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T 기사: Vast New Study Shows a Key to Reducing Poverty: More Friendships Between Rich and Poor.

Chetty et al. Nature 논문

 

최근 가장 화제가 된 사회과학 논문은 체티와 동료들이 페이스북 자료를 이용해 작성한 위 글일 것. Nature의 논문 출간에 맞춰 뉴욕타임즈에도 대문짝하게 기사가 나왔다. 체티의 파워를 다시 한 번 실감하는 순간.

 

워낙 화제가 된 논문이고, 한국 언론에도 많이 소개되었고 (예를 들어 요기), 여기저기서 공감한다는 얘기도 보여서 관련 논쟁을 소개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논문의 내용인 즉, 어렸을 때 계급을 뛰어넘는 친분을 쌓았던 경우에 커서 빈곤을 극복하고 더 나은 경제적 삶을 사는 확률이 높다라는 것. 현재 자신의 처지가 가난하더라도 부유한 친구를 사귀고 부유한 가족의 삶을 알면 커서 뭔가 달라진다는거다. 

 

이 논문이 나온 직후에 미국사회학대회가 열렸는데, 거기서 만나본 사람들의 반응은 대략 세 가지였다. 하나는 드디어 경제학자도 사회학자들이 강조한 사회적 관계의 중요성을 알기 시작했다는 환영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많지는 않더라. 

 

다른 하나는 이거 사회학계에서 수십년 한 소리인데 이제와서 경제학자가 빅데이터 써서 얘기했다고, 빈곤을 극복할 수 있는 홀리그레일을 찾았다는 듯이 호들갑을 떠는 이유가 뭐냐는 거다. Coleman의 1988년 AJS 논문인 Social Capital in the Creation of Human Capital 이후 진짜 지겹게 연구한 주제 아니던가. 그래도 사회학자 연구들이 20편 정도 인용되었으니 그렇게까지 열받을 일은 아니라는 반응도 있었고 (David Brady 교수가 직접 세어봤단다). 

 

마지막은 이 연구에서 말하는 사회자본의 효과가 과장 되었다는 지적이다. Richard Alba 교수의 비판인데 Andrew Gelman 교수의 블로그에 실려있다. 사회자본이 효과가 있는건 다 아는데, 체티의 연구에서 말하듯이 크지는 않다는 것이 알바 교수 비판의 핵심이다. 

 

저는 계급 간 친분을 통한 사회자본의 효과에 대해서 의심하는 쪽에 가깝다. cross-class friendship은 아시아계 미국인이 다른 인종보다 성공한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 Jennifer Lee and Min Zhou 교수에 의해서 제안되기도 했다. Hyper-selectivity 가설이라는 이론이다. 간단히 말해,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워낙 학력이 높은 쪽으로 편향되어 있는데, 이 때문에 같은 인종끼리 친구를 형성하는 아시아계 학생들은 하위계급 출신도 상위계급과 친구가 되는 cross-class friendship을 형성하고, 부모들도 cross-class networks를 형성한다는 거다. 

 

하지만 사회자본은 선택편향을 통제하기 매우 어렵다.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하지 않던가. 하위계층이라도 상위계층적 마인드나 태도를 가지고 있어서 cross-class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결국 성공하는건지, 사회자본이 실제 원인으로 작용하는건지 알기 어렵다. 설사 사회자본이 원인으로 작용하더라도 전자의 상관관계 때문에 양적으로 측정하면 사회자본의 효과를 과장될 가능성이 크다. 

 

체티의 연구가 사회자본의 효과에 대해 크게 강조한 반면, 수십년 동안 사회자본의 효과를 연구한 사회학계에서는 최근들어 사회자본의 효과에 대해서 의구심을 나타내는 경우가 늘었다. 그 중 하나가 작년 Sociology of Education에 발표된 Gamoran과 그의 동료들의 논문이다. 아리조나와 텍사스에서 3천명의 1학년 학생들을 무작위로 사회자본을 강화하는 프로그램(Families and Schools Together, FAST)이 있는 학교로 배정한 Treatment Group과 그렇지 않은 Control Group으로 나눠서 봤는데 2년 후에 읽기와 수학 성적에서 두 그룹 간에 차이가 없더라고. 

