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영 교수 칼럼: [열린세상] ‘개천용’ 학파 vs ‘대통영’ 학파/김종영 ‘서울대 10개 만들기’(예정) 저자

 

입시 기회균등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분들을 '개천용'학파로, 지방대를 키워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원하는 분들을 ‘대통영(대학통합네트워크를 위해 영혼을 끌어모은 사람)' 학파로 명명했다. 

 

"SKY 또는 인서울 대학의 독점을 유지한 채 그 좁은 자리에 계층이 낮은 학생들이 더 선발되거나 이들의 계층 이동을 돕는 정책을 제시하는 학파가 ‘개천용’(개천에서 용 나기) 학파다. ‘개천용지수’를 개발한 주병기 교수는 엘리트 대학에 농어촌·중소도시 학생들을 위한 ‘지역균형선발’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창환 교수는 엘리트 대학 입시에서 공정한 순서는 학생부종합전형, 정시전형, 논술전형이라고 밝혔다. ... 정의의 철학자들은 ‘개천용’ 학파가 개혁을 가장한 채 사악한 교육체제를 영속시키는 데 기여한다고 비판한다."

 

개천용 학파의 일원으로 제가 호출되었는데, 이건 그냥 오독이다. 

 

이 블로그 꾸준히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의 지론이 "기회균등 기획"의 한계다. 김종영 교수가 문제삼은 그 논문도 입시제도 아무리 바꿔봤자 기회균등은 달성하기 어렵다는 것이 주요 주장이다. 어떤 입시제도가 하위계층에 눈꼽만큼 유리한지 보여주는 것이 주요 목적이 아니다. 정책적으로 기회균등보다 결과평등에 초점을 맞추라는게 모든 논문과 그 동안 썼던 글들의 일관된 주장이다.  

 

"개혁을 가장한 채 사악한 교육체제를 영속시키는 데 기여"하는 학파로 누군가를 지칭하려면 적어도 주장의 내용을 알아야 한다. 주장의 내용도 모르고 험한 말로 비판만 하면 어쩌나.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기회균등이나 SKY 독점 권력 타파가 아니라 지방균형발전 측면에서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획으로 뭔가 질적으로 다른 정의로운 일이 벌어질 것으로 상상하는 이유는 이해하기 어렵다. 

 

우선 한국 사회의 변화를 회고해보자. 한국 사회에서 SKY의 독점이 과거보다 강화되었나? 포항공대(87년 첫 신입생), 카이스트(대학원 밖에 없다가 86년 첫 학부생 선발) 등 이공계 명문대가 생기고, 성균관대나 한양대, 가끔 경희대나 중앙대가 SKY를 앞서는 결과도 나오고 있지 않나? 입시 전형이 다양화되면서 "학력고사" 점수에 맞춰서 대학을 가던 시절에 비해 각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의 선별성(selectivity)이 과거보다 적어도 집중화 완화라는 측면에서 평등화되지 않았나? 통계적으로 각 대학 진학자 수능시험의 분산이 과거보다 커졌을 것 같은데 말이다. 교수 임용에서도 서울대 출신 집중이 줄어들고, 여러 상위권 대학으로 확대되었다. 과거보다 상위권 대학의 경쟁이 치열해졌다. SKY가 아니라, 상위 10개 대학 정도로 경쟁이 확대되었다. 

 

그래서 정의로워졌나?

 

SKY에서 서울 소재 10개 대학으로 경쟁이 확대되는건 "개혁을 가장한 채 사악한 교육체제를 영속"시키는 것인데, 지방 국공립대 10개를 명문대로 만들어 경쟁을 확대하는건 왜 "개혁을 가장한 채 사악한 교육체제를 영속"시키는 것이 아닌가? 

 

서울대가 10개가 되면, 이 10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학생들은 이 체제를 정의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서울대 정원이 약 3천명인데, 10개면 3만명이다. 다음 정부 정책이 한참 실현될 2025년에 대학에 입학할 2007년생의 총출생아수가 약 50만명이다. 열 개 서울대에 진학하는 인원은 학력 상위 6%다. 상위 6%가 "서울대"를 나오면 정의로운 사회인가? 서울에 있는 기존 명문대까지 합치면, 한 10% 정도가 명문대 출신이 된다. 나머지 90%는 어쩌라는건가?

 

아마,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지방대 육성이라 차원이 다르다고 할 것이다. 의대가 인기를 끌면서 지방의대의 인기가 크게 높아졌다. 지방의대가 서울대 이공계 전공보다 경쟁률이 더 높다. 그래서 의대는 유독 정의로워졌나? 의대는 지방대의 위상이 높아져도 중상층의 이익강화로 귀결되지만, 다른 전공은 아닌가? 그렇게 예측하는 근거는 뭔가? 과거에 부산대, 경북대, 전남대가 지금보다 훨씬 더 명문대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그 때는 "사악한 교육체제"가 아니었나? 그 때 서울대의 위상이 지금보다 낮았나? 

 

굳이 예측해 본다면,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중상층의 자기 이익 챙기기 프로젝트로 변질될 것이다. 명문대 진학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최상층은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원래 풍부하고, 해외유학 등 다른 출구를 모색하는데 반해, 중상층은 수시확대의 혜택도 못받는 등 자기 자리가 위협받으니, 자신들의 기회를 확충하기 위해서 생각해낼 수 있는 기획이다. 그런 면에서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상위 1%가 아닌 상위 10%의 이익챙기기 프로젝트로 변화할 것이다. 

 

미국에서 리차드 리브스가 쓴 Opportunity Hoarding이라는 책이 있다 (요기서 소개). 상위 1%가 아니라 상위 10%가 어떻게 자기 이익 챙기기를 하는지 비판한 책이다. 한국의 상위 10%라고 다르지 않다. 상위 10%는 상위 1%와 자신을 차별화하며 희생자 코스프레를 하고,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를 도모한다. 다만 미국과 한국의 처한 상황이 다르니 대응이 다를 뿐이다. 이게 김종영 교수가 언급한 논문에서 제가 말한 "적응의 법칙"이다. 대학입시 제도 변화에 따른 상위계층 적응의 법칙이 서울대 10개 만들기에서 갑자기 멈출 이유가 뭔가? 

 

지역 균형 발전의 측면에서, 수도권 집중 완화 정책의 일환으로 지방대 육성은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걸 기회균등 정책을 넘어선 뭔가 대단히 정의로운 일로 착각하지는 마시라. 지방대 10개 육성도 기회균등 기획의 일부이다. 서울대에서 SKY로, SKY에서 서울 소재 10개 명문대로, 서울소재 명문대에서 지방포함 명문대로, 명문대의 범위만 바꾸는 마이크로 칼리브레이션이다. 이런 걸로 세상 좋아지는 정도가, 적어도 평등을 촉진하는 측면에서, 미미하다는 것이 저의 주장이다. 

 

저의 지론을 다시 한 번 반복하자면, 기회균등 기획은 (법적 명시적 차별을 시정하는 것 외에) 지금까지 성공한 케이스가 없다. 지방대 육성은 지방발전 차원에서 고려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뭔가 다른 기회균등이나 결과 평등을 가져오지 못한다. 기회균등 프로젝트보다는 결과의 불평등을 축소시키는 기획이 훨씬 더 쉽고, 타 국가의 사례를 봤을 때 성공적이었다.  

 

 

 

Ps. 그렇다고 기회균등 기획 모두 폐기하라는 얘기 아니다. 정책의 중심은 결과평등에 맞추어야 한다는거지. 

 

Pps. 제가 관련이 있다면, '개천용'학파가 아니라, 충남 계룡에 기반한 '계룡"학파 아닐까 싶다. 모 교수님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계룡대가 짱이라 서울대가 필요치...

Posted by 바이커 sov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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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이누린 2021.11.25 20: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계룡대 개그 웃겼습니다. ㅎㅎ

  2. 종종 2021.11.25 23: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개에서 10개로 늘어난다고 해서 10개의 독점구조 내지는 10개의 과점구조가 되지 않겠나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대로 써주셨네요.

    이와 별개로 교수님의 주장을 꽤나 봐왔고 동의하는 지점이 많습니다만 그럼에도 뭔가 공허하고 잘 모르겠어서 묻는건데,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결과의 평등은 어떤 것인가요? 부의 재분배 정책..?? 문자 그대로의 재분배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가할 것이고.. 결국 교육을 대표로하는 각종 지원 정책의 확대일까요

    • 바이커 2021.11.26 10:44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소득중심론자입니다. 세후 지니 .30 이하, 빈곤율 5% 정도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은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 종종 2021.11.26 23:09  댓글주소  수정/삭제

      자본소득보다는 근로소득에 집중해야한다는 교수님의 주장에 일관되는 구체적 제시군요. 감사합니다.

  3. Hunnae 2021.12.01 12: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pps가 핵심이군요

요즘 세대 간 불평등 문제에 대한 이해가 좋아지면서, 슬슬 청년 세대 내 계급 문제로 이슈가 전환되는 것 같다. 얼룩소에 올라온 계급의 재발견도 그런 변화 조짐의 하나일 것. 

 

각 세대 내에서 불평등이 있다는 건 뉴스가 아니다. 세상에 안 그런적이 어디있었나. 항상 같은 세대 내에 상당히 큰 불평등이 존재하지. 진짜 질문은 청년 세대 내 불평등이 시계열적으로 더 커졌는지, 다른 연령대와 비교해서 다르게 변화했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아래 표는 앞으로 발간될 것으로 기대하는 책에 실릴 챕터의 일부이다 (2019년에 썼는데 아직도...). 영어책이라 별로 보는 분들이 없을텐데, 청년 세대 내 불평등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요즘, 한 번쯤 소개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가구단위 자료인 가계동향조사 자료를 개인단위 자료로 전환해서 노동시장에 있는 인구의 세대 내 불평등 변화를 추적한 것이다. 

