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게 한국을 방문하면서 C모 교수님 덕분에 최병천 소장의 <좋은 불평등>을 읽었다. 불평등 전문 연구자에게는 읽기를 권하고, 다른 분들에게는 권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책이었다. 

 

1980년대 이후 전세계적인 국가 내 불평등 증가 원인에 대한 논의는 대략 4가지다: (1) 기술변동론, (2) 제도변동론, (3) 세계화, (4) 인구학적 변동론. <좋은 불평등>은 한국의 불평등 변화에 대한 설명으로 제도변동론을 비판하고 세계화 효과의 재평가를 요구하는 책이다. 

 

전문 연구자에게 이 책을 권하는 이유는 이 책의 최대 장점인 세계화 효과의 재평가 때문이다. 제가 과문하지만, 한국 사회의 불평등 변화 요인으로 세계화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미국에서도 세계화는 불평등 변화 원인 중 가장 나중에 주목을 받았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세계화를 불평등 변화의 한 요인으로 주목하지 않다가, 21세기 들어서야 세계화 효과가 본격적으로 논의 되었다. 

 

<좋은 불평등>은 중국효과를 한국사회 불평등 변화의 가장 큰 요인으로 보는 면에서 세계화 효과의 재평가론이라 할 수 있다. 1994, 2008, 2015년이라는 임금불평등 변동 지점이 모두 중국 효과와 결부되어 있다는 주장은 매우 흥미롭다. 이 블로그에서 여러 번 얘기했고 (예를 들면 요기), 논문도 썼지만 (예를 들면 요기, 요기), 한국사회에서 불평등이 증가하기 시작한 시점은 IMF 이후가 아니라 1990년대 초반이다. 그리고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소득불평등이 줄어든다. 이러한 변화 지점을 일관되게 설명하는 논리가 제가 알기로 없었다. 최병천 소장이 <좋은 불평등>에서 주장한 중국효과론이 1990년대 초반 이후 2008년까지의 불평등 증가, 그 이후의 하락을 단일 논리로 설명하는 최초의 가설이다. 이러한 가설을 제시한 것은 큰 공로다. 

 

여기서 가설이라고 얘기하는 이유는, 최병천 소장의 강한 주장과 달리 이 논리가 검증되지는 않았다. 이 책의 최대 단점이다. 어떤 인터뷰를 보니 300여개의 데이터가 제시되었다고 하는데, 전문 연구자의 관점에서 보면 짜집기이다. 예를 들면 이런거다. 이 책에서 임금불평등의 변화 지점을 보는 [그림 1-4]는 책에서도 쓰여있듯 <임금구조기본조사>와 <고용형태별근로실태조사>에 근거한다. 그런데 두 조사는 조사대상이 중간에 바뀌었다. 10인 이상 사업체로 일관되게 한정할 경우 10인 이하 사업체의 저소득 노동자와 책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비노동 인구가 제외되는 큰 단점이 있다. 한국사회 소득, 임금 불평등 변화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자료가 아니다. 한국사회에 그런 자료는 없다. 2012년 이후 그런 자료(=가금복)를 만들기 시작했지만 일반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병천 소장은 IMF는 영향이 없고, 1994년이 불평등의 변곡점이라 주장한다. 경제위기로 대량해고가 이루어진 후 자리를 보전한 노동자를 대상으로 만족도 조사를 하면, 만족도가 높아진다. 이를 잘못 해석하면 해고가 노동자의 만족도를 높인다고 할 것이다. 마찬가지다. IMF 구제금융이 이루어진 1997-8년 경제위기 때 자리를 보전한 10인 이상 사업체 노동자들 내부에서의 불평등을 측정하여 불평등 증가가 없었다고 주장하면 안된다. 일자리를 잃은 수많은 노동자 와 저소득층 가구의 소득이 급전직하하여 불평등이 급등하였다. 이러한 자료 분석은 비노동 인구를 제4의 계급으로 포함해야 한다는 저자 자신의 주장과도 모순된다. [그림 1-4]에서 1997-8년 효과가 보이지 않는 것은 데이터 한계를 드러내는 지표다. 이 한계로 인한 오판의 가능성을 다른 자료로 크로스체크해야 한다. 

