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컷뉴스: 나경원 아들 제1저자, 나경원 부탁으로 실험실 사용

 

이 번에는 나경원 아들이 서울대 실험실을 사용하고 학회 발표문의 제1저자가 되었다고. 그 결과를 이용해서 예일대에 진학했다는 의혹까지. 이 전 포스팅에도 얘기했듯 상위 계층은 어떤 교육 제도를 도입하더라도 교육을 통한 계층재생산을 경로를 찾아내고야 만다는. 

 

조국, 나경원 모두 뭔가 특혜를 받고 스펙을 쌓아서 문제. 이런 스펙으로 각각 한국과 미국의 대학에 진학하였음. 양 국가 모두 학생의 종합적 성과를 고려하는 입시 제도를 가지고 있어서 생겨난 논란. 이 때문에 학종의 비중을 줄이고, 대신 정시를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비등.

 

한겨레 기사: 된서리 맞는 '학종' 한겨레 기사 뿐만 아니라 많은 언론들이 공정성 강화를 위해서 수시의 비중을 줄이고, 정시 비중을 늘릴 것으로 예상. 

 

그런데 과연 수시의 비중을 줄이고, 정시의 비중을 늘리면 공정한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답을 제시하는 논문이 한국사회학 최신호에 떡하니 실림. 요즘 한국사회 불평등에 대한 참신한 연구는 모두 사회학에서 나오는 듯. 어쩜 이렇게 시기도 적절하게 논문이 나왔는지. 

 

문정주, 최율 (2019) 한국사회학 논문: 계층수준에 따른 대입 제도 선호

 

문정주, 최율 선생의 질문은 계층에 따라 수시, 정시 입시 제도에 대한 인식과 선호가 다른지 여부. 사회학자라면 누구나 아는 social closure 개념을 배제와 적응이라는 두 가지로 정리하여 교육 제도에 도입하고 대입 제도의 계층 간 경쟁의 대상으로 분석.

 

이론적 논의도 잘 정리했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분석 결과. 아래 그래프는 주관적 사회계층에 따라 선호하는 입시 제도. 보다시피 상층은 확실히 수시보다 정시를 선호함. 하층에서도 수시보다 정시를 선호하지만 그 정도는 약함. 대신 하층에서는 수시나 정시나 특별한 선호가 없다는 응답이 절반에 육박. 여기서 사회계층 인식이 상층인 비율은 약 15%, 중간은 71%, 하층은 14%. 

 

입시제도로 수시보다 정시를 미는 것은 하위계층이 아닌 상위계층. 

그렇다면 평가의 공정성에 대한 인식도 계층에 따라 달라질까? 아래 <Figure 2-2>에서 보듯 계층이 높아질수록 정시가 더 공정하다고 생각함. 하층에서는 정시와 수시의 차이가 없음.

 

이 블로그에서는 제시 안했지만, 논문의 분석에 따르면 기회의 평등에 대한 인식도 아래 그래프와 거의 같음. 상층일수록 정시가 수시보다 더 공정하다고 인식함. 

계층 지위가 높을수록 수시보다는 정시를 선호하고, 정시가 더 평가의 공정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정시가 더 기회평등을 제공한다고 생각. 

 

그런데 이러한 결과는 수시를 이용하여 대학에 진학한 여러 최상층의 케이스와 모순됨. 수시는 상층에 유리하고 정시는 흙수저에 유리하다는 최근의 인식과도 다름. 하지만 어떤 면에서 이러한 결과는 현실과 부합함. 논문에서 리뷰했듯 예전의 연구를 보면 상층이 표준화된 시험에서 항상 유리하였음. 

 

그럼 한국에서는 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한국에서 유독 정시가 하층에 유리하다는 인식이 퍼져있는 이유에 대해서 저자들은 매우 재미있는 해석을 제시함. 

 

수시는 하층에 유리한 여러 제도적 장치를 제공하고, 최상층(=금수저)은 자신들의 네트워크와 자원을 이용하여 바늘구멍인 수시의 구멍을 뚫는데, 여기에 끼인 최상층이 아닌 상층(=은수저)이 수시제도보다는 정시제도를 선호한다는 것. 

