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인 기사: 민주당 장기집권 ‘문재인 뉴딜’에 달렸다 (천관율).
재미있는 기사. 일독을 권함. 그런데 기사 후반에 가면 한국에서 포퓰리즘의 등장 가능성을 제시하며, 그 근거 중 하나로 소득 상위10%의 소득 집중도 상승을 들고 있다.
소득 상위 10%의 집중도 상승은 맞는 얘기인데, 그렇다고 이 근거만 가지고 한국에서 10% vs 90%의 전선이 나타날 수 있다고 예단할 수 없다.
왜 그런지 한국 사회 불평등 문제의 독특성을 좀 살펴보자.
우선 상위 10% 얘기부터.
미국과 유럽은 상위 10% 보다는 상위 1%의 소득 상승률이 높고, 상위 1%보다는 상위 0.1%나 0.001%의 소득 상승률이 높다. 중산층보다는 고소득층, 고소득층보다는 초고소득층이 점점 더 잘 살게 되는 사회다.
하지만 한국은 상위 1%와 상위 10%의 소득 상승률에 큰 차이가 없다. 그래서 한국에서 상위1%나 재벌만 욕하는 것이 실제 사회변화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실과 다르니까.
한국에서 상위 10% 내부의 소득집중도 변화를 가장 깊게 연구한 사람 중 한 명이 노동연구원의 홍민기 박사다. 이 분의 홈페이지를 보면 발표된 논문 뿐만 아니라 가장 최신의 데이터까지 업데이트되어 있다.
그럼 당연히 상위 10%만 잘나간다는 판단이 맞는거 아니냐는 질문이 나올거다.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나온다. 하나는 상위 10%의 집중도가 높아진 이유가 하위 90%와의 격차를 벌린 것인지 아니면 상위 20% 내지는 50%가 비슷하게 상승하고, 하위 50%가 낮아진 것인지다. 이 질문은 상위10% 집중도 강화가 중간층의 희생의 결과인지, 아니면 상위50% 전체의 소득이 높아지고 하위50%의 소득이 낮아지는, 빈곤강화의 문제인지를 가르는 것이다.
상층 강화든 빈곤 악화든 상위 10%의 통계에서 소득집중도는 높아진다. 하지만 둘의 문제는 전혀 다르다. 상위 10%의 소득집중도 강화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간층 희생이 결과로 생각하지만 그런 증거가 명확하지 않다.
상위 10% 소득집중도 강화와 관련된 또 다른 이슈는 개인 소득의 변화와 가구 소득의 변화가 같은지 아니면 다른지다. 상층 소득의 집중도를 연구한 홍민기 박사나 김낙년 교수의 연구는 개인을 분석 단위로 한다. 한국은 세금보고가 가구 단위가 아니라 개인 단위이기 때문에 분석을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실제로 느끼는 삶은 질은 개인 소득이 아니라 가구 소득에 의해 결정된다.
한국에서 개인소득과 가구소득의 변화를 같이 볼 수 있는 장기 데이터는 없다. 최근에 <가계금융복지조사>가 두 소득을 모두 포괄하지만 통계청에서 원자료를 일반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 개인소득 자료를 가지고 전체 불평등을 재단해서는 안된다.
전에도 한 번 얘기했지만 가구균등화 소득으로 한국에서 상위 10%와 중간층의 격차가 벌어졌는지, 아니면 상위 50%와 하위층의 격차가 벌어졌는지를 살펴보면, 한국의 불평등은 완전히 하위 50%의 소득 감소에 의해서 추동되었다.
아래 그래프는 (1) 상위10%를 가르는 분기점의 소득과 중위 50%를 가르는 분기점의 소득의 비 (=P90/P50), 그리고 (2) 중위 50%를 가르는 분기점의 소득과 하위 10%를 가르는 분기점의 소득의 비 (=P50/P10)의 변화를 보여준다. 자료의 소스는 가계동향조사다. 소득 불평등이 증가한 1992~2008년까지의 장기간 동안 가구 소득상승률의 측면에서 상위 10%와 중간층의 차이는 극히 미미하다. 거의 전적으로 불평등은 하위 소득의 악화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 상위10%와 하위90%를 대비시키려는 정치적 시도가 성공하기 어렵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은 가구단위로 보면 상위 1%, 상위 10%, 중간층이 통시적으로 비슷하게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있다.
한국 불평등의 가장 큰 문제는 하층의 소득 하락, 빈곤의 문제다. 상층을 고립시켜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한편으로는 그래서 정치적으로 더 어렵다. 하위 90%나 99%의 동맹을 형성할 수 없고, 정치적 목소리가 작은 소득하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적 목소리가 큰 상위 50%의 지지를 받아 상위 50% 자신의 (일정 정도의) 희생을 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2018년의 최저임금 논쟁을 상기해보라. 최저임금 상승은 소득하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 정책을 실제로 실행하자 그 지지는 낮아졌다. 잘못된 통계에 기반한 공격이었지만, 최저임금 상승 정책을 지지하는 목소리는 낮아지고 경제를 망친다는 목소리만 높아졌다.
한국에서 계급정치가 어려운 것은 정치적으로 액티브한 상위 50%의 지지를 받아, 정치적으로 활동이 없는 하위 20%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미션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지지와 정책적 혜택의 불일치가 있다. 하위 20%는 노인빈곤이 많다. 민주당보다는 보수당을 더 지지한다. 정책적 혜택을 받는 층이 자신들에게 혜택을 주는 정치를 지지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한국은 상위50%가 하위20%로 떨어지지 않도록 보장하는 것(소득 안정성)과 하위20%의 혜택을 늘리는 것(소득 불평등 축소)을 교환해야 한다. 계급적 이해에 기반해서 이러한 정책을 추진할 동맹을 형성하기 매우 어렵다. 경제성장의 열매를 상위 50%가 공유했기 때문에, 성장보다 분배를 중시하는 레토릭이 큰 힘을 얻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 힘은 약화되었지만 소득주도 성장과 같은 성장 레토릭을 포기하기 어렵다.
우리가 이렇게 잘난 나라인데 하위 20%가 빈곤하다는게 말이 되느냐. 이런 레토릭이 오히려 더 잘 먹힐 것이다. 1960년대 미국에서 존슨 대통령이 "빈곤과의 전쟁"을 선포했을 때의 논리가 바로 이거였다. 앞으로도 정치적 동원과 국뽕을 계속 보게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