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트판의 요즘 흙수저 집안에서 애 낳으면 생기는 일에 대한 많은 개인적 경험과 분석이 보인다. 그 중에서도 사회학자 Annett Lareau의 중산층과 하위계층의 양육 방식 차이를 나타내는 concerted cultivation과 natural growth 개념을 적용하여 해당 글을 분석한 dennoch님의 트윗이 인상적이다. 

 

아래 기린아님이 댓글에서 한국에서 문화자본이 질적차이를 통해서가 아니라 양적차이를 통해서 드러난다는 지적도 타당하게 들린다. 중산층은 에버랜드 방문이 맘먹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곳이지만, 하위계층은 그렇지 않다는 것. 

 

문화자본이 학업성취와 계층형성에 끼친다는 사회학 연구는 많다. 모든 학자들이 일치된 문화자본의 정의와 적용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문화자본이 많은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의 학업 성취도가 높고 계층지위도 높아진다.

 

예를 들어 Evans 등은 27개 국가를 비교해보니, 책이 많은 가정에서 자란 자녀가 책이 전혀 없는 집에서 자란 자녀보다 3년 정도 교육 연수가 많았다. 이 효과는 부모의 교육수준, 직업, 계층지위를 통제한 것이다. 문화자본이 소득의 대리지표가 아니라 독립적인 영향이 있다는 것. 이 영향력이 국가의 발전 수준에 관계 없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문화자본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인지 당연히 뒤따르는 질문이다. 

 

흥미롭게도 지금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문화활동"으로 규정된 문화자본은 한국에서 학업성취도에 오히려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문화활동을 많이 하는 상위계층 자녀의 성적은 올라가는게 아니라 내려간다. 얼마 전 소개했던 정인관 외 (2020)의 한국의 세대 간 사회이동과 교육 불평등에 대한 리뷰 논문에 잘 정리가 되어 있다. 37~38쪽의 내용을 따오면 다음과 같다 (참고문헌 인용은 모두 생략). 

 

--------

부모가 소유한 문화적 소유물, 독서 향유 정도, 문화적 소통 등으로 정의된 문화자본은 자녀의 학업성취에 정적인 영향을 주는 반면, 자녀의 문화 활동 참여로 정의되는 문화자본은 일관되게 부적 영향을 가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결과는 한국 교육제도의 특징(표준화된 커리큘럼, 시험 중심의 평가제도, 사교육) 및 문화 활동과 공부가 가진 시간 배분에서의 경쟁 관계로 설명된다. 이런 한국의 양상은 서구 사회에서 관찰되는 일반적 양상과는 다른 독특한 점이다. 

이런 문화자본의 발현 방식은 한국에서 문화적 체험, 경험이 자본으로서 작동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한편 고도로 전략적이고 계층화된 형태 로 문화자본 활용이 이뤄지고 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 예를 들어, 문화 체험의 빈도가 부모의 문화 체험 빈도에 따라 선형적으로 증가하지 않고 일정 수준부터는 감소하는 대신 독서 향유로 전환되는 양상이 나타나는데 이는 각 유형의 문화자본의 한계 효과를 이해한 전략적 행위일 수 있다. ... 이는 한국에서 문화자본이 교육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역할을 하되 그 방식이 무의식 혹은 반의식적 사회화 과정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전략적 고려를 매개로 이뤄지고 있을 가능성을 확인시켜 준다.

--------

(다시 한 번, 한국의 계층이동, 교육불평등에 관심있는 모든 분들에게 이 논문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다.)

 

 

 

문화자본의 영향력이 이렇게 미묘한 이유 중 하나는 한국에서 계층별 문화 격차가 질적 차이가 아니라 양적 차이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인이 공유하는 문화적 동질성이 문화자본이 학업과 계층 성취와 보다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맺는걸 방해한다.  

 

예를 들어, 모든 계층의 자녀가 사교육을 받는다. 계층에 상관없이 같은 학원에서 사교육을 받으면서 교우 관계를 맺는게 계층별 문화 자본의 영향력을 낮추는 아이러니를 일으킬 수 있다. 지난 10여년간 하위계층의 사교육 투자가 늘어났다는 것을 기억하라. 

