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관율 기자의 alookso 대선 라이브 업데이트

 

이 번 대선이 인물이 아니라 정책 선거였다고, 링크된 글의 5번에 나오는 진단이다. 

 

황당하다고 느끼실 분들도 있겠지만, 저는 동의한다. 이 번 대선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얘기한적이 한 번도 없는데, 해외 거주 관찰자로서 이 진단에 동의하는 이유에 대해서 얘기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대의제에서 정책 노선 선거는 사실 매우 피곤한 일이다. 아래 글, 이념적 일관성에서도 얘기했지만, 오래 단련된 정치인이나 사상가가 아니면 이념적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렵다. 각각의 사안에 대한 정책적 판단은 골치아프고 힘들다. 사회과학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전문가도 자기 분야만 안다. 이럴 때 어떤 인물에 대한 인상에 기반해서 투표하면 취득해야 할 정보량을 줄여줘서 효율적이다. 

 

진영에 기반해서 투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대략적인 지향점은 있는데, 각 정책에 대한 지식은 부족할 때 진영에 기반해서 투표하면 실패할 확률이 낮다. 

 

 

 

물론 투표하는 이유가 정책적 선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집권 세력에 대한 불만의 표시도 한 의견이고 충분한 선택 이유다. 특정 정책에 대한 선호 때문에 스윙보트가 되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고 싶은 얘기는, 이러한 스윙보트가 진영 기반 투표 대비 도덕적으로나 정책적으로 더 나은게 아니라는거다. 오히려 진영 기반 투표가 스윙보트보다 더 일관된 정책적 선호에 기반한다. 달리 말해, 도덕성 이슈가 아닌 정책 이슈에서는 진영논리가 평균적으로 더 낫다.  

 

한국에서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 중에서 후자의 두 개를 강조한다. 그런데 정치인의 첫번째 자질은 대의에 헌신하는 열정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치인이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번째 자격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이걸 우습게 안다. 마치 이 자격조건의 미달이 미덕인줄 착각한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이 번 선거에서 한국의 과거 어떤 선거보다 양당 후보 간 정책적 이질성이 크게 드러났다. 이전에는 이 번 선거 대비 이질성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진보와 보수의 가장 큰 차이는 경제, 사회정책이라기보다는 권력 집행의 방식이었다. 이명박 정권 시절의 민주주의 후퇴는 심각했다. 국정원 직원이 댓글 알바로 활동하다 걸렸으니 오죽 했겠는가.

 

민주당이 퍼주기 복지 공약을 한다고 하지만, 박근혜 후보 시절에 가장 중요한 공약이 기초연금이었다.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여의도 연구소에서 어떻게 페미니즘을 당내에서 정책적으로 구현할 것인지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토건의 기수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청계천을 복원할 때 친환경을 그 이유로 꼽았다. 외국의 보고서에서 가장 친환경 지도자로 가카가 선정되기도 했다.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 버스노선을 개편하고 욕먹고 있을 때, 노대통령이 어중간하게나마 옹호한 사실도 있다. 이민자를 처음으로 국회의원으로 추대한 것도 박근혜대통령이었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에 연말정산 공제혜택을 줄여 세금을 인상할려고 했을 때, 당시 야당 대표였던 문재인 대통령이 결사 반대했던 것도 상기하길. 제가 기억하는 정치인 문재인의 가장 큰 삽질이 이거다. 광범위한 세원에 대한 과세로 복지국가를 앞당긴다는 원칙에 역행했다. 단기 정치 이득이 아니라 일관된 이념에 입각해서 판단했다면 취하지 못했을 노선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 누구보다 국방을 강화했다. 한국이 강고한 군사강국이 되었다. 동남아 정책을 보고있자면 새끼 제국주의자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립서비스가 아니라 힘에 기반한 평화 노선에 가장 충실했던게 문재인 정부다. 

