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대부분의 선진국에서의 상황이다 (미국은 확실하지 않음).
자산불평등은 소득불평등보다 여러가지 측면에서 훨씬 더 복잡한 현상이다. 개념적으로도 복잡하고, 측정하기도 까다롭다. 연구할 수 있는 데이터도 별로 없어서, 알려진 것도 많지 않다. 저도 그렇게 깊게 아는 것도 아니지만, 불평등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가지는 몇 가지 상식이 있다.
한국에서 많은 분들이 집값에 워낙 민감해서 자산불평등에 대해서 얘기하기가 어렵다. 이 번에 논란이 된 고소득-흙수저, 부동산보다는 금융시장 부양이라는 이재명 정부의 신호는, 자산불평등에 대한 풍부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 박한슬 선생의 중앙일보 칼럼인 "토건보수와 개미진보"가 이 지점을 잘 포착해 매우 흥미있게 읽었다.
이 포스팅의 제목으로 돌아가, 집값이 오르면 자산불평등이 줄어드는 이유를 잠깐 설명해보자. 어느 국가나 자산불평등은 소득불평등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산이 없어도 생활을 영유할 수 있지만, 소득이 없으면 살 수 없다. 빈곤층도 소득은 있다.
소득과 달리 자산은 일부만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자산불평등을 볼 때 최하층은 거의 고려 대상이 아니다. 자산이 어차피 없으니까. 자산 가격이 크게 올라서 격차가 더 벌어졌다고 느껴도, 자산이 원래 0이었던 계층과의 격차는 자산불평등 지수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자산불평등은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중간층과 상층의 차이에 의해서 대부분 결정된다.
그런데 최상층을 제외한 나머지 집단의 자산은 크게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집이고, 다른 하나는 연금이다 (다른 선진국과 달리 한국은 집이 압도적일 것이다). 최상층의 자산은 주택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고 다른 금융자산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집값이 오르고, 다른 자산 가격에 변동이 없을 때, 상대적으로 중산층의 자산 상승률이 더 높다. 그 결과 집 값이 오를 때 자산불평등은 줄어든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 주택 가격이 지역별로 비균형적으로 상승하면 자산불평등이 증가한다. 그 이유는 최상층의 자산 중 부동산이 아닌 비중이 상대적으로 작아서다. 상층의 자산 중 금융자산의 비중이 작은 것은 일반적으로 자산불평등이 낮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부동산 소유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금융이 고도화되면 최상층의 금융자산 비중이 증가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은 자산불평등이 낮기 때문에 주택 가격의 불균등한 상승이 자산불평등 상승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주택가격 상승이 강남에 한정되지 않고 전체 지역으로 확산되면 자산불평등은 줄어들 수 있다. 무주택자의 설움은 커지겠지만, 이재용의 재산에서 주택이 차지하는 비중보다 주식이 더 많기 때문에 주택가격의 전반적 상승은 이재용 대비 중산층의 자산 비중을 높인다. 오르는 전세값은 (전세 대출을 일단 논외로 치면) 세입자의 생활수준을 낮추겠지만, 이들의 자산 저축을 강제해서, 주택자와 무주택자를 포함한 전체 중산층의 자산 축적을 유도한다. 그래서 전지역에서 집 값이 오르고, 주택 가격 대비 전세값의 비율이 오르면, 대다수 중산층의 자산이 상승하고, 자산불평등은 줄어들 수 있다. 실제로 2012-2017 사이에 주택 가격은 상승했지만 자산불평등은 줄어들었다. 이 시기의 주택 가격 상승은 수도권보다 비수도권이 주도했다. 주택가격 상승으로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이유는 자산불평등 증가 때문이 아니라 주거비용 상승의 문제다. 두 문제는 연결되어 있지만 초점이 다르다.
그럼 금융시장을 활성화시키겠다는 이재명 정부의 대책은 최상층에게 유리하고 자산불평등을 더 키우는 정책이 아닌가? 그럴수도 아닐 수도 있다. 여기서 연금이 나온다.
