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와 머스크가 정확히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이 하는 일이 연방정부의 전반적인 규모 축소로 이어질 것은 확실하다. 

 

지난 금요일에 사회보장국 (Social Security Administration) 직원 7천명을 해고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미 연방정부에서 가장 큰 조직은 국방부(군인을 포함해서 280만명)이고, 그 다음은 보훈처(Veterans Affairs)로 약 40-50만명이다. 사회보장국은 중간 규모의 조직으로 약 6만명이 근무한다. 그런데 미 연방정부 예산에서 가장 큰 규모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의료와 연금을 포함한 사회보장이다. 연방 정부 총지출의 40~50%가 사회보장국 관련이다.

 

그러니까 사회보장국에 대한 공격은 연방정부에 대한 공격이 될 수 밖에 없다. 사회보장국 직원의 축소는 사회보장에 대한 축소로 넘어가기 위한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

 

아래 그래프는 어디에서 긁어왔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연방정부의 수입과 지출이 전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여준다. MAGA, Make American Great Again에서 얘기하는, 미국 사람이 노스탤지어를 가지는 Again이 대략 50-60년대인데, 이 때와 지금을 비교해서 연방정부가 차지하는 GDP 비중에 차이가 없다. 연방정부의 규모 축소로 갈려면 2차 대전 이전, 루즈벨트 대통령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니까 1935년에 입법되고 그 이후 상당히 확장된, 사회보장법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연방정부를 축소시키는 변화는 MAGA의 Again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1950-60년대가 아니라, 광란의 20년대 (Roaring Twenties), 내지는 약탈 귀족 (Robber barons)의 시절이라는 19세기 후반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연방정부에 대한 공격이 유례가 없어서 말하자면 그렇다는거고, 실질 규모가 그렇게까지 크게 축소되지는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 

 

사회보장 제도에 대한 변화는 늘상 있는 것이지만, 가장 질적으로 큰 변화를 시도했던건 2005년 부시 대통령 재선 직후다. 연방 정부 프로그램인 사회보장을 민영화하려고 했다. 일반 기업에서 들어주는 퇴직 연금인 401k 비슷하게 개인이 어떻게 투자할지 결정하고, 그 투자 결과에 따라서 연금을 받는 방식으로 사회보장제도를 바꾸려고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연방정부는 내 돈에 손대지 말라"는 식의 시니어들의 적극적 저항으로 그 시도는 무산되었다. 

 

하지만 사회보장국 직원 수를 대폭 감소하면, 사회보장 서비스의 질이 낮아질 것이고, 당연히 받아야할 돈을 받지 못하는 일도 증가할 것이다. 그러면 뭔가 큰 변화를 요구할 수 있고, Social Security를 민영화 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릴 수 있다. 사회보장제도의 작동을 망가뜨려서 오히려 사회보장제도 자체의 변화를 시도하는 기동이라는 것. 

 

트럼프 1기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쓴 책 중에 Michael Lewis가 쓴 <The Fifth Risk>라는 책이 있다. 루이스는 영화로도 나온 <The Big Short>의 저자이기도 하다. 연방 정부가 관리하는 네 가지 위험 (핵, 자연재해-기후변화, 경제/사회안정, 보건) 외에 정부의 실무적 관리 소홀이 어떻게 재앙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 트럼프의 연방 정부 기능에 대한 이해 부족(The fifth risk)이 어떻게 실무적 관리 소홀로 이어지고, 심각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책이다. 예를 들어, 기후 측정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는 주요 부서도 상무부 (Department of Commerce)이고, 인구조사 (Census)를 진행하는 부서도 상무부인데 트럼프 1기 때 얼마나 이러한 기능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그래서 어떻게 해야할 일을 안하는걸로 연방정부 기능들을 약화시켰는지 쓴 책이다. 

 

트럼프 2기는 1기와 달리 무지에 의해서 연방정부 기능을 약화시키는게 아니고, 연방정부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의도적으로 그 기능을 약화시키고 있다. 어디까지 갈지... 

 

 

 

Ps. 아래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지금 부는 해고 칼바람의 강도는 한국 언론에서 보도하는 것보다, 미국 대학의 테뉴어 트랙 교수들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다. 스탠포드는 고용 중단 결정이 내려졌고, 유펜은 신규 대학원 지원자의 학비지급 오퍼 취소 명령이 내려왔다더라. 연방정부에 근무하는 친구는 언제 해고 통보가 날아올지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라고. 제가 있는 대학의 재정부서는 해고는 불가피하고, 해고시 1개월의 유예 기간을 줄 예정인데, 그 1개월 월급을 어느 구좌에서 지급할지 논의하고 있다더라. 

 

Pps. 미국에서 은퇴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사회보장 수표가 싱가폴 사회보장국 사무소에서 발행된다. 이 사무소는 남아 있으려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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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이 많고, 비판하는 분들도 많던데, 당연히 계산된 발언이겠지.

