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20대 남성 내부 다양성론에 대한 글을 쓴 후 몇 가지 직간접적인 반론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적지는 않았지만 아래 글에서 제 논리는 주로 20대 남성 내부의 개인 간 다양성론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런데 반론은 20대 남성 의견의 사안별 다양성이라는 개체 내 다양성론을 피더라.
저는 이 논리도 허약하다고 생각한다.
이 논리의 구조는 이렇다.
(1) 최근 20대 남성의 정치적 선택은 꾸준히 보수적이었다.
(2) 페미니즘은 항상 극렬한 반대다 (여성혐오, 미소지니 의심).
(3) 하지만 재분배, 성소수자, 탄핵, 계엄 등의 사안별로 보면 항상 극우적 내지는 보수적 의견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 마지막 관찰 때문에 20대 남성이 보수화 내지는 극우화되었다고 할 수 없다.
이 논리의 암묵적/명시적 전제는 (3)에 의해서 (1)이 바뀔 수 있다는거다. 그러니까 이 논리는 (1)의 지속성을 거부하고, (3)에 의해 (1)이 바뀔 수 있다는 희망회로를 돌리거나 (이를 "가능태론"이라 칭하자), (3)의 변수도 모두 보수적이지 않으면 (1)에도 불구하고 보수화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거다 (이는 20대의 성향을 알 수 없다는 주장이니 "불가지론"이라 칭하자). 여러 조금씩 다른 논리가 있지만 대부분 이 두 가지 범주에 속한다.
저는 가능태론과 불가지론 모두 허약하다고 생각한다.
먼저 가능태론이 왜 허약한지부터.
비교를 위해서 우선 20대 남성 펨코/일베화론의 논리 구조를 위의 변수를 통해서 살펴보자. 20대 남성이 일베화되었다는건, 20대 남성의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 반페미니즘이라는 주장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일베화론은 (2)가 설명변수이고 (1)이 종속변수인 인과관계의 로직이다. 여기서 (3)은 (1)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서로 상관이 없는, 통계방법론적으로 표현하면 orthogonal한 변수다. 여러 변수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가지지만, 이 의견이 정치적 선택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고 반페미니즘(여성혐오) 단일 변수가 정치적 선택을 지배한다. 이 논리는 적어도 최근 10여년간 일관되게 관찰된 (1)과 (2)를 연결시키는 논리다. 동의하든 안하든 개연성이 있다.
이에 반해 가능태론은 일관되게 관찰되는 (1)과 (2)의 상관관계를 인정하면서도, (3)에 의해서 (1)이 바뀔 수 있다는 희망에 근거해서 논리를 핀다. (3)이 orthogonal한게 아니라 어떤 다른 조건만 주어지면 (1)을 바꾼다는거다. 20대 남성도 계엄에 반대하고 탄핵에 찬성했다는게 근거 중 하나다. 계엄에 반대하고 탄핵에 찬성하는걸 보니 20대 남성이 보수 투표에서 바뀔 가능성이 충분한데, 아직 그 조건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 논리는 이 번 선거에서 실제 계엄을 무산시키고 탄핵을 이루어낸 정치 세력으로 조금도 옮겨오지 않은 20대 남성의 부동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준석도 반계엄, 친탄핵이라고 하지만, 계엄과 탄핵에서 가장 활약한 세력이 민주당이라는걸 20대가 인식하지 못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집단포화를 입은 3차 토론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그 발언 때문에) 20대 남성은 이준석에서 가장 많이 투표했다.
이 논리를 진지하게 고려하기 위해서는 (3) 에 의해서 기존에 형성된 (2)-(1)의 인과관계가 끊어질 수 있는 논리적 조건을 제시하거나 이를 지지하는 과거의 사례를 가져와야 한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듣지 못했다. 통계적으로 보면 보수 투표에서 바뀔 가능성을 가진 20대 남성의 어떤 성향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다른 조건 변수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논리 구조 때문이 가능태론은 그 조건 변수를 제공하지 않은 제 3자(= 주로 민주당 아니면 진보집단)를 비난하는 논리로 전개된다. 가능태론은 말그대로 여러 가능성이 열린 논리이다. 웬만해서는 틀리기 쉽지 않은 논리이자, 동시에 명확한 주장이 없어서 유보적인 주장이다. 하지만 이 논리의 전제는 변화이고, 변화가 없다면 그리 의미있는 주장이 아니다. 가능태론은 현재로써는 화자들의 막연한 희망사항일 뿐이다. 계엄과 탄핵에도 불구하고 (1)이 지속된 이 번 대선 결과는 (3)과 관계없이 (2)-(1)의 인과가 강고하다는 증거가 아닌가?