 

이 블로그에서 여러 번 말했던 내용 중의 하나가 한국 사회 가구소득 불평등은 상층의 변화가 아니라 하층에 의해서 특징지워진다는 것이다 (요기). 하지만 최병천 소장은 중국 효과를 임노동 상층의 소득 변화로 설명한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1980년 이후 상중하층의 소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자료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자신의 구미에 맞는 특정 시점의 변화 몇 개로 퉁친다. 이러면 안된다. 최소한 <임금구조기본조사>와 <고용형태별근로실태조사>의 소득 상중하층의 통시적 변화라도 보여줘야하지 않겠는가. 가구소득의 변화는 하층이 주도하고, (검증되지는 않았지만 만약) 임노동자 소득의 변화는 상층이 주도했다면, 양자간의 모순을 매개하는 설명은 무엇인지가 제시되어야 한다. 

 

강한 주장에 비해 실제 자료 분석이 미비하다는 것은 최저임금에 대한 분석에서도 드러난다. 2018년 최저임금 인상 당시의 <가계동향조사>의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저도 요기, 요기, 요기 등등에서 언급). 그리고 소득불평등에 대한 가장 신뢰할만한 자료인 가금복 조사에서 2018년에 불평등이 줄었다고 드러났다. 하지만 최병천 소장은 가계동향조사 자료에만 의지해서 불평등이 증가했다고 주장한다. 더 나은 자료에 의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는데 논란이 된 자료로 엉뚱한 주장을 반복한다. 두 자료의 결과가 상충되면 그 원인에 대한 분석과 어느 자료가 신뢰할만지에 대한 평가가 따라야하지만 자신의 구미에 맞는 자료만 선택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cherry-picking하면 곤란하다. 

 

불평등 변화의 패턴에 대한 가설 소개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Kuznets Curve는 정확히는 산업구성변화론이지만 기술변동론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쿠즈네츠 커브와 세계화론은 다른 주장이지만 구분하지 않고 있다. 직업구성 변화에 대해서도 상층직업의 확대를 중국효과로 설명하고 하층의 확대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세계화론은 하층 직업의 축소로 이어져야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직업변화를 중국 효과로 설명하는 이 책의 설명과 달리, 상하층의 직업이 확대되고, 중층이 줄어드는 U-Curve는 기술변동론의 주요 주장 내용 중 하나다. David Autor가 기술변동론의 수정 버젼으로 제시해서 여러 국가에서 검증된 바다. 밀라노비치의 코끼리 곡선도 최근에는 상당히 변화했다고 밀라노비치가 업데이트된 그래프를 제시한 바 있다. 

 

책의 후반부에서 주장하는 노인 빈곤 문제는 저 역시 동의한다. 이 블로그 만들면서 가장 처음 한 주장 중 하나가 노인문제의 중요성이다. 그런데 노인가구를 제외하고 분석해도 한국사회 불평등 변화는 소득상층이 아니라 소득하층이 더 크게 결정한다. 일반적으로 선진국에서 빈곤과 불평등은 연결되어 있지만 조금 다른 이슈다. 불평등 증가가 빈곤 증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두 이슈가 결합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왜 그런지 , 어떻게 그런지에 대한 일관된 설명은 아직은 없다. 이에 대한 설명은 세계화와 제도변동에 더하여 인구학적 변동에 주목해야 한다. 

 

인구학적 변동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 뿐만이 아니다. 한국은 자영업자의 비중이 꾸준히 줄었다. 미국 같은 국가는 임노동자만을 대상으로 분석해도 일관된 대상으로 시행한 분석이 되지만, 한국은 자영업자가 줄고 임노동자가 증가했기 때문에 임노동자만 대상으로 분석해도 변화의 일부 원인은 인구학적 변동에 있다. 또한 다른 선진국과 달리 여성의 경제참여율이 높아지는 등 경제활동인구의 비중이 증가했기 때문에 경활인구를 대상으로 분석해도 인구학적 요인이 불평등 변동의 한 요인이 된다. 신규 유입 인구가 저소득층일 가능성이 큰데, 이 경우 임노동 상층의 소득에 큰 변화가 없어도 신규 노동시장 유입 인구의 증가는 상층 소득의 비중 확대를 가져온다. 경활인구의 확대를 통한 실질적인 소득불평등 축소지만, 임노동자만을 대상으로 한 분석에서는 소득불평등 확대로 보이는 착시를 일으킨다. 여기에 더해서 한국은 세대별로 교육수준이 현저히 다르다. 산업구조 변동, 직업구조 변동이 모두 교육수준 변동과 연계되어 있다. 자료를 분석할 때 이 부분에 대한 고려가 필수적이지만, 이 책은 그런 수고를 하지는 않았다. 

