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괴감

교육 2010. 12. 31. 01:28
미국 연구중심 대학에서 교수들에게 강의란 피할 수 있는 데 까지 피하는 것이다. 신임교수들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중의 하나가 강의 준비 많이 하지 말라는 거다. 채점에도 시간을 보내지 말고. 연구비 지원을 받으면 학교에 일정 액수를 내고 강의를 면제받는다. 강의를 가장 적게하는 교수가 가장 훌륭한 교수.

겉으로는 강의와 연구를 모두 중시한다고 하지만, 연구중심 대학에서 (특히 신임) 교수 평가는 오로지 임팩트 높은 저널에 얼마나 많은 논문을 출간했는가로 결정된다. 나 역시 이런 태도를 가지도록 훈련받았다. 영어가 약한 외국인들이 미국 대학에 교수로 채용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의, 출제, 채점은 교수 생활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기말에 채점을 하다보면 내가 뭐하고 있는 건지 자괴감을 느낀다. 이 번 학기에 한 과목은 30%의 학생들에게 F를 주었다.

주의 flagship 대학이고, 돈은 없어도 똑똑한 학생들이 많이 오는 대학이지만, 학생 내부 편차가 너무 심하다. 어떤 학생은 담당 교수를 바꿔가면서 벌써 3학기째 똑같은 졸업 필수 과목을 재수강하고 있다. 학점이 낮아서 짤리면 2년제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학점을 따서 다시 입학하고, 또 F를 받고 짤리고... 많은 학생들이 대학 등록금이 없어서 대출을 받고, 리테일 샵에서 시간제로 일해서 등록금을 낸다. 그렇게 일하다보니 공부할 시간이 없어서 또 F를 받고. 능력없는 학생일수록 대학에 갖다 바치는 등록금 액수는 늘어난다.

대학교육을 받지 않아도 적당한 기술을 가르치고 그 기술로 먹고 살 수 있게 해주어야 할 텐데, 기술로 먹고 사는 체제는 없어져 버렸다. 대학의 중요성은 알기에 부득부득 졸업장을 취득할려고 하지만, 꽤 많은 학생들이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준비가 안되어 있다.

너는 능력이 안되니 그만 두라고 할 수도 없고... 점수는 안되지만 그냥 D를 줘버릴 수도 없고... 이게 미국 중고등학교 교육의 문제인지, 대학 교육의 문제인지, 대입 제도의 문제인지, 리소스를 많이 사용하는 미국 대학 체제의 문제인지... 능력이 안되는 학생들이 시간제 노동자로 일해서 피땀으로 모은 돈으로 내가 월급 받아먹고 있다고 생각하면 우울하다.
Posted by sov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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