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총선 감상에서 비례대표제에 대한 간단한 코멘트를 남겼더니 정의당 지지자분들의 심기가 편치 않으신 듯. 

 

한국에서 대통령제가 바뀌기 어렵다고 얘기하면 많은 분들이 걍 느낌으로 여론 때문에 그렇게 얘기하는줄 아는데 그렇지 않음. 예전에 사회과학자들에게 사회과학의 최대 난제가 무엇이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 난제들 중의 하나가 제도의 생성과 유지였음. 사회과학자들은 한 사회에서 제도가 어떻게 유입/생성되고 정착되고 유지되는지 그 메카니즘을 알지 못함.  

 

왜 제도의 생성과 유지가 사회과학의 난제인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한국의 대통령제를 예로 들어서 조금 설명하고자 함. 

 

현대 신생 국가에서 제일 먼저 하는게 국가 리더쉽의 규칙을 정하고 선거를 실시한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을 것. 예를 들면 한국의 제헌의회. 문제는 선거가 곧 결과 승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규칙에 따라서 선거하고, 선거 결과 받아들이고, 정부를 세우고 정책을 실천하면 나라를 이끌 수 있을거 같은데, 대부분 이렇게 안됨. 거의 대부분의 신생 국가에서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총질해서 내전으로 돌입함. 

 

생각해 보면 이해가 어렵지 않음. 총칼로 저항할 수 있는데 뭐 때문에 투표 결과를 받아들이고,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지도자를 받아들여야 함?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어쩌다 2차 대전 이후에 연합국에서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의 일부로 받아들여 총선거를 실시했다고 상상해 보삼. 한국인들이 독립군의 총칼을 내려놓고 그 선거 결과를 받아들였을 거 같음?  

 

이 번 총선만 해도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전투표 음모론을 야당의 일부 의원들도 개진하는 판. 야당만 그런게 아니라, 예전에 보수가 이겼을 때 김어준도 뭐 이상한 투개표 음모론을 핀 적이 있음. 이거 다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소리. 한국처럼 민주주의가 완전히 정착된 국가에서도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는게 이렇게 쉽지 않음. 그러니 선거로 지도자를 뽑는 전통이 없었던 신생 국가에서 총칼을 내려놓고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기는 무척 어려움. 

 

즉, 선거라는 형식만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 선출된 지도부를 지도부로 인정하고 따르겠다는 글로 쓰여있지 않은 사회 전반적 합의가 있어야만 제도가 정착되는 것임. 제도의 생성과 유지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은 이 합의가 어떻게 생성되고 유지되는지 그 규칙을 모른다는 것. 심지어 제대로 정착되었다고 하는 제도도 원래 의도했던 것과 달리 뒤틀린 형태로 정착되는 경우가 허다함.  

 

한국은 해방 후 대통령제로 국가를 이끌어나갈 권력을 부여하고 그 권력에 복종하여 행정력을 발휘하는 사회적 체계를 70년 넘게 구축한 사회임. 국가의 리더쉽이 대통령제로 굴러가게끔 짜여져 있음. 대통령제에서 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로 바꾸면 단지 선거 제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행정권력이 작동하는 전체 메카니즘을 바꿔야 함. 이게 쉬운 일이 아님. 

 

제도를 착근시키는 어려운 예를 하나 들어 보겠음. 현재 선거법 위반으로 100만원 이상 벌금을 받으면 국회의원직을 상실함. 내각제로 바뀌면 차기 수상 후보는 선거법 위반 내용을 잡기 위해서 상대 정당이 혈안이 되어서 일거수일투족을 뒤질 것이고, 온갖 소송이 걸릴 것. 이 때 생길 수 있는 정당성의 위기를 어떤 식으로 넘어갈 지 알지 못함. 보통 내각제에서 집권 여당이 국민적 신뢰를 상실했다고 판단되면 조기총선을 하는데 이건 또 어떻게 합의해서 할지. 한 정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하면 연정을 해야 하는데, 연정의 전통도 우리는 없음. 

 

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비례대표 꼼수도 이와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음. 특별히 법이 잘못된 것이 아님. 실제 권력의 향방이 달리니까 온갖 꼼수가 작동함. 위성정당을 안만든다는 비법률적 합의가 없으니까 이렇게 되고야 마는 것. 제도가 제도로써 안착이 안된 것. 상대방은 위성정당 안만들고 나만 만들면 선거에서 이기는데 왜 안만들겠음? 그런거 안만든다는 전통이 없는 제도이기 때문에 당연히 만들게끔 되어 있음. 새로운 제도를 만들면 뭔가 헛점이 있고 이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큼. 이번 연동형 비례제의 꼼수 향연이 특별한게 아님. 

 

글로 써진 법률을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한 암묵적 합의도 어렵지만, 어떤 때는 글로 써진 법률이 작동하지 않게끔 제도가 발전하기도 함. 법이 법조문에 쓰인 그대로 작동하지 않고, 헌법도 헌법에 쓰여있는 그대로 작동하지 않음. 예를 들면 한국에서 국가원로자문회의 같은 거. 한국에서 국가원로자문회의가 뭐 했다는 소리 들어본 분 있음? 국가원로자문회의는 헌법 90조에 규정된 국가 조직이지만, 유명무실함.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은 직전 대통령이 맡게끔 헌법으로 규정되어 있음. 권한은 법률로 정하고. 재인 대통령이 헌법에 근거해서 국가원로자문회의법 새로 만들어서 퇴임 후에 의장맡겠다고 하면, 영구집권 독재음모라고 난리날 것. 한국에서 전두환, 노태우를 감방으로 보내면서 헌법에 쓰여있는 국가원로자문회의는 문항으로만 존재하고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국가조직이 되었음. 87년 새로운 헌법 도입 후 30여년간의 역사 속에 그렇게 정립된 것. 

 

그래서 개헌은 정말 큰 이슈임. 문재인 정권에서 개헌 이슈가 잠깐 있었는데, 이 때 문재인 정부가 개헌을 실제로 원했다고 생각하지 않음. 대선 때의 공약을 털어서 부담을 덜어낼려고 했던 것으로 이해함. 

 

현재의 대통령제에서 다른 권력체제로 넘어가면 생길 수 있는 각종 문제점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모르고, 굳이 권력체제를 바꿔서 이걸 새로 배워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음. 지금 대통령제 하에서도 선거 결과에 승복을 못하고 온갖 음모론이 난무하는 마당에, 총선 후 소송으로 상대 지도자를 거꾸로 뜨릴 수 있을 때 어떤 정치적 기동이 난무할지 닥치지 않으면 모르는 것. 왜 대통령제에서 이탈해서 이런 국가적 혼란을 스스로 초래하겠음? 

 

선거제도를 고민할 때는 그래서 대통령제와의 연관성을 항상 같이 고민해야 함. 절대 법칙으로 대통령제가 지속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대통령제에서 벗어나 다른 제도가 도입되는 것이 매우*3 어려움. 

 

제가 비례대표제 논의할 때 대통령제와의 친화성을 말하고, 대통령제의 지속성에 대한 의견을 묻는 것은 이러한 제도의 생성과 유지의 어려움을 이해하는지 물어보는 것. 비례대표제만 뚝딱 따로 떼어서 논의할 수 있는게 아님. 

Posted by sov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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