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과 사회과학 저널리즘 - 얼룩소 기사에 붙여.
얼룩소 천관율 기사: (1) 계급이 돌아왔다-이대남 현상이라는 착시, (2) 누가 페미니스트인가.
천관율 기자/작가의 최근 얼룩소 글을 두고 다양한 평가가 나오는 듯하다. 첫번째 글을 읽은 후 다른 사회학자들에게 가장 먼저한 얘기는 이거 읽고 놀랄 계층론 연구자는 한 명도 없을거라는 것. 계층론 연구자들에게는 상식과 같은 얘기다. 계층에 따라 꿈이 다르다는 얘기도 새롭지 않다. 여러 논문이 이미 나와 있다. 페미니스트의 특성에 대한 진단도 상식적이다. 한국에서 여성이 여러 측면에서 차별받는 소수자인데, 소수자와 연대하는 인식을 가진 사람이 어디 한 가지만 그러겠는가. 평균적으로 더 공동체 지향적인게 당연하다. 기사에 새로운 내용이 없다는게 이 분석의 가장 큰 장점(상식적으로 이해된다)이자 단점(뉴스가 없다)이다.
새로운 내용이 없어서인지 천관율 작가의 글쓰는 스타일에 대해서 말들이 많다. 2개의 분석 기사를 읽고 여러 생각이 있는데, 일단 내용에 대해서 몇 가지 짚고, 제가 생각하는 사회과학과 저널리즘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계급 분석 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계급을 나누는 방법이다. 여러 분들이 이 방법론에 관해 의구심을 가지고 질문을 하던데, 저는 "공부방 계급론"이 매우 명민한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공부방 계급론을 나누기 위한 구체적인 통계 기법이야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응답 점수로 연속척도를 만들수도, 천관율 기자의 방식처럼 임의의 점수로 나눌 수도, 좀 더 체계적으로 latent class analysis (LCA)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뭘 하든지 결과는 비슷할 것이다.
계급이라는게 딱히 정해진 조작적 정의가 없다. 소득, 자산, 교육, 직업, 주관적 계급이 모두 계급 정의의 변수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이 번 분석에서 공부방 계급론에 사용된 질문은 두 가지 큰 장점이 있다. 하나는 이 지표는 소득(용돈 지급, 돈 걱정 없이 공부), 자산(독립된 공부방), 문화(부모가 자녀 학력에 관심)를 모두 포괄하는 종합지표(a composite index)다. 특히 문화자본(사회학에서는 보통 집에 있는 책의 권수로 측정)은 기존 연구에 따르면 학력 성취에 영향을 끼치는 가장 강력한 변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자본을 측정하여 계급 구분에 적용한 서베이는 거의 없다. 여러 계급적 지표를 종합해서 하나의 변수로 조작화한 것은 인상깊은 장점이다.
이 분석의 더 인상깊었던 장점은 응답자가 부정확한 정보를 리콜할 필요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출신계급을 묻는 질문은 보통 15세의 자산, 소득 등을 묻는다. 응답자가 제대로 모르고 답변할 가능성이 상당하다. 의도적인 거짓말이 아니라도, 정보가 부정확할 가능성이 높다. 독립변수의 에러에 대한 errors-in-variables 이슈는 통계의 측정 오차에 대해 눈꼽만큼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아는 문제다. 하지만 공부방 계급론의 질문은 모두 응답자 자신의 경험에 대한 리콜이다. 측정오차를 상당히 줄일 수 있다. 향후 청년층/청소년층을 대상으로 한 계급 분석에서 충분히 계속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공부방 계급론으로 측정한 계급에 따른 응답의 격차가, 학력 격차로 측정한 지위에 따른 응답 격차보다 크다는 점도 재미있는 포인트다. 이 분석을 좀 더 생각해보면, 공부방 계급론의 계급 지위가 학력 격차로 그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얼룩소 글에서는 계급의 재발견이라고 썼지만, 학력 성취에서 계급의 허약성을 드러내는 결과이기도 하다. 계급 격차가 학력 격차로 그대로 이어지지 않고, 고학력층에서 계급이 상당히 섞여있다는 의미다. 청년층에서 출신 계급에 따른 인식 격차가, 현재의 학력 성취에 따른 인식 격차보다 더 크다. 능력주의 담론은 학력 성취자의 담론이라기 보다는, 출신 계급에 따른 담론이라는 의미다. 계급에 따른 학력성취와 인식 격차를 종합하면, 능력주의 담론은 계급적이지만, 학력 성취는 덜 계급적이라는 의미다. 상당히 재미있는 발견이다. 하지만 얼룩소 분석글에서 이 점이 언급되지 않았다.