 

사회자본 강화를 위해서 학교에 프로그램을 만들고 비용을 투자했는데, 실제 효과는 없더라는 것. 방법론적으로 이 논문이 지금까지 나온 어떤 논문보다 가장 엄격하게 선택편향을 통제한 것이다. 이 실험이 cross-class에 초점을 맞춘건 아니니, 체티의 연구와 어긋나는건 아니지만...  

 

더 놀라운 건, 실제로는 차이가 없는데, 서베이에서 물어보는 방식으로 사회자본을 측정하면 사회자본과 학업성취에 긍정적 상관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 

 

 

Ps. 친구 따라 강남가고, 맹모삼천지교라 하지만, 다음 세대의 빈곤을 극복하는 첩경은 사회자본을 길러주는 새로운 프로그램이 아니라 현재 세대의 빈곤을 줄이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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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ll & Harris (2014) Annals of Tourism Research

 

이런 것도 연구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찾아보니 역시나 논문이 있다. Annals of Tourism Research는 주변에서 아무도 안읽고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 저널이다. 그런데 가끔 사회학 저널 랭킹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있어서 의아했는데, 처음으로 이 저널의 논문을 살펴보게 되었다. 

 

한국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에서도 비행기에서 우는 아이를 견디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고, 좀 더 포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좀 더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있다. 논문은 discourse를 분석한 것이다. 

 

논문에 따르면, 이 번에 난리를 친 40대 남성처럼,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이가 아니라 부모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부정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아이를 가진 부모들이 뭔가 특권을 가진 것처럼 행동한다고 느낀다고. 

 

Sydney Morning Herald에 따르면 많은 서베이에서 우는 아이가 비행에서 가장 참기 어려운 불편으로 꼽았다. 실제로 아이의 울음소리는 소음 중에서 가장 참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란다. 사람은 아이울음에 집중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기 때문에. 

 

말레이지아 항공은 1등석과 upper deck 이코노미석을 노키즈 존으로 만들었고. 호주의 한 서베이에 따르면 54%의 응답자가 아이가 있는 가족 여행객은 비행기에서 별도의 섹션에 자리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응답. 

 

비행에서 이륙과 착륙 때 아이가 우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 귀에 압력을 느끼고 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아이들은 우는 것 뿐이다. 

 

남성의 행동은 절대 용납할 수 없지만, 이런 일이 한국 특정 그룹의 특성이라고 비약하는 것도 그다지. 

 

 

Ps. 비행기 안에서의 행동에 대한 가장 유명한 논문은 아마도 1등석이 있어서 불평등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비행기에서 기내소란이나 난동이 발생할 확률이 높다는 요 연구가 아닐지. 몇 년 전에 꽤 화제가 되었던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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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 자료

 

부인이 음식을 태웠거나, 남편에게 대들었거나, 말도 안하고 외출했거나, 애들을 돌보지 않았거나, 성관계를 거부했을 때는 남편의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대답한 비율. 18.4%

 

15-49세 여성 중의 답변. 

 

독일이 가장 높아서 19.6%. 미국은 11.0%. OECD 평균은 6.7%.

 

원자료는 2005-2016 World Value Survey 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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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시작 이후 KGSS에서 꾸준히 물어본 질문 중 하나가 자신이 생각하는 10점 리커트 척도에서의 계층 위치다. 주관적 계층인식(Subjective Social Status: SSS)이라는 표준화된 질문인데, 그 변화가 엄청나다. 

 

10점 척도에서 중위값은 5.5지만, 5점이 중간값으로 인식된다. KGSS에서도 5점의 응답 비율이 거의 매년 가장 높다 (단 한 번의 예외가 2005년. 4점 응답이 5점보다 5명 많다). 5점 응답이 꾸준히 25~30%를 차지하여, 항상 단봉형(unimodal) 분포를 보인다. 그래서 계층인식에서 5점 미만(1-4점)을 하층(=중간미만)으로, 5점을 중간층으로, 6점 이상을 상층(=중간초과)으로 구분해서 그 변화를 살펴보았다.

 

아래 그래프가 분포의 변화이다. 2003년에 KGSS 조사를 시작했을 때 자신의 계층이 중간이하라는 비율이 45~50%로 가장 많았다. 상층은 20%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2021년 현재 자신이 중간층을 넘어선다는 비율이 45%로 가장 높고, 중간미만이라는 비율은 27%로 가장 낮다. 중간과 하층을 묶어도 55%로, 상층이라는 응답 비율 45%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 특히 계층지위 상층 인식의 증가는 2012년 이후 박근혜 정부의 등장서부터 시작되었다. 2010년대 이후 한국은 드라마틱한 계층인식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모든 국가의 GSS를 점검해 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미국에서는 이러한 급격한 변화가 관찰되지 않는다. 

