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조직

정치 2011. 10. 12. 17:49
중산층과 서민의 경제적 풍요와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진보적 아젠다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두 가지 조직이 필요했다.

하나는 정당, 다른 하나는 노조.

진보적 정당의 집권없이 진보적 아젠다를 실행한 경우도 없고, 노조의 강화 없이 진보 정당이 집권한 적도 별로 없다. FDR이 집권하여 진보적 정책을 실현하고, 유럽에서 사민주의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전에 쌓인 수많은 노조의 투쟁과 사회운동이 있었기 때문이고, FDR의 장기 집권은 그의 행정부가 노조와 소비자 단체의 조직화를 조장한 덕도 있다.

1970년대 이후의 전세계적인 보수화도 마찬가지다. 미국 보수층에서 하나의 조직이 떠오르고 뒤이어 다른 하나의 조직이 변화한다. 전자는 조직화된 자본의 등장, 후자는 공화당의 극보수화. 아버지 부시 시절에만 해도 공화당의 다수가 온건 보수였지만, 깅그리치의 하원 혁명 이후, 아들 부시를 거치면서 공화당은 레이건의 공화당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보수화되었다. 공화당의 보수화를 이끌어낸 것은 공화당 외부의 자본 조직이었다. (티파티를 추동한 것도 조직화된 자본이었다.)

정당만 굳건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지만, 역사적으로 그렇지 않았다. 정당이 힘을 가질려면 정당 외부의 노조나 소비자 단체 등 시민 조직 역시 힘이 있어야 한다. 전자의 정치와 후자의 사회운동이 결합할 때 진보 정치는 만개할 수 있다. 진보적 아젠다는 외부 환경의 변화에 따라 계속 변화한다. 이러한 변화에 맞추어 정당의 정강을 이끌어내는 것은 "깨어있는 시민, 노동자, 소비자의 <조직화된> 힘"이다.  한국에서 민주당 집권 10년 동안 이 점을 등한시 한 것은 실수였다. 

박원순이 결국은 무소속으로 서울시장 선거를 치룬다. 안철수, 박원순의 지지율은 조직화되지 않은 시민의 지지에 기반한다. 이런 식의 정치는 정당 조직은 형해화시키지만, 시민 조직은 나타나지 않는, 이 중의 조직 부재 현상을 낳는다. 조직의 부재로는 장기적 힘을 발휘하기 어렵고, 장기간 지속되는 힘없이 실질적 변화를 가져오기 어렵다.

한국의 촛불시위가 더 발전하지 못한 이유도 조직의 부재 때문이고, 워싱턴의 월가점령 시위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그렇게 희망적이지 않은 이유도 이들이 조직화되는 징후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강력한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있으면 정치적으로, 사회운동의 측면에서 일시적으로 유지할 수 있지만, 조직으로 발전하지 않으면 지속성이 없다. 지도자의 카리스마도 없으면 그야말로 오합지졸이 되기 쉽상이다.

안그래도 노조가 약하고, 소비자 조직도 약한 나라에서, 정당마져 무력화시키면 진보 정치의 미래는 암울해 진다. 민주당이 못봐주겠으면, 들어가서 기존의 구닥다리를 몰아내고 신진세력이 차지해서 고쳐놓겠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정당도 살고, 진보적 아젠다도 산다.
Posted by 바이커 sovidence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꼬마 2011.10.13 0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말씀하신 것에 공감이 됩니다.

    다만...정당들, 특히 민주당이 분발해야 할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조직이 대중을 빨아들이고 비젼을 제시해야지 개인들이 조직을 리드한다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이네요. 유권자들의 막연한 욕구와 희망을 민주당이 열심히 분석하고 대안을 창출해서 리드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계속해서 당 외곽에서 '구세주'가 강림하기를 바라는 대중들의 마음이 제2, 제3의 노무현, 조국, 문재인, 안철수, 박원순을 불러들일 것 같아요...

    • 바이커 2011.10.14 00:48  댓글주소  수정/삭제

      구세주의 강림은 많은 나라에서 바랍니다. 당의 외곽에서 나타나도 당의 내부를 갈아치우는 구세주로 등극하는게 다를 뿐이죠. 민주당이 흔들리는 이유는 민주당이 못해서인 것도 있지만, 지지기반의 불안정성이 제가 생각하기에는 근본원인입니다.

  2. 기린아 2011.10.13 19: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 3세력의 존재가 과연 '진보 쪽'인지에 대해서도 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시다시피 제 3세력의 계보는 박찬종 - 정회장 - 이인제 - 정몽준 등등인데, 이 라인의 특징은 절대 민주당이나 진보세력에 가깝지 않았지요.

    세칭 시민단체 쪽이 이런 제 3세력 혹은 무당파를 그 근간으로 삼고 있다면 (즉 양당체제에 대한 불만을 그 에너지로 삼는다면) 그분들이 굳이 진보일 이유도 진보연할 이유도 없는거죠. 실제 박경철씨만 해도 민주당 찍은적 없다고 했고... (그분이 민노당 찍어서 그런 말을 한건 아니구요.)