 

이렇게 정책적 격차가 크지 않으니 인물 위주의 선거, 권력행사 행태를 둘러싼 도덕성 위주의 선거가 된다. 그런데 정책이 실종된 인물 위주의 선거는 역설적으로 정책적 격차가 작아서 정책적으로 국론이 분열되지 않았다는 긍정적 의미다. 86세대의 기여 중 하나를 찾는다면 저는 이것을 꼽고 싶다. 여야 모두 정치 중심이 86 운동권 세대가 되면서 여야의 지향점이 상당히 비슷했다. 정책이 실종되고 도덕성 위주의 논리가 판을 치는게, 뒤집어 생각하면 국론 통일의 현상이다. 단단한 관료제에 기반한 국정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이런 국론 통일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와 대비해서 운동권 출신 86세대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새로운 세대의 선호가 충돌한 이 번 대선이 얼마나 큰 정책적 분열을 드러냈는지 생각해보라. 한국에서 노동조건 악화와 복지 축소, 성별 평등 약화를 명시적으로 표명한 첫 정치세력의 등장이다. 권력 구사 행태에 정책적 격차가 더해졌다.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는 잘 모르겠다. 윤석열-오세훈으로 이어지면서 정책적으로 진영 격차가 확산되는 전기가 될지, 여전히 부족한 복지와 다양성 관련 정책에서 외국의 사례를 좌표로 삼아 앞으로도 비슷한 방향으로 변화할지. 

 

조만간 핵심노동인구의 축소를 경험할 한국은 (1) 외국인 수용, (2) 여성의 사회 진출 확대, (3) 정년 연장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번 선택은 이 세 가지와 모두 배치되지만, 위 세가지 노선 외의 길은 국가적 자살인데, 설마 그 길을 가랴 싶다. 

 

 

 

마지막으로 최선의 정책은 "중산층에게 이득이 되는데 빈곤층이 묻어가는" 것이라는 얘기를 또 하고 싶다. 투표를 하는 중산층의 지지를 받는데, 그 혜택이 빈곤층에게도 돌아가야 한다. 

 

여러 번 얘기했지만, 한국 불평등은 상위 1%, 10%의 상층이 차상층보다 훨씬 많이 버는 상위 불평등이 아니라 빈곤층 20%가 차하위층보다 심각하게 더 가난한 하위 불평등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문재인 정부는 하위 20%의 처지를 개선해서 빈곤을 줄이고, 불평등을 축소하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 성과는 중상층의 소득이 늘지 않고, 부동산 문제가 악화되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런 정책은 지속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최저임금 1만원을 지지하는양 떠들었지만, 막상 정책적으로 문제되니 그 누구도 나서서 옹호하지 않았다는걸 기억하라. 최하층은 정치적으로 조직되지 않는다. 

 

 

 

Ps. 트럼프 대통령 시절에 그토록 제도로서의 정부 기관이 망가지고 혐오가 극심했지만, 의외로 인종 간 경제 격차는 상당히 줄었다. 흑인의 빈곤이 상당히 크게 감소했다. 백인 대비 감소폭이 더 크다. 흑인만 그런게 아니다. 히스패닉계, 아시안계, 기타 인종의 소득 증가율이 거의 전 분위에 걸쳐서 백인보다 더 높다. 최근 목도되는 소수 인종의 보수화에는 이러한 경제적 배경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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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적 일관성

교육 2022. 3. 8. 13:55

페북 포스팅을 보고 드는 생각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사안에 대해서 일관된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견지하지 않는다. 때로는 이러한 이념적 다양성을 자랑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러 사안에 대한 자신의 의견이 정치적 스펙트럼의 어느 한 분파에 일관되게 속하지 않고 다양하다면 셋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철학이 부재하거나, 사안별로 잘 모르거나, 둘 다거나. 저 자신도 진보-보수의 스펙트럼에서 사안별로 의견이 뒤섞여 있는데, 저의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가장 먼 의견을 가진 사안은 제가 가장 잘 모르는 분야다. 예를 들면 환경이나 원자력 등. 

 

정치인들이 당파에 따라 일관된 의견을 가지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분들의 철학적 깊이와 사안 이해의 넓이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이 경지에 이르기 어렵다. 특정 분야 전문가들이 스카웃되어서 정치할 때 황당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자기 분야 외에는 모르기 때문이다. 정치혐오는 어설프게 아는 분들이 가장 세다. 세상만사에 대한 이해의 일관성, 이념적 일관성을 확보하는건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렵다. 