 

과거에 민주당이 중도보수, 중도우파라는 발언을 한 인사들의 수는 적지 않다. 색깔론에 대한 대응 차원, 중도 확장 전략 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이재명 대표의 발언은 5월 대선을 염두에 둔 발언이리라. 그 의도를 제가 분석하고자 하는 건 아니고, 한국에서 진보적 정책의 수용성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말하고자 한다. 

 

몇 번 얘기했지만 (예를 들면 요기, 요기, 요기) 한국 국민의 정책적 선호는 상당히 보수화되어 왔다. 그 배경에는 계층인식의 상승이 있다. 경제가 안정되고, 소득이 높아지고, 생활처지가 개선되니까 분배 정책에 대한 지지가 줄어든다.

 

아래 그래프는 예전에도 한 번 보여줬던 그래프에 2023년 자료를 업데하고, <상층*>라는 카테고리를 추가한 것이다.  자료소스는 KGSS 2003-2023 원자료다. 2021년에 비해서도 2023년에 자신이 계층이 상층이라는 인식이 증가하였다. 자신이 중간은 넘는다는 인식이  2003년 21%에서 2023년에는 47%로, 20년 사이에 두 배 이상 높아져, 연평균 1.3%포인트씩 증가했다. 

 

10점 만점 척도에서 7점 이상을 확실한 상층(아래 그래프에서 <상층*>)으로 규정하면 (9나 10응답자는 극소수다), 2003년에는 7.7%였는데, 2023년에는 24.0%로 3배 증가하였다. 2023년 현재, 상층*의 응답 비중은 자신이 중간 (5점) 미만이라는 응답의 비중과 거의 다를 바 없다. 자신이 하층이라는 응답은 2003년에는 46%로 거의 절반에 달했는데, 이제는 27%로 줄었다. 

 

 

이러한 계층 인식의 상승은 성연령을 불문한다. 집단에 따른 격차는 있지만 모든 집단에서 계층 인식이 높아졌다. 특히 중장년과 노년층의 계층 인식이 크게 높아졌다. 남녀를 분리하면 여성의 상승률이 더 높다.

 

청년 남성의 계층 인식도 높아졌지만, 다른 집단과 비교해서 상승률이 작다. 일부는 2003-05에 다른 집단에 비해 상층 인식이 높았던 것에 기인(즉, 기저효과)하지만, 다른 집단보다 상위 계층 인식의 상승률이 낮은 건 분명하다. 2003-05에는 모든 집단 중에 청년 남성에서 가장 상위 계층 인식률이 높았는데, 지금은 60+ 여성에 뒤이어 끝에서 두 번째다. 

 

표1 . 상층 (6-10점) 계층 인식자 비율 (%)

  18-39 남성 40-59 남성 60+ 남성 18-39 여성 40-59 여성 60+ 여성
2003-05 (%) 28.5 25.0 17.9 26.5 22.2 9.1
2021-23 (%) 40.1 47.2 42.0 48.7 50.1 35.1
변화 (%p) (11.6) (22.2) (24,1) (22.2) (27.9) (26.0)

 

 

계층 인식이 이렇게 크게 변화했기 때문에, 한국에서 급진적 변화를 요구하는 정책이 지지를 받을 가능성은 낮다. 무상급식에서 시작해서 기초연금을 어느 정당이 더 많이 올리냐로 경쟁했던 시절은 당분간 다시 돌아오기 어려울 것이다.

 

선거에서 다수파를 형성하고자하는 정당의  지도부는 변화보다는 안정을 원하는 유권자를 염두에 둔 이미지 포장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민주당의 가장 강력한 지지기반인 40-50대의 계층 인식이 다른 집단보다 더 높다는 것도 민주당이 급진적 변화보다는 안정을 강조할 계층적 이유가 된다. 이재명 대표의 발언이 개인의 정치적 지향에 따라 실망스러울수는 있어도, 놀랄 일은 아니다. 한국에서 진보 정당의 파이가 줄어드는건 정치 공학이 다가 아니고, 유권자의 지형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스팔트 우파에 경도되어 극우화로 치닫는 정당이 대중의 지지를 받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한다. 청년 남성은 다른 집단 대비 상대적 박탈감을 겪겠지만, 그렇다고 혁명적 변화를 지지할 정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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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 상당히 기대했던 연구비 신청이 채택되지 않은 일이 있었다.

 

2023년에도 신청했던 건데, 연구 내용과 연구 디자인은 칭찬 일색이었지만, DEI 내용을 좀 더 충족하라는 코멘트를 받았다. 작년에, DEI를 보강하고 혼합방법론, 커뮤니터 기여 같은 부분을 추가한 후 동일한 프로포잘을 다시 제출하라는 요청을 받았고, 그렇게 했지만 결국 선정되지 않았다. 

 

이 그랜트는 선정 과정이 다른 그랜트와 조금 다르다. SSA RDRC(Retirement and Disability Research Consortium)라고 미국 사회보장국에서 자금을 대는 연구 센터가 6군데 대학에 있다. 각 대학 연구센터에서 1차 심사를 진행하고, 이를 취합하여 SSA에 보내면 2차 심사를 하는 과정이다. 1차 심사에서는 무난히 통과했는데, 최종 선정 과정에서 탈락하였다. 