 

<표 1> 연령대별 세대 내 개인소득 불평등 변화 (타일 인덱스)

  2006-2010 2011-2015 2016-2019 변화
18-29 .159 .158 .175 +.016
30대 .191 .149 .145 -.046
40대 .248 .223 .198 -.050
50대 .312 .279 .258 -.054
60대  .370 .330 .305 -.065

다른 모든 연령대는 세대 내 불평등이 줄어드는데 18-29세에서만 늘어나고 있다. 그럼 계급의 재발견이 확인된 것?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아래 표는 학력별로 나누어서 청년층 내부의 불평등 변화를 살펴본 것이다. 각 학력 내에서는 청년 층 내부의 불평등이 줄었다. <표1>에서 나타난 18-29세 청년층의 내부 불평등 증가는 고졸이하와 대졸이상의 격차 증대 때문이다. 대학 나와도 소용없다고 주장하신 분들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고졸대비 대학 졸업의 상대적 경제 가치는 청년층에서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커졌으면 커졌지. 

 

<표 2> 청년층 (18-29세) 내부 학력별 개인소득 불평등 변화, 고졸 이하 학력자 vs. 대졸 이상 학력자 (타일 인덱스)

  2006-2010 2011-2015 2016-2019 변화
고졸 이하 .163 .146 .150 -.013
대졸 이상 .141 .112 .102 -.039

 

그런데 문제가 더 복잡한게 이게 또 스토리의 전부가 아니다. 개인소득이 아니라 가구 균등화 소득으로 보면 20대 청년층 내부에서 불평등이 더 커지는 경향이 없다. 가구 균등화 소득이 삶의 질을 나타낸다고 봤을 때, 생활의 퀄러티 면에서 20대 청년층에서 다른 세대보다 딱히 더 균열이 심해지는 조짐이 없다. 2006-10년 대비 2016-19년의 변화가 0.0이다. 둘이 똑같다. 20대 청년층 내부의 개인소득 불평등은 커졌지만, 부모 세대의 내부 불평등이 줄어들면서 청년층 그 혜택을 봐서, 균등화소득 측면에서 불평등이 증가하지 않았다. 

 

문제는 노동시장에서 벌어들이는 개인 소득 불평등의 증가, 특히 학력에 따른 격차 증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다. 한 가지 실마리는 18-29세가 아니라 25-29세로 청년층의 범위를 좁혀서 보면 개인 소득의 측면에서도 청년층 내부의 계층 격차가 벌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아래 표는 변수용 선생과 같이 작업한 <교육 프리미엄>책에 실린 <표 5.3>의 일부이다. 시기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보다시피 25-29세 전체의 내부 불평등은 지난 10년간 줄어들었다. 

 

<표 3> 개인소득 타일 불평등 지수 변화, 25-29세

  2009-10 2014-15 2018-19 변화
25-29 .113 .120 .100 -.014

 

그러니까, 청년층의 개인소득 불평등 증가는 (1) 20대 초반과 20대 후반의 격차 증대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노동시장 활동을 시작하는 20대 후반만 보면 내부 불평등은 오히려 줄었다. (2) 20대 초반과 후반의 격차 증대는 고졸이하 학력과 대학이상 학력의 격차 증가와 일치한다. (3) 개인소득이 아닌 삶의 질을 나타내는 가구 균등화 소득으로 보면 청년층 내부에서 계층 격차가 확대되는 경향은 보이지 않는다. 

 

이상을 종합하면 학업을 이수하지 않은 20대 초반 청년층의 개인 소득이 줄어든게 변화의 핵심이다. 그 이유가 대부분의 청년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20대 초반에 노동시간 공급이 줄어들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20대 초반 숙련형성 이전 저학력 노동자의 소득이 낮아졌기 때문인지는 명확하지는 않다. 20대 후반에서 청년 내부 불평등이 줄어든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전자의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하지만, 구체적인 확인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 계급의 재발견, 청년 내부의 불평등도 좀 세밀히 들여다봐야 한다. 현실은 늘상 그렇듯 한 두 가지 구호로 정리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특히 청년 문제는 가족 구성 문제, 학력변화 문제까지 얽혀있어 더욱 복잡하다.  

 

 

Ps. 시대별 변화와 세대 내 시대별 변화가 불일치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에 둘이 일치한다. 불일치 현상이 나타나면 자세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복잡한 연구 주제다. 

Posted by 바이커 sov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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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린아 2021.11.24 22: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냥 막연하게 이야기 해 본다면, 어쨌든 최저임금 자체는 꾸준히 늘었으니 저학력 노동자들의 시간당 소득이 감소했을 가망성 보다는 저학력 노동자들이 노동에 투자하는 시간이 감소했다고 보는게 현실에 부합하는 데이터 일것 같기는 합니다만...

    • 바이커 2021.11.25 1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학력 노동자라고 해야할지도 잘 모릅니다. 대학생들의 알바 시간이 줄었다면 이건 일반적으로 말하는 저학력 노동자의 노동공급 축소는 아니거든요.

      delayed gratification이 강화되었거나, 20대 초반 소속 가구의 소득 상승으로 노동시장 참여의 유인이 줄어든 긍정적 결과거든요.

  2. 종종 2021.11.24 23: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대초반 내부의 격차가 확대됐을 가능성은 배제된 것 같습니다...?

  3. 핑계죠 2021.12.05 17: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애초에 대학 정원이 입시생보다 많은 현실에, 대졸 고졸 차이로 임금이 차이난다는건 핑계죠 그냥 고졸들이 일을 안하는겁니다.

  4. 핑계죠 2021.12.05 17: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게다가 블라인드, 여성할당, 지역할당 등으로 순수 학력의 가치는 점점 떨어지고있고, 아예 학력을 보지 않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Pew: What Makes Life Meaningful? Views From 17 Advanced Economies

 

다들 한마디씩 한 조사 결과. 처음에 이 결과를 보고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우선 질문하는 내용이 모호하다. "삶을 의미있거나 (meaningful), 충만하거나(fulfilling), 만족스럽게(satisfying) 만드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물었다.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걸(life meaning) 독립변수로 설정하고 종속변수인 삶의 만족도(life satisfaction)에 끼치는 영향을 파악한 연구는 봤어도, 이 모든걸 같은 질문항목으로 한꺼번에 물어보는 조사는 처음봤다. 이런 조사에서 나온 답변의 의미가 무엇인지,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모르겠더라.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요인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물어도 되는건가? 개방형 질문을 한건데, 심층적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 이렇게 한건지, 물어보는 내용이 모호하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버린건지. 아니면 뭔가 다른 기법이 있는건지. 

 

그것도 아니면, 마케팅 조사에서 사용하는 unaided awareness recall의 의미로 받아들여서 각 국가의 사람들이 얼마나 삶의 의미와 만족도에서 대해서 생각하며 사는지 awareness를 파악하는걸로 봐야하는지. 

 

여러 의견을 봤지만, 그 중 마지막 의미인 awareness로 해석한 것이 "오하이오의 낚시꾼"님의 페북 포스팅이다. 

 

여전히 남는 문제는 한국은 어쨌든간에 물질적 항목에 대한 응답이 다른 국가보다 비율적으로 높다는 점이다. 응답의 갯수가 많지 않을 때, 다른 무엇보다 물질적 요인을 첫번째로 꼽는다는건 뭔가 한국의 다른 특성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려웠다. 다른 국가와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그래도 뭔가 한국적 특색을 드러내는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더라. 

 

이걸 설명하기 어려우니까, 많이들 하는 얘기가 이런 서베이는 국가 간에 비교해서는 안된다는 무용론이다. 문제가 있다는건 알겠는데, 그래도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래서 항목들을 다시 묶어봤다. 퓨 리서치의 전체 보고서를 보면 물질적 항목의 풀네임은 "material well-being, stability, and quality of life"다. 제가 주목한 것은 이 항목이 한국에서 retirement나 occupation and career와 구분되지 않고 얘기되었을 가능성이다. 퓨 리서치의 전체 보고서를 보면 비록 (not just having money)와 다르다고 표시되어 있지만, earning money가 occupation & career로 material well-being, stability, and quality of life와 다르게 분류되어 있다. 과연 한국인들이 이 둘을 구분했을까? 

 

마찬가지로 가족, 배우자, 친구, 애완동물도 모두 관계의 문제라고 보고 하나로 묶었다. 건강과 Covid도 하나로 묶고, 여행은 취미에 포함해서 하나의 카테고리로 만들었다. 

 

그런데 퓨 리서치 결과를 보면 특이한 두 개 항목이 있는데, 하나는 general positive고 다른 하나는 general negative다. 후자는 웹 보고서에는 Challenges로 분류되어 있어서 마치 인생의 여러 도전을 즐긴다는 느낌을 주지만, 전체 보고서를 보면 그냥 모호하게 "아무것도 의미없다" "만족감을 못느낀다"와 같이 인생이 뭐같다고 얘기하는거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모호한 응답을 묶었다. 

 

여기서 묶는다는건 단순 합을 낸다는 것이다. 원자료가 없기 때문에 코딩을 다시 할 수는 없고, 가족, 친구를 모두 응답했으면 양자의 %를 단순히 더하였다. 그 다음에 전체 응답 %의 단순합으로 각 항목별 응답 %를 나누어서 상대적 분포를 봤다. 그랬더니 결과가 아래와 같다. 짙은 분홍색이 1위 응답이고, 옅은 분홍색이 2위 응답이다. 옅은 녹색은 다른 국가와 달리 특이하게 응답 비중이 높은 항목이다. 

 

국가 평균
응답수
material
+career
+retire
family
+friends
+pets
health
+covid
society
+civic
religion hobby
+travel
general
negative/
positive
others
미국 3.1 16% 34% 7% 9% 6% 6% 8% 14%
캐나다 2.2 25% 34% 8% 10% 1% 6% 6% 9%
벨기에 2.3 24% 29% 13% 7% 0% 6% 10% 10%
프랑스 1.8 25% 28% 14% 5% 1% 8% 11% 8%
독일 2.0 23% 28% 15% 4% 1% 4% 14% 10%
그리스 1.9 21% 40% 12% 4% 1% 9% 6% 7%
이태리 2.5 31% 29% 11% 9% 1% 4% 10% 5%
네델란드 2.5 25% 31% 17% 9% 1% 5% 6% 6%
스페인 2.5 33% 21% 20% 9% 1% 4% 7% 5%
스웨덴 2.6 25% 31% 12% 7% 0% 8% 6% 10%
영국 2.1 17% 40% 9% 4% 1% 13% 5% 12%
호주 2.6 22% 37% 6% 10% 2% 9% 4% 10%
일본 1.4 24% 28% 12% 5% 0% 8% 15% 8%
뉴질랜드 2.4 22% 38% 6% 10% 2% 9% 4% 10%
싱가폴 1.8 29% 24% 7% 17% 1% 3% 12% 7%
한국 1.2 23% 18% 16% 8% 1% 3% 23% 9%
대만 1.7 20% 15% 8% 28% 1% 7% 8% 13%

 

보다시피 대부분의 국가에서 가족+배우자+친구+애완동물 등 친밀한 관계가 1위이고, 그 다음이 물질적 웰빙, 직업/경력, 은퇴 등 경제적 만족도다. 한국은 친밀한 관계보다 물질적 항목이 더 중요한 4개 국가 중에 하나지만, 한국만 너무나 특이하게 물질적 만족도에 집중되었다고 얘기하기 어렵다. 

