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기사

한국은행 박용민, 허정 연구원의 전체 보고서

 

재미있는 분석인데, 이 분석은 결혼할 당시의 남녀의 소득을 본 것이 아니라, 현재 결혼을 유지 중인 25-64세를 대상으로 하였다. ILO의 이상헌 선생이 페북에 썼듯이, 이렇게 하면 한국에서 실제로 소득동질혼이 약한지, 아니면 소득 동질혼이 이루어졌다가, 남편의 소득이 높아서 여성이 경력단절을 더 쉽게 하고, 남편의 소득이 없으면 여성이 노동시장에 더 오래 머물게되어 나타나는 현상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얘기는 이 분석에 쓰인 자료다. 가금복의 개인 소득을 이용했는데, 통계청 mdis에서 일반 공개하지 않는 자료다. 이런 분석을 할려면 부부 각자의 소득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는데, mdis에서 다운 받을 수 있는 가금복 자료는 부부 개인 소득이 없다. 가계동향조사는 부부개인 소득을 제공하는 것에 비해 가금복으로 가구소득을 파악하면서 자료 공개 범위가 오히려 축소되었다. 가계동향조사는 1998년인가 이후 부부 개인 소득을 제공하고, 나머지 가구원의 소득은 하나의 변수로 제공한다. 가금복은 가구원 모두의 개인 소득을 조사했는데도 불구하고 개인 소득은 공개자료에서 제공하지 않고 있다. 개인소득이 포함된 자료는 한국은행 같은 연구기관은 접속이 가능하고, 그게 아니면 별도로 신청해서 허가를 받아야만 쓸 수 있다. 그러니 이런 연구가 드물다.  

 

그건 그렇고, 여러 사람들이 가질 의문은 한국에서 소득동질혼이 결혼 당시의 소득으로 봐도 다른 국가보다 낮을 것인가이다. 그런데 그럴 개연성이 상당히 있다.

 

사회학 연구자들에게는 이제 상식이 된 결과일텐데, 박현준 교수의 연구 시리즈(예를 들어 요기, 요기, 요기)를 보면 한국은 교육 동질혼이 강화된 서구 국가와 달리 1990년대 초반 이후 교육 수준이 비슷한 사람끼리 결혼하는 교육 동질혼이 약화되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교육 동질혼이 강화되다가, 교육팽창이 이루어진 그 이후로는 오히려 약화된 것이다. 교육 동질혼의 단순 비율만 본 것이 아니라, 부부의 학벌 분포를 통제한 후 상대적 오즈를 본 것이다. 

 

교육이 소득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임을 감안할 때 소득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결혼하는 소득 동질혼 추세도 줄어들었을 개연성이 상당히 있다.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는 물론 추가 연구를 필요로 한다. 혼인 결정의 계층 중요성이 줄어들고, 사회적 개방성이 높아진 결과일수도 있지만, 전혀 반대로 결혼하는 당사자들의 계층 지위가 아닌 부모의 계층 지위가 혼인에서 중요해졌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가구 소득에 끼치는 부모의 효과는 줄어들고 개인의 교육, 경력, 직업의 중요성이 커지기 때문에, 교육 동질혼의 감소, 소득 동질혼의 감소는 가구 소득 불평등, 삶의 질의 불평등의 감소에 기여하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소득 불평등을 증가시키는 인구학적 메카니즘과 감소시키는 메카니즘이 혼재되어 있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연구 없이 한 두 가지 결과로 지르는 주장이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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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의 구간을 물어본 자료로 불평등을 분석하는건 보편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요즘이야 소득 자료가 상대적으로 풍부해져서 개인, 가구 상세 소득이 있었지, 옛날에는 그런 자료가 매우 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득 불평등을 분석했다.

 

소득 구간을 객관식으로 물어본 자료를 grouped data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이런 자료를 이용한 불평등 분석이 대부분이었다. 국가 간 비교는 아직도 대부분 구간 소득 자료를 이용한다 (예를 들어 그 유명한 Milanovic의 논문들). 