 

왜 안되었는지 코멘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번 주에 관련 그랜트 모두가 진행 중단 명령을 받았고, 대학의 연구센터 전체의 펀드도 전액 지급 중단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센터 모두가 문을 닫고, 관련 연구원과 행정직들이 모두 해고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대부분의 연방정부 연구자금은 일단 집행하고 해당 비용을 변제받는 방식으로 집행된다. 만약 작년에 연구 프로포절이 선정되고 올 초에 연구를 시작했으면, 연구조교도 고용했을텐데, 이제와서 모든 연구를 중단하고 조교도 해고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뻔 했다. 연구비를 못받아서 오히려 황당한 일을 겪지 않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DEI 와 눈꼽만큼이라도 관련된 연구만 폭탄을 맞은 것도 아니다. 재직 중인 학교의 한 연구소는 DEI와 아무 관련이 없고 증거기반 교육정책을 연구하는 순수 과학에 가까운 프로그램인데도 중단 명령을 받았다. 

 

이 뿐만이 아니다. NIH 간접비를 최대 15%로 제한하라는 명령으로 인해, 재직하고 있는 학교의 수입이 약 2천만불 (280억원)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당장 학교 연구비 관련 부서는 추가 고용 중단 결정이 내려졌고, 손실을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을지, 해고는 일어날 지, 매일 회의와 타운홀 미팅이 열리고 있다. 학교 측에서는 해고하지 않는다는 약속은 못하고, 해고하더라도 프로그램을 통해서 놀라지 않게 점진적 과정을 거치겠다고 약속하는 정도다. 

 

우리 과에서는 NIH 펀드를 받아서 지난 12-1월에 신규 교수 2명 채용 계약을 했는데, 약속한 펀드가 제대로 집행될지 모르겠다. 신규 교수 채용 조건이 다행히 NIH 펀드 수령의 조건부는 아니라, 설사 NIH에서 돈을 못받더라도 계약을 취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1월에 채용 계약한 교수는 채용 조건에 대한 협상을 진행하다가 트럼프의 연구비 집행 중단 명령 소식을 듣자마자 추가 협상없이 계약서에 바로 사인했다더라. 올 가을 미국 교수 채용 시장은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대학이 지원받는 연구비 중에서 Department of Education의 펀드가 간접비는 적지만 규모 자체는 상당히 큰데, 여기에 의존해서 운영하던 연구센터에서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직원과 연구원들이 매일 상당한 스트레스 속에서 일하고 있다. 연구비 중단에 이어 교육부에 대해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할지. 

 

미국은 출생아수의 감소로 조만간 대학 진학자의 절대수가 상당히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이에 맞춰서 교원수와 행정 조직을 조정해왔다. 일부 대학은 문을 닫았고.

 

연구비 축소는 교육팽창의 시대에서 교육축소의 시대로 전환하는걸 더 앞당기겠지. 이러한 변화가 2년이 갈지, 4년이 갈지, 영속화되는건지. 대학의 기능 중 연구가 축소되고 수업이 더 중시될지. 대학도 확실히 불확실성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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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 Shin 2024 RSSM.

 

GOMS 자료를 이용하여 시리즈로 내고 있는 성별 소득 격차의 세 번째(이자 아마도 마지막) 연구. 첫 번째 연구가 대졸 직후 성별 소득 격차를 밝히는 것이고, 두 번째 연구가 그 원인이 여성차별에 있음을 밝히는 것이었는데, 이 번 연구는 대졸 직후 동일한 일자리를 가졌을 때 소득 성장률이 성별로 어떻게 다른가를 살핀 것이다. 이 번에는 신희연 선생과 같이 연구했다. 

 

자료는 2008-2010 GOMS의 1차 조사와 2년 후 추적 조사를 사용했다. 더 최근 자료를 사용하면 좋겠지만, 1차 조사 2년 뒤에 동일 응답자를 추적 조사한 건 이 때 뿐이다. 그 이후에는 추적 조사를 중단했다. 분석 대상은 4년제 대졸 후 1,2차 조사 모두에서 일자리가 있던 응답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졸 직후 일자리를 가진 다음에 2년 동안 여성의 임금 증가율이 남성보다 평균 9% 낮다. 동일 학교, 동일 전공, 동일 근무 시간, 동일 일자리를 가졌을 때 여성의 2년 동안의 임금 성장률이 남성보다 9% 낮다는 의미다. 

 

물론 스토리가 이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지금부터 어떻게 복잡한지 얘기하고자 한다. 

