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터에서 한차레 떠들썩하게 아비투스에 대해 설왕설래하다가, 한국은 상위계급의 아비투스랄게 없다는 식으로 정리되는걸 보니 몇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아비투스의 의미에 대한 복잡한 논의들은 많다. 구조와 행위자의 관계로 기든스의 구조화와 연결시켜 비교하는 연구도 있고. 이 논의는 문화를 행위의 툴박스로 규정하는 논의와도 연결된다. 

 

어쨌든, 몇 해 전에 수저계급론이 유행하고, 중산층이 세습된다는 책도 나올 때, 사회학자들이 한 주장이 그거 아니다라는거다. 한국은 다른 어떤 사회보다 계층 이동이 활발하며, 1980년대 후반 출생자가 노동시장에 진출한 시점까지 계급의 대물림이 강화되기 보다는 약화되었다. 교육지위의 획득 면에서, 직업지위의 획득 면에서, 소득 랭크의 상관성 면에서 모두 그러하다. 

 

서베이 자료에서만 그런게 아니고, 국민연금과 의료보험 자료 행정자료로 소득의 rank-rank association을 봤더니 유럽이나 미국의 수치대비 절반 이하로 극히 낮은 부모 자식 간의 소득 상관성이 나오더라. 이 자료를 분석했던 학자들이 오히려 당황했었다. 

 

그랬더니 하는 소리가 1990년대생은 달라요다. 그럴수도 있기는한데, 당시에는 아예 90년대생 노동시장 자료가 없던 시절이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예측해서 사회가 변했다고 주장하는 사회과학이라니. 1990년대생에 대해서 확실했던 자료는 교육수준이다. 하지만 교육의 대물림이 1990년대생에게서 강화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한국은 계급의 대물림, 계층이동의 저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회가 아니고, 오히려 상위계급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 계급/계층 출신에 상관없이 다 같이 참여하기 때문에, 경쟁이 극심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사회다. 

 

 

 

 

아래 그래프는 몇 년전 출간한 책에 포함했던 건데, 1960년 이후 센서스에서 관리전문직의 비중 변화를 보여준다. 1990년대까지 25-64세 전체 노동인구나, 25-34세 청년층이나 관리전문직 비중에서 차이가 없었다. 1995년에는 11.1%로 정확히 일치한다. 1990년대에도 청년층의 교육수준이 장년층보다 높았지만, 관리전문직 획득에서 경험의 중요성이 학력 대비 떨어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상대적 고학력 청년층과 그 윗세대 간의 관리전문직 비중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25-34세 청년층에서 관리전문직의 비중이 다른 세대보다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청년층 교육팽창이 이들의 직업 선택에 크게 영향을 끼쳤고, 관리전문직 획득에서 경험보다 교육의 중요성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출신계급/계층에 상관없이 확대되었는데, 대학 학위를 획득한 후 관리전문직을 획득할 수 있는 오즈는 전혀 낮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 대비 전체 산업구조가 고도화되면서 대학 졸업 후 바로 관리전문직을 획득할 수 있는 확률은 높아졌다. 이렇게 교육이 급속히 팽창하고 계층 이동이 활발한 사회에서 상층 계급/계층의 아비투스를 형성하기는 쉽지 않다. 연구가 진행될수록 몇 년 간 떠들었던 청년층의 몰락이 과장된 얘기였다는 주장이 늘지 않을까 싶다. 

 

중하층이나 하층 출신이 자신들의 부모와 중산층 부모를 비교하며 요즘은 다르다고 얘기할 수도 있는데, 이런 분들에게 조세희의 <난쏘공>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1970년대도 그 정도 차이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6세대가 대학에 가고 사회에 진출하던 시절에는 계층이동이 활발했고 상위계층의 별도 아비투스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관련되어 있지만, 조금 다른 얘기로 미국과 영국의 계층을 비교하며 왜 영국에서는 자수성가형 상층이 진보가 되고, 미국은 보수가 되는지를 설명하는 사회학 연구가 있다. 이유는 미국은 계층에 따른 문화 취향의 차이가 없고, 귀족이 없어서, 경제적 상층이 된 후 배제(exclusion)되는 영역이 없는데, 영국은 경제적 상층이 되어도 보수적 귀족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지위불일치(status inconsistency)가 있다는거다. 이 지위불일치를 타파하기 위해서 영국 자수성가형 부자는 진보가, 지위불일치가 없는 미국은 자신의 계급 이해에 따라 보수가 된다. 

 

이러한 차이를 잘 보여줬던 옛날 영화로 <빌리 엘리어트>가 있다. 영국에서 노동계급 출신으로 발레리나를 꿈꾸는 어린이가 어떻게 집안 내에서 계급갈등을 겪는가이다. 노동계급 출신 남자 아이는 축구나 복싱을 하는거지 춤을 추는게 아니다.  영국 사회는 좋아하는 스포츠도 계층에 따라 달아져야 했다. 미국은 이런 식의 구분이 없다. 계급/계층에 상관없이 모든 아이들이 다 야구를 한다. 

 

한국의 자수성가형 부자는 어떤가? 다들 알다시피 보수가 되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상층의 아비투스가 아니라 "노오력"이 계층을 결정짓는 요인이라는 이데올로기다. 한국에서 한 가지 예외가 출신지역이다. 영남 위주 권력에서 호남 출신을 오랫동안 배제했기에 호남출신 자수성가 부자들이 진보적 정치성향을 가지게 된다. 경제적 지위와 정치적 권력/사회적 지위의 불일치에서 생기는 현상이다. 출신 지역에 따른 배제의 구조가 약화되면, 호남에서도 계급에 따른 정치성향 차이가 더 커질 것이다. 

 

유럽보다 계급/계층에 따른 문화적 차이가 적은 미국도 Annet Lareau의 질적 연구에서 보여주듯, 중산층과 노동계급 자녀의 훈육 내용이 다르다. 그런데 한국은 자녀 훈육 내용의 차이도 거의 없다.

 

이러한 한국사회의 특징을 잘 나타낸 영화가 <기생충>이다. 영화 <기생충>에서 냄새로 표현되는 계급/계층 차이를 얘기하지만, 박사장 집의 문화와 기택 집의 근본적 차이는 없다. <기생충>의 핵심 메시지는 계급/계층 분리라기 보다는, 무수히 많은 계단 장면으로 표현되는 계층이동이다. 한국에서 빈곤은 헤어날 수 없는 수렁이 아니라, 계층이동의 기회라는 맥락에서 표현된다. 그런 면에서 <기생충>의 내용은 기회평등, 계층이동을 중시하는 미국의 입맛에 상당히 맞았던 영화였다.

 

 

 

 

정리하자면, 한국 사회의 특징은 고착화된 수저계급론과 그에 따른 수렁과 절망이 아니라, 동일한 목표를 향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실시하는, 그래서 활발한 계층이동이 오히려 스트레스인 그런 사회다. 

 

이런 사회가 지속될 것인가? 회의적이다. 대부분의 사회가 안정화되고 고착된 계층분리 사회로 되어갔듯, 한국 사회도 그럴 가능성이 클 것이다. 한국의 중상층과 상층도 그런 "안정된" 사회를 열망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특징인 역동성은 활발한 계층이동과 그에 따른 갈등의 이면이기도 하다. 아비투스라는 개념은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더 중요해질 수 있다. 

 

그럼 여기서 미국은 여전히 역동적이지 않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런데 미국 사회에서 가장 역동적인 계층이동을 보이는 집단은 이민자다. Immigrant Paradox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Posted by sovidenc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