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일: 3세 경영 혹은 재벌 경영의 진짜 문제는, 재벌 가문이 산하 계열사 전체를 사실상 지배하지만, 문제가 발생할 때 이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최근 삼성의 전략기획실이 부활했고, 앞으로는 3세가 이를 통해 그룹 계열사들 모두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전략기획실은 법률(회사법)적으로 규정된 조직이 아니며, 이에 따라 법률적 책임을 질 필요도 없다. 결국 필요한 것은 (3세와 전략기획실의) 법률적 책임을 분명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이다. 그래야 재벌 후계자들이 쓸데없이 계열사에 개입한다거나 무분별한 경영을 안 하게 된다. 책임질 자신이 없으면 경영 일선에 나서지 말라는 것이다.

벨기에의 로젠블룸(Rosenblum) 판례법이 좋은 사례다. 벨기에도 대기업의 90% 정도가 기업 그룹 계열사다. 이런 기업 집단의 최상층에는 거대한 순수지주회사(다른 기업들의 지분을 갖고 지배할 목적으로 설립되는 회사)가 있다. 그리고 이 순수지주회사는 금융감독 기구의 감독을 받는다. 즉, 벨기에의 금융감독 당국은 대기업 그룹의 ‘전략기획실’이랄 수 있는 순수지주회사에게 분기별로 전체 그룹의 재무 및 경영 상황을 보고받고, 사장 등 이사 선임을 할 때 거부권까지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금융감독 당국 뒤에는 국회가 있다. 우리도 재벌 후계자 문제를 가지고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이처럼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제도적 장치를 모색해야 한다.
장하준, 정승일 대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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