 

동일 일자리를 통제하지 않고 임금증가율의 평균만 보면 여성은 남성보다 단지 2.8% 낮다. 9%의 격차는 일자리가 같을 때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는 1차 연도에 임금이 낮은 일자리를 가질수록 2년후 임금 상승률이 높기 때문이다. 여성은 1차 연도에 남성보다 낮은 임금을 지급하는 일자리를 가질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고, 비슷하게 낮은 임금을 지급하는 <한계 일자리>에서 여성의 임금상승률은 남성보다 9% 낮지만, 1차 연도 한계 일자리 취득자의 임금상승률이 높아, <한계 일자리>에 여성이 집중된 분포 효과로 평균 임금 상승률 차이는 2.8% 밖에 안되어 보이는 것이다. 임금 상승률 순효과는 9%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또한 1차 연도에 <한계 일자리>를 가지면 2년 뒤 일자리를 바꾸는 확률도 높고, 일자리 변동은 임금 상승으로 이어진다. 2년 동안 남성은 34.5%가 일자리를 바꿨지만, 여성은 44.8%가 일자리를 바꿨다. 채용해도 여성은 금방 그만둔다는 얘기는 이런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일자리를 <좋은 일자리> (대기업+정규직+평균이상 임금), <적당한 일자리>(나머지 모든 일자리), <한계 일자리>(중소기업+비정규직+낮은임금)으로 나누었을 때, 1차 연도에 <좋은 일자리>의 비중이 남성은 27.1%, 여성은 11.5%, <한계 일자리>는 여성이 42.9%, 남성이 22.8%다. 

 

이 때문에 성별로 동일한 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3단계 가중치를 적용했다. Inverse Probability Treatment Weighting이라는 기법을 확대 적용한 것인데, (기존의 샘플링 가중치)*(3년차에도 계속해서 일할 확률)*(인적자본과 1차 연도 노동조건의 성별격차 조정)로 최종 가중치를 준거다. 이렇게 하면 1차 조사에서 학력, 전공, 일자리의 임금 수준, 노동시간 등의 성별 격차가 모두 사라진 성별 균형 샘플을 만들 수 있다. 

 

이렇게 성별 조건을 동일하게 맞추면 여성의 임금 상승률이 남성보다 9% 낮다는 거다. 

 

그런데 임금상승률의 성별 격차가 <한계 일자리>나 <적당한 일자리>에서는 9%에 달하지만, <좋은 일자리>에서는 4.5%로 줄어들고, 추가로 1-2차 연도 사이의 일자리 변동, 결혼, 직무 변동 등을 통제하면 성별 격차가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게 바뀐다. 다시 말해, 대기업의 괜찮은 일자리에서는 성별 임금증가율 차이가 크지 않고, 그 작은 격차도 직무 변동이나 승진 등에 의해서 설명된다. 하지만 그 이하 일자리에서는 어떤 변수를 통제하더라도 상당히 큰 성별 임금증가율 격차가 있다. 

 

동일 일자리에서 성별 임금 격차와 기회 격차가 없다는 주장은 여성 중 상위 10%만이 차지하는 <좋은 일자리>의 스토리를 전체로 일반화한 오류다. 인사부가 크고, 임금과 인사조치가 규정화된 대기업에서의 성별 차이가 작지만, 여성 임노동자의 90%가 경험하는 현실은 이와 크게 다르다. 

 

그런데 대기업에서는 다른 방식의 성별 격차가 존재하는데 바로 승진 기회의 차이다.  <한계 일자리>보다 <좋은 일자리>에서 여성의 승진 확률이 남성보다 더 크게 낮다 (성별 격차 5%p vs 8%p). 이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여성은 남성보다 승진 때문에 일자리를 바꾸는 확률이 높다는거다. 승진에 뒤쳐지는 현실에 짜증이 나서 설사 임금이 그렇게 높아지지 않더라도 승진이 되는 일자리로 바꾼다. 이런 경향은 여성은 남성보다 한 조직에 충성하기 어려운 구조적 조건이 있다는거다. <한계 일자리>에 있다보니 임금 상승을 위해서, 승진이 안되다보니 승진을 위해서, 여성은 남성보다 일자리를 더 높은 확률도 바꿀 수 밖에 없다. 이에 반해 남성은 일자리 변동의 가장 큰 이유는 임금이다. 일자리를 바꿀 때 남성은 임금이 평균 20% 정도 높아지는데, 여성은 10% 정도만 높아진다. 

 

또 다른 발견 중 하나는 결혼의 효과다. 남성은 결혼이 임금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데, 여성의 결혼은 임금 하락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같은 일자리를 유지하고 있는데도 임금이 하락하는건 아니고, 여성의 결혼 후 임금 하락은 일자리를 바꾸기 때문이다. 동일 일자리에서는 남여 모두 결혼이 임금에 끼치는 영향이 없다. 그런데 결혼 후 일자리를 바꾼 사람 중 남성은 임금 변동이 유의하지 않은데, 여성은 임금이 16% 낮아진다. 이러한 변동이 자의에 의한 self-selection인지 구조적인 압력이 있는건지는 이 연구가 밝히지는 못한다. 그리고 결혼이 여성에게 끼치는 이런 부정적 영향은 <한계 일자리>에서 상당히 크고, <좋은 일자리>에서는 미미하다. 