 

이를 조금 비틀어보면 교육제도에 대한 논의는 금수저 vs 은수저(or 다이아몬드 수저 vs 금수저)의 논쟁이라서, 그 밑의 계층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아예 공론의 장에 들어와 있지도 않다는 것. 서울대, 고대 등의 시위도 금수저를 향한 은수저의 분노였던 것. 

 

하층이 정시를 선호한다는 것은 최상층 대비 상층이 정시를 선호한다는 것의 뒤틀린 표현. 강남에 있는 아파트 대출 갚느라 가난한 서민의 애환을 그리는 하우스푸어 기사와 다를 바 없음. 한국은 입시제도를 비롯한 다양한 정책 논의 공론장에서 하층의 실제 선호를 지운 나라가 아닌지. 

 

 

 

 

Ps. 주관적 계층이 아닌 객관적 계층(=소득, 재산)으로 보면 다르지 않냐고 물어볼 수도 있는데, 저자들은 객관적 계층으로도 모두 분석해서 부록표에서 제시. 결과 안달라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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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김민아 칼럼

 

조국과 그의 자녀 특권 문제는 계급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경향신문 칼럼. 

 

여러 우수한 연구들이 상당히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고, 꽤 많은 계급,계층론 전공자가 동의하는 지점이 바로 한국에서 기회평등은 악화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선되었다는 것. 일반적 인식과 다르고 결과가 섹시하지 않기 때문에 언론에서 잘 보도하지 않음. 직관과 다른 이 결과를 이해할려면 상당한 통계적 지식도 필요해서 더더욱 제대로 보도되지 않음. 대신 개천에서 용이 안난다, 흙수저론과 같은 현실과 다른 자극적인 논의만 확대 재생산되는 중. 

 

최성수, 이수빈 <한국사회학> 논문

 

예전에 소개했던 최성수, 이수빈의 "한국에서 교육기회는 점점 불평등해졌는가?"라는 논문에 따르면 세칭 명문대를 제외하면 부모의 학력에 따른 그 자녀 세대의 학력불평등 격차는 의미있게 증가했다고 할 수 없음. 

 

정인관, 박현준의 최신 SSR 논문

 

학력만 그런 것이 아님. Social Science Research 최신 호에 실린 정인관, 박현준의 연구에 따르면 교육팽창으로 인하여 한국에서 부모 계급과 자녀 계급의 상관성은 하락하였음. 

 

부모 계급과 자녀의 계급 상관성은 두 가지로 요소분해할 수 있음. 하나는 구조적 요인 (structural mobility), 다른 하나는 순수한 사회 이동 (fluidity 또는 relative mobility 또는 circulation mobility).

 

구조적 요인은 경제발전으로 인하여 평균 소득이 높아지고 직업 구조가 고도화되면 설사 부모 세대 내에서의 "상대적" 지위(=등수)와 자녀 세대 내에서의 상대적 지위에 차이가 없더라고, 자녀 세대의 사회이동이 높아지는 현상을 나타냄. 

 

부모가 그 세대 내에서 하위 40%고, 자녀도 그 세대 내에서 하위 40%일지라도 부모 세대는 농사꾼이었지만, 자녀 세대는 화이트칼라 회사원이 됨. 이 경우 계급의 상대적 지위는 부모와 자녀 세대에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마치 계급이동이 활발한 것처럼 느껴짐. 

 

이와 대비되는 순수 사회이동은 쉽게 설명해서 구조적 요인을 통제하고 부모와 자녀 세대의 등수에 변화가 있는지를 보는 것.

 

정인관, 박현준의 논문에 따르면 부모-자녀 계급의 순수한 사회이동은 1950-1984년 코호트를 걸치면서 계속 증가하였음. 개천에서 용이 나는 확률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었음. 아래 그림에서 로그선형 모델이라는 기법으로 분석했더니 부자 간의 계급 상관이 1950-54년 코호트를 1로 봤을 때 최근 코호트로 올수록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음. 