그렇다고 모든 입장이 정해져 있다는 얘기는 당연히 아니다. 모든 정치인들이 깊은 이해가 있다는건 더더욱 아니고. 비슷한 철학과 이념을 가져도 새로운 사안이나 환경이 출현하면 해석에서 차이가 날 수 있고, 철학과 이념의 일관성에 정합적인 노선을 찾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정치는 현안을 다루기 때문에 비슷한 철학과 이념을 가져도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당파별로 대립되는 주제에서 정치인이 자기 노선과 이탈된 의견을 가질 가능성은 낮다. 이건 논리의 문제다. 같은 당에서 주요 노선에 변화를 가져올려면 노선투쟁을 한다. 이념적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사안에 대한 대응을 달리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베버가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얘기한 정치인의 세가지 자질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 중 열정은 "근원(대의)에 대한 헌신"이다. 영어로 "passionate devotion to a 'cause'"라고 하는데, cause는 궁극적 진리라고 해석해도 저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논리적 일관성이 없으면 이게 안생긴다. 그러니 같은 당에 속한 사람은 두리뭉실하게 잘 지낼 수 있는 동무가 아닌 뜻을 같이 하는 "동지"가 아닌가. 

정치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협하고 절충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본다. 하나는 자신의 철학과 이념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현실 세력을 조정하고 타협하는 훈련이 잘 되어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입장이 다른 사람의 철학적 바탕도 이해하기 때문이다. 전자와 관련해서 베버는 책임윤리를 들고온다. 이념의 노예가 되지 않고 유연하다는게, 한편으로는 책임윤리의 발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의 빈곤에 기인한 기회주의, 베버의 용어를 다시 빌리면 신념윤리 부족의 특성일 수 있다. 

 

그러니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성이란, 사안별로 자신의 이데올로기와 다른 다양한 의견을 가진다는 것이 아니라, 이념적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책임윤리에 기반하여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좋은 정치인은 이념적 일관성을 정책적 유연성으로 풀어내는 사람이다. 

베버는 정치인이 피해야할 악덕 중 하나로 허영(vanity)을 든다. 허영이란 <객관성>이나 <책임감> 없이 가장 선명하게 앞장서서 자신을 드러내서 어떤 "인상(impression)"을 주는 행위를 일컫는다. 

그런데 베버는 허영은 학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직업병으로 상대적으로 해롭지 않은 질병으로 간주한다. 증거도 별로없고 알지도 못하면서 선명하게 들이밀어도 그 자체로 학문적 발전에 크게 영향을 안끼친다고. 

그러니 제가 아무런 객관성과 책임감 없이 정치적 입장을 선명히 드러내고 다른 사람을 비웃으면 학문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이려니... (후다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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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환 (2022) 가족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대학원 진학 확률의 성별 격차. 한국사회학. 

 

며칠 뒤에 논문이 kci나 dbpia에 올라오고나서 포스팅하는게 정도겠지만 (이제 나와서 위에 링크 삽입), 현시점에서 젠더 이슈가 구조적 문제인지 아닌지 판단하는데 눈꼽만큼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걍 지금 올립니다.    

 

 

 

아래 그림은 부모의 소득 수준에 따른 4년제 대졸자의 대학원 진학 확률 기대값이다. 대졸자직업경로이동조사(GOMS)를 이용해서 분석한거다. 지역 등 인구학적 변수, 출신 학부 학교의 위세, 전공, 출신 고교, 부모의 교육 수준, 직업도 모두 통제한 결과다. 

 

부모 소득 거의 전영역에 걸쳐서 남성의 대학원 진학 확률이 여성보다 높다. 그런데 성별격차가 부모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일정한게 아니고, 부모 소득이 낮을수록 격차가 크고 부모 소득이 높을수록 격차가 작다. 부모소득 상위 10% 이상에서는 성별 격차가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게 된다. 소득 중위점을 기준으로 남성의 대학원 진학 확률이 여성보다 대략 20% 정도 높다. 