 

결론은 클라우디어 골딘이 얘기한 성별 임금 격차는 차별보다는 커리어와 가족 간의 선택의 문제가 되어 성별 격차의 <마지막 챕터>에 들어섰다는 진단이 일부 국가에 한정된 얘기지 한국의 현실이 아니라는거다. 논문에서는 길게 얘기했는데, 미국, 유럽의 연구에서 일자리가 동일할 때 성별 임금 상승률 격차가 거의 없다는 연구들이 있다. 한국은 이러한 <마지막 챕터>에 들어서지 않았다. 한국의 대졸 청년 여성 노동자는 노동시장 진입 당시 일자리 할당에서, 노동시장 진입 후 임금 상승률에서 이 중의 차별을 겪고 있다. 

 

 

 

Ps. 이 번 연구의 가장 큰 단점은 자료가 2008-2010으로 약 15년 지났다는거다. 요즘은 달라요라는 주장을 검증하기 어렵다. 그런데 성별 소득 격차를 다른 어떤 자료보다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던 GOMS 조사는 2020년을 마지막으로 조사가 중단되었다. 조사 폐지에 대한 논란이 있을 때 잠시 미루었다가 결국 조사를 중단했다. 중단했던 2차 추적조사를 다시 시작해도 모자랄판에. 

 

Pps. 다른 분들은 이런 경험이 여러 번 있는지 모르겠는데, 이 연구는 저널에 제출 후 1차 심사에서 무수정 채택된 유일한 논문이다. 지금까지 첫 제출에 conditional accept은 몇 번 받아봤지만, 첫 제출에 무수정 채택은 이 논문이 유일하다. 

 

Ppps. 논문은 학교와 Elsevier의 계약 덕분에 무료 다운로드가 된다. 논문을 한글로 옮긴 번역본도 있는데, 혹시 한글본이 필요하신 분들은 비밀답글로 본명과 이멜을 남겨주시면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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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칼로, 내란으로 그 결과를 바꿀 수 있는데?

 

답은 모른다. 

 

2010년에 포스팅했던건데, 사회과학의 최대 난제가 무엇인지 당대의 사회과학자 13명이 리스트한 적이 있다. Ann Swidler라고 문화가 무엇인지 새로운 정의(culture as a toolkit)를 제시했던 사회학자가 꼽았던 난제는 <안정적 제도의 생성과 유지>였다. 어떻게 하면 한 사회에서 제도가 생성되고 안정적으로 유지되는가라는 질문이다 

 

여기서 제도(institution)란 법적 제도 만이 아니라 규범과 문화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선거제도란 선거를 하는 규칙과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사회전반의 태도를 포괄한다. 많은 신생 국가에서 선거를 해도 그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내전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선거 제도와 민주주의의 확립은 결과가 맘에 들지 않더라도 결과를 수용하는 문화가 있을 때 가능하다. 미국이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 침범 후 선거와 민주주의 제도를 이식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법을 만들고, 선거를 실시하기는 쉽지만, 그에 맞춰서 대다수의 정치인과 국민이 따르게 하기는 어렵다. 어떤 경로와 과정을 거쳐서 제도가 한 사회에 생성되고 유지되는지, 어떻게 하면 제도를 다른 사회에 이식할 수 있는지 그 규칙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많은 분들이 느끼듯 윤석열의 쿠데타와 이어진 내란 세력의 준동은 한국에 상당히 장기적인 충격을 가할 것이다. 저는 두 가지 점에서 윤석열의 내란과 그 동조 세력이 한국 사회 민주주의 제도에 큰 충격을 가했고, 앞으로 가할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는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고 그에 맞춰서 행동하는 전통, 제도의 심리적 수용성을 뒤흔들었다. 다른 하나는 법의 빈공간이 있을 때 법의 취지에 따라 행동하는 제도의 문화적 측면을 뒤흔들었다.

 

어떤 제도도 법률적으로 문서상으로 완벽하게 성문화되는 경우는 없다. 법의 취지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문화를 동반하지 않으면 제도는 유지되지 않는다. 헌법재판관 임명과정, 윤석열의 체포와 압수수색 과정은 모두 논란이 될 수 없는 과정을 논란으로 만들었다. 윤석열 내란과 그 동조 세력의 행동을 박근혜 탄핵 당시의 플레이어들의 행동과 비교해보면 박근혜의 탄핵은 헌법이 정한 절차와 취지를 따른 매우 질서정연한 과정이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어떤 것도 논란이 되지 않았다. 법률과 문화를 포괄하는 제도로써의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한국 사회에서 가까운 미래에 없어지지 않을 보수 정당 정치인의 다수가 내란 세력을 신속히 차단하기를 거부했고, 상당수의 보수 정당 지도자들이 실질적으로 내란에 동조했고, 권력의 궁극적 원천인 경찰, 군부의 상당수가 내란에 직접적으로 가담했다. 한국 사회의 최대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능력있는 행정 관료들이 법의 취지에 따라 행동하기를 거부했다. 정치적 불안정에 행정적 안정을 부여하던 관료제에 균열을 가했다. 이런 대치를 통해 국민의 1/3이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기 보다는 무력의 사용을 지지하는걸로 바뀌고 있다. 윤석열을 지키겠다고 그의 관저 앞에 모인 무리들은 또 다른 국가 기관인 경호처와 합세하여 국가에서 발행한 체포영장의 집행을 방해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현 시점에서 "이재명은 안 된다"는 현수막은 선거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물리적 수단을 이용해서라도 수용하지 말자는 선동에 가깝다. 소속 정당과 지지 정당에 따라 정책적 이견을 가지는걸 넘어서, 제도 수용의 문화가 달라지고 있다. 