 

 

계층인식의 이러한 변화는 아래 포스팅한 빈곤층 지원 축소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의견의 급증과 일치한다.

 

이러한 변화의 의미가 무엇일까? 자신이 하층이라는 비율은 줄고 상층은 늘었으니 사회가 좋아진 것인가? 

 

우선, 계층인식 변화의 정치적, 정책적 함의부터. 

 

복지 정치, 정책의 측면에서 2010년대 초반까지만해도 하위계층의 복지 확대는 자신도 혜택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는 인구의 비중이 높았다. 적어도 레토릭의 측면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지금은 하위계층의 복지 확대는 자신과 무관한 일로 인식할 인구 비중이 가장 높다. 

 

미디언 보터 이론을 적용하면, 계층의 우편도 분포(=상층이라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고, 하층이라는 비율이 높은 분포)는 재분배 정책에 우호적인 투표를, 좌편도 분포(=상층이라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고, 하층이라는 비율이 낮은 분포)는 재분배를 비토하는 투표를 하게 된다. 미디언 보터가 우편도 분포에서는 하위계층에 좌편도 분포에서는 상위계층에 속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계층인식은 2010년까지만해도 우편도 분포였지만, 이제는 좌편도 분포로 바뀌었다.

 

유권자들의 인식이 이렇게 바뀌면 거의 모든 정당의 정책이 보수화될 가능성이 크다. 진보 정당이라 할지라도 투표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보수적 정책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계층 인식 변화의 더 중요한 함의는 변화의 원인을 생각해보면 드러난다. 

 

계층인식이 이렇게 급변한 이유가 2012년 이후 객관적으로 상층이 급증했기 때문은 당연히 아니다. KGSS의 질문은 상대적 위치이기 때문에 객관적 소득이나 자산의 변화가 계층인식의 급변을 반드시 야기하지 않는다. 객관적으로 2010년대 이후 소득 하층의 상황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상층의 급증을 동반하지는 않았다. 

 

제가 생각하기에 위와 같은 변화는 계층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를 의미한다. 거의 모든 국가에서 유니버셜하게 자신의 주관적 계층을 객관적 계층보다 낮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상층보다는 하층의 비율이 높은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무슨 이유에선가 자신을 하위계층이라고 인식하기를 꺼려하고 상위계층이라고 인식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2010년대에 급증한 것이다.

 

계층이 바뀌었다기 보다는 계층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이러한 태도 변화는 한국 사회의 다른 변화와 일치한다. 사회적 경제적 지위의 성취를 능력의 결과로 간주하면, 자신이 하위계층이라는건 무능하다는 의미가 된다. 반대로 자신이 능력이 있다면 상위계층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과거 불평등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인식하고 재벌 위주의 경제 구조를 고쳐 문제를 해결하자고 했을 때는, 가상의 상위계층을 설정하고 자신을 중간이나 하위계층으로 인식했다. 빈곤은 구조적 문제였다. 하지만 이제 빈곤은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능력 문제가 되었다. 중상층은 가상의 상위계층과 자신을 분리해서 인식하지 않고, 이제 가상의 하위계층과 자신을 분리해서 인식하는 듯하다. 계층정체성의 큰 변화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각자도생을 넘어, 패자에 대한 혐오가 늘어남. 자신은 패자가 아니기에 하층에 속할리가 없고, 중간층도 아니고, 상층에 속한다는 인식이 확대되었다는 우울한 진단이다. 계층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어, 계층 정체성이 급변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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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공정이라는 이름의 각자도생

강태영 대표 트위터 요약

 

경향신문과 언더스코어의 공정인식에 대한 협업 데이터 저널리즘 세 번째 기사. 이 번에도 정보량이 많다. 일독을 권함. 

 

기사의 내용에 대해 약간의 보완적 자료를 제공하면 맥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듯. 