 

한국의 중상층 이하에서는 대학이 교육의 마지막 단계로 인식된다. 대학 교육까지는 자녀의 성별에 따른 가족투자의 격차가 없어졌을지 몰라도, 대학원 교육처럼 마지막 단계를 넘어선 추가적 교육에서는 여전히 가족 교육투자의 성별 격차가 존재한다. 가족 소득이 낮아서 자녀 모두를 지원하기 어려울수록 여전히 딸보다는 아들의 교육에 더 투자한다. 

 

이 연구에서는 대학원 진학만 봤지만, 대학에서도 딸보다 아들에게 더 투자한다고 의심할만한 기술통계가 있다. 부모의 소득 수준을 보면 평균적으로 여성 대졸자 부모의 소득 수준이 남성 대졸자보다 높다. 부모의 학력 수준도, 직업 위세도 여성이 더 높다. 딸이 있는 집안이 더 잘산다거나, 잘사는 집안만 딸을 낳는게 아니라면, 이런 경향은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가족의 자녀 교육 투자가 성별로 상이할 가능성을 제기한다.   

졸업 후 소득이 높은 전공에서는 성별로 대학원 진학 확률에 차이가 없고, 평균 소득이 낮은 전공에서는 남성의 확률이 여성보다 높다. 남성은 학부에서 경제적 리턴이 작은 전공을 선택했을 경우 대학원 진학으로 노동시장 소구점을 높이는 경향이 여성보다 강하다. 이 경향이 동원 가능한 자원의 성별 격차에서 발생하는지, 성별 교육/노동시장 전략의 선호도 차이에서 발생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출신 학교별로는 상위 20권 대학은 성별 격차가 없는데, 그 이하에서는 남성의 대학원 진학 확률이 더 높다. 특히 상위 20위권이 아닌 서울소재 사립대 출신은 남성의 대학원 진학 확률이 여성보다 상당히 높다. 

 

이상의 결과를 종합하면 사회경제적 지위 중상층 이하의 자녀가 중위권 대학, 그 중에서도 비인기 전공을 선택해 진학했을 때, 성별 대학원 진학 확률의 격차가 크다. 

 

최상위나 차상위 대학에 진학하면 남녀 모두 동일한 대학원 진학 확률을 보이지만, 중위권 대학에서는 성별 격차가 있다는 발견의 함의는 (대학원을 학벌의 하나로 보면) 학벌성취에서 남성은 대학 진학과 대학원 진학 두 단계에서 기회를 가지는데 여성은 기회가 한 번 밖에 없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다는거다. 성별로 학벌성취 기회의 구조적 격차가 존재한다. 

 

 

 

당연히 기대하듯이 같은 대학, 같은 전공이라도 가족 사회경제적 배경 상층 자녀의 대학원 진학 확률이 하층보다 높다. 무려 2배가 넘는다. 부모의 소득, 교육, 직업 모두 그렇다. 가족배경 세 변수를 동시에 통제해도 각 변수가 모두 통계적으로 유의하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몇 가지 재미있는 점이 있다.  

 

우선, 자산의 경우, 단순 상관을 보면 자산상층과 대학원 진학이 정의 관계를 보이는데, 부모의 소득, 교육, 직업을 통제하면 자산은 대학원 진학과 음의 상관으로 바뀐다. 다른 조건이 동일할 경우 자산 상층의 자녀는 대학원에 진학하기보다는 노동시장에서 괜찮은 일자리를 취득하는 확률이 높다. 대학원 진학은 소득/교육 수준이 높지만 자산은 높지 않은 가정 출신이 많이 한다. 

 

교육은 부모 각각의 수준이 모두 중요한데, 딸의 대학원 진학 확률은 모친이 대학원 교육을 받았는지 여부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어머니가 대학 학력자일 경우 자녀 모두의 대학원 진학 확률이 비슷하게 높아지는데, 어머니가 대학원 학력자일 경우 아들보다 딸의 대학원 진학 확률이 특히 더 높아진다. 