 

문화자본의 이러한 미묘한 영향에 비해 가족배경의 계층지위는 확실히 좋은 대학 진학 확률에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한국의 하위계층은 소득 수준이 올라가면 자녀 교육 투자가 늘어난다. 소득이 올라갔을 때 자녀 교육 투자를 우선시하는 한국의 교육열은 계층 재생산의 가족배경 효과는 낮추는 면에서 엄청난 장점이다.

 

이 때문에 하위계층의 소득 수준 개선에 집중하는 정책으로 하위계층 자녀의 학업 성취도도 개선할 수 있다. 아래 포스팅에서 얘기했듯, 소득 재분배 정책이 기회 평등 정책보다 쉽다. 

Posted by 바이커 sovidence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기린아 2020.11.15 23: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한국에서의 문화자본이 '계급'형성에 도움이 안되서(하비투스라고 하든가요?) 가치가 없는것도 대충 맞는거 같아요. 가령 상류층만 듣는 음악이라던지 아니면 미술에 대한 감각이 대화에 영향을 미친다든지 그런건 아니거든요. 상류층만의 문화라는게 딱히 볼거 없다고 해야 할지. 어학연수쯤 되면 상류층과 상류층 아닌 사람들의 차이가 확실히 날텐데, 그게 또 딱히 어마어마한 사회적 리턴으로 돌아오는건 또 아니란 말이죠.

    그냥 드는 생각인데, 한국에서 계급 차이가 '질적 차이'가 아닌 '양적 차이'로 나는 것은 아직 계급이 '발생 중'이어서 그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을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계급에 따른 문화적 격차를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 그것이 '당연시'되는 것도 아니구요.

    • 바이커 2020.11.16 12:01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그게 계급재생산의 안정성이 떨어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달리 말해 세대간 사회이동이 활발하다는거죠.

  2. 푸른 2020.11.16 00: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문화자본 개념이 상당히 모호한데, 일단 부르디외 저작을 열심히 옮겨주시는 이상길 교수님에 따르면 부르디외가 말하는 '문화자본'의 자본은 베버의 자산asset이라고 하네요. 문화적 경험의 정도를 가지고 문화자본이다 아니다 정의하는게 아니고 가치나 이윤을 전유하는데 기여하는 능력이 문화적 요소(취향, 책이나 음반같은 문화적 재화, 공인자격증)일 때 그 요인을 문화자본이라고 하는 것이죠. 구성적 정의가 아니라 기능적인 정의인 것이죠.

    결국 특정한 문화적 요소가 계급재생산에 부적이라면 그건 재생산과정에서는 문화자본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이건 그냥 definition의 문제죠. 다른 분께서 여부와 빈도를 거론해주셨는데, 빈도를 지지해주는 경제적 여건과 취향(놀이공원이나 익스트림을 즐기는 성향)으로 나눠볼 수 있을듯 합니다. 후자만이 문화자본의 후보군이겠고요.

    한편 이 문화자본으로 규정되는 문화적 경험은 국가별로, 시대별로 달라집니다. 예컨대 새벽에 일어나면 할아버지가 사서삼경을 읊는 집의 경우 조선시대까지야 도움이 됐겠지만 요즘에는 별 도움 안되죠. 국가별로는 철학, 사회학, 언어학 정전을 추가적으로 읽으면 대입에 유리해지는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하에서 독서경향은 분명한 문화자본이지만, 일단 영어는 EBS지문 외우는게 우선이고, 독서와 별 상관없는 수학이 변별력을 주는 한국의 대입제도(그 중에서 정시)에서는 독서경향이나 연극이나 영화를 좋아하는 취향은 공부할 시간에 딴짓하는 학생을 만들 뿐이죠.

    교수님이 추천해주신 위의 리뷰논문에 감사드리며, 저도 문화자본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게 된 논문을 소개하고 마치려합니다. 김샛별 교수님의 논문 '불평등한 미래: 청소년의 꿈, 지위표식이 되다'입니다. 혼합방법을 썼는데 인터뷰 부분에서 드러나는 계층별 차이가 쇼킹하더라구요.
    링크는 여기 :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9312409#none

    • 바이커 2020.11.16 12: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문화자본에 대한 일치된 정의가 있는건 아니지만, 문화자본의 자산 측면을 그렇게 정의하면 결과가 발생해야만 자본이 되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기는 편이 우리편"으로 우리편을 정의하는거와 비슷하죠.

      검증이 불가능하거나 불필요한 개념이 되어버립니다.