 

강태영 대표의 SNS 내용에 KGSS의 2011년 조사와 비교하는 내용이 있다. 현 시점의 조사에는 청년 남성이 가장 보수적으로 나타나는데 2011년 KGSS 조사에서는 그런 경향이 없다는 거다. 청년 여성이 기성세대보다 더 진보적이지 않다는 결론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복지와 정부 역할에 대한 인식이 세대별 성별로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 수 있는 KGSS 조사 항목으로 "정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혜택을 줄여야 한다"는 찬반 의견이 있다. 아래 그래프가 그 변화이다. 5점 리커트 척도 응답 중에서 이 항목에 반대하는, 그러니까 정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혜택을 줄여서는 안된다는 응답의 비율이다. 

 

보다시피 가장 큰 변화는 세대와 성에 관계없이 빈곤층에 주는 혜택을 줄이는 것에 반대하는 비율의 폭락이다. 낙폭이 엄청나게 크다.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다. 2014년에만 해도 모든 그룹에서 60% 이상이 빈곤층 혜택을 줄이는 것에 반대했는데 지금은 20~40% 남짓이다. 청년 남성은 2009년 79%에서 2021년 24%, 1/3로 줄었다. 빈곤층 혜택을 줄이는 것에 가장 반대하는 그룹이 청년 여성인데, 그래봤자 그 비율은 41%다. 2009년 대비 절반으로 줄었다. 각자도생은 청년만의 시대정신이 아니다. 한국 사회 전반이 빈곤층에 적대적으로 변하고 있다.

 

이런 급락을 코로나 영향으로 해석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항목들도 모두 점검해 봤는데, 2021년 이전에도 분배와 관련된 여러 항목에서 꾸준한 보수화 경향이 관찰된다. 경제적 배분에서 한국사회의 전반적 보수화는 대세다. 

 

그룹별로 보자면 2009년에는 청년은 성별로 격차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2021년에는 청년 남성은 가장 보수적으로, 청년 여성은 "상대적으로" 가장 진보적으로 바뀌었다. 한국사회는 세대와 젠더에 상관없이 급격히 각자도생의 시대정신으로 보수화되고 있는데, 그나마 청년 여성의 보수화가 덜 심하고, 청년 남성의 보수화가 가장 심하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렇다. 

 

청년 여성이 어떤 집단인지에 대해서 데이터마다 조금씩 결과가 다른 이유는 위 그래프에서 보여지듯 사회적 인식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아노미 상태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회 전반적 보수화(즉, period effects)와 청년 여성의 페미니즘 자각(즉, cohort effects)이 혼재 내지는 충돌하고 있는 듯 하다. 

 

청년 여성에 대한 규정이 조금 조심스러운데 반해, 청년 남성의 보수화는 KGSS에서도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2021년 KGSS에서 새로 질문한 항목으로 "경제적 자원 분배시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이 있다. 응답 항목은 대략 (1) 능력, (2) 평등, 그리고 (3) 시혜로 나눌 수 있다. 아래 그래프가 결과이다. 

 

위 그래프에서 청년 남성은 다른 모든 집단과 달리 능력주의에 따른 분배 선호가 가장 크다.

 

참고로 60대 이상의 의견은 빈곤층 혜택이나 경제적 자원 배분 관련 항목 모두에서 청년 남성과 다르고, 다른 집단과 비슷하다. 이러한 결과는 경제적 배분을 둘러싼 이슈가 제기되면 현 정권 지지 세력인 청년 남성과 고연령층 사이에 분열이 발생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다른 한 편으로 한국사회의 전반적 보수화는 앞으로 보수 정당 뿐만 아니라 리버럴, 진보 정당도 정책적으로 보수화될 가능성을 의미한다. 

 

 

 

Ps. 복지 확대가 디폴트고 보편복지인지 선별복지인지 논쟁하던 시절이 진보의 춘삼월이었다. 

 

Pps. 위 그래프에서 얻어야할 또 다른 교훈은 선별 복지에 대해 우호적인 집단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중산층인 나도 같이 혜택을 보는 복지를 하거나(청년 남성 외 모든 집단), 그게 아니면 복지(즉 선별복지)를 축소하자는 의견이 대세가 되고 있다. 

 

Ppps. 2021년 조사를 포함한 KGSS 최신 자료는 이 번 5월에 릴리스되었다. 요기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SPSS 자료로만 배포되지만, R에서 "haven" library를 이용해서 간편하게 Stata로 변환할 수 있다. 한글 variable/value labels까지 깨지지 않고 잘 변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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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도 한 번 얘기한적 있는데, 이념적 일관성은 철학적 바탕이 있기 때문에 학력과 정치적 지식은 이념적 일관성과 정의 관계를 가진다. 

