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민주화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확보되었지만, 많은 386 운동권들이 사회주의 사회를 미래의 이상으로 그리고 있었음. 몸도 힘들고 정신도 힘들고 경제적으로도 어렵던 그 시절에 운동권들을 지탱해주었던 힘은 분노가 아니라 자신들의 소신이 옳다는 자기 확신과, 밝은 미래가 반드시 온다는 낙관주의였음. 


2008년의 경제 위기 이후 전세계가 권위주의와 테러리즘으로 변해가는 상황에서 미국의 리버럴리즘이 정책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중심을 잡아준 것은 큰 위로가 되었음. 


유럽, 일본, 러시아, 중국, 한국은 권위주의에, 중동은 테러리즘에 잠식당할 때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고, 중도 좌파적 정책을 관철시키는 패권국가의 존재는 권위주의와 테러리즘이 아니라 자유주의와 동반성장이 기대 가능한 미래라고 믿게 만들었음. 


유토피아적 미래에 대한 대안적 지적설계는 없지만 다양성을 존중하고 최저임금을 높이고, 의료보험을 확대하는 등의 점진적 변화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음. 


트럼프의 당선은 그러한 낙관적 기대가 무너지는 상황. 




많은 격변기가 있었지만 20세기의 정치적 변화는 여러 종류의 낙관주의로 가득차 있었음. 


내년 10월이면 러시아 혁명 100주년, 2차 대전 이후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신질서가 탄생했다면, 1차 대전은 Empire에 의해 지배되던 구질서를 무너뜨렸음. 사회주의가 대안 국가가 될 수 있다는 실제 사례를 소비에트 유니온이 보여준 것. 


1920년대의 Robber Baron 시절을 견디게 한 이념적 중심이 사회주의 국가의 존재였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움. 미국의 1920년대를 Roaring Twenties라고 부르는데, 이 시절은 전국적으로 노동쟁의와 소요가 끊이지 않았음. 이 시대를 견디게 해준 낙관주의의 원천이 바로 사회주의. 이 때의 사회주의는 사회과학계의 최고 천재 중의 한 명인 칼 맑스가 닦아놓은 지적 유산에 근거하고 있음. 


사회주의에 맞서서 자본주의 내부에서는 복지를 새로운 이념으로 내세웠음. 루즈벨트 이후 미국은 여러 복지 제도를 도입. 사회보장, 은퇴, 실업수당 등의 개념이 모두 이 때 들어왔음. 복지자본주의는 계급 투쟁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케인즈를 비롯한 리버럴리즘의 지적 유산임. 


2차 대전 이후에는 경제 성장과 복지 확대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의 황금기. 미래에 대한 낙관이 가득했음. 


혹자는 트럼프의 당선을 1980년 레이건의 당선에 비교함. 쇼비즈니스를 하던 레이건과 기존질서의 카터가 맞붙어 레이건이 이긴 선거. 하지만 양자를 그렇게 비교할 수 있는건지 모르겠음. 레이건 때는 1970년대의 인플레이션과 사회혼란에 대해 케인즈주의가 제대로 대응을 못하자, 통화주의와 시카고 학파가 보수의 새로운 지적 설계를 내세웠던 시기. 설사 보수라 할지라도 이념적 대안을 가지고 보수화되었던 시기임. 그것도 대안이라면 대안임. 1984년 레이건의 정치 캐치프레이즈가 Morning in America. 보수적 낙관주의였음. 




하지만 트럼프의 당선은 점진적 변화 외에 기존 질서의 다른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좌파 진영의 지적 실패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뼈아픔. 


기술은 발전하는데, 불평등은 증가하고, 국가 간의 평등은 높아지는데, 국가 내 계급 격차는 확대되는 상황에 대한 진보적 대안이 사실 별로 없음. 노동계급의 경제적 상황을 개선시키는 것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리버럴리즘이 거의 유일한 깃발. 그러니 사람들이 기대는 곳이 테러리즘과 권위주의, 자국 중심주의, 인종주의, 민족 중심주의.  


사회과학적으로 여러 분석을 할 수는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쉽게 이해하고 기대할 수 있는 깃발.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목표가 있는지는 모르겠음. 


한가지 위로 아닌 위로라면, 정상적인 우파에게도 지금 상황은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 어쨌든 공화당이 되어서 좋기는 하겠지만, 지금의 공화당 지지기반이 어디 우리가 알던 그 공화당임? 새롭게 공화당을 찍은 분노한 노동계급 백인들에게 무엇을 제시할 수 있을지 아이디어가 없기는 공화당 애들도 마찬가지. 


삶은 지속되겠지만 트럼프 당선의 충격을 벗어나는데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음. 심적으로, 지적으로... 

Posted by sovidenc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