 

이 책이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는 보수의 입맛에 맞게 반성하는 진보의 이미지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불평등>이라는 제목도 불평등을 딱히 개선해야할 것으로 보지 않는 저자의 시선을 반영한다. 대기업 확대를 통한 경제발전론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주장 역시 보수의 입맛에 맞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10인 이상 사업체의 임노동자를 대상으로 했을 때는 1994년 이후, 도시 2인 이상 가구를 대상으로 했을 때는 1992년 이후 한국에서 불평등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 변곡점은 크게 두 가지 가설이 대립한다. 하나는 최병천 소장이 제시한 세계화 효과, 다른 하나는 제도적 변화다. 신자유주의라고 퉁치는 변화가 아니라 1987-9년 노동자 대투쟁이후 이에 대한 대응으로 시행된 일련의 변화들(예를 들어 계약직, 파견노동자 등 비정규직의 증가 등)이 90년대 초반 이후 불평등의 변화를 야기했을 수 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한다면 고령화와 교육수준 확대라는 인구학적 변화가 있다. 다른 국가의 사례를 봤을 때 이 중 한가지가 모든 것을 설명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현실은 항상 복잡하고 여러 요인이 함께 작용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여러 요인을 일관되게 분석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종합적 평가는 여러 자료를 분석한 후 비여있는 공간을 논리와 추정으로 엮어야 한다. <좋은 불평등>은 이런 기획을 추동하는 좋은 촉진제임에는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불평등 감소가 진보의 목표였다면, 최병천 소장의 평가와 달리 적어도 2017년 이후 2020년까지는 보수정권보다 성공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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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현우: 지방총각들도 가정을 꿈꾼다

 

이 칼럼 때문에 난리가 났다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일부 사실관계가 다르고 너무 상식적인 얘기를 한다는 비판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전통적 가족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자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의 내용이 반페미니즘으로 그렇게 비판받을 일인지. 천현우 작가의 이전 글과 연결되어서 이런 비판을 받는 것인지, 조선일보에 썼기 때문에 이런 비판을 받는 것인지. 

 

서구사회에서 관찰되는 혼인과 관련된 변화에서 몇 가지 주목할 만한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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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혼인이 모든 사람이 겪는 생애사 이벤트에서 점점 중산층 이상 계급만 달성하는 계급성취물이 되어가고 있다. 혼인이 연령의 지표에서 계급의 지표로 바뀌고 있다. 

 

2. 혼인의 조건만 변한게 아니라, 혼인한 커플의 관계도 변했다. 결혼한 커플 내에서의 평등성이 강화되었다. 결혼이 전통적인 성별 가사분업이 아니라 서로 존중하고 케어하는 커플의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 결합이 되고 있다. Equality within marriage 없는 결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3. 이런 현상을 총칭하여 사회학에서는 deinstitutionalization of marraige(Cherlin)이라고 부른다. 결혼의 의미가 변화하고 있지만 중산층 이상의 혼인 안정성은 여러가지 지표에서 흔들림없이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노동계급에서의 혼인 안정성은 크게 위협받고 있다. 혼인을 안하고, 혼인을 해도 이혼율이 높다. 결혼의 중산층화라 부를만하다. 

 

4. 중산층 이상에서는 혼외 출산의 비율도 높지 않지만, 노동계급층과 중하층 이하에서는 혼외 출산 비율이 높다. 10대 미혼모의 비중이 줄면서 중산층 이상의 혼외 출산 문제는 오히려 감소했다. 노동계급에서는 결혼과 출산의 디커플링이, 중산층 이상에서는 여전히 양자가 결합되어 있다. 