천관율 기자의 분석 글에서 "착시"라고 얘기하는데, 뭐가 착시라는건지 아직은 모르겠다. 사회과학에서 착시란 심슨의 역설과 같은 것이다. 이대남이 착시고 계급이 진짜라면, 인구 집단을 세대가 아니라 계급으로 나누면 세대별로 결과가 같아져야 한다. 예를 들어, 35세 이상 상위계층의 반페미니즘과 능력주의 천착이 20대 남성 상위계층과 다를 바 없고, 35세 이상 하위계층은 20대 남성 하위계층과 다를 바 없어져야, 이대남이 계급의 착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게 아니고 각 계층별로 20대 남성에서 반페미, 능력주의 성향이 다른 연령대보다 강화되었다면 이건 착시가 아니다. 설사 계급별로 상이성이 있더라도, 여전히 이대남 현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착시라고 얘기할려면, 적어도 하위계층에서는 세대별 격차가 없는데, 상위계층에서만 차이가 난다는 결과라도 있어야 한다. 이 경우, 이대남 현상은 상위계층 남성의 인식 변화 현상이 된다. 세대와 계급의 상호작용 효과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런 분석은 아직까지는 없다. 계층별로 능력주의에 대한 입장이 다르고, 미래에 대한 전망도 다르고, 부모의 역할에 대한 인식도 다르다는 건, 계층론의 상식이다. 착시라고 말할 수 있는 새로운 내용이 아직은 없다.
즉, 착시를 얘기할려면 세대 간 격차에 대한 분석이 있어야 한다. 다음 얼룩소 글에서 이런 착시를 분석하는지 기다리고 있다. 35세 이상 그룹도 서베이했으니 충분히 분석이 가능하다. 한가지 궁금하게 생각하는건 공부방 계급론을 35세 이상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했는지다. 그랬다면 분포는 어떻게 다른지 매우 궁금하다. 이대남 현상이 착시라고 할려면, 35세 이상에게도 똑같은 공부방 계급론 항목을 질문했고, 동일한 기준으로 계급을 나누면 상, 하위 계층의 능력주의에 대한 응답 비율에 세대 간 격차가 없어야 한다. 다만, 20대남자는 돈걱정없고 공부방을 가진 비율이 증가해서 능력주의가 커진 것으로 나와야 한다. 달리 말해, 이대남 현상은 계급의 분포 변화로 인한 착시다. 정확히 심슨의 역설과 같은 논리다. 그래야 이대남 현상이 계급의 착시가 된다. 단순히 계급이 중요하다는건 착시가 아니다.
페미니스트 관련해서, 앞에서 언급했듯 페미니스트의 성향이 공적 영역을 중시한다는건 놀랍지 않다. 이렇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 사회과학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하나만 하는 사람은 없다고 했던가. 많은 사람들이 모순적 사고를 하지만, 집단으로 분석하면 상당한 일관성이 있다. 민주당 지지자가 미통당 지지자 보다는 평균적으로 더 진보적이고 더 공공성을 중시한다. 그렇다고 민주당 지지자 개개인이 모두 그렇게 일관적이지는 않다. 당연한 현상이다. 마찬가지로, 여성차별이 심한 한국에서 페미니스트가 상대적으로 더 약자에 우호적이고 공공성을 중시하는게 당연하다. 그러니 이 기사도 유용한 정보이기는 하지만, 놀라운 뉴스가 아니다. 심지어 반페미니스트에게도 이 뉴스가 기대하지 못했던 결과인지 의심스럽다.