 

그럼 당연히 의문이 생긴다. 이런 자료로 불평등 분석하고 가족 배경 통제해도 문제는 없는걸까? 의문이 생긴다고 구간 소득 자료로 분석한 연구는 이상하거나 틀렸다고 페북에서 용감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본데, 그런거 아니다. Davies & Shorrocks (1989)이 이미 한 세대 이전에 여기에 대해서 연구해서 Journal of Econometrics에 논문을 출간했다. 경제학 방법론 논문 한 편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저널의 의미가 뭔지 알거다. Shorrocks은 소득불평등 분해에서 자기 이름 붙은 방법론을 개발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들의 시뮬레이션 결과, 구간 소득으로 측정한 불평등 정도와 상세 소득으로 측정한 불평등 정도에 거의 차이가 없었다. 소득의 구간이 5개 이상이면 "any bias present is relatively small"이다. 그러니 구간 소득으로 측정한 분석에 오류가 클거라는 조바심은 고이 접어두셔도 괜찮다. 

 

그런데 구간 소득이 아니라 연속변수로 소득을 물어봐도 구간 소득으로 물어본 것과 유사한 효과가 발생하는데, 그건 바로 사람들이 소득을 반올림 내지는 내림해서 보고하기 때문이다. 월소득이 323만원이면, 걍 300만원 쯤으로 대답한다. 이런 식의 패턴 때문에 연속변수 소득도 특정 소득 지점에 쏠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래서 소득 분포의 그래프(density graph)는 너무 금액 단위(bin)을 자세하게 나누면 그래프가 오히려 부정확해진다. 적절하게 구간으로 봐야 분포 그래프가 정확하다. 미국 세금 자료와 SIPP 자가 보고 소득의 격차를 연구하면서 직접 체크해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요기, 요기). 

 

구간 소득을 이용할 때 한 가지 이슈는 톱코딩이다. 예를 들어, 보통 100-200만원 사이면, 중위값이 150만원으로 코딩하면 되는데 (랜덤값을 부여하는 방법도 있다), 최고 응답 구간이 1천만원 이상일 때, 여기에 어떤 값을 줘야하는지 결정하기 어려울 수 있다. 1천만원은 하위값이라 부적당하고, 그 위의 값을 쓰려니 어느 값을 써야될지 막막하다. 이 주제도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연구했다. 

 

보편적으로 쓰이는 방법은 상수를 곱하는거다. 불평등 연구하면 빼놓을 수 없는 David Autor 등도 톱코딩 소득은 1.3을 걍 곱했다. 또 다른 방법은 톱코딩 이하 소득분포를 감안해서 log normal distribution을 가정하는거다. 연도별로 구간 소득값이 같더라도, 조금씩 상위 소득으로 이동하면, log normal distribution의 톱코딩 변환값은 변화한다. 이 외에도 여러 방법이 있다. EPI에서 여러 톱코딩을 적용해서 불평등을 비교한 보고서를 낸 적도 있다. 미국 <Current Population Survey>에서 2010년에 톱코딩을 없애기 전에 모든 소득불평등은 톱코딩에 이런 식의 임의적인 조치를 취했다. 제가 GOMS 자료를 이용한 논문을 쓸 때 이 방법론들을 모두 적용해보고 결과에 차이가 없다는걸 확인했었다. 

 

그러니 뭔가 의심이 들 때는 남들이 연구해놓은건 없는지 찾아보는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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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인문학적 글쓰기라고 불러도 되는지는 모르겠다. <소설, 영화, 노래가 가지는 역사적 기억의 힘>이라고 부를려니 너무 길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쓴 조세희 작가의 소천 소식을 접하고 다시 떠오른 생각이다. 1970년대를 희미하게나마 기억하는 사람들은 조세희 소설의 기억 또한 어떤식으로든 가지고 있을 거다. 저 역시 마찬가지다. 집에 책이 적지 않은 편이었고, 어려서부터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읽었다. 방목형 독서 지도를 받았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선친께서 조금 더 커서 읽으라고 만류했던 책이다. 지금은 읽어도 그 의미를 모두 이해하지 못할거라고. 자라면서 유일하게 받았던 독서지도가 이것이다. 

 

우리는 역사적 사건과 상황을 집단적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집단적 기억은 역사와 사회과학 연구를 통해서 유지되는게 아니다. 역사의 집단적 기억은 소설, 영화, 노래에서 쓰여지고 각색되고 재창조되면서 유지된다. 소설, 영화, 노래의 소재가 되지 못하는 역사는 집단적 기억에서 사라진다. 희빈 장씨를 온국민이 아는 이유는 아쉬우면 반복되는 드라마 때문이지, 그 때의 역사가 한국사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다. 