 

5. 중산층 이상의 여성은 과거보다 오히려 가정, 일, 육아를 모두 추구하는 방향으로 인식이 변화하였다. Goldin의 책에서 말했듯, 과거에는 커리어 우먼은 가정을 포기했는데, 요즘은 가정과 일, 출산을 모두 추구하는 새로운 세대가 형성되고 있다.

 

6. 그런데 혼인을 하고자하는 의도나 욕구 자체는 노동계급에서도 큰 변화가 없다. 저학력 여성, 노동계급 남성도 모두 혼인을 원한다. 보다 전통적인 가정을 현성하고 유지하고 싶은 욕구가 노동계급에서 여전하다. 하지 못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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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생기는 아이러니 중 하나가 노동계급에서는 전통적 가족관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더 결혼해서 안정되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노동계급에서는 Equality within marriage 가 아니라 male breadwinner model 을 유지하는 커플이 동거에서 결혼으로 이동할 확률이 높을 수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 결혼한 커플의 평등성이 높아지는 것과 동시에,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남성가족부양모델 가족의 비율도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증가하는 데이케어 센터 비용도 있다. 돌봄노동 비용이 증가해서  전업주부로 가족을 돌보는 것에 비해 노동계급 여성이 노동시장에 있으며 돌봄노동을 외주화하는 것의 경제적 가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에서 여성의 사회진출이 가족경제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일 가능성이 있다. 혼인 확률이 계급화되는 것에 더해서, 결혼 후 혼인생활의 패턴도 계급화되는 조짐이 보인다. 

 

한국은 서구 사회에 비해서 결혼과 결혼생활, 출산의 계급화 현상이 현저히 약하다. 계급에 관계없이 결혼 연령이 미뤄지고, 미혼 비율이 높아졌고, 계급에 상관없이 저출산, 무자녀 가족이 늘어나고 있다. 인구행동의 계급화가 상대적으로 약해서 사회적 동질성이 높지만, 동시에 인구행동의 계급화가 약해서 저출산 문제에 대한 대응도 어렵다. 

 

사회학에서 Michèle Lamont의 <Dignity of Working Men>이라는 연구가 있다. 백인 하위계급 노동자들이 세계화, 여성과 소수인종의 사회진출 속에서 어떻게 자신들의 가치와 존엄성을 인식하는지 비교사회학적으로 연구하였다. 노동계급 남성이 자신의 가치와 존엄성을 발견하는 이유 중 하나가 가족의 부양이다. 천현우 칼럼과 같은 내용이다. 이 연구가 백인 노동계급 남성을 로맨티사이즈한다는 비판도 있긴 했다. 백인 노동계급 남성은 매우 인종주의적 인식에 기반해서 자신의 가치와 존엄성을 확인하고 있기도 하고. 

 

어쨌든 노동계급 남성들이 전통적 가족주의를 가까운 미래에 폐기할 가능성은 매우 낮을 것이다. 페미니즘이 한국보다 큰 격차로 발전한 미국에서도 노동계급 남성은 가족부양과 전통적 가족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는데, 한국은 오죽 하겠는가. 

 

여성의 사회진출은 돌이킬 수 없는 대세다. 전통적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개혁하려고 시도하기 보다는 맞벌이가 양성 모두에게 실질적 경제 이익이 되도록 시스템을 구축하는게 효율적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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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g et al. (2022, PNAS)

 

Yang Yang과 동료들이 6.6백만개의 의학 논문을 분석해보니, 남녀 혼성으로 이루어진 연구팀의 결과가 동성으로 이루어진 연구팀의 결과보다 더 새롭고 인용도 많이 되더라고. 

 

아래 그래프에서 X축은 팀원의 숫자, Y축은 왼쪽 그래프는 독창성 지수고 오른쪽 그래프는 (출간연도를 통제한 상태에서) 상위 5% 인용많이 되는 논문이 될 확률. 

 

보다시피 혼성팀의 연구가 더 독창적이고 인용도 많이 됨. 팀원의 숫자에 관계없이 통계적으로 유의한 차이가 있다 (6백만계 논문이니 통계적 유의도가 없을리가). 

 

잘 모르는 분야라, Novelty 측정을 어떻게 했는지 궁금했는데, 일반적으로 같이 인용되지 않는 저널이 인용된 정도로 측정한다고. 이 연구에서 독창적으로 개발한 지수가 아니라 이전서부터 그렇게 측정했단다. 

