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북 포스팅을 보고 드는 생각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사안에 대해서 일관된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견지하지 않는다. 때로는 이러한 이념적 다양성을 자랑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러 사안에 대한 자신의 의견이 정치적 스펙트럼의 어느 한 분파에 일관되게 속하지 않고 다양하다면 셋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철학이 부재하거나, 사안별로 잘 모르거나, 둘 다거나. 저 자신도 진보-보수의 스펙트럼에서 사안별로 의견이 뒤섞여 있는데, 저의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가장 먼 의견을 가진 사안은 제가 가장 잘 모르는 분야다. 예를 들면 환경이나 원자력 등.
정치인들이 당파에 따라 일관된 의견을 가지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분들의 철학적 깊이와 사안 이해의 넓이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이 경지에 이르기 어렵다. 특정 분야 전문가들이 스카웃되어서 정치할 때 황당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자기 분야 외에는 모르기 때문이다. 정치혐오는 어설프게 아는 분들이 가장 세다. 세상만사에 대한 이해의 일관성, 이념적 일관성을 확보하는건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렵다.
그렇다고 모든 입장이 정해져 있다는 얘기는 당연히 아니다. 모든 정치인들이 깊은 이해가 있다는건 더더욱 아니고. 비슷한 철학과 이념을 가져도 새로운 사안이나 환경이 출현하면 해석에서 차이가 날 수 있고, 철학과 이념의 일관성에 정합적인 노선을 찾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정치는 현안을 다루기 때문에 비슷한 철학과 이념을 가져도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당파별로 대립되는 주제에서 정치인이 자기 노선과 이탈된 의견을 가질 가능성은 낮다. 이건 논리의 문제다. 같은 당에서 주요 노선에 변화를 가져올려면 노선투쟁을 한다. 이념적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사안에 대한 대응을 달리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베버가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얘기한 정치인의 세가지 자질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 중 열정은 "근원(대의)에 대한 헌신"이다. 영어로 "passionate devotion to a 'cause'"라고 하는데, cause는 궁극적 진리라고 해석해도 저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논리적 일관성이 없으면 이게 안생긴다. 그러니 같은 당에 속한 사람은 두리뭉실하게 잘 지낼 수 있는 동무가 아닌 뜻을 같이 하는 "동지"가 아닌가.
정치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협하고 절충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본다. 하나는 자신의 철학과 이념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현실 세력을 조정하고 타협하는 훈련이 잘 되어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입장이 다른 사람의 철학적 바탕도 이해하기 때문이다. 전자와 관련해서 베버는 책임윤리를 들고온다. 이념의 노예가 되지 않고 유연하다는게, 한편으로는 책임윤리의 발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의 빈곤에 기인한 기회주의, 베버의 용어를 다시 빌리면 신념윤리 부족의 특성일 수 있다.
그러니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성이란, 사안별로 자신의 이데올로기와 다른 다양한 의견을 가진다는 것이 아니라, 이념적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책임윤리에 기반하여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좋은 정치인은 이념적 일관성을 정책적 유연성으로 풀어내는 사람이다.
베버는 정치인이 피해야할 악덕 중 하나로 허영(vanity)을 든다. 허영이란 <객관성>이나 <책임감> 없이 가장 선명하게 앞장서서 자신을 드러내서 어떤 "인상(impression)"을 주는 행위를 일컫는다.
그런데 베버는 허영은 학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직업병으로 상대적으로 해롭지 않은 질병으로 간주한다. 증거도 별로없고 알지도 못하면서 선명하게 들이밀어도 그 자체로 학문적 발전에 크게 영향을 안끼친다고.
그러니 제가 아무런 객관성과 책임감 없이 정치적 입장을 선명히 드러내고 다른 사람을 비웃으면 학문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이려니... (후다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