 

기억에서 사라진 역사의 사례 중 하나가 스페인 독감이다. 1900년대 초반의 가장 강력한 전염병이었고, 사회학의 파운딩 파더 중 한 명인 막스베버도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전염병에 대해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18억 인구의 2~5%가 죽었다고 추정되는 엄청난 전염병이었지만, 전염병하면 중세의 페스트를 떠올리지 불과 100년 전에 발생했던 스페인 독감을 생각하지 못했다. 코로나 전염병 창궐 이후 스페인 독감에 대해서 새로운 사실인양 모든 언론에서 보도하기 전에는.  

 

1차 대전의 마지막은 스페인 독감과 함께한 전쟁이었다. 1차 대전 사망자가 1,500만명이지만, 스페인 독감 사망자는 그 세 배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서도 14만명이 죽었다고 한다. 독감의 기억이 전쟁 기억 중 큰 부분이 되어야 하지만, 1차 대전은 <서부 전선 이상 없다>로 기억된다. 참호 속에서의 추위와 배고픔, 일진일퇴의 지리한 공방으로 기억되는 1차 대전은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힘이다. 캔사스시티에 가면 1차대전 기념관이 있는데, 여기도 여러 무기의 개발과 참호의 비참함은 잘 묘사하고 있지만, 스페인 독감은 상기시키지 않는다. 불과 100년 밖에 지나지 않은 스페인 독감을 집단적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소설과 영화에서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가 소유권을 가진 주장은 아니고, 어디서 읽은 내용이다. 

 

이처럼 역사적 사실의 집단적 기억은 허구적 창작의 재현을 통해서만 유지된다. 

 

조세희의 <난쏘공>은 70년대 빈곤을 현대에도 희미하게나마 기억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강력한 글이다. 조세희 선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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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단어를 만든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1973년에 출간한 책의 제목이 <대칭적 가족(the symmetrical family)>이다.  

 

여기서 마이클 영은 21세기에 가족은 3가지 발전단계를 거칠 것이라고 예측한다. 

 

(a) 한 가지 부담을 지는 부인과, 한 가지 부담을 지는 남편. 

(b) 두 가지 부담을 지는 부인과, 한 가지 부담을 지는 남편,

(c) 두 가지 부담을 지는 부인과, 두 가지 부담을 지는 남편. 

 

여기서 부담이 되는 두 가지 일은 각각 가사노동과, 임금노동이다. (c)에 이르면 대칭이 완성된다고 마이클 영은 예측한다. 이 책을 읽은 건 아니고, Richard Reeves가 쓴 Of Boys and Men이라는 책에서 본 인용이다. 리브스는 Opportunity Hoarding (한국어로는 <20 VS 80의 사회>로 번역되었다)의 저자로 상위 10%가 어떻게 기회를 독점적으로 쌓고 나머지 90%를 소외시키지는지에 대해 논의하였다. 

 

많은 국가에서 (b) 단계로의 이동은 거의 이루어졌고, (c) 단계로의 이행이 더디게 진행 중이다. 한국에서도 화제가 된 골딘의 <커리어 그리고 가정>도 이 단계에 대한 책이다. 여성이 두 가지 부담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던 사회에서 두 가지를 모두를 선택하는 사회로의 이행이 어떤 시점에 이루어졌는지, 미국 사회를 분석한 책.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이 대칭적 가족으로 가는 첫 번째 변화라면, 남성의 가사노동 부담 증가가 대칭적 가족의 완성으로 가는 두 번째 변화다. 굳이 단계를 나누자면 그렇다는 얘기고, 실제 남성의 두 가지 부담은 (a) - (b) - (c) 단계에서 점진적 변화를 보일 것이다. 

 

마이클 영이 1970년대 초에 예측한 이러한 변화는 모두 여성의 니즈를 반영한다. 남성의 니즈가 아니고. Of Boys and Men는 이 와중에 나타나는 남성의 위기에 대한 책이다. 상당히 중요한 문제를 지적한 책으로, Reeves가 제기한 아젠다의 영향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질 것 같다. 

 

이러한 변화에서 잊지말아야할 것은, 한국은 아직도 두 번째 단계로의 이동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c) 단계로 어떻게 진입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담긴 골딘의 책이 한국에서는 (b) 단계의 문제는 없다는 식으로 소비되었듯이  리브스의 책도 조만간 번역되어 비슷하게 소비될 것 같다는 기우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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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한국을 방문하면서 C모 교수님 덕분에 최병천 소장의 <좋은 불평등>을 읽었다. 불평등 전문 연구자에게는 읽기를 권하고, 다른 분들에게는 권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책이었다. 