가능태론이 허약한 것은, 이 논리가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는걸 넘어, 이 논리의 반증이 많기 때문이다. 가능태론의 바람과 달리 실제 투표와 정치적 연합에서 (3)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2)와 같은 한 가지 사안에 의해서 (1)이 유지되는 현상이 빈번하게 관찰된다. 40-50대 태도의 다양성(예를 들어 이 블로그에서 계속 얘기한 보수화)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강한 신념 때문에 이들의 진보 정당 투표가 유지된다. 정치 현상으로 더 많이 관찰되는 것은 (3)에 의해서 (1)이 바뀌는게 아니라, (1)에 의해서 (3)이 바뀌는 것. 그러니까 자신의 의견과 지지정당의 정책이 일치하지 않으면 지지정당을 바꾸는게 아니라, 지지정당의 입장에 따라서 자신의 의견을 바꾼다. 가능태론보다는 펨코/일베화의 영역 확대가 더 많이 관찰된다. 최근 타국가를 살펴본 많은 연구들이 이 현상을 보고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가능태론의 설명력은 허약하다.
불가지론은 가능태론과 그리 다르지 않은데, 좀 더 유보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논리적으로는 더 허약하다. 거의 다른 모든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한국은 대의제다. 개별적 사안에 대해서 유권자가 직접 투표로 결정하는게 아니라, 대략적인 지향성으로 대리인을 뽑으면 그들이 정책을 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인지 보수인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는 지지 정당이다. 민주주의와 복지가 중요하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투표는 민정당(= 전두환 정당)에 하고, 오세훈이 무상급식 없애자고 해도 뽑으면, 민주주의와 복지에 대한 우호적 태도가 무슨 의미가 있나?
불가지론이 가능태론보다 더 허약한 이유는 (1)에 대한 설명 자체가 없기때문이다. 설명해야할 주요 현상(종속변수)을 설명의 요인과 섞어서 판단을 흐린다. 가능태론은 (3)에 의해서 (1)이 바뀔 수도 있다는 전제라도 있지만, 불가지론은 그마저도 없다.
그런데 불가지론이 왜 인기를 끄는가? 불가지론에는 우리를 함부로 규정하지 말라는 당사자들의 외침이 들어있다. 누구나 자신을 한 가지로 규정짓기를 꺼려한다. 개인은 항상 다양하고 중첩적이니까. 이런 다양성은 여러 가능성을 가지기에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규정할 수 없는 자"는 절대자다. 아우구스티누스인가? 하여간 신이 누구인가를 논할 때 나오는 논리가 이거다. 트럼프도 자신을 예측할 수 없는 사람으로 이미지 메이킹하기 위해 무척 노력한다. 규정짓기에 대한 거부는 한 편으로 힘에 대한 숭배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무한한 가능성으로써의 자기애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불가지론은 20대 남성 당사자들의 논리가 되기 쉽다.
Ps. 계엄이 해제된 직후 청년들 사이에 계엄을 비난하는 움직임이 있자, 이들이 정치적 각성을 했다고 상찬한 글들이 여럿 있었다. 희망이 드디어 현실이 되는 모멘트로 본 듯 하다. 가능태론이 맞았다면 이 번 선거는 결과가 좀 달랐어야 한다.
Pps. 가능태론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논리이기도 하다. "우리 애가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해서." 무한한 가능태로 자식을 바라보는 엄마의 심정. 이런 심정에서 벗어나 20대 남성도 결과에 따라 평가받는 어른으로 대접하는게 좋지 않겠나 싶다.
Ppps. 위에서 말했듯 (3)에 의해서 (1)이 바뀔 수 있다는 가능태론은 민주당이 (3)을 잘하면 (1)이 바뀔 수 있다는 논리로 쉽사리 전개된다. 잠재적으로 가능태론은 민주당 나빠요론으로 빠진다. 지난 총선을 통해서, 이게 작동하지 않는다는걸 이미 경험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