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에 나는 계몽주의자였음. 교육(내지는 정보 공유)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세월이 걸리지는 않았음. 


현재는 제도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음. 제도(규칙)를 바꿔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 


여성차별과 혐오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제도를 어떻게 바꿀지 목표를 정하는 것. 구체적인 목표가 없이 인식을 제고하는 운동은 허망하게 끝나기 쉬움. 


예를 들어 미국에서 Occupy Wall Street 운동이 한창일 때, 내가 재직 중인 학교에서도 Occupy KU 같은 연대 운동이 있었음. 친한 제자가 이 운동을 주도하고 나에게 도와줄 것을 요청했는데, 나는 그 때 이 운동은 흐지부지 끝날 것이라고 얘기했음.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번째는 운동의 구체적인 목표, 요구사항이 없기 때문. 두번째는 운동을 이끌어가는 조직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 


한국에서는 예전에 촛불집회가 흐지부지된 것과 유사함. 


지금 들끓고 있는 여성차별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 여성혐오에 대한 인식 제고 효과는 분명히 있으나 지도 그룹이 없고 구체적인 제도나 정책적 요구사항이 (내가 과문한 탓인지 아직은) 없는 듯. 


남성계몽으로 남녀평등이 이루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남성의 인식이 바뀌어서 여성차별이 폐지되는게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남녀 평등이 상당히 이루어진 후 어쩔 수 없이 남성이 인식을 바꾸게될 것. 남성의 인식이 바뀌어서 유리천장이 깨지는 것이 아니라, 유리천장이 깨져서 여성을 보스로 모셔본 후 인식이 바뀌는 것. 


지금과 같은 모멘텀이 없었더라도 여성차별은 줄어드는 방향으로 변화할 것이고, 신여성의 사회진출은 계속될 것이지만, 기왕 모멘텀이 형성되었으니 변화를 촉진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요구사항이 나왔으면 좋겠음. 


예전에 군가산점 페지, 호주제 페지, 간통제 남녀 공동 처벌 등등이 제도를 바꿔 남녀 평등을 촉진시켰듯, 남녀평등을 한차원 높이기 위해서 지금 필요한 제도적 변화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요구했으면. 


지금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20-30대 여성이 노동시장에서 계속 남아서 경쟁하기 위해서 필요한 제도적 장치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했으면 좋겠다는 것. 경력 단절 후 재진입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경력단절을 막기 위한 정책적 요구들. 


그래야 정치권에서도 그 요구를 받아들여서 공약을 할 것. 

Posted by sov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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