 

한국의 가장 특이한 점은 삶의 의미, 충족도, 만족의 요소를 물어봤는데도, 구체적 내용없이 "사는게 힘들다", "사는게 좋다" 등으로 응답하는 모호한 응답이 매우 높다는 사실이다. 답변을 거부한 응답자를 제외하고 응답자 중에서 평균 응답 항목이 1.2개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항목을 답변하지 못했다. 

 

응답갯수로 이 조사의 결과는 한국인은 삶의 의미나 만족을 주는 항목에 대한 사고 자체가 없다고 추정한 오하이오의 낚시꾼님의 분석을 실제 응답 비율로 뒷받침하는 결과라 할 수 있다. 

 

이 응답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한국의 특징은 "가족, 친구, 배우자"와 "사회, 공동체, 시민적 참여'를 합친 뭔가 공동체적인 항목의 응답이 눈에 띄게 낮다는 점이다. 두 항목의 합이 조사 대상 국가의 평균이 39%고, 한국을 제외한 최하 30%(스페인), 최고 47%(뉴질랜드)인데, 한국만 26%로 20%대다. 

 

한국인은 다른 국가의 시민들보다 삶의 의미를 주는 요인을 찾지를 못하고 있고, 설사 찾는다 할지라도 공동체적 요인의 중요성이 다른 국가보다 낮은게 이 번 조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국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Ps. 굳이 찾는다면 그렇다는 얘기다. 여전히 이런 복합적 질문이 서베이 항목으로 적절한지, 국가 간 비교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잘 모르겠다. 

 

Pps. Pew Research에 이메일이라도 보내야 하는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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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엔지니어 2021.11.22 20: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신문 기사를 보고 납득이 잘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고, 다소 부정적이고 자조섞인 분위기여서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이에 대해서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해주신 글을 보고 매일 눈팅만 하다가 처음으로 글을 남깁니다.

    가족+배우자+친구+애완동물을 합한 수치도 우리 나라가 낮기는 하지만 이를 각자 구분해서 조사해보면 애완동물 외에 다른 수치들은 계속 감소하는 추세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보게됩니다. 어제 '애완 돌'에 대한 기사를 보고 나름 충격이었는데 허무맹랑한 얘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 바이커 2021.11.22 21:33  댓글주소  수정/삭제

      타국가 대비 어려울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족이나 친구가 없다는 조사는 계속 있었습니다. 이게 감소 추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퓨리서치 조사에서는 한국에서 노년층과 10대 이하에서만 유난히 가족의 중요성이 낮습니다.

  2. 유월비상 2021.11.23 0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https://www.facebook.com/cjunekim/posts/5038300069531853
    https://www.facebook.com/sihoon.nahm.98/posts/647252579606966 (하상응님 댓글)

    한국은 '전화로' 응답했다는데(응답 방식은 국가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전화인데다 전화로 자기 표현을 꺼려하는 한국인의 문화적 성향이 반영됐다는 해석이 있더군요. 이쪽 해석도 공감이 많이 됩니다. 한국과 같은 문화권인 일본 싱가폴 대만도 응답갯수가 한국보다 조금 많은 수준이거든요.

    다만 WVS나 여타 조사에도 드러나듯 한국이 생활수준에 비해 물질주의가 유독 강한 나라라, 결론 자체는 놀랍지 않습니다.

    • 바이커 2021.11.23 08: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대부분 전화조사입니다.

      전화에서 자기 표현을 꺼린다는게, 가능성이 없는건 아니지만, 설명이 깔끔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무응답률이 특별히 높지 않으니까요.

  3. 그냥 2021.11.23 08: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극도로 높은 인구밀도 체면을 중시하는 사회분위기 그로 인한 치열한 경쟁 뭐 물질을 중시하는 건 당연하게 드러나는 표면적 특성인듯

최성호 교수, 교수신문 칼럼

"진정 과도한 비난 받아야 할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철학연구회입니다. 학문적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함량 미달의 저질 텍스트에 학문의 권위를 부여하고, 그를 통해 ‘보이루’라는 표현의 의미에 대한 윤지선의 근거 없는 주장이, ‘한남충’이나 ‘한남유충’과 같은 혐오표현이 학문적 활동이라는 미명 하에서 유포되고 전파되는 결과를 초래한 책임이 바로 철학연구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 윤지선 박사의 논문이 『철학 연구』의 심사를 통과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가 이끌어내야 할 교훈은 『철학 연구』의 심사 절차 자체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연구회"의 심사 절차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데, 어떤 결함이 있다는건지? 한국 학술지의 심사 절차는 거의 똑같지 않은가? 철학연구회는 뭔가 다른 절차를 채택하고 있나? 그렇다면 그 절차가 무엇인지 명시적으로 짚어줘야 하지 않나? 

 

이런 논문이 나오면 (하도 유명해서 저도 훑어는 봤다) 그 책임은 "철학연구회"가 아니고, 논문 심사 당시의 『철학 연구』 편집장이 져야하지만 대부분의 학회 규정에 따르면 편집장도 아무 책임이 없다. 한국에서 학술지 편집장은 행정직원에 가깝지 논문의 가치를 판단하지 않는다. 리뷰어들이 잘못한거지만, 그렇다고 리뷰어 탓을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엉터리 논문이 나와도 책임질 주체가 분명하지 않다. 최대한 문제삼으면 좋은 리뷰어를 구하지 못한 편집자 탓이겠지만, 권한은 없고 책임만 지라는 꼴이 된다. 리뷰어 구하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이 문제의 재발 방지책과 책임을 생각한다면, 한국 학계 논문 심사 방식의 기계적 결정 과정을 문제 삼아야 한다. 아래는 <한국사회학>지의 판정 기준이다. 학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논문이 아무리 수준 이하라도 두 명의 리뷰어가 "수정게재" 의견을 내면 논문은 대부분의 경우에 나온다. 두 명의 리뷰어가 "수정게재" 이상의 의견을 냈고 그에 맞춰 수정했는데도, 논문이 근본적으로 수준 이하라서 싣지 않으려면, 편집자가 학회 판정 기준을 무시하고 월권을 행사하는 무리수를 둬야 한다. 그런 분이 없는건 아니다. 직접 보기도 했다. 하지만 매우 드물다.  

 

철학연구회의 절차에 문제가 있다면, 논문이 함량 미달일 때 학회 판정 기준을 무시하고 월권을 행사하는 무리수를 둘 편집장을 선출하지 못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제출만 하면 다 실어줘서 실제로는 심사라는게 없다는건가? 도의적 책임이라는 실체가 모호한 책임으로는 철학연구회를 비난할 수 있겠지만, 연구회라는 조직이 구체적으로 뭘 잘못했는지는 최성호 교수의 글을 읽어봐도 잘 모르겠다. 

 

 

예전부터 한 번 얘기하고 싶었는데, 한국학술지의 판정표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방식은 편집장의 자의성을 배제하지만, 동시에 학술지 편집장을 맡은 경험많은 학자의 판단을 무력화시킨다. 잘못된 논문이 게재되었을 때의 책임소재도 없애버린다. 저는 윤지선 논문 사건을 이러한 제도적 문제의 산물로 이해한다. 이런 문제를 막는 한 가지 방법은 학술지 편집장에서 권한을 주고 잘못되었을 때 책임을 묻는 것이다. 

 

미국학회지들은 편집장이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리뷰어들의 판단이 중요하지만, 최종 판단은 편집장의 몫이다. 리뷰어들이 조금 비판적이어도 편집장이 논문을 수용할 수도 있고, 2명이 긍정적으로 평가해도, 비판적인 1명의 논리가 타당하면 편집장이 리젝 결정을 내린다. 극단적인 예로, 예전에 Sociology of Education 제출 논문을 리뷰했는데, 저를 포함한 3명의 리뷰어가 모두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논문의 방법론이나 논지가 아니라 연구 주제 자체가 올드하고 발전 가능성과 추가적 기여도가 없다고 편집장 본인이 나서서 장장 5쪽에 걸쳐 해당 주제의 논쟁사를 빽빽히 개괄하면서 평가결정문을 써서 리젝하는걸 본 적이 있다. 진짜 놀랐다. 이 분야는 자신이 최고 전문가라는 그 자신감에 혀를 내둘렀다.

 

물론 이런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편집장의 자의적 판단이 과도한 경우도 상당히 많다 (개인적으로 억울한 감정이 드는 경우도 몇 번 당해봤다). Social Science Research라고 사회학에서 꽤 괜찮은 학술지가 있는데, 여기서 Mark Regnerus라는 학자의 2012년 논문이 크게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동성 커플의 자녀교육을 문제삼는 내용으로 언론에도 대서특필되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자료도 이상하고 논문 심사 과정도 황당했던 것. 미사회학회에서 유명했던 사건이다. 이 문제로 난리가 나서 SSR의 논문 리뷰 과정이 audit을 받았고, 1978년 부터 2014년까지 무려 36년간 이 저널 편집장을 맡은 저명학자이자 고인물 중의 고인물 James Wright 교수는 연구윤리를 위반했다고 사임 요구까지 받았다. 2019년에 돌아가셨으니, 커리어에서 이 논문 사건이 최대 오점이리라.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의 권한은 "명성"에 근거해 주어질 수 밖에 없다. 학문은 동료평가 외의 다른 외부평가가 불가능한데, 동료 간에는 명시적인 위계가 없다. 편집장으로 엉터리 판단을 자꾸 내리면 자신의 명성을 스스로 갉아먹는다.  