 

Fixed effects로 같은 저자인데 팀의 구성에 따라 nevelty와 impact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도 측정했는데, 혼성으로 연구팀 구성할 때 둘 다 높아졌다고. 

 

팀 리더의 성별에 따라 차이가 있는지도 봤는데, 성별에 관계없이 혼성팀의 성취가 동성팀보다 높았단다. 그런데 여성이 리더인 혼성팀은 남성이 리더인 혼성팀보다 novelty는 높지만 citation impact는 남성이 리더인 혼성팀보다 낮았다고 한다. 

 

 

Ps. 계속 나오는 연구들이 다양성이 혁신과 생산성의 원천임을 보여주고 있다. 몇 년 전부터 한국 사회도 다양성을 화두로 삼아야 한다고 기회있을 때 마다 얘기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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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 교수들이 김건희 박사 논문의 표절을 자체 검증하지 않기로 투표로 결정했다고.  

 

예전에 얘기했는데, 전문가 거버넌스의 가장 큰 특징은 자율이다. 톱다운으로 안되고, 외부에서 주입하는거 안되고, 자체적으로 품질을 관리하는게 전문가다. 당연한 일이다. 전문 분야는 그 분야 전문가가 아니면 평가할 방법이 없으니까. 논문 심사는 "동료평가"로 할 수 밖에 없다. 어느 학계나 좁은 사회라서 서로 다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가진 학문적 기준에 따라 아는 사람 논문도 엄격히 품질을 심사하는 관행이 쌓여서 학계가 존재한다. 

 

이 때문에 전문가에 대한 관리도 전문가 출신이 한다. 사실 관리만 놓고 보면 반드시 그래야할 이유는 없다. 전문가에서 관리자로 바뀌는건 직업의 대분류가 바뀌는 일이다. 해당 분야 전문가를 관리자로 바꾸는 것보다는 전문 관리자를 데려오는게 나을 수 있다. 조승우 나왔던 병원 드라마 라이프가 그 경우. 하지만, 비전문가가 전문가를 관리해서는 전문가의 협조를 끌어내기 어렵다. 협조가 없으면 조직이 돌아가지 않는다. 

 

 

국민대에서 60%가 넘는 교수들이 김건희 논문을 검증하지 않기로 투표했다는 것은 한국에서 학계의 자율 규제 기능이 부재하다는 증명인 셈이다. 이렇게 되면 학계의 도덕과 규율은 외부, 그러니까 교육부의 통제로 넘어가게 된다. 

 

전문성이 없는 외부의 통제로 넘어가면 질적 평가가 불가능해진다. 한국에서 교원 충원 시 SSCI는 몇 점, KCI는 몇 점, 공동저자는 몇 점이라고 점수를 매겨서 상위랭킹으로 자르는 평가 방식을 꽤 오랫동안 사용했다. 자교 출신은 몇 %를 넘지 않아야 한다는 기준도 있었다. 한국 대학의 연구 기능 강화, 인맥이 아닌 연구실적으로 교수를 뽑는 관행은, 안타깝게도 자율적 변화가 아니라 이런 외부의 양적 통제 하에서 생겨났다. 그런데 이런 양적 평가는 논문의 질적 평가를 무력화시켜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여기에 대한 비판도 많았고, 최근에는 그러지 말자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고 느꼈다. 

 

한국에서 표절은 단어 몇 개가 연속되어 같으면 안된다는 식으로 규정되어 있다. 표절율이 40%가 넘는 논문도 문제가 되느니 마느니 하는 상황을 볼 때, 황당한 규정이다. 재작년인가 정부 용역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보고서 내고 난 후에 진짜 표절을 이런 식으로 검증하더라. 단어 몇 개 겹치는거 없는지, 주장에 대한 인용이 모두 달렸는지 등. 심지어 그런 감사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너무나 상식적인 OLS 모델에 대한 설명도 인용을 하라고 하더라. 중력 말하면서 뉴턴 인용 안하면 표절이라는 식.