 

 

이렇게 순수 사회이동의 확률이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이동이 줄었다고 느끼는 것은 고도성장 시기를 지나서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었기에 구조적 이동이 줄어든 것. 개천에서 용이 안나는 듯이 느끼지만, 사실은 개천이 줄어서 그런 것. 옛날에는 개천 밖에 없었기에 용이 났다하면 다 개천에서 나지만, 지금은 개천이 별로 없어서 용이 개천에서 안나는 것. 

 

여러 반론이 많겠지만, 위 두 논문보다 신뢰할만한 대규모의 다른 자료를 사용한 연구 결과도 충격적일 정도로 한국 사회에서 계급 이동이 활발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전해 들었음. 데이터 보안이라고 이런 연구는 공개할 수 없으니 참... 

 

순수 사회이동이 높다고 이상적인 사회인 것은 아님. 사회학자인 Torche의 연구에 따르면 칠레는 굉장히 불평등하지만, 순수 사회이동은 높음. 경제 위기로 사회 전체가 쫄딱 망하면 구조적으로 모두가 하향이동하면서 순수 사회이동도 높아질 수 있음.

 

순수 사회이동 확률이 높다는 것은 개천에서 용이 나는 확률이 높다는 것 뿐만 아니라 부자가 망해서 개천으로 떨어질 확률도 높다는 것. 한국에서 순수 사회이동 확률이 높기 때문에 중상층 이상에서 자신의 지위 유지를 위한 노력도 높아질 수 밖에 없음. 떨어지면 바닥이고, 다른 사회보다 떨어질 확률이 높으니, 기를 쓰고 지위 유지를 할려고 하는 것. 

 

이 때문에 최성수 교수는 한국 사회는 계급이동의 경직성이 문제가 아니라, 계급이동이 활발해서 오히려 계급의 정체성을 못받아들이고 모두가 경쟁에 뛰어들어서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사회라고 진단.

 

기회가 평등해서 도리어 불행한 사회가 되는 아이러니. 즉, 높은 불평등과 연동된 기회평등은 필연적으로 경쟁 심화를 동반함.  

 

그래서 사회변화의 기획을 기회평등의 기획이 아닌, 결과 평등의 기획, 계급적 격차 축소로 바꿔야 한다는 것. 올라가도 너무 올라가지 않고 떨어져도 너무 떨어지지 않는 사회로 바꿔야 한다는 것. 결과평등이 있어야 기회평등이 가져오는 경쟁심화 계급격차의 심리적 불행 격화라는 아이러니를 극복할 수 있음. 

 

 

 

 

Ps. 반론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 명문대와 최상의 지위는 달라요일 것. 대학 졸업, 전문직/관리직 같은 넓은 의미의 지위 획득은 계급 간 이동이 높아졌지만, 명문대와 최상위 지위는 계급 간 벽이 더 높아졌을 것이라는 지적. 타당한 지적일 수 있음. 하지만 이를 알려면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의 명문대 효과를 같이 볼 수 있어야 함. 김민아 칼럼에서 언급한 정도의 통계로 검증하기 어려움. 

 

기존 연구에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능력에 따른 sorting 문제도 있음. 과거에는 부모 세대에서 능력에 따른 학력 sorting이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현재의 부모 세대는 능력에 따른 학력 sorting이 더 잘 되었을 수 있음. 기회가 평등해지고 능력에 따른 sorting이 과거보다 더 잘 이루어지고, 많은 능력이 유전이면 사회이동은 떨어짐. 

 

Pps. 또 다른 반론으로 한국의 불평등은 타 국가보다 심하지 않다는 것이 있음. 그럴 수 있음. 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서 하위 10~20%는 다른 국가보다 상대적으로 더 지위가 낮다는 것이 여러 자료에서 일관되게 증명됨. 계급지위가 하락해서 나락으로 떨어지면 끝없는 추락임. 

 

Posted by 바이커 sovidence

"노오력"을 강조하는 분들이 마치 노력은 개인의 achieved characteristics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거 아님. 