 

엉터리 논문의 출간을 절대적으로 막을 수 있는 시스템은 없다. 리뷰어의 1차 판단과, 이를 종합한 편집장의 최종 판단, 두 단계 시스템을 도입하는게 그나마 낫다고 생각한다. 편집장의 자의적 판단이 걱정이라면 문제의 소지가 있는 논문은 편집장과 편집위원 2인 이상이 추가로 판단하게 하는 방식도 있다. 어떤 형식이든 엉터리 논문 게재의 책임은 편집장이 지게끔 시스템을 만드는게 낫지 않을지. 

 

조직에서 절차의 합리성을 최대한으로 추구하면 그 조직이 추구하는 실체적 합리성에 문제가 생긴다. 어떤 절차도 완벽할 수 없다. 자의적 판단 영역을 배제하는 극단적 객관화는 정형화하기 힘든 새로운 문제 해결의 효율성을 감소시킨다. 베버가 혁신을 막는 아이런케이지라고 비판한 관료제는 가장 효율적 조직 형태라는걸 잊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얘기하지만, 어쩌면 한국의 시스템은 학문적 명성이라는 묵시적 위계의 부재에서 생겨난 문제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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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닭칼 2021.11.16 06: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소칼사건이랑 최근에 grievance studies 사건이 생각나네요

  2. ㄷㄷ 2021.11.16 09: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증거 하나도 없이 그냥 엉터리다 빼애액!!하시는걸 보니..혹시 남성이신가용^^

  3. 비림비공 2021.11.16 10: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번엔 남녀 소득격차는 허상이라고 이대남이 몰려오더니
    이번엔 "한---"이 뭐가 문제냐는 이대녀가 몰려올 모양이네요.

    섭섭하게도 주장엔 아무 관심들이 없고...

    • qwer 2021.11.17 0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누가 봐도 남자가 달았을 법한 어그로 댓글 하나 달린 걸 두고 "이대녀가 몰려온다" 운운하는 단견은 그렇다 치고, 결국 이 사건의 핵심인 윤지선 교수 논문과 관련해서 이 글은 "엉터리 논문"이라는 뉘앙스만 흘리고 있을 뿐 딱히 아무런 주장도 하고 있지 않은데, 대체 무슨 주장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건지 궁금하네요. 밑에 단 본인 댓글에서는 분명 "내용에 대한 비판이야 동일 분과 학자의 몫"이라고 책임을 회피하면서도, 막상 본문에서는 동일 분과 학자도 아닌 본인이 윤지선의 논문은 '엉터리 논문'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뉘앙스가 팍팍 느껴지는데 이건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는 발화 방식입니까? 저는 오히려 이런 특이한 발화법에 몹시 관심이 생기는군요. 학계에 몸 담고 있지도 않은 입장으로서 학계에 대한 논의가 길게 나오는 본문의 '주장'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생기지 않고요.

    • 두꺼비 2021.11.17 07:31  댓글주소  수정/삭제

      qwer//

      처음엔 주장이 없는 글이라더니 나중에는 난 학계인이 아니라 그런 주장엔 관심없어.... 이 짧은 글을 대체 몇 명이서 쓴겁니까?

    • 비림비공 2021.11.17 08:19  댓글주소  수정/삭제

      qwer//

      위에 달린 댓글은 너무 흔한 트롤이라 별 관심도 없었구요. 윤지선 교수의 인용RT가 올라온 걸 보고 '이건 또 싸움나겠구나' 해서 쓴 건데, 결과적으로 단견이 되었습니다. 제가 잘못 판단했네요.

    • 바이커 2021.11.17 08:54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 제목도 "논문 게재의 책임 문제"입니다. 잘못된 논문이 나오면 그 책임을 누가 지느냐죠.

      철회되어야할 엉터리 논문, 잘못된 논문이란, 의외로 내용이 옳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학술적 논쟁의 첨단은 나중에 보면 결국 틀린 얘기라도 당시 시점의 주어진 분석 내에서 내용이 그럴듯하면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논쟁을 하는거죠.

      엉터리 논문, 잘못된 논문의 가장 큰 기준은 윤리입니다. 논문 조작 뿐만 아니라, 연구의 대상이 있을 때는 대상에 대한 영향력도 윤리의 한 부분입니다. 윤 박사의 논문은 혐오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고, 분석대상이 된 개인에 대해 잘못된 기술로 명백하게 명예를 훼손하고 고통을 초래하였습니다. 이러한 행태가 학문윤리적으로 용납될 수 없습니다.

  4. student 2021.11.16 18: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학회장도 시니어들 돌아가면서 하는 거 아니냐는 인식이 있는 마당에 묵시적 위계를 따지는 건 사치가 아닐까 합니다…

    • 바이커 2021.11.16 22:10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널 에디터는 명예지만, 영혼을 갈아넣는 서비스인데, 그래도 하는 이유가 메이져 저널 에디터는 학계 명성의 징표와 같은 거라서인데 말입니다. 학계 선출과 더불어 묵시적 위계를 명시화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요즘 사회학 메이져 저널은 하루에 평균 1.5~2편의 신규 논문이 접수되는 것 같더군요.

  5. JuniorSociologist 2021.11.16 21: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견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비판이 윤지선 박사 개인의 일탈이나 실력 부족(혹은 학문 외 목적) 포커스가 맞추어 지지 않고, 그 배경이 된 부분을 향한 것 같아 더욱 의미가 있다 보았는데요...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절차에서의 자의적 판단 부재 또한 이 문제를 야기했다는 말씀이 크게 와닿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바이커 2021.11.16 2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내용에 대한 비판이야 동일 분과 학자의 몫이니까요. 또 다른 관점은 연구윤리 문제인데, 학계에서 여기에 대해서 좀더 진지하게 대처했으면하는 바램입니다.

  6. 지나가다 2021.11.17 13: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에디터 재량으로 리젝을 준 사례는 애초에 에디터가 desk reject을 줬어야 하는게 아닌가도 싶습니다. 주변에서 (방법론에 명백한 하자가 있는 등의) 애초에 데스크 리젝을 받았어야 할 논문에 리뷰를 의로받고 불평하는 경우들을 종종 보게되는데, 앞서 댓글에서 언급하신것 처럼 잘 알려진 저널에 접수되는 논문수를 생각해보면 에디터가 리뷰어 선정 전 단계에서 모든 논문을 비교적 꼼꼼하게 검토한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쉽진 않아보긴 하네요.

    • 바이커 2021.11.17 19:02  댓글주소  수정/삭제

      처음 3-4페이지 읽고서 리젝인거 확실한데도 리뷰 쓰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끝까지 읽는거 짜증나긴하죠.

      에디터들이 리뷰가 일부라도 긍정적이지 않으면 다 읽어볼거 같지 않습니다. 말씀하신대로 데스크 리젝 제대로 주는 것도 보통일이 아닐 것 같습니다.

  7. 딱히 2021.11.18 04: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사자가 직접 트위터에 글을 올렸네요.
    https://twitter.com/sublimusun2/status/1460635396635709445

Goldin. 2021. <Career & Family>. Princeton Univ Press. 

 

한국어로는 <커리어 그리고 가정>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여러 언론에도 소개되었고 (예를 들어 한겨레). 미국의 발매 일자가 10월12일이었는데, 한국에서 번역판이 10월12일 같은 날짜에 나왔다. 사회학과 경제학을 모두 공부하고, 언론사에 있었던 김승진 선생이 번역했으니 번역도 훌륭할 것으로 기대한다.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 책에 대해서 독후감을 남긴다. 

 

하나는 형식이다. 누구의 도움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경제"학자"가 쓴 책이 아니다. 내용은 당연히 골딘의 것이지만, 형식은 대중서를 작성하는 전문가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것에 틀림없다. 에필로그를 포함한 본문 237페이지에 인용이 하나도 없다. 논문 형식으로 괄호 안에 참고문헌이 없는 정도가 아니다. 아예 각주도 없다. 대신 "Notes"라는 책 말미에 붙은 appendix에 각 페이지와 그 페이지의 문장을 볼드체로 소개하고, 각주를 달듯이 참고문헌과 추가 설명을 기재하였다. 

 

글의 소스를 확인하려면, (1) Notes에서 쪽번호를 찾고, (2) 확인하려는 본문 내용의 문장을 찾은 뒤, (3) Notes의 내용을 읽어서, 예를 들어, (Goldin, 2014)를 확인한 후, (4) References에 가야 한다. 그래야 최종적으로 원소스 논문을 찾을 수 있다. 본문에서 제시된 테이블이나 그림의 소스를 확인하려면, Figures and Tables Appendix를 찾아본 후, Source Appendix를 또 찾아봐야 한다. 

 

본문의 소스를 확인하는 학문적 글읽기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학술 논문 쓰기에 익숙한 학자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형식이다. 하지만 학문적 글읽기가 아니라 책 전체의 논지를 쫓아가는게 주목적인 글읽기를 하는 분들에게는 문장이 끊기거나 각주를 왔다갔다할 필요없이 매끄럽게 글을 읽을 수 있는 매력적인 형식이다. 

 

책은 이보다 더 쉬울 수 없을 만큼 쉽게 썼다. 예를 들어 직업분리(occupational segregation) 개념을 자세히 설명한다. 저에게 이 개념을 설명하라고 하면 두 줄 정도 쓸 것 같다. 최대한 길게 쓰면 두 문단 정도 쓰고. 그 이상 설명하라고 하면, segregation index 공식을 쓸 것 같다. 하지만 골딘은 이 개념을 두 쪽에 걸쳐서 설명하고 또 설명한다. 

