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분들이 소개했던 (예를 들어, 한겨레 기사) Levitzky & Ziblatt 의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뒤늦게 읽었다.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책이지만, 한국의 현재 상황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너무 잘 설명하는 책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권위주의 정권이 어떻게 선거를 통해서 집권을 하고; 민주주의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연속적인 일련의 조치로, 국민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무너지는지; 과거와는 다른 양상의 민주주의 후퇴를 잘 설명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헌법과 법률 뿐만 아니라 행위자의 규범이 중요하다는 것도 100% 공감하는 내용이다. 이 부분은 제도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회과학도에게는 아마 상식일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또 하나의 내용은 정치엘리트의 중요성이다. 듣기에 따라서는 당혹스러울 수도 있는데, 민주주의를 지키는데 더 중요한 것은, 적어도 게이트키핑이라는 측면에서, 국민의 민도가 아니라 엘리트의 역할이라는 주장이다. 극단적 선동을 일삼는 사람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고, 이들에게 호응하는 대중도 드문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가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부터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힘은 정당과 정당의 지도자들이 행하는 게이트키퍼로서의 역할이다. 정당의 지도자들이 게이트키핑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민주주의가 바로 무너지는 것은 아니지만, 민주주의는 극단주의자, 권위주의자의 위협에 벌거벗겨진체 노출된다.
미국에서 폴리티컬머신이라고 불리우던 지역의 정치지도자가 모든 후보를 좌우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런 비민주적 절차를 개선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가 프라이머리, 코커스 등의 국민참여 후보선출 제도다. 한국도 정당을 민주화하고 경선을 도입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들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프라이머리 제도가 트럼프의 등장을 가능케했다. 민주주의를 통해 무너지는 민주주의.
현재 한국은 국민의힘 지도부가 민주주의를 위한 게이트키핑을 하기보다는 앞장서서 계엄과 쿠데타를 옹호하고 있다. 얼마전 이재명 대표가 국민의힘이 100일 안에 윤석열을 부인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국민의힘이 윤석열을 계속해서 옹호하기 보다는 거리를 둔다면 오히려 긍정적 변화이다. 과연 그럴 것인가?
지난 3월1일 경향신문에 보도된 황인정 연구원의 인터뷰는 이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국민의힘이 극우세력을 신속하게 포용하면서 극우 노선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과는 다른 정치적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 이번 독일 총선에서 보수정당인 기독민주당과 바이에른 기독사회당 연합이 1위를 하고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2위를 했다. 기독민주당은 AfD와는 절대 연정하지 않겠다며 극우와 확실히 선을 그은 바 있다. 이 같은 선 긋기가 중요한데, 국민의힘은 그와 정반대로 가고 있어 향후 국민의힘 내에서 극우세력의 주류화가 공고해질 수 있다. ... 후폭풍이 오랫동안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설령 국민의힘 내에서 극우가 지배적인 세력이 되지 않는다 해도, 극우가 외부에서 계속해서 여론에 영향을 미치고 결집할 가능성이 높다. ... 더 강경한 극우 메시지를 내세우는 새로운 정치인이 등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헌재의 탄핵 선고가 인용으로 나와도 갈 길은 매우 매우 멀다.
Ps. 이 책에서 칠레가 미국이 지원했던 쿠데타의 어두운 과거를 멀리하고 1990년 이후 지난 30년간 모범적 민주주의를 펼치고 있다고 마지막 장에서 얘기한다. 희망적 사례인데, 칠레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전환점은 사회당과 기독민주당 정치지도자들이 모여서 합의한 "완전한 민주주의를 위한 전국 협정"이고, 그 내용은 주요 사안을 두 당간의 합의로 처리한다는 것이었단다. 현재 한국에서는 그 씨앗도 보이지 않는 내용이다.
Pps. 돌이켜보면 한국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양 당의 공유된 가치는 86운동권 세대가 양 당 모두에 포진하고 서로 친분을 유지했던 결과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영삼의 3당 합당이 이를 가능케했다. 이와 달리 현재의 여야 지도부는 출신 성분이 다르고 서로 간의 접점면이 과거보다 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