대부분의 중산/중상층에게 자산은 자산소득으로 생활을 영유하는 기능은 거의 없고, 경제적 쇼크에 대응하는 버퍼, 안전망이다. 생애주기에서 가장 큰 경제적 쇼크가 노동소득이 없어지는 은퇴다. 연금은 은퇴라는 쇼크로 인한 생활수준의 하락을 막아주는 버퍼이고, 본질적으로 자산과 동일한 기능을 한다.
많은 선진국에서 금융시장의 발전과 더불어 연금이 보편화되었다. 한국에서도 국민연금 뿐만 아니라 개인연금 제도가 도입되었다. 얼마나 많은 직장인들이 이 연금에 가입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개인연금 제도는 중산층의 자산을 늘리는 대표적인 제도다. 연금을 자산의 일부로 포함해야 하는지는 논란이 있다. 이 논의를 촉발한 사람은 Feldstein (1976)이라는 경제학자인데, discounted present value라는 개념으로 미래에 받을 연금을 현재의 자산으로 환산하여 자산 불평등을 측정했다. 많은 선진국에서 연금을 포함하면 금융시장의 활성화가 중산층의 자산비중 증대로 이어지고, 자산불평등이 줄어든다.
부동산, 현금, 주식만으로 측정하면 자산불평등이 증가할 수 있지만, 연금을 포함하여 실질 자산불평등을 측정하면 한국에서 앞으로 자산불평등은 줄어들 가능성이 농후하다. 대부분의 국민이 국민연금에 가입하고 있고, 연금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이 추세는 더 가파라질 것이다. 즉, 자산불평등이 늘어서 큰 일이라는 여러 언론의 보도와 달리, 한국에서 자산불평등으로 인한 생애과정 전반에서의 실질적인 삶의 질 격차는 연금의 효과로 인해 상당 기간 줄어들 가능성이 더 크다. (그렇다고 생애주기 초중반의 증여로 인한 삶의 질 격차가 의미없다는 주장은 당연히 아니다. 이게 다가 아니라는거지.)
이렇게 얘기하면 일부에서는 중하층은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않고 가입하더라도 조기 해제하는 경우가 많아서 국민연금 때문에 노년층 불평등이 더 커지는건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질문할 것이다. 맞는 얘기지만, 이 효과는 국민연금 수령자가 보편화되면 점차 줄어들 것이고, 설사 이 효과가 일부 지속되더라도 연금의 확대가 중산층의 총자산을 키우는 효과가 있는 건 변함이 없다.
국민연금 뿐만 아니라 개인연금은 세제 혜택이 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 세제 혜택은 중산층에 유리하도록 짜여 있다. 이 때문에 정치학자인 Howard는 (다른 제도를 포함해서) 이 제도를 "숨겨진 복지국가 (hidden welfare state)"라고 명한 바 있다. 복지가 아닌 것 같지만 실제로는 중산층에게 복지를 주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Howard 이후 이 개념은 학자마다 용어를 조금씩 바꾸면서 수 없이 연구되었다.
따라서 이재명 정부에서 금융시장을 활성화시키는게 (최상층이 금융자산을 더 많이 가지고 있어서) 반드시 흙수저에게 유리한 것은 아니지만, 이 정책 방향이 (개인) 연금의 확대와 결부되면 흙수저에게 부동산 자산이 주는 것과 유사한 안정성을 제공할 수 있다. <금융시장 활성화 + 연금 확산>이 중산층의 실질 자산 확대로 이어지고, 자산불평등의 하락을 유도하고, 흙수저가 부동산에 의지하지 않고도 부동산 자산이 주는 것과 같은 안정성을 노년에 누릴 수 있게 만들 수 있다.
Ps. 국민연금 확대는 어렵겠지만, 개인연금 확산은 상대적으로 용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