 

책 전체에 걸쳐서 비슷한 얘기를 여러 번 반복한다. 머리 속에 안들어올래야 안들어올 수가 없다. 처음에는 책을 읽다가 237쪽이 아니라 100쪽 내외의 팜플렛을 만들 내용을 뻥튀기했다는 생각이 들더라. 자고로 대중서는 이렇게 써야한다는것, 그리고 이게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걸 동시에 배웠다. 자기 전문 분야에 빠져있으면 어떤 개념은 자세히 설명해야하고, 어떤 개념은 그럴 필요가 없는지 감이 없어진다. 전문용어인 아카데믹 쟈곤이 제일 편한 언어가 된다. 이 책은 그렇지 않다. 전문 대중 아케데믹 서적 편집자가 상세히 읽고 코치를 해준 듯 하다.  

 

이 책을 소개하는 다른 하나의 이유는 당연히 내용이다. 골딘의 논문을 평소에 읽던 분들이 이 책에서 뭔가 새로 배울 내용은 거의 없다. 골딘의 1990년대 후반 작업과 2010년대 작업을 같이 엮은 책이다. 했던 얘기를 저널리스틱하게 또했다.

 

그런데 골딘이 30년에 걸쳐서, 그 중 10년 정도는 작업을 중단해서 불연속성을 가지는 여성의 커리어에 대한 별도의 논문들을 하나의 거대 서사로 엮었다. 한국으로 치면 은퇴하면서 논문집을 내는데, 이걸 논문들의 단순 묶음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수미일관된 이야기가 있는 드라마틱한 서사로 재탄생시킨거다. 공식과 숫자로 들어찬 경제학 논문을 서사로 가득한 스토리 텔링으로 재탄생시켰다. 

 

어제 올렸던 사회과학과 사회과학 저널리즘의 구분을 적용하자면, 이 책은 경제학 전문가가 대중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 경제학자가 아닌 경제학 저널리스트로써 쓴 책이다. 매우 잘쓴 책이다. 일생에 걸친 골딘의 경제학 업적에 강력한 스토리 텔링을 얹은 사화과학 저널리즘의 끝판왕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책이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원천은 골딘이 한 가지 커다란 주제에 대해서 꼬리에 꼬리를 잇는 질문을 일생에 걸쳐서 논리적으로 연구했기 때문이다. 일생에 걸친 연구도 이렇게 서사가 있게 하고 싶다는, 평범한 연구자가 쉽게 성취하기 어려운 욕망이 생기더라.  

 

내용에 대해서는 물론 동의하는 부분과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이 섞여 있다. 예를 들어,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을 "조용한 혁명(Quiet Revolution)"이라고 부르는데, 이 용어는 한 편으로는 1960년대 중반 이후 다수 여성노동자의 지속적 사회진출을 일컫는 말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60년대에 요란했던 사회운동과 여성의 사회진출을 분리시키려는 이데올로기적 시도이기도 하다. 마치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과 성별 소득 격차 축소가 여성운동과는 무관한 일인양 보이게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 책 이전에 논문을 읽었을 때도 느꼈지만, 골딘이 제시하는 성별 소득 격차를 줄이기 위한 "last chapter"가 대기업이라는 관료제적 통제를 필요로 한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변호사와 약사를 대비시키면서 정부의 개입보다는 기술과 시장에 의한 해결책을 선호하지만, 이를 위한 전제 조건이 "정부"의 시스템인 관료제적 통제다.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보이는 손이 있어야 해결된다는, 시장에 의한 해결과는 거리가 멀어도 많이 먼 해결책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싶은 것은, 골딘이 책에서 두어번 언급한 사실이다. 바로 미국은 대졸 직후 노동시장에서 성별 소득 격차가 없다는 것. 골딘이 주장하는 성별 소득 격차가 차별보다는 "가정"의 분업과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핵심 근거 중 하나다. 하지만 한국은 대졸 직후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소득이 남성보다 18% 작다

 

한국은 골딘이 말하는 greedy work 때문에 발생하는 가정의 분업과 여성에 대한 차별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걸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고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미국의 비동시성이 한국에서는 동시성으로 존재한다. 그러니 이 책을 읽고 한국의 성별 격차도 미국처럼 해결해야겠다고 깨달아서는 곤란하다. 미국은 과거의 문제가 되어버린 명백한 차별을 한국은 아직도 해결하지 못했다. 차별을 줄여서 미국 정도의 성별 격차라도 도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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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tudent 2021.11.12 22: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경제학도로서 골딘 작업의 해제를 저희 쪽에서 이렇게 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개인적으론 한국의 장시간 근무환경이 전문 고소득직종이 아닌 직종조차 greedy work (nonlinear compensating differential) 성격을 갖게 만들어 (달갑지 않은 형태로) 함의를 확장시키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오랫동안 하고 있습니다.

    • 바이커 2021.11.13 1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일반 사무직의 노동시간 축소가 성별 소득 격차 해소의 조건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다행인 것은 한국의 평균 노동시간도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습니다.

    • 두꺼비 2021.11.15 04:54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사회학은 잘 모르는 일반인입니다. 혹시 'greedy work'가 어떤 걸 정의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투입한 시간에 비례해서 수익을 얻기 때문에 노동시간이 크게 늘어나는 직군을 이야기하는 것 같기는 한데 (그래서 가정을 위해 부부 중 한명을 - 주로 여성을 - 탈락시키는) 정확한 정의가 궁금하네요.

    • 바이커 2021.11.15 09:46  댓글주소  수정/삭제

      장시간 노동시간에 더해서, 연락이 오면 항상 반응할 수 있는 대기상태를 요구하는 직업입니다.

      이 일자리는 투입한 시간에 단순 비례하는게 아니라, 투입한 시간이 늘면 단위시간당 소득도 올라갑니다. 투입 시간과 총소득이 지수함수 관계가 됩니다.

      사회학에서는 인디애나대 차영주 교수의 overwork 연구가 가장 유명합니다.

    • 두꺼비 2021.11.16 10:00  댓글주소  수정/삭제

      감사합니다. 주변에서 보면서도 그냥 그러려니 하는 얘기 같은데 그런 부분을 잡아내서 용어로 만든다는게 참 대단하네요.

    • 2021.11.18 12:59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인적으로는 계량분석 못지않게 중요한게 이론을 만들고 풀어내는 실력인 것 같습니다. 개념 하나 잘 잡아내서 논문 발표하면 구글스칼라 인용지수 1~1,500 한방에 늘어나는거 일도 아니거든요. 최근 한국에서 유학오는 학생들한테 흔히 보이는게 과하게 통계능력만 갖추면 미국에서 어드미션 받을거란 믿음이 꽤 우려스럽습니다.

  2. 기린아 2021.11.20 03: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안 부분은 그람시가 남부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대기업과 관료적 해법이 필요하다고 했던 것이 떠오르게 하네요.

    • 바이커 2021.11.20 1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ㅎㅎ 평등을 실현하려면 좌우파 모두 관료제적 조직원리를 피할 수 없나봅니다.

      이게 재미있는 포인트인게, 조직은 과거보다 관료제적 원리(=독점, 거대기업화)가 커지지만, 노동자 개인은 노동조직이 아니라 개인에 의해 대표되는 경향(=deunionization & individual negotiation)이 커지고 있어서 결과가 뭐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성, 인종 같은 categorical inequality는 줄어들고, 그룹 내 분산은 커지는 결과가 될지, 둘 다 커질지, 아니면 둘 다 작아질지.

얼룩소 천관율 기사: (1) 계급이 돌아왔다-이대남 현상이라는 착시, (2) 누가 페미니스트인가

 

천관율 기자/작가의 최근 얼룩소 글을 두고 다양한 평가가 나오는 듯하다. 첫번째 글을 읽은 후 다른 사회학자들에게 가장 먼저한 얘기는 이거 읽고 놀랄 계층론 연구자는 한 명도 없을거라는 것. 계층론 연구자들에게는 상식과 같은 얘기다. 계층에 따라 꿈이 다르다는 얘기도 새롭지 않다. 여러 논문이 이미 나와 있다. 페미니스트의 특성에 대한 진단도 상식적이다. 한국에서 여성이 여러 측면에서 차별받는 소수자인데, 소수자와 연대하는 인식을 가진 사람이 어디 한 가지만 그러겠는가. 평균적으로 더 공동체 지향적인게 당연하다. 기사에 새로운 내용이 없다는게 이 분석의 가장 큰 장점(상식적으로 이해된다)이자 단점(뉴스가 없다)이다. 

 

새로운 내용이 없어서인지 천관율 작가의 글쓰는 스타일에 대해서 말들이 많다. 2개의 분석 기사를 읽고 여러 생각이 있는데, 일단 내용에 대해서 몇 가지 짚고, 제가 생각하는 사회과학과 저널리즘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계급 분석 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계급을 나누는 방법이다. 여러 분들이 이 방법론에 관해 의구심을 가지고 질문을 하던데, 저는 "공부방 계급론"이 매우 명민한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공부방 계급론을 나누기 위한 구체적인 통계 기법이야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응답 점수로 연속척도를 만들수도, 천관율 기자의 방식처럼 임의의 점수로 나눌 수도, 좀 더 체계적으로 latent class analysis (LCA)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뭘 하든지 결과는 비슷할 것이다. 

 

계급이라는게 딱히 정해진 조작적 정의가 없다. 소득, 자산, 교육, 직업, 주관적 계급이 모두 계급 정의의 변수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이 번 분석에서 공부방 계급론에 사용된 질문은 두 가지 큰 장점이 있다. 하나는 이 지표는 소득(용돈 지급, 돈 걱정 없이 공부), 자산(독립된 공부방), 문화(부모가 자녀 학력에 관심)를 모두 포괄하는 종합지표(a composite index)다. 특히 문화자본(사회학에서는 보통 집에 있는 책의 권수로 측정)은 기존 연구에 따르면 학력 성취에 영향을 끼치는 가장 강력한 변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자본을 측정하여 계급 구분에 적용한 서베이는 거의 없다. 여러 계급적 지표를 종합해서 하나의 변수로 조작화한 것은 인상깊은 장점이다.