더 중요한 질문은 왜 이런 상식적 내용과는 관계없이 페미니스트가 사회에 도움이 안된다고 인식되고 있는가이다. 페미니스트의 성향이 아니라, 페미니스트의 내용이나 페미니스트가 여성 문제와 관련해서 제기하는 주장이 문제인데, 거기에 대해서 얼룩소는 질문하거나 분석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의 주장이 싫다는데 "사람은 착해"라고 엉뚱한 얘기를 한다는거다. 페미니스트의 주장이 사회에 도움이 될 것이 확실하고, 여러 국제기구도 페미니스트의 주장대로 해야 한국 경제가 더 발전할 것이라고 충고한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페미니스트를 싫어하나? 페미니스트가 뭔지 몰라서인가? 아니면 성별 평등 자체에 대해서 저항하는가? 계급적으로 페미니스트의 득세가 경제적으로 불이익이 되나? 아니면 미국에서 CRT가 뭔지 모르면서도 비판적이 되듯, 페미니스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화가 성공해서인가? 쉽지 않은 질문이고, 서베이 한 두 개로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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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분석글에 대한 코멘트다. 조금만 더 어깨에 힘을 빼주면 좋겠지만, 이 정도면 훌륭한 기사라고 생각한다. 진짜로 하고 싶은 얘기는 사회과학 저널리즘에 대한 것이다. 모든 영역의 전문가들은 그 분야에서 다 똑똑하다. 아마츄어가 범접하기 어려운 내공을 쌓고 있다. 사회과학도 마찬가지다. 서베이 돌려서 남들은 알지 못하고 연구하지 못한 뭔가 굉장히 새롭고 충격적인 얘기를 지속적으로 던지기는 어렵다.
그런데 사회과학 저널리즘은 아는 얘기도 다른 사건에서는 다른 각도로 또 할 필요가 있다. 사회과학과 사회과학 저널리즘은 다르다. 사회과학 저널리즘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는데, 저널리즘에 있는 분들이 사회과학, 사회과학 저널리즘, 그리고 저널리즘 사회과학의 차이에 대해 모른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저널리즘 사회과학은 프로페셔날 사회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아마츄어다. 이 번 얼룩소 분석도 기사로써는 훌륭하지만, 사회과학적 분석의 잣대를 들이대면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사회과학적 지식도 새로운 내용의 추가를 통한 점진적 발전인데, 새로운 내용 추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사회과학 저널리즘을 할려면 사회과학자를 설문지 검토 용역에 동원하는 것 보다는, 사회과학자들이 프로페셔날한 영역에서 달성한 성취를 이용해야 한다. 사회과학 저널리즘을 하는 분이 사회과학자 중 누가 무슨 연구를 했는지 읽고 종합해서 알아듣기 쉬운 말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과학자보다 사회과학 기자가 더 광범위하게 읽어야 한다. 사회과학자는 자기 전문 분야만 읽어도 되지만, 사회과학 기자는 덜 깊게 하지만 더 넓게 읽고 서로 다른 분야들을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 사회과학 기자는 어떤 사회과학자가 어떤 분야의 전문가인지 관통하고 있어야 한다. 그게 진짜 정보다. 기사에서 사회학자들 코멘트 딴 것들 보면, 전문가가 아니라 친한 교수에게 대충 몇 마디 딴게 너무 눈에 보인다. 사회과학 저널리즘에서 필요한 능력 중 하나는 누가 진짜 전문가인지 파악하는 능력이다. 무슨 문제가 있을 때 누구에게 물어보는지 알고, 실제로 물어보고, 추가로 무슨 내용을 더 알아보면 되는지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전문적 영역이다.
사회과학 대비 사회과학 저널리즘의 가장 큰 장점은 스토리 텔링이다. 좋은 사회과학 논문이나 저서도 스토리 텔링이 있다. 하지만 사회과학 저널리즘만큼 흥미롭지는 않다. 여러 사회과학 연구를 꿰어서 사회현상에 대한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사회과학 전문기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스토리를 꿰는 것이 어렵다면, 라쇼몽처럼 하나의 현상에 대한 여러 스토리를 전달하는 것도 사회과학 전문기자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다. 천관율 기자는 탁월한 스토리 텔러다. 하지만 이 분이 한 최근의 일부 작업은 사회과학 저널리즘이 아닌, 저널리즘 사회과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라건대 "저널리즘 사회과학"이 아니라 "사회과학 저널리즘"을 하는 분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Ps. 사회과학자도 1회성 센세이셔널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기획에 곁다리로 참여하는건 이제 좀 자제했으면 좋겠다. 그런 기획이 필요한 때도 있지만, 진중한 질문이 필요한 현상을 그렇게 접근하는 한계는 너무 명확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