 

 

 

 

이 결과의 한 가지 함의는 남성과 여성의 출신 배경을 비교할 때, 대학에서 대학원으로, 대학원에서 괜찮은 일자리로 갈수록, 여성의 가족배경이 남성보다 좋을 확률이 높다는거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올라갈수록 여성 동료의 출신 집안 경제적 사정이 남성인 자기보다 나은 것으로 보일거다. 남자는 없는 집 출신으로 어렵게 노력해서 올라 왔는데, 동료인 여성은 집안 사정이 좋아서 편하게 살아온 것으로 보이는 그런 상황. 상대적 박탈감 느끼기 딱 좋다.

 

하지만 그 이유는 사회경제적 상층이 아니면 여전히 딸보다는 아들에게 상대적으로 더 많은 투자를 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달리 말해 성별 기회의 구조적 격차로 여성이 남성보다 더 긍정적 선택편향을 가지게 된 결과 남성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되는 아이러니. 

 

 

 

 

 

 

Ps.

(1) 고등학교는 이공계인데 대학에서 인문계로 바꾼 사람의 대학원 진학 확률이 고교와 대학 모두에서 인문계를 선택했던 사람보다 높다. 출신대학과 학과를 모두 통제해도 인문사회계 학부 전공자 중 과학고/외고 출신의 대학원 진학 확률이 일반고 출신보다 높다. 

 

(2) 서울 다른 지역 출신보다 강남3구 출신자의 대학원 진학 확률이 가족의 사회경제적 배경(소득, 자산, 부모교육, 부모직업)을 모두 통제해도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높다. 

 

(3) 출신 대학별로는 다른 모든 변수를 통제해도 "서연고 카포 서성한"로 표현되는 최상위 대학(진학률 28.4%)과 차상층 (그 다음 상위 20위권 대학은 16.3%)의 격차가 가장 크고, 차상층과 그 다음 랭크 대학(14.7%)의 격차는 그렇게 크지 않다. 

 

(4) 대졸 직후 가장 대학원을 많이 가는 전공은 공대를 제외한 순수 자연과학(26.7%)이다.

 

(5) 대졸 직후 가장 대학원을 안가는 전공은 사회과학(6.0%)이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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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노동시간 격차에 대해서도 모두 얘기했는데, 여전히 제대로 읽지 않고 불만을 가지는거 같다. 그러려니 한다. 

 

지난 주 불평등연구회 세미나에서도 청년들의 장시간 노동시간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전반적인 노동시간은 줄었지만, 입사 직후 OJT 기간 중에는 장시간 노동이 유지되었을 가능성, 그래서 청년층의 장시간 노동은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는거다.

 

노동시간 같은 사회 전반적 문화와 관련된 현상이 청년층에서만 뭔가 다르게 통시적으로 진행될 가능성을 저는 낮게 본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체크해 보았다. 

 

아래 그래프가 GOMS(대졸자직업이동경로조사)의 4년제 대졸자 노동시간 변화다. GOMS는 대학 졸업 후 1-1.5년이 지난 시점의 노동시간이다. 보다시피 장시간 초과노동자는 대졸 청년층에서도 크게 줄었다. 2008년에는 52시간 초과 근무자가 21%였는데, 2019년에는 8%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35시간 미만 노동자의 비율은 큰 변화가 없다. 

 

52시간 노동제가 2018년에 시행되었으니까, 2018년과 2019년 자료는 52시간제의 영향을 받은 후다. 다른 연도보다 2017-19의 2년 사이에 주당 45시간 이상 장시간 노동자의 비율이 8%포인트가 줄어들었다. 52시간 근무제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노동시간의 감소는 장기 추세다. 2008년과 2017년을 비교하면 장시간 노동자 비율이 10%포인트 줄어들었다. 10여년전에 비해서 장시간 노동의 비율은 확실히 줄었다. 15년 전의 대졸 직후 청년 노동자에 비해 현재의 대졸 직후 청년 노동자가 더 많은 임노동 외의 시간을 누리고 있다. 

한 편으로 이 결과는 워라밸을 개선하면 청년들의 인구행동이나 삶의 만족도 문제가 해소될 것이라는 진단에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work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은 확실히 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애, 혼인, 출산이 증가했다는 얘기는 없다.  