 

이 분석의 더 인상깊었던 장점은 응답자가 부정확한 정보를 리콜할 필요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출신계급을 묻는 질문은 보통 15세의 자산, 소득 등을 묻는다. 응답자가 제대로 모르고 답변할 가능성이 상당하다. 의도적인 거짓말이 아니라도, 정보가 부정확할 가능성이 높다. 독립변수의 에러에 대한 errors-in-variables 이슈는 통계의 측정 오차에 대해 눈꼽만큼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아는 문제다. 하지만 공부방 계급론의 질문은 모두 응답자 자신의 경험에 대한 리콜이다. 측정오차를 상당히 줄일 수 있다. 향후 청년층/청소년층을 대상으로 한 계급 분석에서 충분히 계속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공부방 계급론으로 측정한 계급에 따른 응답의 격차가, 학력 격차로 측정한 지위에 따른 응답 격차보다 크다는 점도 재미있는 포인트다. 이 분석을 좀 더 생각해보면, 공부방 계급론의 계급 지위가 학력 격차로 그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얼룩소 글에서는 계급의 재발견이라고 썼지만, 학력 성취에서 계급의 허약성을 드러내는 결과이기도 하다. 계급 격차가 학력 격차로 그대로 이어지지 않고, 고학력층에서 계급이 상당히 섞여있다는 의미다. 청년층에서 출신 계급에 따른 인식 격차가, 현재의 학력 성취에 따른 인식 격차보다 더 크다. 능력주의 담론은 학력 성취자의 담론이라기 보다는, 출신 계급에 따른 담론이라는 의미다. 계급에 따른 학력성취와 인식 격차를 종합하면, 능력주의 담론은 계급적이지만, 학력 성취는 덜 계급적이라는 의미다. 상당히 재미있는 발견이다. 하지만 얼룩소 분석글에서 이 점이 언급되지 않았다.  

 

천관율 기자의 분석 글에서 "착시"라고 얘기하는데, 뭐가 착시라는건지 아직은 모르겠다. 사회과학에서 착시란 심슨의 역설과 같은 것이다. 이대남이 착시고 계급이 진짜라면, 인구 집단을 세대가 아니라 계급으로 나누면 세대별로 결과가 같아져야 한다. 예를 들어, 35세 이상 상위계층의 반페미니즘과 능력주의 천착이 20대 남성 상위계층과 다를 바 없고, 35세 이상 하위계층은 20대 남성 하위계층과 다를 바 없어져야, 이대남이 계급의 착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게 아니고 각 계층별로 20대 남성에서 반페미, 능력주의 성향이 다른 연령대보다 강화되었다면 이건 착시가 아니다. 설사 계급별로 상이성이 있더라도, 여전히 이대남 현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착시라고 얘기할려면, 적어도 하위계층에서는 세대별 격차가 없는데, 상위계층에서만 차이가 난다는 결과라도 있어야 한다. 이 경우, 이대남 현상은 상위계층 남성의 인식 변화 현상이 된다. 세대와 계급의 상호작용 효과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런 분석은 아직까지는 없다. 계층별로 능력주의에 대한 입장이 다르고, 미래에 대한 전망도 다르고, 부모의 역할에 대한 인식도 다르다는 건, 계층론의 상식이다. 착시라고 말할 수 있는 새로운 내용이 아직은 없다. 

 

즉, 착시를 얘기할려면 세대 간 격차에 대한 분석이 있어야 한다. 다음 얼룩소 글에서 이런 착시를 분석하는지 기다리고 있다. 35세 이상 그룹도 서베이했으니 충분히 분석이 가능하다. 한가지 궁금하게 생각하는건 공부방 계급론을 35세 이상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했는지다. 그랬다면 분포는 어떻게 다른지 매우 궁금하다. 이대남 현상이 착시라고 할려면, 35세 이상에게도 똑같은 공부방 계급론 항목을 질문했고, 동일한 기준으로 계급을 나누면 상, 하위 계층의 능력주의에 대한 응답 비율에 세대 간 격차가 없어야 한다. 다만, 20대남자는 돈걱정없고 공부방을 가진 비율이 증가해서 능력주의가 커진 것으로 나와야 한다. 달리 말해, 이대남 현상은 계급의 분포 변화로 인한 착시다. 정확히 심슨의 역설과 같은 논리다. 그래야 이대남 현상이 계급의 착시가 된다. 단순히 계급이 중요하다는건 착시가 아니다. 

 

페미니스트 관련해서, 앞에서 언급했듯 페미니스트의 성향이 공적 영역을 중시한다는건 놀랍지 않다. 이렇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 사회과학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하나만 하는 사람은 없다고 했던가. 많은 사람들이 모순적 사고를 하지만, 집단으로 분석하면 상당한 일관성이 있다. 민주당 지지자가 미통당 지지자 보다는 평균적으로 더 진보적이고 더 공공성을 중시한다. 그렇다고 민주당 지지자 개개인이 모두 그렇게 일관적이지는 않다. 당연한 현상이다. 마찬가지로, 여성차별이 심한 한국에서 페미니스트가 상대적으로 더 약자에 우호적이고 공공성을 중시하는게 당연하다. 그러니 이 기사도 유용한 정보이기는 하지만, 놀라운 뉴스가 아니다. 심지어 반페미니스트에게도 이 뉴스가 기대하지 못했던 결과인지 의심스럽다.  

 

더 중요한 질문은 왜 이런 상식적 내용과는 관계없이 페미니스트가 사회에 도움이 안된다고 인식되고 있는가이다. 페미니스트의 성향이 아니라, 페미니스트의 내용이나 페미니스트가 여성 문제와 관련해서 제기하는 주장이 문제인데, 거기에 대해서 얼룩소는 질문하거나 분석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의 주장이 싫다는데 "사람은 착해"라고 엉뚱한 얘기를 한다는거다. 페미니스트의 주장이 사회에 도움이 될 것이 확실하고, 여러 국제기구도 페미니스트의 주장대로 해야 한국 경제가 더 발전할 것이라고 충고한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페미니스트를 싫어하나? 페미니스트가 뭔지 몰라서인가? 아니면 성별 평등 자체에 대해서 저항하는가? 계급적으로 페미니스트의 득세가 경제적으로 불이익이 되나? 아니면 미국에서 CRT가 뭔지 모르면서도 비판적이 되듯, 페미니스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화가 성공해서인가? 쉽지 않은 질문이고, 서베이 한 두 개로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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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분석글에 대한 코멘트다. 조금만 더 어깨에 힘을 빼주면 좋겠지만, 이 정도면 훌륭한 기사라고 생각한다. 진짜로 하고 싶은 얘기는 사회과학 저널리즘에 대한 것이다. 모든 영역의 전문가들은 그 분야에서 다 똑똑하다. 아마츄어가 범접하기 어려운 내공을 쌓고 있다. 사회과학도 마찬가지다. 서베이 돌려서 남들은 알지 못하고 연구하지 못한 뭔가 굉장히 새롭고 충격적인 얘기를 지속적으로 던지기는 어렵다. 

 

그런데 사회과학 저널리즘은 아는 얘기도 다른 사건에서는 다른 각도로 또 할 필요가 있다. 사회과학과 사회과학 저널리즘은 다르다. 사회과학 저널리즘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는데, 저널리즘에 있는 분들이 사회과학, 사회과학 저널리즘, 그리고 저널리즘 사회과학의 차이에 대해 모른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저널리즘 사회과학은 프로페셔날 사회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아마츄어다. 이 번 얼룩소 분석도 기사로써는 훌륭하지만, 사회과학적 분석의 잣대를 들이대면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사회과학적 지식도 새로운 내용의 추가를 통한 점진적 발전인데, 새로운 내용 추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사회과학 저널리즘을 할려면 사회과학자를 설문지 검토 용역에 동원하는 것 보다는, 사회과학자들이 프로페셔날한 영역에서 달성한 성취를 이용해야 한다. 사회과학 저널리즘을 하는 분이 사회과학자 중 누가 무슨 연구를 했는지 읽고 종합해서 알아듣기 쉬운 말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과학자보다 사회과학 기자가 더 광범위하게 읽어야 한다. 사회과학자는 자기 전문 분야만 읽어도 되지만, 사회과학 기자는 덜 깊게 하지만 더 넓게 읽고 서로 다른 분야들을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 사회과학 기자는 어떤 사회과학자가 어떤 분야의 전문가인지 관통하고 있어야 한다. 그게 진짜 정보다. 기사에서 사회학자들 코멘트 딴 것들 보면, 전문가가 아니라 친한 교수에게 대충 몇 마디 딴게 너무 눈에 보인다. 사회과학 저널리즘에서 필요한 능력 중 하나는 누가 진짜 전문가인지 파악하는 능력이다. 무슨 문제가 있을 때 누구에게 물어보는지 알고, 실제로 물어보고, 추가로 무슨 내용을 더 알아보면 되는지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전문적 영역이다. 

 

사회과학 대비 사회과학 저널리즘의 가장 큰 장점은 스토리 텔링이다. 좋은 사회과학 논문이나 저서도 스토리 텔링이 있다. 하지만 사회과학 저널리즘만큼 흥미롭지는 않다. 여러 사회과학 연구를 꿰어서 사회현상에 대한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사회과학 전문기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스토리를 꿰는 것이 어렵다면, 라쇼몽처럼 하나의 현상에 대한 여러 스토리를 전달하는 것도 사회과학 전문기자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다. 천관율 기자는 탁월한 스토리 텔러다. 하지만 이 분이 한 최근의 일부 작업은 사회과학 저널리즘이 아닌, 저널리즘 사회과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라건대 "저널리즘 사회과학"이 아니라 "사회과학 저널리즘"을 하는 분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Ps. 사회과학자도 1회성 센세이셔널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기획에 곁다리로 참여하는건 이제 좀 자제했으면 좋겠다. 그런 기획이 필요한 때도 있지만, 진중한 질문이 필요한 현상을 그렇게 접근하는 한계는 너무 명확하지 않은가. 

Posted by 바이커 sov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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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2021.11.10 17: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회과학 저널리즘에 대한 교수님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누가 전문가인지를 알고, 여러 깊으나 좁은 연구들을 연결하여 이해하고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통찰력을 갖춘 진정한 사회과학 저널리스트의 등장을 기대하고 싶네요.
    이대남은 뭐가 착시의 증거라는 건지 기사를 다 읽어도 납득이 안가네요.

    • 바이커 2021.11.10 17:48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에도 썼지만, 35세 이상도 설문했으니 왜 착시라고 주장하는지 얘기하지 않을까 기다리고 있습니다.