    따라서 말씀하신 사회운동 세력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에 따라서 정당과 정당외부의 조화라는 스토리도 많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노조라면 나름 정치적 지향성이 뚜렸하겠지만, 시민단체는 그 자체로는 딱히 진보적일것 같지는 않습니다.

    • 바이커 2011.10.14 0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무당파 얘기하는거 아니고요, 시민단체가 무당파를 근간으로 삼고 있다고 보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가끔 그렇게 나타날 때가 있는거죠. 현재의 시민단체에는 시민이 없다고도 하죠. 조직이 아니라 명망가, 지식인들의 사랑방 모임 비슷한.

      한국에서 유의미한 사회운동 세력은 대학 총학생회, 노조였죠. 둘 외에 가능성이 있는 단체는 환경운동, 소비자 단체, 여성운동 모임. 이런 단체가 광범위하게 조직이 되면 진보성을 띌 가능성이 높습니다.

    • 기린아 2011.10.16 02: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무당파 이야기를 하시는게 아니면, 구체적인 대상을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의 환경운동은 초 마이너 운동이고, 여성운동은 진작에 양당에 다 포섭되어 있는 상황이고, 소비자단체 운동은 현재로서는 정치적 지향점이 잘 보이지 않죠.

      진보의 양축으로서의 당과 외부 운동을 논하시는건 알겠는데, 그 외부운동의 대상이 말씀하신걸 들어보면 없지 않습니까? 꼭 이 글이 아니더라도, '운동으로서의 정치'를 자주 이야기 하셨습니다만, 그 대상을 저는 잘 모르겠네요;;;

    • 바이커 2011.10.16 17: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범민주당 지지자 내부의 역학을 얘기하는 겁니다.

      한국에서 양당정치는 경향적으로 존재하나, 공고화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특히 민주당은 한나라당에 비해 원심력이 큽니다. 과거에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세력의 에너지를 흡수하고 이들의 요구를 새로운 피 수혈로 당에서 수용하는 메카니즘이 존재했으나, 지금은 그런게 상당히 약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당은 운동권이 아니고, 운동권은 민주당이 아닌 다른 당을 지지한다는 분위기가 된다든지, 민주당 지지세력이 시민운동세력을 적대시내지 경멸시하는 분위기가 지속되면, 사회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이 민주당을 지지해야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변화가 없을 바에야, 기득권자들의 네트웤에서 떡고물이라도 먹을 수 있는 한나라당 지지가 다수의 사람들에게 이득이죠.

    • 오그드루 자하드 2011.10.17 04:26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기린아 님의 말씀에 좀 더 동의하는 편입니다. 가령 박원순의 과거 발언들을 볼까요?

      http://news.donga.com/3/all/20111017/41149989/1
      “촛불집회도 조금은 유연하게 방향을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민주노총 지지하는 사람과 참여연대 지지하는 사람이 똑같으면 안 된다고 봅니다.”

      http://www.hadream.com/zb40pl3/zboard.php?id=03move&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5&PHPSESSID=a0e63665a255b058eb13
      <박원순 변호사는 끝내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말이 그렇게 들렸다면 내가 오늘 여기에 온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고 웃으며 받았다. "참여연대 가입원서 가지고 왔으니 많이 가입하시라"고까지 했다.>

      이쯤되면 시민운동세력이 '조직화된 노동'에 우호적인지, 아니 애초에 이들이 진보적이었는지 의문이 드는군요.

    • 바이커 2011.10.17 07:35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그드루 자하드/ 저도 박원순 후보를 딱히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런 식으로 공격하는 건 좀 불편하군요. 민노당이 민주당 공격할 때 써먹던 방식 아니던가요? 노동운동에 대해 비우호적인 발언으로 치면 손학규 대표의 과거 발언들이 훨씬 더 심하거든오.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했어요.

    • 오그드루 자하드 2011.10.17 10:51  댓글주소  수정/삭제

      1. 그래서 저는 민주당도 완전히 믿지 않습니다. 김주익, 이랜드, 콜트콜텍, 기륭전자..... 다 어느 정권 때였습니까?

      2. 하종강의 경험담은 그렇다쳐도, 촛불시위에 대한 생각도 그렇다 치더라도, 무려 2009년이라는 것도 넘어가더라도, "민주노총 지지자"가 "참여연대 지지자"보다 열등하다는 뉘앙스가 느껴지는군요. 적대하려면 그냥 적대하는 게 낫습니다. 이래서야 '적과의 동침'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박원순의 머릿속에서 민노총은 참여연대보다 열등한데 말입니다.

  3. .... 2011.10.23 05: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에서 한 6개월 정도 체류하시고 한국 정치글을 쓰신다면 좋을텐데...
    좀 안타깝네요...

    아마 이 분에게는 노빠,유빠, 그리고 몇몇 트위터쟁이의 쇼가 '운동'으로 다가오신 듯..... 아무리 봐도 무브온의 아류.... 그나마도 요즘 무브온이 미국에서 먹어주긴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