 

이러한 추세를 보고 드는 생각이 워라밸에서 work가 아니라 life의 의미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을 분석할 때 크게 3가지 범주로 나눈다. 돈벌이 노동, 돈벌이가 안되는 노동 (가사, 돌봄 등), 그리고 레져.

 

일반적으로 워라밸의 라이프는 돈벌이가 안되는 노동과 레져를 합친 개념이다. 예전에 한 번 쓴 적이 있는데, 그래서 남성의 돈벌이 노동시간이 줄어들 때, 레져 시간이 반드시 증가하는게 아니다. 미국의 경우는 남성의 돈벌이 노동 시간이 줄어들면서, 레져 시간이 증가한게 아니라, 돈벌이가 안되는 가사 노동시간이 늘었다. 20세기 동안 미국에서 여성의 가사노동이 43시간에서 28시간으로 15시간 줄어들 때, 남성의 가사노동은 4시간에서 16시간으로 11시간 늘었다. 대략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이 남성보다 75%많다.

 

워라밸은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이 줄고 돈벌이 노동시간이 늘어나는 것과 남성의 돈벌이 노동시간이 줄고 가사노동시간이 늘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한국은 2019년 현재 기혼자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이 남성보다 250% 많다. 한국도 다른 국가의 추세를 따른다면 여성의 노동시장 진입이 늘고, 남성의 임노동 시간이 줄어들고,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이 증가할 것으로 저는 예측했었다.

 

"돈벌이 노동 vs 다른 시간"의 균형이 워라밸이니까.

 

그런데, 최근에 느끼는 점은 한국은 "돈벌이 노동 vs 다른 시간"의 균형에서 워라밸의 의미를 찾는게 아니라, "모든 노동 vs 레져 시간"으로 워라밸의 의미를 찾는게 아닌가 싶다. 자기개발은 워라밸이 아니라 레져를 깎아먹는 워라밸의 방해 요소다. 

 

이러한 대립점 변화의 또 다른 의구심은 워라밸에서 라이프의 의미가 가족이 아니라 개인이 되었다는거다. 가족은 가사노동의 포션을 늘려서 워라밸에 방해가 된다. 다른 국가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과격한 개인주의로의 이행. 증거가 제대로 없는 가설적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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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걸 참는 능력

교육 2022. 2. 16. 09:10

종교 현상은 사회과학의 대상이지만, 신의 존재 같은 건 사회과학의 대상이 아니다. 지금은 너무 당연하게 들리는 이 말이 원래 그랬던건 아니다. 철학에서 사회과학이 뭔가 다른 분야로 독립한 이후에나 성립되었다.  

 

현대 사회과학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연구의 바탕이 되는 이론이 "중범위 이론"이라는거다. 거의 모든 사회현상에 대한 일관된 설명을 제공하는 이론이 아니라 특정 현상에 특화된 이론을 사용한다. 사회현상이란게 따지고 보면 모두 연결되어 있지만, 그 모든 연결을 다 고려하지 않는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사회현상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과학 연구 결과를 보고 세상 이치를 깨우치고자 하는 분들은 답답하게 느낄거다. 

 

이런 분들에게 해드리고 싶은 얘기는 엉뚱하게 완성된 논리를 세우지 말라는거다. 인간본성에 따라 성별로 원하는 바가 어떻게 같느니 다르니 하는 주장을 강하게 하면 아무도 안처준다. 그런 주장에 반응하는 정상적인 사회과학자는 한 명도 없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 본성서부터 시작해서 연역으로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논리가 별 의미없다는걸 깨닫고 주류 사회과학에서 그런 소리 안한지 오래되었다. 

 

예를 들어, 아래보니까 가부장제적 남성부양자 모델에 대한 페미니즘의 반발을 얘기하더라. 여성들이 이 모델에 대해 반감을 가지면서도 이 모델에 의존한다고 불만이던데, 지배적 사회모형은 항상 그런 양가적 태도를 동반한다. 그리고 남성부양자 모델은 여전히 작동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모델이 전사회에 걸쳐서 일관되게 작동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한국만 그런게 아니고 어느 사회나 그렇다. 