 

아래 그래프는 OSU 정치학자인 Thomas Wood의 트윗 내용이다. ANES라는 선거 조사를 이용해서 28개 사안에 대한 상관관계 matrix를  학력별로 시각화한 것이다. 보라색은 부정적, 노란색은 긍정적 상관을 나타내고, 동그라미 사이즈가 클수록 상관관계의 절대값이 크다. 

 

보다시피 고졸이하에서는 사안별 상관관계가 약하다. 한 이슈에 대한 의견과 다른 이슈에 대한 의견 간에 관계가 약하다. 하지만 학력이 높아질수록 사안별 상관관계가 강해진다. 예를 들어 복지를 늘리자는 의견과 중죄인에게도 투표권을 줘야 한다는 의견 사이에 고졸 이하에서는 상관관계가 전혀 없지만, 대졸 이상에서는 상당히 강한 긍정적 상관을 보인다. 학력이 높을수록 이데올로기적 일관성이 높아진다. 

 

이런 경향이 최근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1970년대 이후 ANES 조사 전반에 걸쳐서 관찰된다. 특히 학력이 높아진 최근에 그 경향이 더욱 강화되었다. 

 

아래 그래프는 Kozlowski & Murphy (2021, SSR)에서 따온 것이다. 역시 ANES 조사를 이용해서 연도별로 정당소속감 (강고한 민주당-강고한 공화당 7점 척도), 이념적 강도(강고한 리버럴, 강고한 보수 7점 척도)와 개별 이슈 간의 상관관계를 나타낸 것이다. 보다시피 전기간에 걸쳐서 대졸자가 그 이하 학력보다 개별 이슈 판단에서 자신의 정당과 이념 지향과 더 일치된 의견을 가지고 있다. 

 

맨 밑의 그래프는 정당이나 이념과 개별 사안별 상관관계가 아니라, 위의 Wood 의 분석과 마찬가지로 각 사안 사이의 상관관계를 계산한 것이다. 1970년 이후 지속적으로 고학력자가 여러 사안에 대해 이념적으로 일치된 의견을 가지고 있다. 

학력에 더해서 정치 고관여일수록 이념적 일관성은 높아진다. 아래 그래프는 정치적 지식을 상중하로 나누고 위의 그래프와 동일한 분석을 한 것이다. 학력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지식이 많은 집단이 모든 측면에서 더 일관된 의견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동일한 사안에 대해서 정파에 따라 판단이 바뀌는 이중잣대를 가지는 것과 정파에 따라 이념적 일관성을 가지는 것은 구분하는 것이 좋다. 

 

학력이 높을수록 이념적 순수성이 높아진다는 이 경향이 한국 사회에 대해서 가지는 함의가 있다. 현재의 청년세대는 다른 어떤 세대보다 교육 수준이 높다. 그러니 청년층의 정치적 경험이 증가하면서 스윙보터가 늘어나기 보다는 현재도 보수적인 청년층이 더 일관되게 보수화될 가능성이 클 것이다. 아래 글에서 언급했듯 만약 현재 청년층이 보수에 대해 가지는 태도가 유동적일지라도, 진보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는 않으리라. 

 

Ps. 여기에 더해 젠더에 따른 정치적 의견의 분화는 가족 형성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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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기사: 두 얼굴의 공정(1) 조국과 정호영, 누가 더 ‘불공정’합니까?

언더스코어 강태영 대표 트윗

 

정치적 성향에 따라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딸의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 입학은 공정했다(이하 조국)’와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 아들의 경북대 의대 편입학은 공정했다(이하 정호영)’는 두 문장에 대한 공감 정도가 달랐다는 경향신문 기사. 

 

분석을 수행한 언더스코어 강태영 대표의 트윗에 잘 요약되어 있듯, 대부분의 국가에서 "정치화"된 사건과 이슈는 정치성향에 따라 사람들의 판단이 달라진다. 정치화 이전에는 지지 정당에 관계없이 의견이 비슷하던 이슈도 정치화되면 홍해바다 갈라지듯 여론이 갈라지는 현상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조국과 정호영에 대한 공정성 판단이 달랐던 가장 큰 이유는 두 사건이 정치적 사건, 내지는 정치화된 사건이었기 때문이리라.