  2. MinK 2021.11.10 2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십대남을 분석하는 키워드 제시에 사회과학자도 저널리스트도 상상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군대는 다른 세대에도 있었고 계급 역시 이십대남의 고유학 특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면 웹하드, 불법촬영 문화가 현재 20대 남의 키워드일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라고 보이는데 그런 얘기 하는 분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 그것또한 2021.11.10 23:36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유한 특성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이십대의 대세 게임이 외부에서 보기에는 롤이라고는 하지만 롤을 실제로 하지 않거나, 관심이 없는 비율도 상당하니까요. 마찬가지로 불법촬영, 웹하드 등도 이십대의 고유특성이라기 보다는 이삼십대 소위 인싸 일부의 문화라고 봐야겠죠.

    • 청염 2021.11.10 23:54  댓글주소  수정/삭제

      웹하드와 불법촬영이야말로 ‘20대 남성문화’라 보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낮게 잡아도 최소 40대 이하 남성이 모두 공유하는 문화입니다. 저는 ‘김본좌’가 대놓고 찬양받던 시절에 비하면 오히려 현재 20대 남성이 이 문제에서는 더 진보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 딱하나만 2021.11.11 0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지나가다가.. 원 댓글 쓴 사람은 아닙니다만 불법촬영, 웹하드가 40대 이하 남성이 공유하는건 동의하는데 그걸 인싸 문화라고 말하는 근거가 있나요? 인싸 문화가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남초 커뮤니티나 남자들 사이에서 '국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법촬영물이 공유되거나 불법촬영물을 소비한게 인싸 아싸 가리지 않았던것 같은데요

    • 통계 2021.11.11 00:24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편 몰카범죄는 주로 30대 이하 연령대가 저지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4년간 몰카범죄로 검거된 총 2만994건 중 20대가 7,193건으로 가장 많았고 30대가 4,964건으로 두 번째로 많았다.

      소년범을 포함한 19세 이하 연령에 의해 발생한 것도 3,830건에 달했다.

      출처 : 굿뉴스365 - http://www.goodnews365.net/news/articleView.html?idxno=155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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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이재정 국회의원은 경찰청이 제출한 국정감사자료 ‘2014년 이후 카메라 등 이용촬영 범죄현황’ 자료 분석 결과, 2014년 이후 검거된 카메라 등 이용 촬영범죄 피의자가 1만 6,802명으로 매년 급증하고 있으며 남성 피의자가 전체의 97%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https://m.boannews.com/html/detail.html?idx=73259

    • 71 2021.11.11 03:03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십대남 특징이라면.. 펨코, 디씨 같은 익명 남초커뮤니티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다는 것 아닐까요? 3040에 비해 시간이 많으니 훨씬 남초커뮤의 논리에 중독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페미 나쁘다 라는 확증편향을 그런 곳에서 접하고 강화하는 것 같더군요.

    • j.k 2021.11.11 09:05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댓글쓴 분은 '불법촬영'이 이대남이 보수화되고 다른 세대와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이유라고 생각하시는건가요? 비논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이십대 여성은 '팬픽'이 키워드라고 제시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참고로 제 입장을 밝히자면, 저는 10대고, 사회학을 뭣도 모르지만 남성 주류 문화가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확증편향이 심한 커뮤니티 문화에 물들었다고 생각합니다)

  3. 종종 2021.11.10 22: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러니 저러니 교수님께서 가장 많이 언급하는 기자는 천관율 기자네요. ㅎㅎ 그래도 가장 교수님 입맛(?)에 맞게 글을 쓰나 봅니다

  4. 지나가던사람 2021.11.11 02: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교수님 분석 잘 봤고 동의합니다.

    다만, 갑작스레 궁금한게 떠올라서 몇 자 남겨봅니다.

    천관율 기자의 분석은, 페미니즘 이슈 응답을 이용해서 k-means를 써서 그룹을 나눈다음, 다른 인권 이슈에 대해서 응답 경향을 분석했습니다.

    어제까지는 이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었는데, 생각을 해보니 이게 거꾸로 분석했어야 했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즉, 다른 인권 이슈의 응답 경향으로 k-means로 그룹을 만든 다음(약자에 친화적인 그룹, 비친화적인 그룹 등), 거기서 페미니즘 이슈의 응답 경향을 분석했어야 했던거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조선족과 난민에 혐오적인 사람이 페미니스트라면 그건 이 사람이 여성 이슈에만 관심이 큰거지, 인권에 친화적이라고 하기엔 되게 애매하지 않습니까.

    천 기자의 분석을 보고 '이거 정말로 페미니스트가 타 그룹에 비해 인권 친화적인거 맞나?'라는 의문들이 많이 제기 되던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분석이 거꾸로 됐단 느낌입니다.

    '착한 사람'을 분석해도, 착한 사람이 어느정도 여성 이슈에 관심있냐, 페미니스트는 어떤 층위로 구성되어있느냐가 중요하지, 평균적으로 페미니스트가 어느정도 착한지의 정보는... 응답경향이 저렇게 벌어지는 상황에서는. 애매한거 같습니다.

    • 바이커 2021.11.11 11:29  댓글주소  수정/삭제

      천관율 기자의 분석은 페미니스트의 profile이 아니라 페미니스트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각각에서 다른 항목의 share를 따진 분석을 한 겁니다.

      "페미니스트는 누구인가"에 대해 질문이 누가 페미니스트가 되나라면 잘못된 답이고, 페미니시트는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들인가라면 맞는 답이죠.

  5. 71 2021.11.11 03: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티페미들도 놀라워하지 않을 글이라고 하셨는데..안티페미들은 천 기자의 글을 보고 페미들이 그렇게 착할 리 없고 사실은 페미들은 나쁘다며 화를 내더군요. 그게 천 기자의 의도 아니었을까요. 하도 치우쳐 있으니까요.
    안티페미들이 페미를 싫어하는 이유 페미니스트가 뭔지 몰라서이기도 하고 페미니스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화가 성공해서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상 익명 남초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주고받는 확증편향이 이 현상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베가 사회문제가 될 때는 전체 인터넷이용자 중 일베 유저 비율이 비교적 낮았지만 최근 이십대 남성의 디씨,펨코 이용은 일상화되었고 유저 비율은 상당히 높습니다. 그곳에서 공유되는 글들은 일베와 다를 바 없는 수준이고요. 익명 남초 커뮤니티 없이 페미니즘악마화가 설명될 순 없습니다. 조사 대상자가 어떤 인터넷 사이트에서 하루에 몇 시간을 보내는제, 그리고 미디어를 얼마나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지 미디어 리터러시를 조사해본다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동의 2021.11.11 04:55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동의하는데 천관율 기자 분석 자체를 거짓이라고 하는 안티페미들 많더라구요. 페미니스트들이 소수자 문제에 더 나은 응답을 한 게 위선이라고요

  6. 임성민 2021.11.11 04: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관율 기자 글 읽다가 블로그를 알게 되었습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첫글부터 쭉 읽게 되네요
    비아냥대는 댓글들 보니 저조차도 기분이 상하는데 어떻게 글쓰기를 지속하셨는지 존경스럽습니다
    앞으로 하시는 연구들도 관심 갖고 찾아보게 될 것 같네요
    번뜩이는 글들 잘 읽고 갑니다

  7. sw19classic 2021.11.11 06: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개인의 학업성취가 (더 정확히는, 학업성취를 위해 들인 투입의 양이) 출신계급보다는 좀 더 '이대남 현상' 을 잘 설명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흙수저 공부방에서 공부했던 명문대생들은 공정·능력주의 담론에 대해서 자기 학우들보다는 덜 동의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세습 중산층 사회》 도 떠오르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회적 이슈들이 계급의 대물림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스칩니다.

    • 바이커 2021.11.11 11:31  댓글주소  수정/삭제

      흙수저 출신 명문대생 = 지위불일치(status inconsistency).

      관련된 주제에 대해 현재 작업 중인데 내년 중순 정도에 일부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8. JY 2021.11.12 23: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매번 잘 읽고 있습니다. 코멘트 마지막 문단이 정말 공감이 가네요. 페미니스트가 착한 사람이다란 결론 보가는 왜 그들에게 거의 악마의 이미지가 씌어졌는 지 설명하는 연구가 수행되면 좋겠네요.

    별개로 키워드 하나로 깊이있는 생각하나를 묶어버리는 방법은 정말 위험함에도 너무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 같아서 무섭네요.

프레시안 기사: "쌀 사먹게 2만 원만.." 22살 청년 간병인의 비극적 살인

 

프레시안 기사에서 보도된 청년 간병인의 비극은 한국의 빈곤문제와, 복지의 사각지대, 특히 50대 빈곤의 문제를 드러낸다. 50대 빈곤은 기사에서 나오듯 20대 초반의 빈곤이 된다. 20대 후반만 되어도 독립해서 일을 하기 시작하면 빈곤에서 탈출한다. 한국에서 빈곤은 주로 60대 이상 고령층의 문제지만, 빈곤의 구조적 문제는 1차 노동시장에서 탈락하는 50대 초반서부터 시작된다. 통계를 분석해보면 50대 이하에서도 빈곤 문제가 더 심각해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 인식이 지체되는 이유 중 하나는 빈곤문제가 어떻게 심각해지고 있는지 통계를 자세히 분석하지 않으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니계수나 팔머지수 등 한 개의 수치로 표현된 불평등 지수는 가끔 현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한국이 그런 경우다.

 

한국에서 소득불평등이 2009년 이후에 증가하지 않았다고 얘기하면, 가처분 소득은 그렇지만 시장 소득의 불평등은 증가했다는 반론을 가끔 듣는다. 팔머지수라고 상위 10%의 소득 점유율과 하위 10%의 소득 점유율을 비교하는 지표가 있다. 이 지표에 따르면 시장소득 불평등은 커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니계수로 측정하면 가처분 소득 불평등 뿐만 아니라 시장소득 불평등도 별로 증가하지 않았다. 불평등을 측정하는 여러 지수가 다소의 차이는 있더라도 대부분 동일한 변화를 보여주는데 이상하게 한국은 지표에 따라서 불평등의 변화가 다르게 나타난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아래 표는 2011년 이후 2019년까지 통계청 가계금융복지조사의 가구 균등화 시장소득 증가율이다. 소득 상승률을 통계청에서 계산하지는 않지만 분위별 평균 소득의 연도별 변화로 증가율을 계산할 수 있다. 인플레를 감안하지 않은 명목 소득으로 계산한 것이다. 