    • 푸른 2020.11.17 2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마디, 딱 한마디면 되겠네요. 화폐

      화폐도 결과적으로 교환의 매개물로서 기능해야 화폐가 됩니다. 그것이 돌로 만들어졌든, 붉은색 꼬리깃이든, 초록색 종이든 '매개물로 기능하는 것이 화폐인 것'ㅡ이기는 편이 내 편과 같이ㅡ이죠. 그럼 화폐 개념도 불필요한 개념인가요? 아마 아닐겁니다.

    • 바이커 2020.11.17 2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화폐는 정의 자체가 기능이에요. 뭔가 다른건데 결과적으로 교환의 매개물이라는 기능을 하는게 아니고요. 그 기능에 맞으면 뭐든 화폐가 됩니다. "이기는 편"이라는 정의 자체죠. 그러니 형태가 무엇이든 그 기능을 하면 모두 화폐입니다.

      반면 자본은 무언가의 stock이죠. 자본도 분명 작동과 기능을 하지만, 어떤 기능 자체로 정의된게 아닙니다.

      문화자본을 상류계층의 어떤 취향 일체가 아니라 계급재생산의 미시적 과정에서의 각각의 기능으로 정의하면 논의가 많이 꼬이게 될 겁니다.

    • 푸른 2020.11.18 0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불필요에서 논의의 어려움으로 평가가 달라진듯하여 다행입니다. 제가 "화폐"거리며 한 말의 의도를 어찌저찌 이해해주셨나봅니다ㅎㅎ

      한편 자본에 대한 논의는 참으로 복잡하죠. 교수님이 말하셨듯 자본을 stock으로 보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다른 입장도 있으니까요. 애초에 '자본'이라는 말을 유행시킨 마르크스가 "자본이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사회구성체에 속하는 일정한 사회적 생산관계"라고 단언하기도 했고요.. 이 관점에서 보면 문화자본의 경우, '자본'이 무엇이냐가 핵심인듯 합니다. 부르디외가 마르크스 이전의 정의를 그대로 차용했을지, 마르크스 이후의 다른 학자의 정의를 차용했을지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우선 그 개념이 등장한 배경을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르디외가 문화자본 개념을 제시한 이유는 경제적 배경만으로는 재생산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부르디외는 같은 경제수준이더라도 특정 문화성향을 충족하는 그룹에서 재생산이 효과적임을 분석해냅니다. 그 후에 그 문화성향을 문화자본이라고 지칭합니다. 지극히 결과적이고 기능주의스러운 명명이죠.

      물론 부르디외는 자본을 축적된 노동이라고 말합니다. 재생산에 도움이 되는 문화적 성향도 반복행동의 결과일 뿐이니까요. 다만 이를 두고 '자본을 무언가의 stock으로 정의했다'라고 하기 어려운 이유는 부르디외의 장 이론에 따르면 대상A가 이 장에서는 자본이지만 다른 장에서는 자본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데 호의적인 말투는 연애 시장에서는 분명 문화자본이겠지만 주식거래시장에서는 문화자본이라 불리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자본이 무언가의 stock으로 정의된다면, 달리말해 '자본A는 a의 stock이다'가 분석명제라면, a의 stock은 항상 자본이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죠.

      이에 더해 부르디외는 '(경제적) 상류계층이 지닌 문화적인 취향이 문화자본이다'라고 말한적은 1번도 없고, 오히려 경제적 심급이 최종심급이라는(그래서 문화적성향도 경제적여건이 결정한다는) 알튀세르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또한 미국에서 '미국에서는 계급 위치에 따라 취향이 분화되지 않는다'는 말을 누군가는 꼭한다고 불평을 하죠.

      이상의 설명을 종합해보면 문화자본은 stock으로 정의될 수 없으며, 기능주의적으로 명명됩니다. 기능주의를 피하기 위한 일단의 시도는 부르디외에게만큼은 부정되었고요.

    • 바이커 2020.11.18 08:26  댓글주소  수정/삭제

      화폐의 비유를 잘못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정확히 그런 의미로 썼다니 놀랍군요.

      그런데 그렇게 정의하면 기능주의 논리가 걸었던 길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됩니다.

  3. 두꺼비 2020.11.16 01: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그 네이트 판 글을 보고 그 책이 가장 먼저 떠오르더라고요. 아마 몇 년 전에 이 블로그에서 추천받았던거 같은데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