 

부모로 부터 재산을 물려받듯, 부모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자녀에게 지위를 물려주듯, 개인의 능력의 상당 부분은 유전되는 것. IQ만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노오력도 유전임. 

 

사회과학에서 노오력을 "grit"이라고 표현함.  인내라고도 번역하고, 이를 악물고 빠득거리는 성격이라고도 번역하는데, 이 단어는 인내, 일관성, 열심히 노력, 지치고 않고 계속함, 미래지향적인 목표의식 등등을 포괄하는 단어임. 

 

영국학자들이 grit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을 가정 환경과 유전으로 나눠서 봤더니만, 제일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라 유전 (전체 논문은 요기). 유전과 노력의 상관관계가 86%. 양심도 유전임 (논문은 요기). 같은 집에서 자란 이란성 쌍둥이와 다른 집에서 자란 일란성 쌍둥이를 비교했더니만 환경에 관계없이 일란성 쌍둥이의 소위 virtuous behavior의 상관성이 더 높음. 

 

그러니까 머리가 나쁜 것도 상당 부분이 부모 탓이고, 노력을 안하는 것도 상당 부분이 부모 탓. 양심 없이 행동하는 것도 부모 탓. 키크고 미모가 뛰어난 것만 유전이 아님. 

 

인종차별의 근거가 되었던 우생학과 다를 바 없다고 느껴지는 이러한 결과들이 최근에 대규모 DNA 정보를 사회과학자들이 분석할 수 있게 되면서 속속 드러나고 있음. 앞으로 이런 발견이 더 많아질 것으로 예상함. 

 

그런 측면에서 능력주의는 가장 상속에 기반한 불평등을 지지하는 논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님. 부모 잘 만난 것도 능력이라는 정유라의 주장이 능력주의에 대한 최근의 사회과학적 발견과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일치. 

 

물론 이런 발견도 다 정도의 문제. 세상에 100% 유전이라는 주장은 하나도 없음. 우리가 과거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개인의 선택이 사실은 선택이 아니라는 것. 우리가 과거에 생각했던 개인의 노력이 생각보다 훨씬 더 부모와 독립적이지 않다는 것. achieved characteristics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이 사실은 ascribed characteristics임.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사회학자 마이클 영의 비판은 바로 이 지점임. 능력주의를 끝까지 밀어붙였더니 상속주의가 되고 만다는 것. 

 

그러면 대안은?

 

이건 사회과학적 문제라기 보다는 철학적 문제임. 인간이 평등해야만 하는 과학적 이유는 없음. 사람은 다름. 능력에 상당한 격차가 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언적 의미에서라도 인간은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철학적 선택임. 지금처럼 보통선거권을 부여하고 법 앞의 평등이라는 관념도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 옛날 사람들은 현대의 사람과 본능과 양심이 달라서 신분제를 채택했겠음?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의 불평등이 용인할만한 불평등인지는 집단적 선택의 문제임. 어떤 능력을 보상하는지도 사회적 결정인 것과 마찬가지. 사농공상일 때는 사람들이 멍청해서 그렇게 했겠음? 지금은 STEM을 전공하면 보상받지만 옛날에는 천한 것들이나 하는 일이었음. 발재간이나 좋은 호날두가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이유는 뭐임? 능력도 다 운 때가 맞아야 보상받는 능력이 되는 것 (g-factor라고 능력은 한 가지 지표로 환원된다는 사람도 있기는 함).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능력주의, 공평한 기회라는 신기루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깨고, 이 에너지를 공생, 박애의 기획으로 전환할 수 있을지... 이 문제가 담론 차원에서 진보의 가장 중요한 과제인듯. 

 

 

 

 

Ps. 번외 편으로 2017년의 통계 수치 몇 개 감상하시길. https://sovidence.tistory.com/854. 헌법에 써있는 법 앞의 평등은 잘 지켜지고 있는거죠? 

Posted by 바이커 sovidence

교육사회학 이론 중에 EMI (effectively maintained inequality)라는게 있음. 전세계적인 고등 교육의 팽창 속에서 상류층이 어떻게 자신들의 우월적 지위를 유지하고 교육을 통해 불평등을 재생산하는지에 대한 버클리 사회학과 교수 Sam Lucas의 탁월한 통찰이 담긴 이론. 

