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련의 사태를 겪기 전까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규범과 이를 체화한 두터운 관료, 시민층이 한국에 형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계엄에 저항했던 군인과 홍장원 등을 보면서 그 생각에 추호도 의심이 없었다. 그런데 불법 계엄과 그 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 그리고 어제 윤석열의 석방을 보면서 한국에서 국가와 시민사회의 균형, 민주주의 제도를 가능케했던 동력은 어디에 있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많이들 알고 있듯, 애쓰모글루와 로빈슨은 <국가의 실패>와 <좁은 회랑> 논의에서 제도(institution)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제도는 법률, 정부 조직 같은 형식적 제도 뿐만 아니라 문화와 관습, 사람들의 믿음 같은 비형식적 제도를 포괄한다. 형식적 제도는 그 자체로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모든 제도는 허점이 있다. 그 허점을 악용하지 않고, 제도의 취지에 따라 작동하도록 만드는건 그 제도 내에서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들의 태도, 관습, 문화다. 둘은 물론 같이 발전하는 것이지만, 사회학에서 베버의 자본주의 발전론은 그 중에서도 비형식적 제도, 문화의 중요성에 주목했다. 저는 이 부분의 중요성을 간과하다가 최근 생각이 좀 바뀌었다.
어쨌든 1987년 이후 지난 40년 가까운 지속적 실행을 통해서, 한국에도 민주주의의 형식적 제도 뿐만 아니라 이를 지탱하는 문화와 관습이 확립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도 좁은 회랑에 들어섰을 뿐만 아니라 이미 그 회랑이 상당히 넓어지는 우상향 분면에 들어섰다고 생각했다. 국가의 제도적 민주성과 이를 실행하는 엘리트와 시민사회의 문화적 수용성이 상당히 괜찮은 긴장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한국이 좁은 회랑으로 들어선 동력이 국가와 시민사회와 더불어 제3의 요인인 외세가 있다면? 그러니까 한국이 권위주의나 대혼란으로 빠지지 않고 좁은 회랑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동력이 내적 역학 뿐만 아니라 미국의 개입이라는 외적 동력이 상당히 중요했고, 지금도 중요하다면? 한국의 엘리트와 행정, 사법 권력이 민주주의 문화를 체화하지 않았고, 그럴 의향도 없지만, 한미 특수관계에 의해서 형식적 제도의 작동이 강제되었고, 그게 지금까지는 엘리트와 권력자들의 이해와 일치했지만, 더 이상은 아니라면? 달리 말해, 시민사회와 국가권력의 균형이 유지되었던건, 양자의 건강한 상호작용이 다가 아니고, 외세의 개입이라는 제3의 변수가 권위주의로 빠지는 않도록 무게 중심을 옮겼고, 한국의 엘리트와 권력자들이 여기에 순응했기 때문이라면?
1987년 민주화 당시 전두환이 계엄을 하지 못한 이유 중 미국의 압력이 있었다는건 잘 알려져 있다. DJ가 박정희에게 암살당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도 CIA의 개입이다. 적어도 트럼트 이전까지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의 리더였다. 미국이 가진 제국적 힘의 원천에는 권위주의 대비 자유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우월성, 그러니까 소프트파워도 한 자리하고 있다. 미국의 악행도 헤아릴 수 없지만, 적어도 친미인 한에서는 민주주의 국가를 권위주의 국가보다 선호하는건 분명했다. 중국이 미국과의 경쟁에서 밀리는 이유 중 하나도 소프트파워다. 경제력 외에 중국 체제를 선호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트럼프 이후 한국을 좁은 회랑으로 강제했던 제3의 힘이었던 외세가 트럼프 이후 더 이상 개입하지 않고, 오히려 권위주의적 체제로 가는걸 촉진하는 힘이 되고 있다면? 계엄 직후 한국이 법률적 과정을 통해 질서를 회복하기를 바란다고, 내정간섭에 가까운 개입을 했던 바이든 정부의 미국은 더 이상 없다. 트럼프의 미국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서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도 낮다. 불법 계엄을 해도 40%가 여전히 지지하고, 보수가 똘똘 뭉쳐서 오히려 세를 확장할 수 있고, 설사 여러차례 구속이 정당하다고 판단을 받아도, 한 번의 기회를 통해 석방이 될 수 있고, 안보에 문제가 없고, 궁극적으로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한국 엘리트와 권력층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좁은 회랑에 굳이 머무를 이유는 뭔가.
이 상황에서 한국은 권위주의나 내전으로 떨어지지 않고 좁은 회랑의 우상향 분면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는 문화와 규범이 충분히 강한가?
여전히 설마라고 생각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