 

한국에서 혼인율이 낮아진 원인 중의 하나로 20대 후반 30대 초반 남성의 경제적 부가 충분하지 않다고 인터넷에서 많이 얘기한다. 가부장제적 남성부양자 모델이 되기에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다는거다. 하지만 최선영, 장경섭(2012)의 연구를 보면 1930년대 출생 코호트 남성의 결혼 시점 직업이 무직인 경우가 21%였다. 현재보다 지금은 80대인 1930년대 출생자들이 결혼할 당시가 가부장적 남성부양자 모델이 더 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는 새신랑의 1/5이 무직인데도 결혼을 했다. 가부장의 경제적 능력이 결혼의 전제조건이 아니었다는 의미다. 그 때는 여성들이 남성의 경제력 능력을 안따졌나? 세상에 그럴리가. 남성부양자 모델보다 생애사에서 누구나 거쳐야 하는 사회적 제도로써의 혼인의 강제력이 더 컸을 따름이다. 개인 선택의 자유가 낮았기에 가능했던 사회현상이다. 

 

그러니 과거에는 남성부양자 모델에 기반해서 가족 경제가 작동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혼인율이 낮아졌다는 단순한 설명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사회적 제도로써의 혼인의 의미가 변화하고, 결혼의 경제적 조건이 변화하고, 여성의 사회진출로 인한 기회비용이 변화하고... 등등등. 혼인은 성욕이라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 욕망, 경제적 능력으로 채워지는 식욕과 다른 물질적 욕망과 연결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그 욕망에서 부터 혼인 제도나 패턴을 유추할 수 있는게 아니다. 

 

사회과학적 이해란 이런 복잡한 관계를 알도록 노력하는거다. 

 

(사회)과학적 사고란 새로운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 어설픈 논리로 설명하려들지 않고 모르는 체로 참는 능력이기도 하다. 미시적 심리와 거시적 사회현상을 모두 포괄하는 완결적 설명은 없다. 근원이라는 환원주의적 설명은 매력적으로 들리지만, 현실 세계의 검증테스트를 통과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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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기사: 이대녀는 40대만큼 진보인데···이대남은 대한민국 최강 보수 [본지·정당학회 분석]

 

올해 1월25일자 기사인데 꽤 화제가 되었다. 이 조사의 의미에 대해서 크게 덧붙일게 있는건 아니고, 기사가 나온지 몇 주 지났으니, 기사의 직접적 해석을 넘어, 이 조사와 지난 번에 생난리가 났었던 KBS 조사를 연결해서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중앙일보 기사는 20대 남성의 정치적 성향이 재분배 영역을 포함해서 전반적으로 보수적이라는걸 다시 한 번 드러낸다. KBS 조사와 중앙일보 조사 결과는 하나의 일관된 스토리로 연결될 수 있다. KBS 조사 결과로부터 20대 남성의 인식이 독특하다는 정보를 수용하기를 거부했던 분들은 이제 뭐라고 할 것인가? KBS 조사가 소음이라기보다는 정보값이 컸던 신호라는걸 이제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경제성장과 복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성소수자 대응 등 모든 측면에서 20대 남성은 보수적이고, 20대 여성은 진보적이다. KBS 조사는 성별 분화의 한 축이 계급일 것이라는 신호를 제공한다. 

아마 방법론적으로 중앙일보 기사와 KBS 기사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변명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중앙일보 기사도 방법론적으로 그렇게 깔끔해 보이지 않는다. 전연령대 2천명 조사했으니까, 성(2집단)*연령대(5집단)의 10개 집단별로 샘플수는 200명 남짓이다. 그 숫자로 위와 아래 그래프와 같이 스무스한 분포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나? 

 

기사에 나온 그래프를 보면 0점이하 10점 이상에도 음영이 있다. 응답이 0~10이니까 당연히 이 값은 불가능하다. 대략적인 분포를 엄청나게 smoothing해서 만들었거나, 모수통계로 정치 성향의 기대값을 계산했더니 설정된 바운더리를 넘어간 경우, 또는 두가지 방법론의 결합일 것이다. 하지만 이 번에는 누구도 디테일을 무시하고 대략적 경향을 보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정보에서 신호를 포착하지 못하는 때가 바로 자신의 편견이나 이념이 객관적 인식을 가리는 지점이다. 저 자신을 포함 누구나 이 지점이 있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고 조심하도록 노력하는게 최선이다. 

