대한 평균적 기술의 논리를 기각할 수 있다.

 

그럼 다양성에 대한 강조의 의미는 무엇인가? 다양성에 대한 기술이란, 다른 집단과 구분되는 특정 집단의 평균에 대한 기술이 일부 현상을 확대 과장한 것이고, 실제로는 다른 집단과 차이가 없다는 의미이다. 즉, 집단의 특성에 대한 기술의 안티테제로서 다양성 기술이 의미를 가진다. 영가설과 대립가설의 관계 비슷한거다. 

 

사고 실험으로 두 논리를 이 번 선거에 적용해 보자. (a) 20대 남자는 극우/펨코/일베다. vs. (b) 20대 남성은 내부 다양성이 크다. (a)는 위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지만, (b)는 위 결과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b)는 왜 70%의 20대 남성이 보수 내지는 극우적 선택을 하는지 예측하지 못한다. (b)의 논리는 20대 남성의 투표 성향이 다른 집단과 별로 다르지 않아야 한다. 위 그래프에서 보다시피 (b)의 논리는 지지받지 못한다. 영가설이 기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파하는 다양성 논리는 물타기일 뿐이다.   

 

현재 20대 남성에 대한 일반적 기술로 현재는 "극우/펨코/일베화 되었다"라는 기술이 있을 뿐이다. 

 

이 기술에 대해서 3가지 대응, 내지는 연구가 가능하다. 

 

(1) 그렇지 않다. 20대 남성은 다양하다. 위에서 말했듯, 다른 모든 집단도 다양하기 때문이 이 논리는 20대 남성이 다른 집단과 다르지 않다는 영가설이다. 지금까지의 선거와 여러 서베이 결과는 이 논리가 틀렸다는걸 드러낸다. 이제 파기해도 좋을 가설이지 않을까 싶다. 

 

(2) 두 번째 대응은 극우/펨코/일베화가 아닌 다른 가설을 제기하는 것이다. 제가 과문해서 모르는 것일 수 있지만, 아직까지는 없는 듯 하다. 

 

(3) 세 번째 대응은 극우/펨코/일베화의 "경향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 하나는 경향성의 다양한 진화 내지는 행태를 추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경향성이 왜 생겼는지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극우화 경향성의 인구학적, 계층적 다양성을 연구할 수 있다. 여기서 다양성은 20대의 다양성이 아니라, 20대 일베의 다양성이다. 아니면 김학준 선생의 <보통 일베들의 시대>처럼 웃음 코드가 어떻게 일베 코드가 되는지 담론적 분석도 가능하다. 

 

이제 20대 남성에 대한 설명으로 다양성 논리를 넘어서야 하지 않겠나. 반복된 검증에서 계속 기각되었는데 왜 아직도 이 논리를 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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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기사: 이상한 한국, 중산층 60%인데…그 중에 절반이 "나는 하위층"

 

"한국의 중산층 비중이 역대 최대인 60% 수준까지 늘어났다. 하지만 본인이 중산층이라 생각하는 ‘체감 중산층’은 되레 줄었다." 이게 기사 헤드에 있는 요약이다. "월 가구소득 400만~500만원에서 본인을 ‘중층’으로 인식한 비율은 2013년 77.8%에서 2023년 69.7%로 줄었다. 500만~600만원 구간에서도 83.3%에서 73.3%로 감소했다"라고 국가 공식 통계인 통계청의 사회조사를 인용하며 구체적인 통계 숫자의 근거까지 든다. 

 

그러면서 "체감 중산층이 줄어드는 건 사회 전체의 계층 이동 가능성이 떨어지고 있다는 신호다"라고 주장한다. 비록 객관적 기준에서의 중산층은 역대 최대로 늘었지만, 국가 공식 조사에 따르면 체감 중산층은 줄었단다. 중앙일보는 그러면서 그 이유로 소비, 자산의 문제를 든다. 

 

과연 그럴까? 

 

중앙일보 기사는 일부 통계 수치만을 인용해서 진실을 가리는 전형적인 통계를 이용한 조작이다. 아래 그래프가 중앙일보가 이용한 통계청 사회조사의 2023년 결과 보고서다. 보다시피 2013-2023 사이에 중산층은 57.4%에서 61.6%로, 상층은 1.9%에서 3.0%로 늘었다. 이에 반해 하층은 40.7%에서 35.4%로 줄었다. 10년 사이에 자신을 중산층과 상층으로 인식하는 비율이 59.3%에서 64.6%로 5%포인트 정도 늘었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중산층 인식이 줄었다고 해석하나? 

 

 

중앙일보에서 인용한 월 가구소득 400-500만원 소득자 중 자신을 중산층으로 인식하는 비율이 줄어드는건, 인플레이션과 한국의 전반적 소득 증가로 인하여 400-500만원의 상대적 위치가 줄어들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다. 2013년의 400만원과 2023년의 400만원은 그 가치가 다르다. 그러니 10년 전 동일 소득 계층에서 주관적 계층 인식이 줄어드는건 당연하다. 어떻게 이걸 중산층 인식이 줄어들었다고 해석하나.  

 

한국인의 계층인식이 높아지고 있는건, 통계청 사회조사의 다른 항목에서도 드러난다. 아래는 주관적 소득수준 응답이다. 소득이 여유가 있거나 적당하다는 비율이 2013년 33.8%에서 2023년 44.9%로 무려 11.1%포인트, 비율로는 30%가 증가했다. 여유가 없다는 비율은 66.2%에서 55.1%로 줄었다. 

 

 

마지막으로 아래 그래프는 소비생활 만족도다. 현재의 소비생활에서 만족한다는 비율이 13.6%에서 21.2%로 증가하고, 보통이라는 비율도 46.7%에서 49.9%로 증가한다. 이에 반해 소비생활에 불만이라는 비율은 2013년 39.6%에서 2023년 28.9%로 줄어들었다. 

 

 

이 조사의 도대체 어디에서 한국의 계층 인식이 낮아지고 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나? 주관적 계층인식, 소득 만족도, 소비 만족도 모두 지난 10년간 상당폭 개선되었다. 기사에서 과거와 달리 객관적 중산층은 늘었다고 인정하니 그나마 나아졌다고 해야하는건지. 

 

여러 이상한 기사와 달리 한국에서 소득이 증가하는 객관적 변화와 자신을 중산층이나 상층으로 인식하는 주관적 계층인식의 변화에 불일치는 없다. 객관적, 주관적 두 측면 모두에서 중산층과 상층이 증가했다. 한국의 사회변화와 정책 제안은 이러한 객관적 상태와 주관적 인식의 변화에 기초해서 마련하는게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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