 

어떻게 될까? 

 

한국 정도로 발전하고 자유와 민주주의에 익숙한 국민이 있는 국가에서 전면적 반동으로 나아간 사례는 없다. 한국도 예외가 되지는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윤석열 내란의 청산 과정은 상당히 지난할 것이다. 일제와 군부 독재는 그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청산이 어려웠다. 일제 청산과 프랑스 비시 정부의 청산이 다른 가장 큰 이유가 기간이다. 기간이 길면 청산 세력이 광범위하고, 이들 세력이 없으면 국가 역량도 잠식된다. 윤석열의 내란은 짧은 기간이지만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세력과 집단이 동조하고 참여했기에, 청산이 얼마나 잘 될지 모르겠다. 

 

내란 세력의 청산과 민주주의 제도 수용의 규범과 문화를 발전시켜야할 이 중의 어려운 과제가 앞에 놓여 있다. 그래도 궁극적으로는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한국 사회가 더 단단한 민주주의 사회가 될 것이라는 낙관적 기대로 새해를 맞이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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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광우병 시위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했던 발언이다. 촛불시위자의 자발성을 폄하하는 발언으로 집중 비판을 받았는데, 촛불시위 주최자의 자금원을 막으라는 지시이기도 하다. 

 

아래 포스팅에서 K-pop에 대해 언급하니 여러 분들이 의견을 제시하는데, 이 번 탄핵 집회에서 "역조공"을 비롯한 K-Pop 기사를 보면서 제가 가지는 의문을 좀 더 정리하면 이런거다. 

 

아래 글에서 시민운동의 빈공간 속에서 K-pop 이 자리를 차지 하는거 아니냐는 질문을 했는데, 이는 위에서 언급한 이명박의 발언을 빌려서 다시 질문할 수 있다. 여러차례의 탄핵 관련 집회를 열려면 상당한 비용이 들어간다. 음향시설은 공짜가 아니다. 이승환이 개런티 없이 출연하겠다고 하면서도 괜찮은 음향시설을 요구했다는 보도도 있다. 

 

12월 14일 오후 3시부터 열린 여의도 집회의 주최는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다. 참여연대 홈페이지를 보면 이 단체는 12월 10일 전국 1,500여개 노동시민사회단체가 발족한 기구다. 그러니까 운동권 시민단체의 연합체다. 가수 이승환과의 출연협의도 아마 이 단체에서 했을 것이다. 말이 10일 발족한 기구지, 12월 4일의 여의도 집회도 이 단체가 주최했다. 

 

달리 말하며 신뢰 하락을 겪고 있는 시민단체가 없었다면 축제와 다를 바 없었던 잘 조직된 탄핵 집회도 없었다. 그런데 K-pop의 스타들은 '비상행동'에 대한 지원을 하거나 기부를 하지는 않는다. 선결제를 통해 자신의 이미지와 팬관리 서비스는 하지만, 집회를 주최하는 측과는 거리를 둔다. 집회 주최측으로써는 풍요 속의 빈곤을 체감할 것이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게 저의 질문이다. 이 질문은 좀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 

 

하나는 K-pop의 등장이 정치와 대중가요의 결합인지, 아니면 반정치와 대중가요의 결합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2016년 이화여대에서 등장했던 다만세는 "반정치로써의 학내 운동"과 K-pop의 결합이었다. 2024년 이화여대의 탄핵 집회는 학생회를 통해 이루어졌지만, 2016년의 이대 점거 농성은 학생회를 배제하였다. 당시 이대 총학생회장은 시위의 주동자도 아니면서 주동자로 처벌받았다. 권한은 없으면서 책임(accountability)만 있었던 케이스. <정치-대의를 위한 시위-운동가요>로 이어진 연결을, <비정치-이익을 위한 시위-K-pop>으로 대치시켰다. 

 

그런데 이 번 탄핵 시위를 보면 K-pop은 반정치 뿐만 아니라 정치와도 결합하고 있다. 결합의 내용이 변화했다. 

 

이는 두 번째 질문으로 이어진다. 두 번째 질문은 반정치로 등장한 K-pop이 정치와 결합하게되는 실제 과정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제가 가진 의심을 얘기한다면, 사회 운동 효율의 향상을 위해 시민단체에서 K-pop을 적극적으로 동원한 것 아니냐는거다. 이를 통해 반정치와 K-pop의 결합을 정치와 K-pop의 결합으로 전환시킨 것 아닌가? 