 

고등 교육이 팽창하면 상류층은 교육의 양보다는 교육의 질에 더 신경을 쓰고, 여러 경로를 통해서 자신들과 다른 계층을 구분지음. 이 구조 하에서는 집안 배경에 따른 전공과 대학 랭킹의 구분짓기가 과거보다 강화됨. 

 

그런데 이러한 구조를 재생산하는 방법으로 최근에 활용되어 온 것이 "기회비축 (opportunity hoarding)".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Richard Revees 가 그의 책, Dream Hoaders에서 제시한 컨셉인데, 미국에서 상위 10%의 중상층이 어떻게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 교육, 인턴쉽, 연구조교, 견학 등의 기회를 배타적으로 비축하고 계급을 재생산하는지에 대한 개념. 

 

불법적으로 성적을 조작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그걸 안하는 것도 아님), 중상층 이상에서 자신의 네트워크와 자원을 이용해서 자녀들에게 더 많은 인턴 기회, 더 많은 공동 연구 기회, 더 많고 더 나은 봉사활동 기회를 제공하고, 그렇게 쌓인 기회 속에서 자녀들이 "성취"를 이루고 결국은 경쟁적 노동시장에서 성공함. 

 

조국 법무장관 후보의 자녀 관련 논란을 보면 한국에서도 미국에서 일어났던 일이 그대로 재생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음. 유럽이 다르냐고 하면 그것도 아님. EMI 이론은 유럽에도 잘 적용됨.  

 

그렇다고 옛날에는 이런 기회비축이 없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님. 다만 행태가 달랐음. 지금은 여러 경로를 통해 기회를 배타적으로 비축하고 그렇게 배타적으로 비축된 기회를 통해 형성된 경력을 통해 인적자본을 재생산하고, 궁극적으로 계급을 재생산하지만, 과거에는 기회비축을 통해서가 아니라 날 것 그대로 돈의 힘으로 재생산 했음. 뒷돈으로 경기고 진학하고, 명문대 나왔다는 케이스가 부지기수. 그나마 기회비축을 통해 재생산하는 행태가 기회균등의 측면에서 진일보한 것임. 

 

교육을 통한 불평등 유지 이론의 가장 큰 정책적 함의는 상류층은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들의 우월적 지위를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내고야 만다는 것. 아무리 체제를 정교하게 짜더라도 모두에게 평등하게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는 그런 시스템은 불가능함. 

 

애초에 가족배경에 따라 동원 가능한 인적, 물적, 문화적, 사회적 자원이 다르고, 모든 부모가 자신의 자녀의 성공을 바라고, 자신이 가진 자원을 투입할 의지가 있음. 이 불평등 구조 하에서 계급재생산을 위한 개개인의 창의성은 기회균등을 위한 제도적 견고함을 가뿐히 뛰어넘게 되어 있음. 

 

조국 법무장관 후보와 그 자녀는 이러한 사회적 구조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던 구성원 중 한 명. 교육을 통한 계급재생산 과정에서 자신이 얼마나 의지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개입했는가는 따져볼 수 있겠지만, 이 구조 내에서 자신의 이익극대화를 위해 행위했고 이 구조를 벗어나는 행동적 실천을 보여주지는 않았음 (이 실천이 공직의 필요조건인건 아님). 

 

뭐 결론은 늘상 하는 얘기임. 기회균등의 기획은 실패했고, 앞으로도 성공하기 어려울 것. 

 

선택은 결과의 평등을 촉진시켜 기회균등의 중요성을 낮추거나, 지금과 같이 떠들석한 굿판을 계속 벌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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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포스팅에서 지나가다님이 댓글로 일제에 대한 투쟁이 세상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사람은 체제가 몇 번이나 바뀌었는데도 이러고 있냐고 지적. 