Posted by sov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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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인터뷰 기사: 급한 건 잡았지만 중요한 건 놓쳤다… K방역 2년의 명암.

강국진 기자 자작나무 통신: 취재 뒷 이야기

 

2주 전에 나왔던 인터뷰 기사. 내용인 즉, 방역의 성공은 자영업자의 희생에 바탕한 것인데, 이에 대한 보상이 너무 미흡하다는 점이다. 일부를 아래 옮기면, 

=====

“방역 대응만 놓고 보면 한국은 확진자나 사망자 추이를 보더라도 외국과 비교해 굉장히 잘하고 있다고 본다. 성과를 거둔 원동력이 뭘까. 결국 국민들의 참여와 협조다. 특히 자영업자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희생 뒤에 보상이 없다. 자영업자들은 정부 방침에 협조했다는 이유만으로 빚에 허덕이고 폐업을 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를 희생했으면 보상을 해준다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 통하질 않고 있다. 소수를 희생양삼아 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좋지 못한 선례를 만드는데 정부가 앞장서고 있다. 방역 성공을 위해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 유지를 희생하는 셈이다...

자발적인 협조가 가장 좋은 방식이라고 본다. 불가피하게 강제조치를 해야 할 때는 보상이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중국같은 방식으로 전면봉쇄하고 통제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본다. 한국은 중국처럼 전면적인 봉쇄나 통제를 하진 않지만 손실보상을 제대로 해주지 않고 일방적인 희생에 근거했다는 점에서 보면 중국적 요인이 없다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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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터뷰를 하고 문대통령이 "긴급지원은 속도가 생명"이라며 신속 처리를 당부한다는 기사를 보니, 너무 남얘기 하듯이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하위 80% 보상도 좋고, 90% 보상도 좋은데, 이런 커트라인에 대한 논의는 부차적이다. 방역협조로 손실을 보면 보상을 해야 한다. 그 나마 선거가 있어서 추경이라도 하는건지. 

 

한국의 자영업자 비율이 타국가보다 높고, 구조조정의 필요성도 충분히 공감하는데, 그 구조조정을 팬데믹을 핑계로 정부의 강요로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자영업자가 현정부를 지지하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될 지경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인천, 경기 지역의 직업별 지지율 변화를 보면 세금현실화 등으로 자영업자가 지지층에서 대거 탈락했다. 비슷한 양태가 반복되고 있지만, 그 때는 지금보다 명분이 있었다. 공동체의 위기를 특정 계층의 희생으로 극복하면, 당연히 각자도생의 기운만 높아진다. 

 

한국은 경제가 발전하면서 중산층 이상의 복지 필요성에 대한 공감도가 지속적으로 낮아지고 있다. 조만간 복지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해서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으면 젊은 세대의 보수성과 중산층 이상의 반복지가 결합해서 복지백래쉬가 도래할 가능성이 있다. 가장 중요한 복지는 세대간 협약이다. 현재의 노동인구가 번 돈으로 현재의 노인인구가 괜찮은 삶의 질을 누리는게 가장 중요한 복지다.

 

이 복지를 한국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현재 노인 인구의 국민연금 노령연금 수급률은 40%(현재 노동하는 고령인구의 국민연금 가입률은 10%)가 안된다. 국민연금 가입률이 70%에 이르는 현재의 50대가 은퇴할 때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노후 생활이 복지에 의해서 지탱되는 첫 시대가 열린다. 복지란 일단 시작해서 궤도에 오르면 되돌리기 매우 어렵다. 

 

코로나 후 복지 확대, 공동체 유지보다 각자도생의 분위기가 커져서, 중산층 노인이 복지에 기반해 삶을 영위하는 첫 세대가 나오기도 전에 복지백래쉬가 도래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Posted by sov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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