 

이렇게 얘기하면 민중의 자율성을 무시하지 말라고 할텐데, 자율성이 없다는게 아니라, 조직의 주체가 변화하는 과정이 있다는거다. 시위를 조직하며 민중가요 외에는 고려치 않다가, K-pop을 적극 활용할 때에 시민단체에서 어떤 논의들이 있었는지? 대학에서 전반적인 운동권 문화가 쇠퇴할 때, 민중가요 순혈주의로 가지 않고, 대중가요와 결합하기로 결정할 때 고려했던 요인들. 그 때의 시민단체 내의 역학 같은 것들 말이다. 

 

세 번째 질문은 K-pop 팬덤 조직의 의미다. 사회학자들은 다들 알텐데 예일대 Grace Kao 교수의 요즘 연구 주제가 K-pop이다. 처음에는 BTS 팬덤인 '아미'에 대한 분석이었다. '아미'가 BLM(Black Lives Matter) 운동에 영향을 줬다는 건데, 논문도 읽어봤다. 그런데 솔직히 무슨 얘기를 하는건지 모르겠더라. 미국에서는 Taylor Swift의 팬조직에 대한 문화사회학적 연구를 하는 분들도 있다. 같은 학과 교수가 Swiftie 연구의 개척자라 해도 과언이 아닌지라 귓동냥으로만 듣고 있다. 

 

K-pop 팬덤은 시민의 결합으로써의 의미가 있는건가? 시민의 결합이라는게 거창한게 아니다. 미국 사회 공동체를 다른 그 유명한 Putnam의 책 제목이 <Bowling Alone>이다. 동네 사람들끼리 같이 볼링치는 동호회가 없어지고 있다는 것. 한국은 이와 달리 전통적 모임인 동창회 뿐만 아니라 각종 동호회가 크게 번성했다. 심지어 달리기도 러닝크루라고 무리를 짓고 있다고? 시민단체는 쇠퇴하지만 시민사회는 촘촘한 연결망을 건설해 가고 있는건가? K-pop 팬덤은 인터넷 커뮤니티와 달리 실체적 공동체 모임이 되고 있는가? 그게 성별로 갈리나? 그렇다면 그 내부의 역학은? K-pop이 정치와 결합할 때 K-pop 팬덤도 정치와 결합하는지? 아니면 여전히 반정치가 기본이지만, 특정 국면에서 정치와 결합하기도 하는건지? 

 

질문도 생각도 정리된건 아닌데, 이걸 본격적으로 생각하고 연구하지도 않을거고, 이 번 기회가 아니면 이런 정제되지 않은 얘기를 또 언제할까 싶어서 지금 말씀드린다. 

 

누군가는 열심히 분석하고 있을 것이다. 뭔가 좋은 설명이 있으면 알려주시기를.  

 

 

 

Ps. 비밀 댓글로  본 글의 오류를 알려준 글이 있어 아래 옮겨두었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1500여개가 넘는 시민단체가 모여 발족한 <윤석열 즉각퇴진 사회대개혁 비상행동>과 가수 이승환 씨가 공연한 집회의 주최측인 <촛불행동>이라는 단체는 각각 다른 단체입니다. 실제로 12/13(금) 비상행동의 집회는 8시 30분 경 국민의힘 여의도 당사 앞까지 행진하여 대형 현수막 찢기 퍼포먼스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고, 촛불행동은 그 인근에서 집회를 열었으며 이승환 씨의 공연은 8시 경부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후자인 촛불행동은 박원순 성폭력 사건 2차 가해로 대법원 유죄 판결을 받은 1인이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지라 이 둘을 구분하여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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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종료와 더불어 탄핵 표결도 통과되어 가벼운 마음으로 겨울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몇 가지 감상이 있는데, 

 

첫 번째는 생각보다 적었던 국민의힘 국회의원의 탄핵 찬성 투표다. 2016년 박근혜 탄핵 당시에는 국민의힘의 전신인 새누리당 의원(128명)의 절반이 찬성했다. 이 번에는 108명 국민의힘 의원 중 12명만 찬성이다. 탄핵은 200명의 찬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기권이나 무효는 반대와 다를 바 없다. 

 

2024년의 윤석열 탄핵은 그 이유와 정당성에서 2016년 박근혜 탄핵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명확하고 중하다. 내란 2주만에 탄핵이 이루어졌다는 면에서 희망적이지만, 내란의 죄를 범했음에도 국민의힘 의원 중 10%만이 탄핵에 찬성했다는 면에서 놀랍다. 

 

한국 보수당은 삼당합당의 전통이 있었다. 민정당 계열 뿐만 아니라 민주화 운동을 했던 김영삼의 민주당 상도동 계열이 큰 분파를 차지했다. 박근혜 탄핵 시기의 민주당 계열 지도자가 김무성 아니었던가. 이 번 탄핵 투표 결과는 국민의힘이 더 이상 보수적 이념을 기치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포괄하는 국민정당이 아니라 상당히 순혈적인 극우이념정당으로 바뀌었다는 징표가 아닌가 싶다. 