 

아래 그래프에서 보이는 40대 이상의 응답경향이 일반적이다. 정치성향에 따라 대상만 바뀔 뿐 판단의 경향에 차이가 없다. 성별 격차도 거의 없고. (그래프는 강태영 대표 소셜미디어에서 베껴왔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청년층은 성별에 따라서 응답경향이 달랐다. 이재명을 지지한 여성이나 윤석열의 지지한 남성은 전형적인 응답패턴을 보이는데, 윤석열을 지지한 여성이나 이재명을 지지한 남성은 전형에서 벗어나 있다. 정치성향에 따른 전형적 응답 패턴이 나타나지 않고, 조국과 정호영 케이스 모두 비슷하게 불공정하다고 답했다. 

 

아래 그래프를 보고 두 가지 생각이 든다.  

 

하나는 이제는 모두가 인지하듯이 청년층에서 젠더가 정치적 성향의 준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여성은 이재명 내지는 진보가 준거이고, 남성은 윤석열 내지는 보수가 준거가 되었다. 여기서 벗어나면 전형에서 이탈한 특이한 집단이 된다. 이 집단은 상당한 peer pressure를 느낄 것으로 예상된다. 

 

다른 하나는 경향 기사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는데, 전형에서 벗어난 20대 청년층이 보수에 대한 태도를 확정짓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래 그래프를 보면 이재명 지지자는 남녀에 관계없이 조국에 대해 동일한 태도(거의 rectangular distribution)를 보인다. 마찬가지로 윤석열 지지자도 남녀에 관계없이 조국에 동일한 태도(상당한 rightly skewed distribution)를 보인다. 조국에 대한 태도는 20대나 중년이나 차이가 없다. 정치성향에 따라 인식이 달랐다. 

 

정치성향과 성별의 상호작용에 따라 청년층의 태도가 달랐던 건, 정호용 자녀의 공정성에 대한 인식이다. 이재명 지지 청년 남성은 정호영 자녀 공정성 판단에서 쌍봉형 분포를 보이고, 윤석열 지지 청년 여성은 우편도 분포를 보인다. 같은 성별로 비교하면, 이재명 지지 청년 남성은 정호영 자녀에 관해서는 윤석열 지지 청년 남성과 비슷한 인식을, 이재명 지지 청년 여성은 정호영 자녀에 관해서는 윤석열 지지 청년 여성과 비슷한 인식을 보인다. 즉, 정호영 자녀에 대한 인식은 정치 성향이 아니라 성별로 갈렸다. 

 

이 관찰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건지는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 가능성은 페미니즘의 정치화가 약해서 나타난 일시적 현상이다. 윤석열과 보수정당이 페미니즘에 적대적 태도를 보여서 청년층의 보수에 대한 인식이 정치적 성향에 관계없이 성별로 갈렸지만, 윤석열 정부와 보수가 페미니즘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일지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페미니즘의 정치화가 수그러들거나, 아니면 오히려 페미니즘의 정치화가 완성되면 청년층의 태도도 중년층에 수렴할 것이다. 

 

두 번째 가능성은 청년층의 보수에 대한 태도의 미정립이다. 이재명 지지냐 윤석열 지지냐에 따라 조국 자녀에 대한 인식은 달라진다. 전형적인 이데올로기 라인에 따른 태도의 정립이 나타난다. 이와 달리 정호영 자녀에 대한 인식은 정치적 태도가 아니라 성별에 따라 다르다. 이는 보수에서 제기하는 여러 이슈들을 일관된 정치적 정체성의 발로가 아니라 이와는 독립적인 사안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는 의미다. 이 경우도 청년층의 정치적 정체성이 완성되어 가면서 사라질 것이다. 

 

세 번째 가능성은 청년층의 상당수가 기존 문법으로 규정할 수 없는 새로운 집단인 경우이다. 다른 세대와 달리 <정치성향*성별>의 상호작용 효과가 분명하게 나타나면서 이 전형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그야말로 이슈에 따라서 의견이 달라지는 스윙보터가 출현했을 가능성이다. 

 

현재의 청년층 여론의 특성을 규정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확실히 보다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한다. 

 

어쨌든 이 번 조사는 정치, 세대, 젠더에 대한 참신한 새로운 정보가 있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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