 

1980년대 이후 전세계적인 국가 내 불평등 증가 원인에 대한 논의는 대략 4가지다: (1) 기술변동론, (2) 제도변동론, (3) 세계화, (4) 인구학적 변동론. <좋은 불평등>은 한국의 불평등 변화에 대한 설명으로 제도변동론을 비판하고 세계화 효과의 재평가를 요구하는 책이다. 

 

전문 연구자에게 이 책을 권하는 이유는 이 책의 최대 장점인 세계화 효과의 재평가 때문이다. 제가 과문하지만, 한국 사회의 불평등 변화 요인으로 세계화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미국에서도 세계화는 불평등 변화 원인 중 가장 나중에 주목을 받았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세계화를 불평등 변화의 한 요인으로 주목하지 않다가, 21세기 들어서야 세계화 효과가 본격적으로 논의 되었다. 

 

<좋은 불평등>은 중국효과를 한국사회 불평등 변화의 가장 큰 요인으로 보는 면에서 세계화 효과의 재평가론이라 할 수 있다. 1994, 2008, 2015년이라는 임금불평등 변동 지점이 모두 중국 효과와 결부되어 있다는 주장은 매우 흥미롭다. 이 블로그에서 여러 번 얘기했고 (예를 들면 요기), 논문도 썼지만 (예를 들면 요기, 요기), 한국사회에서 불평등이 증가하기 시작한 시점은 IMF 이후가 아니라 1990년대 초반이다. 그리고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소득불평등이 줄어든다. 이러한 변화 지점을 일관되게 설명하는 논리가 제가 알기로 없었다. 최병천 소장이 <좋은 불평등>에서 주장한 중국효과론이 1990년대 초반 이후 2008년까지의 불평등 증가, 그 이후의 하락을 단일 논리로 설명하는 최초의 가설이다. 이러한 가설을 제시한 것은 큰 공로다. 

 

여기서 가설이라고 얘기하는 이유는, 최병천 소장의 강한 주장과 달리 이 논리가 검증되지는 않았다. 이 책의 최대 단점이다. 어떤 인터뷰를 보니 300여개의 데이터가 제시되었다고 하는데, 전문 연구자의 관점에서 보면 짜집기이다. 예를 들면 이런거다. 이 책에서 임금불평등의 변화 지점을 보는 [그림 1-4]는 책에서도 쓰여있듯 <임금구조기본조사>와 <고용형태별근로실태조사>에 근거한다. 그런데 두 조사는 조사대상이 중간에 바뀌었다. 10인 이상 사업체로 일관되게 한정할 경우 10인 이하 사업체의 저소득 노동자와 책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비노동 인구가 제외되는 큰 단점이 있다. 한국사회 소득, 임금 불평등 변화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자료가 아니다. 한국사회에 그런 자료는 없다. 2012년 이후 그런 자료(=가금복)를 만들기 시작했지만 일반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병천 소장은 IMF는 영향이 없고, 1994년이 불평등의 변곡점이라 주장한다. 경제위기로 대량해고가 이루어진 후 자리를 보전한 노동자를 대상으로 만족도 조사를 하면, 만족도가 높아진다. 이를 잘못 해석하면 해고가 노동자의 만족도를 높인다고 할 것이다. 마찬가지다. IMF 구제금융이 이루어진 1997-8년 경제위기 때 자리를 보전한 10인 이상 사업체 노동자들 내부에서의 불평등을 측정하여 불평등 증가가 없었다고 주장하면 안된다. 일자리를 잃은 수많은 노동자 와 저소득층 가구의 소득이 급전직하하여 불평등이 급등하였다. 이러한 자료 분석은 비노동 인구를 제4의 계급으로 포함해야 한다는 저자 자신의 주장과도 모순된다. [그림 1-4]에서 1997-8년 효과가 보이지 않는 것은 데이터 한계를 드러내는 지표다. 이 한계로 인한 오판의 가능성을 다른 자료로 크로스체크해야 한다. 