 

가장 잘못된 표절은 아이디어를 베끼는 것이다. 단어가 같고 다르고와는 차원이 다른 표절이다. 김건희 박사의 논문은 그 차원도 아닌 원초적인 문장 베끼기였다. 그런데 이 표절을 검증하지 않겠다고 교수회에서 집단적으로 투표해서 결정했다. 이러면 외부의 통제가 정당화된다. 내용에 상관없이 단어 몇 개가 연속이어도 안된다는 정부 측과, 40%가 넘는 표절도 검증하지 못하는 학계 측 중에서 누구에게 더 정당성이 부여되겠는가. 

 

표절 프로그램을 돌려서 15%를 넘으면 박사학위를 줘서는 안된다는 교육부 지침이 내려오고, 교육부 공무원들이 기관 감사에서 박사 논문을 표절 프로그램으로 검증하고 교수들에게 해명하라고 요구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Ps. 듣자니 어떤 학교에서는 학생의 기말 페이퍼가 표절로 드러나, 그 학생의 재학 기간 전체 기말 페이퍼를 검증한 적이 있단다. 학교 변호사까지 포함하여 관련 법률과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했다고. 제가 재직 중인 학교에서는 제출한 박사 학위 논문의 상당 부분이 표절로 드러나 수정할 기회도 주지 않고 바로 제적한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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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T 기사: Vast New Study Shows a Key to Reducing Poverty: More Friendships Between Rich and Poor.

Chetty et al. Nature 논문

 

최근 가장 화제가 된 사회과학 논문은 체티와 동료들이 페이스북 자료를 이용해 작성한 위 글일 것. Nature의 논문 출간에 맞춰 뉴욕타임즈에도 대문짝하게 기사가 나왔다. 체티의 파워를 다시 한 번 실감하는 순간.

 

워낙 화제가 된 논문이고, 한국 언론에도 많이 소개되었고 (예를 들어 요기), 여기저기서 공감한다는 얘기도 보여서 관련 논쟁을 소개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논문의 내용인 즉, 어렸을 때 계급을 뛰어넘는 친분을 쌓았던 경우에 커서 빈곤을 극복하고 더 나은 경제적 삶을 사는 확률이 높다라는 것. 현재 자신의 처지가 가난하더라도 부유한 친구를 사귀고 부유한 가족의 삶을 알면 커서 뭔가 달라진다는거다. 

 

이 논문이 나온 직후에 미국사회학대회가 열렸는데, 거기서 만나본 사람들의 반응은 대략 세 가지였다. 하나는 드디어 경제학자도 사회학자들이 강조한 사회적 관계의 중요성을 알기 시작했다는 환영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많지는 않더라. 

 

다른 하나는 이거 사회학계에서 수십년 한 소리인데 이제와서 경제학자가 빅데이터 써서 얘기했다고, 빈곤을 극복할 수 있는 홀리그레일을 찾았다는 듯이 호들갑을 떠는 이유가 뭐냐는 거다. Coleman의 1988년 AJS 논문인 Social Capital in the Creation of Human Capital 이후 진짜 지겹게 연구한 주제 아니던가. 그래도 사회학자 연구들이 20편 정도 인용되었으니 그렇게까지 열받을 일은 아니라는 반응도 있었고 (David Brady 교수가 직접 세어봤단다). 

 

마지막은 이 연구에서 말하는 사회자본의 효과가 과장 되었다는 지적이다. Richard Alba 교수의 비판인데 Andrew Gelman 교수의 블로그에 실려있다. 사회자본이 효과가 있는건 다 아는데, 체티의 연구에서 말하듯이 크지는 않다는 것이 알바 교수 비판의 핵심이다. 

 

저는 계급 간 친분을 통한 사회자본의 효과에 대해서 의심하는 쪽에 가깝다. cross-class friendship은 아시아계 미국인이 다른 인종보다 성공한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 Jennifer Lee and Min Zhou 교수에 의해서 제안되기도 했다. Hyper-selectivity 가설이라는 이론이다. 간단히 말해,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워낙 학력이 높은 쪽으로 편향되어 있는데, 이 때문에 같은 인종끼리 친구를 형성하는 아시아계 학생들은 하위계급 출신도 상위계급과 친구가 되는 cross-class friendship을 형성하고, 부모들도 cross-class networks를 형성한다는 거다. 

