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

기본소득 논쟁: 왜 우호세력이 늘어날까?

sovidence 2020. 6. 13. 11:16

복지에 대해서 잘 알고 깊이 고민한 사람일수록 기본소득에 반대하고 포퓰리스트인 이재명 지사같은 분들만 기본소득에 찬성하는걸로 넷상에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저도 프레시안에 실린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대표의 논리에 대해 대부분 동의하고, 재정 문제 때문에 기본소득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다른 기초적인 복지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데 갑자기 기본소득 논의가 이렇게 활발한 이유는 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말하듯 기본소득은 어떤 복지국가도 제대로 실시하지 않고 있는 익스트림 버젼의 복지인데 이 정책이 큰 저항감 없이 사람들의 관심의 받을 때는 뭔가 이유가 있다. 이재명 지사의 개인기로 치부할 수 없는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한국의 변화하는 현실이 한계계층을 대상으로 한 복지확장에 점점 덜 우호적으로 바뀌고 있어, 복지 드라이브를 걸기 위해서는 전국민이 효용감을 느낄 수 있는 복지 정책을 앞세워 끌고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번에 재난지원금을 전 국민을 대상으로 지급함으로써 복지의 효능감을 중산층이 맛봤는데, 중산층이 복지 혜택을 느낄 수 있는 방향으로 복지 확장 정책을 짜는 것이 필요하다. 왜 그런지, 한국인의 인식이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자. 

 

 

 

 

아래는 현재 진행 중인 논문에 들어갈 그림 중 하나다. KGSS를 이용해서 한국인들의 주관적 계층 의식 변화를 보여준다. 보다시피 자신이 하층(10점 만점에 1-3점)이라고 생각하는 비율은 24%에서 17%로 줄었고, 중상층(6점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비율은 21%에서 37%로 늘었다. 중하층(4-5점)이라고 생각하는 비율도 55%에서 45%로 줄었다. 

 

이러한 주관적 계층 인식의 변화는 이전에 얘기했던 한국의 가구 소득은 상위 50%가 전반적으로 개선되었다는 객관적 경제 현실의 변화와 일치한다.

 

다들 한국은 헬조선이라고 주장했지만, 자기 자신의 계층 위치 좌표를 찍으라면 점점 더 상위의 좌표를 찍고 있다. 온갖 호도가 난무하지만 현실은 한국 경제가 다른 국가보다 빨리 발전하면서 삶의 만족도도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주관적 계층의식(및 아마도 연관된 삶의 만족도)가 높아지면서 복지 정책의 필요성과 불평등 축소에 대한 지지는 하락하고 있다. 

 

아래 표는 역시 KGSS를 이용해서 각종 복지 관련 질문들에 대한 답변의 변화를 보여준다. 똑같은 질문을 매년 하는 것은 아니라서 시간 간격이 있는 2개 연도의 변화만 짚었다. 

 

찬성하는 의견이 반대하는 의견보다 여전히 압도적으로 높지만 정부가 노인연금, 실업수당을 올리고,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의견의 비율은 점점 줄고 있다. 소득 격차 축소가 정부 책임이라고 보는 비율도 줄고 있고, 빈부갈등이 심하다거나, 계층 갈등이 심하다는 비율도 줄어들었다. 드라마틱한 변화는 아니지만 한국에서 복지 정책에 대한 지지도는 확실히 줄어들고 있다. 저소득층 대학생과 무주택자에 대한 지원을 늘려야 한다는 의견이 늘어난 것이 예외다.  

 

시사인에서 KGSS 조사와 자신들의 웹조사를 비교해서 2018년 대비 2020년에 복지 정책에 대한 지지도가 줄었다고 얘기했는데, 이게 코로나 때문에 생긴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21세기 들어서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 한국인의 인식 변화다. 

  2006 (적극 찬성 %) 2018 (적극 찬성 %)
노인 연금 늘려야  23.3% 10.6%
실업 수당 늘려야  13.6% 5.6%
정부는 일자리 제공해야 20.6% 14.8% (2016)
무주택자 적정 주거 제공 19.7% 23.3% (2016)
저소득층 대학생 재정지원 28.8% 32.1% (2016)
소득 격차 축소는 정부 책임 28.7% (2009) 24.6% (2014)
빈부 갈등이 심하다 33.3% (2009) 28.2% (2014)
계층 최상 최하층  갈등 심하다 47.4% (2009) 35.0% (2014)

 

 

객관적 경제 현실이 좋아지면서 주관적 계층 인식이 호전되고 복지 정책 필요성에 대한 인식은 감소하고 있다. 현재 수준의 복지가 적당하다는 의견이 점점 커지고 있다. 복지 논쟁이 폭발하고 있고, 통합당마져 기본소득을 말하고 있지만, 한국 사회 저변은 복지를 확충하기 어려운 쪽으로 조금씩 바뀌고 있다. 복지 확대 정치의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을 수도 있다. 

 

복지에 대한 전반적 지지가 조금씩 하락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이유는 위의 통계로 짐작컨대 기존에 논의되던 한계 계층을 주로 지원하던 복지와 달리 중산층도 혜택을 받기 때문이다. 즉, 기본소득이 핫하고 의외로 많은 사람에게 거부감이 없는 이유는 노인연금, 실업수당, 빈부갈등은 타인을 위한 복지로 여기지만 기본소득은 나를 위한 복지로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짜 기본소득이라도 중산층에게 뭔가를 안기는 것이 복지 확장 아젠다 전체가 좌절하지 않고 한국에서 복지의 비중을 늘릴 수 있는 길이다. 더 많은 세금을 납부해야 할 중산층을 포괄하지 않는 복지 정책은 점점 더 지지를 받기 어렵게 될 것이다. 소득하층이나 한계 계층만을 타겟으로 하는 정책이 당장은 효율적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꼭 기본소득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본소득 반대론자들은 기본소득이 아닌 무엇으로 중산층에게 혜택을 안기면서 복지를 확충할 것인지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복지 확대라는 궁극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중산층을 포괄하는 복지 이니셔티브가 없이 기본소득을 반대하다가는 기본소득 말싸움에서만 이기고 복지 확충은 실패하는 우를 범할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