 

이 블로그에서 여러 번 말했던 내용 중의 하나가 한국 사회 가구소득 불평등은 상층의 변화가 아니라 하층에 의해서 특징지워진다는 것이다 (요기). 하지만 최병천 소장은 중국 효과를 임노동 상층의 소득 변화로 설명한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1980년 이후 상중하층의 소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자료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자신의 구미에 맞는 특정 시점의 변화 몇 개로 퉁친다. 이러면 안된다. 최소한 <임금구조기본조사>와 <고용형태별근로실태조사>의 소득 상중하층의 통시적 변화라도 보여줘야하지 않겠는가. 가구소득의 변화는 하층이 주도하고, (검증되지는 않았지만 만약) 임노동자 소득의 변화는 상층이 주도했다면, 양자간의 모순을 매개하는 설명은 무엇인지가 제시되어야 한다. 

 

강한 주장에 비해 실제 자료 분석이 미비하다는 것은 최저임금에 대한 분석에서도 드러난다. 2018년 최저임금 인상 당시의 <가계동향조사>의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저도 요기, 요기, 요기 등등에서 언급). 그리고 소득불평등에 대한 가장 신뢰할만한 자료인 가금복 조사에서 2018년에 불평등이 줄었다고 드러났다. 하지만 최병천 소장은 가계동향조사 자료에만 의지해서 불평등이 증가했다고 주장한다. 더 나은 자료에 의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는데 논란이 된 자료로 엉뚱한 주장을 반복한다. 두 자료의 결과가 상충되면 그 원인에 대한 분석과 어느 자료가 신뢰할만지에 대한 평가가 따라야하지만 자신의 구미에 맞는 자료만 선택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cherry-picking하면 곤란하다. 

 

불평등 변화의 패턴에 대한 가설 소개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Kuznets Curve는 정확히는 산업구성변화론이지만 기술변동론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쿠즈네츠 커브와 세계화론은 다른 주장이지만 구분하지 않고 있다. 직업구성 변화에 대해서도 상층직업의 확대를 중국효과로 설명하고 하층의 확대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세계화론은 하층 직업의 축소로 이어져야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직업변화를 중국 효과로 설명하는 이 책의 설명과 달리, 상하층의 직업이 확대되고, 중층이 줄어드는 U-Curve는 기술변동론의 주요 주장 내용 중 하나다. David Autor가 기술변동론의 수정 버젼으로 제시해서 여러 국가에서 검증된 바다. 밀라노비치의 코끼리 곡선도 최근에는 상당히 변화했다고 밀라노비치가 업데이트된 그래프를 제시한 바 있다. 

 

책의 후반부에서 주장하는 노인 빈곤 문제는 저 역시 동의한다. 이 블로그 만들면서 가장 처음 한 주장 중 하나가 노인문제의 중요성이다. 그런데 노인가구를 제외하고 분석해도 한국사회 불평등 변화는 소득상층이 아니라 소득하층이 더 크게 결정한다. 일반적으로 선진국에서 빈곤과 불평등은 연결되어 있지만 조금 다른 이슈다. 불평등 증가가 빈곤 증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두 이슈가 결합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왜 그런지 , 어떻게 그런지에 대한 일관된 설명은 아직은 없다. 이에 대한 설명은 세계화와 제도변동에 더하여 인구학적 변동에 주목해야 한다. 

 

인구학적 변동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 뿐만이 아니다. 한국은 자영업자의 비중이 꾸준히 줄었다. 미국 같은 국가는 임노동자만을 대상으로 분석해도 일관된 대상으로 시행한 분석이 되지만, 한국은 자영업자가 줄고 임노동자가 증가했기 때문에 임노동자만 대상으로 분석해도 변화의 일부 원인은 인구학적 변동에 있다. 또한 다른 선진국과 달리 여성의 경제참여율이 높아지는 등 경제활동인구의 비중이 증가했기 때문에 경활인구를 대상으로 분석해도 인구학적 요인이 불평등 변동의 한 요인이 된다. 신규 유입 인구가 저소득층일 가능성이 큰데, 이 경우 임노동 상층의 소득에 큰 변화가 없어도 신규 노동시장 유입 인구의 증가는 상층 소득의 비중 확대를 가져온다. 경활인구의 확대를 통한 실질적인 소득불평등 축소지만, 임노동자만을 대상으로 한 분석에서는 소득불평등 확대로 보이는 착시를 일으킨다. 여기에 더해서 한국은 세대별로 교육수준이 현저히 다르다. 산업구조 변동, 직업구조 변동이 모두 교육수준 변동과 연계되어 있다. 자료를 분석할 때 이 부분에 대한 고려가 필수적이지만, 이 책은 그런 수고를 하지는 않았다. 