 

하지만 사회자본은 선택편향을 통제하기 매우 어렵다.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하지 않던가. 하위계층이라도 상위계층적 마인드나 태도를 가지고 있어서 cross-class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결국 성공하는건지, 사회자본이 실제 원인으로 작용하는건지 알기 어렵다. 설사 사회자본이 원인으로 작용하더라도 전자의 상관관계 때문에 양적으로 측정하면 사회자본의 효과를 과장될 가능성이 크다. 

 

체티의 연구가 사회자본의 효과에 대해 크게 강조한 반면, 수십년 동안 사회자본의 효과를 연구한 사회학계에서는 최근들어 사회자본의 효과에 대해서 의구심을 나타내는 경우가 늘었다. 그 중 하나가 작년 Sociology of Education에 발표된 Gamoran과 그의 동료들의 논문이다. 아리조나와 텍사스에서 3천명의 1학년 학생들을 무작위로 사회자본을 강화하는 프로그램(Families and Schools Together, FAST)이 있는 학교로 배정한 Treatment Group과 그렇지 않은 Control Group으로 나눠서 봤는데 2년 후에 읽기와 수학 성적에서 두 그룹 간에 차이가 없더라고. 

 

사회자본 강화를 위해서 학교에 프로그램을 만들고 비용을 투자했는데, 실제 효과는 없더라는 것. 방법론적으로 이 논문이 지금까지 나온 어떤 논문보다 가장 엄격하게 선택편향을 통제한 것이다. 이 실험이 cross-class에 초점을 맞춘건 아니니, 체티의 연구와 어긋나는건 아니지만...  

 

더 놀라운 건, 실제로는 차이가 없는데, 서베이에서 물어보는 방식으로 사회자본을 측정하면 사회자본과 학업성취에 긍정적 상관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 

 

 

Ps. 친구 따라 강남가고, 맹모삼천지교라 하지만, 다음 세대의 빈곤을 극복하는 첩경은 사회자본을 길러주는 새로운 프로그램이 아니라 현재 세대의 빈곤을 줄이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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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ll & Harris (2014) Annals of Tourism Research

 

이런 것도 연구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찾아보니 역시나 논문이 있다. Annals of Tourism Research는 주변에서 아무도 안읽고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 저널이다. 그런데 가끔 사회학 저널 랭킹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있어서 의아했는데, 처음으로 이 저널의 논문을 살펴보게 되었다. 

 

한국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에서도 비행기에서 우는 아이를 견디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고, 좀 더 포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좀 더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있다. 논문은 discourse를 분석한 것이다. 

 

논문에 따르면, 이 번에 난리를 친 40대 남성처럼,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이가 아니라 부모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부정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아이를 가진 부모들이 뭔가 특권을 가진 것처럼 행동한다고 느낀다고. 

 

Sydney Morning Herald에 따르면 많은 서베이에서 우는 아이가 비행에서 가장 참기 어려운 불편으로 꼽았다. 실제로 아이의 울음소리는 소음 중에서 가장 참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란다. 사람은 아이울음에 집중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기 때문에. 

 

말레이지아 항공은 1등석과 upper deck 이코노미석을 노키즈 존으로 만들었고. 호주의 한 서베이에 따르면 54%의 응답자가 아이가 있는 가족 여행객은 비행기에서 별도의 섹션에 자리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응답. 

 

비행에서 이륙과 착륙 때 아이가 우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 귀에 압력을 느끼고 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아이들은 우는 것 뿐이다. 

 

남성의 행동은 절대 용납할 수 없지만, 이런 일이 한국 특정 그룹의 특성이라고 비약하는 것도 그다지. 

 

 

Ps. 비행기 안에서의 행동에 대한 가장 유명한 논문은 아마도 1등석이 있어서 불평등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비행기에서 기내소란이나 난동이 발생할 확률이 높다는 요 연구가 아닐지. 몇 년 전에 꽤 화제가 되었던 논문. 

Posted by sov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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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 자료

 

부인이 음식을 태웠거나, 남편에게 대들었거나, 말도 안하고 외출했거나, 애들을 돌보지 않았거나, 성관계를 거부했을 때는 남편의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대답한 비율. 18.4%

 

15-49세 여성 중의 답변. 

 

독일이 가장 높아서 19.6%. 미국은 11.0%. OECD 평균은 6.7%.

 

원자료는 2005-2016 World Value Survey 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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