 

다른 한 편으로 이 번 탄핵 투표는 적어도 민주주의에 대한 공통된 인식을 가지고 여야 모두에 영향을 끼치던 86세대가 더 이상 한국 정치의 좌우 정당 모두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게 되었다는 표식이 아닐까 싶다. 86 운동권 세대가 보수 정당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 시대는 지나갔다. 

 

민주주의 운동을 했던 세대의 보수 영향력 쇠퇴는 민주주의 절차에 대한 광범위한 합의와 불가역성을 전제로 한다면 딱히 아쉬워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 번 탄핵 투표 결과는 그 전제가 성립하지 않는다는걸 의미한다. 한국에서 보수 정치가 크게 쪼그라들 가능성이 크지 않은걸 고려할 때, 앞으로 한국 정치가 어떤 세력에 의해서 분점될지 두려운 마음이 있다. 

 

 

 

첫 번째가 절망 편이라면 두 번째는 희망 편이다. 군수뇌부는 윤석열의 반란에 저항하지 않았지만, 그 아래 영관급 부터는 반란에 적어도 소극적으로는 저항했다. 한 사회가 법과 제도에 따라 운영이 되기 위해서는 이를 존중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광범위한 시민을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의 위기 앞에서 분연히 떨처일어나는 각성된 시민도 필요하지만, 일상 생활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 주어진 권한의 사용에 두려움이 없으며 타인의 역할과 권한을 존중하는 시민층이 필요하다. 말은 쉽지만 상부에서 압력을 가해질 때 이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 번 사태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그런 시민층이 존재한다는게 확인되었다. 

 

 

 

세 번째는 다시 확인된 청년 세대의 성별 분화다. 여의도 광장의 최대 인파가 20-30대 여성인데 반해 청년 남성의 수는 매우 적었다는 것은, 청년 세대의 정치적, 문화적 태도에서 성별 분화가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 참여에서도 상당히 큰 분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일전의 포스팅에서 한국 사회 전반에서 대인 신뢰와 사회적 신뢰가 증가하고 있는데, 청년 남성에서만 오히려 하락하고 있다고 보여준 바 있다. 청년 남성의 "상대적" 신뢰 저하는 최근 코호트에서 생긴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2000년대 들어 전 코호트에 걸쳐 꾸준히 진행된 현상이다. 하지만 사회참여에서 성별 분화가 있다는 것은 이 번에 처음 확인된 것이 아닌가 싶다. 

 

태도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참여에서 성별 분화가 일어나면 앞으로 어떤 사회적 현상이 나타나는건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사회변동을 이끄는 인구학적 동력에서 전인미답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마지막으로 기관 신뢰도의 변화다. 아래 그래프는 KGSS를 이용해서 2003-07 대비 2018-23 기관별 지도자들의 신뢰도 변화다. 첫 번째 그래프는 신뢰도가 증가한 곳이고, 두 번째는 하락한 곳이다. 

 

 

 

여기서 드러내는 전반적 경향은 정부와 기업의 리더에 대한 신뢰도는 높아지고, 시민사회의 리더에 대한 신뢰도는 낮아진거다. 대부분의 정부 기관 신뢰도가 높아졌는데, 예외가 두 군데 있으니, 대법원과 군대다.  

 

이 번 윤석열 일당의 내란 사태는 한국사회에서 증가하고 있던 대통령실의 신뢰도에 충격을 가할 것이고, 군장성들에 대한 신뢰를 더욱 낮출 것이다. 앞으로 군은 시민의 신뢰를 어떻게 득할지 깊은 고민을 필요로 한다. 

 

지난 20년간 낮아진 시민사회에 대한 신뢰가 이 번 사건을 계기로 전환될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는다. 시위 문화가 응원봉과 K-pop으로 바뀐 건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는 현상이 아닌가 싶다. 비어가고 있는 시민사회의 공간을 채울 수 있는 대안이 그것 밖에 없어서가 아닌지. 

 

 

 

Ps. 바로 위에 언급을 하긴 했지만, 응원봉과 K-pop 이 뭘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승환은 그렇다치고, 아이유와 소녀시대는 되는데 싸이는 안되는 K-pop과 시위의 결합이 뭔지. 화염병에서 촛불로, 촛불에서 응원봉으로 변화하는데, 전자의 의미는 명확한데, 후자는 의미가 있는건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  

 

Pps. 내란이라는 큰 사건이 벌어지니 여러 분들의 분석이 빛을 발하더라. 계엄이 선포되고 무산된 직후 긴급 좌담회를 개최하고, 페북과 언론에서 맹활약한 박종희, 박원호 교수를 비롯한 정치학자들. 윤석열의 담화가 어떻게 사실과 어긋나는지 일목요연하게 분석한 이기은 선생의 팩트 체크. 뉴스타파의 기록생활인구 분석. 천관율 기자의 여전한 분석력과 글발. 슬로우 뉴스 이정환 기자의 요약 등등. 

 

Ppps. 이 전 포스팅의 신뢰도 변화 그래프를 보고 이상한 소리하는 분들이 몇 명 있던데, 나중에 그래프 그리는 법에 대해서 한 번 얘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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