 

이 책이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는 보수의 입맛에 맞게 반성하는 진보의 이미지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불평등>이라는 제목도 불평등을 딱히 개선해야할 것으로 보지 않는 저자의 시선을 반영한다. 대기업 확대를 통한 경제발전론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주장 역시 보수의 입맛에 맞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10인 이상 사업체의 임노동자를 대상으로 했을 때는 1994년 이후, 도시 2인 이상 가구를 대상으로 했을 때는 1992년 이후 한국에서 불평등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 변곡점은 크게 두 가지 가설이 대립한다. 하나는 최병천 소장이 제시한 세계화 효과, 다른 하나는 제도적 변화다. 신자유주의라고 퉁치는 변화가 아니라 1987-9년 노동자 대투쟁이후 이에 대한 대응으로 시행된 일련의 변화들(예를 들어 계약직, 파견노동자 등 비정규직의 증가 등)이 90년대 초반 이후 불평등의 변화를 야기했을 수 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한다면 고령화와 교육수준 확대라는 인구학적 변화가 있다. 다른 국가의 사례를 봤을 때 이 중 한가지가 모든 것을 설명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현실은 항상 복잡하고 여러 요인이 함께 작용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여러 요인을 일관되게 분석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종합적 평가는 여러 자료를 분석한 후 비여있는 공간을 논리와 추정으로 엮어야 한다. <좋은 불평등>은 이런 기획을 추동하는 좋은 촉진제임에는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불평등 감소가 진보의 목표였다면, 최병천 소장의 평가와 달리 적어도 2017년 이후 2020년까지는 보수정권보다 성공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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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현우: 지방총각들도 가정을 꿈꾼다

 

이 칼럼 때문에 난리가 났다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일부 사실관계가 다르고 너무 상식적인 얘기를 한다는 비판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전통적 가족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자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의 내용이 반페미니즘으로 그렇게 비판받을 일인지. 천현우 작가의 이전 글과 연결되어서 이런 비판을 받는 것인지, 조선일보에 썼기 때문에 이런 비판을 받는 것인지. 

 

서구사회에서 관찰되는 혼인과 관련된 변화에서 몇 가지 주목할 만한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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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혼인이 모든 사람이 겪는 생애사 이벤트에서 점점 중산층 이상 계급만 달성하는 계급성취물이 되어가고 있다. 혼인이 연령의 지표에서 계급의 지표로 바뀌고 있다. 

 

2. 혼인의 조건만 변한게 아니라, 혼인한 커플의 관계도 변했다. 결혼한 커플 내에서의 평등성이 강화되었다. 결혼이 전통적인 성별 가사분업이 아니라 서로 존중하고 케어하는 커플의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 결합이 되고 있다. Equality within marriage 없는 결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3. 이런 현상을 총칭하여 사회학에서는 deinstitutionalization of marraige(Cherlin)이라고 부른다. 결혼의 의미가 변화하고 있지만 중산층 이상의 혼인 안정성은 여러가지 지표에서 흔들림없이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노동계급에서의 혼인 안정성은 크게 위협받고 있다. 혼인을 안하고, 혼인을 해도 이혼율이 높다. 결혼의 중산층화라 부를만하다. 

 

4. 중산층 이상에서는 혼외 출산의 비율도 높지 않지만, 노동계급층과 중하층 이하에서는 혼외 출산 비율이 높다. 10대 미혼모의 비중이 줄면서 중산층 이상의 혼외 출산 문제는 오히려 감소했다. 노동계급에서는 결혼과 출산의 디커플링이, 중산층 이상에서는 여전히 양자가 결합되어 있다. 

 

5. 중산층 이상의 여성은 과거보다 오히려 가정, 일, 육아를 모두 추구하는 방향으로 인식이 변화하였다. Goldin의 책에서 말했듯, 과거에는 커리어 우먼은 가정을 포기했는데, 요즘은 가정과 일, 출산을 모두 추구하는 새로운 세대가 형성되고 있다.