 

요즘의 반일 여론몰이에 좀 짜증이 나셨네 본데, 상당히 이해가 되는 면도 있음. 현정부의 반일 여론몰이가 아슬아슬한 수위에 있음. 게다가 문대통령의 남북협력 평화경제 발언은 충분히 비웃음을 살만했음. 

 

하지만 종북과 토착왜구는 동일 선상의 문제가 아님. 반공이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던 시대는 지나가버렸지만, 반일반제는 여전히 한국을 규정하는 큰 요소임. 

 

아래 포스팅에서 변화하는 체제에 대해 얘기했으니 이 번에는 변화하지 않는 체제에 대해서. 

 

 

 

1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는 국민국가 시대로 접어들었고, 여러 문제를 노정하고 있지만 아직도 세계는 국민국가 체제(nation-state system)임. 조만간 이 체제가 바뀔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됨. 2차대전, 1960년대, 소련 붕괴로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세계체제라는 측면에서 국민국가 체제는 약화되기 보다는 오히려 강화되었음. 20세기의 체제변화는 모두 제국에서 국민국가로, 이념대립에서 국민국가로 바뀌는 과정이었음. 

 

현재 벌어지고 있는 많은 문제와 갈등이 이러한 국민국가체제의 강화와 세계화 간의 모순에 기인함. 미중갈등도 세계화와 국민국가체제의 모순에서 벌어지는 일. 예전에는 세계화가 불가역적 현상이고 따라서 국민국가체제를 뛰어넘는 다른 체제가 등장할 것으로 은근 기대했음. 하지만 이런 기대가 글로벌 엘리트들의 순진하고 안일한 생각이었음이 드러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음.  

 

모든 개인의 권리, 천부인권도 오직 국민국가에 기반해서 지켜지고 보호되는 것. 보편적 인권의 개념이 확산되기는 하였으나, 국가에 속한 시민권에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람. 국제기구는 국민국가들 간의 합의의 산물. 특히 미국이 주도한 세계질서의 산물이었음. 그런데 미국이 여기에 딴지를 걸고 있으니... 국민국가 간의 합의나 규약은 지킬려고 노력은 하지만 안지켰을 때 강제할 수 있는 궁극적 폭력적 수단이 사실상 없음. 현재의 세계체제에서 궁극적 행위자는 국민국가임. 

 

이 국민국가 체제에서 2차 대전 이후 이루어진 대한민국이라는 (분단된) 국민국가는 반일반제국주의 전통에 기반하고 있음. 

 

제헌헌법서 부터 시작해서, 4.19 헌법, 유신헌법, 5공 헌법, 현재의 헌법에 이르기 까지 10번에 걸친 모든 헌법 전문 첫줄은 3.1운동으로 시작함. 대한민국 건립의 기반이 3.1운동임. 반일반제국주의 인민항쟁의 이념과 정신을 이어받아 건립한 국가가 대한민국임. 

 

국민국가 간 경쟁에서 한국이 일본을 여전히 추격하는 입장이라면 반일반제국주의라는 국민국가 건립의 이념적 기반은 쉽게 사라지기 어려움. 더욱이 지금처럼 세계화가 퇴조하고 국민국가 간 경쟁이 격화된다면 이 건립이념이 약화될 가능성은 희박함.  언젠가 미국과 영국의 관계처럼 한국과 일본의 역관계가 바뀌면 한국도 일제의 기억을 버릴 수 있겠지만. 

 

 

 

그런데,

 

전세계가 20세기를 관통하며 국민국가 체제를 강화했지만, 한국은 분단으로 인하여 국민국가의 완성이라는 목표를 아직 이루지 못한 상태.  

 

종북은 국민국가 완성의 방법론에 대한 갈등임. 예전에 체제경쟁을 할 때는 종북이 의미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의미가 상당히 상실되었음. 그러니 종북 vs 토착왜구의 구도로 가면 보수가 이기기는 어려울 것. 

 

모순되 보일지라도 <반일반제국주의라는 국민국가의 전통성 기반>을 받아들이고 <세계화 속에서 한국이 융성>한다는 점을 역설할 수 있어야. 

Posted by 바이커 sovid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