분위 소득상승률 분위 소득상승률
최상위 2.40% 5분위 3.94%
9분위 3.51% 4분위 3.96%
8분위 3.56% 3분위 3.65%
7분위 3.61% 2분위 2.95%
6분위 3.73% 최하위 0.63%

 

위 표를 보면 세 가지 놀라운 지점이 있다. 

 

첫째, 소득 최하위 10%의 연간 소득 상승률이 0.63%로 다른 집단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다. 

둘째, 소득 최상위 10%의 소득 증가율은 2.40%로 최하위 다음으로 낮다.

셋째, 3~9분위의 소득 증가율이 3.51~3.96%로 매우 균등하게 높다. 

 

시장소득의 측면에서 지난 10년간 중산층이 약화된게 아니라 강화되었다. 최상층의 소득이 중산층보다 높아진 것이 아니라, 최상층과 중산층의 간격이 좁아졌다. 이에 반해 최하층은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소득 최하층은 한국이 상대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하던 지난 10년간 소득이 감소하였다. 청년 간병인의 비극적 살인은 이러한 변화의 맥락 속에서 터져나온 비극이다. 

 

하위 10%만 제외하면 한국의 시장소득 불평등도 줄어들었다. 팔머지수가 증가한 이유는 최상층의 소득 비중이 늘었기 때문이 아니라 최하층의 소득 비중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2010년대에 다른 국가보다 빠른 발전을 하고, 시장소득의 1차 분배도 개선되었지만 하위 10%는 이러한 긍정적 변화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있다. 지니계수에 변동이 없거나 오히려 약간 줄어드는 이유는, 지니계수는 소득 중간층의 변화에 더 민감한 지수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불평등과 빈곤 문제의 디커플링이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얘기하면 일부에서는 상위 10% 중에서 최상층의 소득은 더 빠르게 증가하고 5~10%의 애미한 상층만 희생당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분위 평균값이 아니라 분위 경계값의 변화를 보면 ln(P90)-ln(P80)의 값이 2011년에는 0.283이었는데, 2019년에는 0.279로 거의 변화가 없다. 이는 상위 10%의 낮은 소득 증가율이 상위 10% 중에서 5~10%가 아니라 상위 1~2% 등 윗부분에서 이루어졌다는 의미다. 

 

아마 여기서 상층의 소득은 서베이 조사로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고 지적할 것이다. 하지만 가금복 통계는 세금자료로 상층 소득을 조정한 수치다. 일반에게 원자료를 공개하지 않아서 그렇지 서베이로 측정되지 않는 수익이 문제가 아니다.

 

종합하면, 한국은 지난 10년간 90% 가구의 시장소득 1차 분배가 개선되어서 불평등이 줄어들었다. 이는 광범위한 중간층의 소득이 상층보다 빨리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긍정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최하위 10%는 소득증가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과거보다 최하층과 차하층의 격차가 더 벌어졌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소득 최하층과 차하층의 격차가 소득 최상층과 차상층의 격차보다 작다. 하지만 한국은 소득 최하층과 차하층(2분위)의 격차(로그소득 1.238)가 소득 최상층과 차상층(9분위)의 격차(로그소득 0.534)보다 2.5배 크다.

 

세상에 한국말고 이런 나라는 없다.

Posted by 바이커 sov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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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린아 2021.11.03 19: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론적으로는 소득 불평등이 전방위적으로 커지는 것 보다는 분명히 나은 상황인데(물론 자산 불평등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만...) 실제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줄어듦으로서 정치적 동력?이 작고, 또한 상위 일부 계층에 돈을 많이 버는게 아니기 때문에 복지 재원을 광범위한 중산층에게서 일률적으로 끌어내야 한다는 숙제가 남는군요. 말씀하신대로 세상에 이런 나라 없기는 합니다.

    • 바이커 2021.11.03 20:16  댓글주소  수정/삭제

      자산불평등도 무주택자와 유주택자의 격차가 벌어졌지, 유주택자 내에서의 격차는 증가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건 절대 액수의 증가로 인한 money illusion 이지 불평등을 좌우하는 상대적 격차는 2010년 대비 그렇게 증가하지 않았습니다.

      하위10~15% 빈곤층 악화의 상당 부분은 고령화의 결과입니다. 말씀하신대로 광범위한 중산층에게서 자원을 끌어내야 하기 때문에, 광범위한 중산층이 혜택을 받으면서 빈곤층이 같이 헤택을 받도록 프로그램을 짜는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민자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빈곤층을 타겟으로 하는 프로그램은 지지를 받기 앞으로 더 어려워질 것이니까요.

  2. 유월비상 2021.11.03 21: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 도표는 시장소득 기준인데 가처분소득 기준으로 해도 비슷한 결과가 나오나요?
    https://sovidence.tistory.com/1089
    제가 본 과거자료로는 가처분기준으로는 최하위층 상승률이 훨씬 컸는데, 복지국가화되는 현실에서는 가처분소득이 중요한 지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 바이커 2021.11.03 21: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맞습니다. 가처분소득 기준으로는 최하층의 증가율이 가장 높고, 최상층의 증가율이 가장 낮습니다. 이 때문에 가처분소득 기준 불평등은 2009년 이후 지속적인 하락 추세입니다.

    • 유월비상 2021.11.04 01: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최하위층의 시장소득 소외가 재분배 후 가처분소득에서 완전히 역전된다면, 이 현상이 심각한 문제인가 싶습니다. 정말 중요한 건 가처분소득이라서요. 교수님도 하위 10%의 뒤쳐짐이 노인빈곤과 연관이 강하다 하셨는데, 노인빈곤율도 '세전'으로 따지면 타 선진국이 한국보다도 더 심각합니다. 하지만 그 세전지표로 타 선진국의 심각한 노인빈곤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연금제도라는 재분배장치로 다 해결되는 문제라.

    • 바이커 2021.11.04 10:26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번 주제는 연금제도 장치에 포함이 안되는 집단에 대한 얘기라서요. 노인빈곤에 대해서는 점점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는데, 노인복지 대상에 들지 못하고 빈곤에 빠지는 50대에 대해서는 정책적 빈공간이 있으니까요.

      하위 10%의 가처분소득은 1990년부터 2009년까지 악화되다가 그 이후에 개선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개선된 것은 아니고, 2000년대 초반 수준으로 되었습니다.

  3. 마요 2021.11.04 04: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위10프로만 그렇게 된 이유와 대안이 궁금하네요. 복지예산은 그동안 엄청 늘었는데 말이져..

  4. 2021.11.04 11: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복지 예산은 보편적 복지 서비스나 인건비 때문에 예산들이 점점 커지는 것 같습니다. 하위 10% 사람들은 사실상 그 중에서 국기초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근로를 하지 않아야 국가로부터 수급 받는데, 그 사람들이 갑자기 돈을 더 벌고 싶어서 노동현장으로 뛰어드는 경우는 적습니다.. 다들 일 안하고 나라로부터 공짜돈 받는게 더 이익이죠... 근로능력을 따지는 건 필요한 경우가 있어서 그런건데 좀 악용하는 분들도 꽤 있다고 봅니다.

  5. ㅁㄴㅇㄹ 2021.11.05 01: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https://www.neosherlock.com/archives/13898?ckattempt=1

    왜 주민센터같은 곳에서 도움을 받지 못했나에 대한 후속기사가 떴는데 이것도 참 생각해봐야할게 많더군요

  6. 맨붕박사 2021.11.23 18: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교수님 오히려 고른 소득증가율은 중산층이 강화되었다고 보기 힘들지 않을까요? 만약 소득증가율보다 실질물가상승률이 더 높다면, 중산층 전체가 빈곤해진다는 이야기이고, 또한 고른 소득증가율은 다르게 말하자면 계층이동이 정체되어 있다는 이야기 같습니다.

    • 맨붕박사 2021.11.23 18: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 1세계 중산층의 몰락”에 따르면 CPI와 고정소비재 물가상승률의 차이가 크다고 나와서요. CPI는 현재 0.7-3프로로 굉장히 낮지만 현실적인 물가상승율은 7-9프로정도로 측정하더군요. 이건 소비자들이 특정 품목의 물가를 견디지 못하고 그보다 싸구려 제품을 사용하는데 CPI는 전체 품목별로 소비자물가를 측정하다보니, 물가 상승이 안나타보이는 효과가 있다고 하더군요

    • 맨붕박사 2021.11.23 19: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또한 다르게 생각해보면 실질적으로 계층이동이 일어나는 측은 9-10분위 말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를 고려해보면 오히려 불평등이 축소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심화 고정되었다고 보는게 더 좋지 않을까요?

    • 맨붕박사 2021.11.23 19: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또 재밌게 볼만한 점은 한국의 지난 정책들입니다. 1분위를 가구소득이 거의 없이 오직 보조금만으로 연명하는 가구라고 생각한다면 그 위의 계층은 일용직 근로자나, 아니면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라는 이야기일텐데, 문재인 정부에서 적어도 잠시라도 추진한 급격한 최저임금 상승에도 불구하고, 2,3분위는 오히려 윗 계층보다 소득증가율이 떨어집니다

    • 맨붕박사 2021.11.23 19: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또 다른 점은 이미 10분위 소득격차와 9분위 소득격차가 극심하다는 점입니다. 현재 10분위의 평균 소득은 9분위의 평균 소득에 1.4804배이며 이를 현재의 9분위 소득증가율/현재의 10분위 소득증가율로 계층이동이 가능할거라고 생각하는 연도를 측정해 본 결과 37년정도가 소요됩니다.

    • 맨붕박사 2021.11.24 00: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또한 이건 소득의 차이이기 때문에 37년간 자산 격차가 계속 늘어난다는 걸 의미합니다. 또한 37년이면 왠만한 근속연수를 훨씬 넘기때문에 이러한 점을 봐야할 것 같구요

    • 바이커 2021.11.24 10: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분위별 소득변화에서 계층이동의 함의를 추론하면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