 

6. 그런데 혼인을 하고자하는 의도나 욕구 자체는 노동계급에서도 큰 변화가 없다. 저학력 여성, 노동계급 남성도 모두 혼인을 원한다. 보다 전통적인 가정을 현성하고 유지하고 싶은 욕구가 노동계급에서 여전하다. 하지 못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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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생기는 아이러니 중 하나가 노동계급에서는 전통적 가족관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더 결혼해서 안정되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노동계급에서는 Equality within marriage 가 아니라 male breadwinner model 을 유지하는 커플이 동거에서 결혼으로 이동할 확률이 높을 수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 결혼한 커플의 평등성이 높아지는 것과 동시에,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남성가족부양모델 가족의 비율도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증가하는 데이케어 센터 비용도 있다. 돌봄노동 비용이 증가해서  전업주부로 가족을 돌보는 것에 비해 노동계급 여성이 노동시장에 있으며 돌봄노동을 외주화하는 것의 경제적 가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에서 여성의 사회진출이 가족경제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일 가능성이 있다. 혼인 확률이 계급화되는 것에 더해서, 결혼 후 혼인생활의 패턴도 계급화되는 조짐이 보인다. 

 

한국은 서구 사회에 비해서 결혼과 결혼생활, 출산의 계급화 현상이 현저히 약하다. 계급에 관계없이 결혼 연령이 미뤄지고, 미혼 비율이 높아졌고, 계급에 상관없이 저출산, 무자녀 가족이 늘어나고 있다. 인구행동의 계급화가 상대적으로 약해서 사회적 동질성이 높지만, 동시에 인구행동의 계급화가 약해서 저출산 문제에 대한 대응도 어렵다. 

 

사회학에서 Michèle Lamont의 <Dignity of Working Men>이라는 연구가 있다. 백인 하위계급 노동자들이 세계화, 여성과 소수인종의 사회진출 속에서 어떻게 자신들의 가치와 존엄성을 인식하는지 비교사회학적으로 연구하였다. 노동계급 남성이 자신의 가치와 존엄성을 발견하는 이유 중 하나가 가족의 부양이다. 천현우 칼럼과 같은 내용이다. 이 연구가 백인 노동계급 남성을 로맨티사이즈한다는 비판도 있긴 했다. 백인 노동계급 남성은 매우 인종주의적 인식에 기반해서 자신의 가치와 존엄성을 확인하고 있기도 하고. 

 

어쨌든 노동계급 남성들이 전통적 가족주의를 가까운 미래에 폐기할 가능성은 매우 낮을 것이다. 페미니즘이 한국보다 큰 격차로 발전한 미국에서도 노동계급 남성은 가족부양과 전통적 가족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는데, 한국은 오죽 하겠는가. 

 

여성의 사회진출은 돌이킬 수 없는 대세다. 전통적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개혁하려고 시도하기 보다는 맞벌이가 양성 모두에게 실질적 경제 이익이 되도록 시스템을 구축하는게 효율적일 것. 

Posted by sov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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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g et al. (2022, PNAS)

 

Yang Yang과 동료들이 6.6백만개의 의학 논문을 분석해보니, 남녀 혼성으로 이루어진 연구팀의 결과가 동성으로 이루어진 연구팀의 결과보다 더 새롭고 인용도 많이 되더라고. 

 

아래 그래프에서 X축은 팀원의 숫자, Y축은 왼쪽 그래프는 독창성 지수고 오른쪽 그래프는 (출간연도를 통제한 상태에서) 상위 5% 인용많이 되는 논문이 될 확률. 

 

보다시피 혼성팀의 연구가 더 독창적이고 인용도 많이 됨. 팀원의 숫자에 관계없이 통계적으로 유의한 차이가 있다 (6백만계 논문이니 통계적 유의도가 없을리가). 

 

잘 모르는 분야라, Novelty 측정을 어떻게 했는지 궁금했는데, 일반적으로 같이 인용되지 않는 저널이 인용된 정도로 측정한다고. 이 연구에서 독창적으로 개발한 지수가 아니라 이전서부터 그렇게 측정했단다. 

 

Fixed effects로 같은 저자인데 팀의 구성에 따라 nevelty와 impact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도 측정했는데, 혼성으로 연구팀 구성할 때 둘 다 높아졌다고. 

 

팀 리더의 성별에 따라 차이가 있는지도 봤는데, 성별에 관계없이 혼성팀의 성취가 동성팀보다 높았단다. 그런데 여성이 리더인 혼성팀은 남성이 리더인 혼성팀보다 novelty는 높지만 citation impact는 남성이 리더인 혼성팀보다 낮았다고 한다. 

 

 

Ps. 계속 나오는 연구들이 다양성이 혁신과 생산성의 원천임을 보여주고 있다. 몇 년 전부터 한국 사회도 다양성을 화두로 삼아야 한다고 기회있을 때 마다 얘기하지만...

Posted by sov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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