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직격: 860만 은퇴 쓰나미 60년대생이 온다

 

이제 노년이 되어가는 86세대 얘기다. 불과 몇 년 전에는 86세대가 과실을 독차지하고 있다고 하더니, 이제는 이들 세대가 어떤 현실에 직면해있는지 얘기가 나온다. 

 

이 다큐멘터리 프로에서 여러 감상을 걷어내면, 한 가지 중요한 메시지가 있고, 한 가지 주목할 팁이 있다.  

 

중요한 메시지는 공적부조의 불평등 강화 효과다. 노인문제는 다들 안다고 생각하지만, 잘 알려져있지 않은 내용 중 하나가  있다. 바로 한국에서 공적부조 그러니까 복지가 노인소득불평등을 완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시킨다. 프로그램 중간에 오건호 정책위원장이 이 문제를 잠깐 언급한다. 이 번 시사직격 프로그램의 핵심메시지는 제가 보기에 국민연금의 불평등 강화 효과다. 

 

이유는 간단하다. 국민연금 혜택을 온전히 받을 수 있는 계층은 핵심노동연령 시기에 대기업이나 공기업에서 장기 근속할 수 있었던 상층 노동인구다. 나머지 사람들은 원래 국민연금에 제대로 가입하지 않았거나, 설사 가입했더라도 50대의 어려움을 이겨낼 자원이 없어서 국민연금을 중간에 해지하거나 얼마 붓지 못했다. 즉, 연금가입의 계층화 현상이다. 핵심노동연령일 때의 노동시장 계층화가 은퇴 후 연금의 계층화로 직결된다. 

 

이 현상에 대한 연구는 충남대 사회학과 황선재 선생이 진행했다. 2016년 Journal of Aging & Social Policy에 출간된 논문에서 황 교수는 1998년에서 2010년 사이의 노인불평등을 연구하면서 국민연금이 "great equalizer"가 되는게 아니라 불평등 강화 효과가 있다는 것을 불평등 지수의 요소분해 분석을 통해 밝혔다. 1998년에서 2010년 사이에 공적부조의 불평등 강화 효과가 근 3배 증가했다. 

 

불평등을 줄이는 부조는 공적부조가 아니라 사적부조다. 그러니까 공공복지가 아니라 자식이 부모를 부양해서 제공하는 현금이 그나마 불평등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그런데 2010년 이후 한국 사회는 많이 변했다. 전체 소득불평등도 2010년 이후에는 줄어들었다. 노인연금도 생겼고. 그래서 이제는 공적부조가 노인불평등을 줄이고 있을까? 여기에 대한 연구는 최혜은,유종성(2022) 선생이 <연금연구>에 발표한 논문에서 밝혔다. 2011-2020년 가금복 자료를 이용한 연구에서 최혜은, 유종성 선생은 여전히 공적연금이 노인소득불평등을 줄이기 보다는 여전히 강화하고 있다고 보여준다. 갈 길이 멀다. 

 

그렇다면 국민연금이 이렇게 기대했던 효과를 내지 못하고 불평등을 강화하는 이유(메카니즘)는 무엇일까? 제가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50대의 노동시장 불안정이다. 국민연금 수령시기는 60대인데, 한국의 노동시장에서 주요 일자리에서의 첫번째 은퇴시기는 평균 49세이다. 국민연금을 받기까지 15년 가까운 공백이 있다. 이 기간동안 국민연금을 제대로 납부하지도 못한다. 한국 사회 경제적 웰빙 사이클의 가장 큰 구멍이 바로 50대 노동시장이다.

 

60대 중반이후에는 연금으로 해결되도록 시스템을 구축했는데, 이 때의 가정은 50대 후반까지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20-40대는 노동시장에서 경제적 웰빙이 해결된다. 50대에 경제적 웰빙의 첫번째 위기가 닥치는데, 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사회적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고,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논의도 제대로 없었다. 한국 사회는 이 시스템을 갖추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기 보다는 86세대 비난하다가 시간을 허비했다. 

 

 

 

시사직격에서 아주 작은 팁으로 나온 주목할 필요가 있는 현상은 대리기사 뛰는 아버지가 부양하는 대학원 다니는 아들이다. 아버지가 대리기사로 일해도 20대 후반에 이르렀을 자녀는 노동시장에 진입하지 않고 있다. 현재 20대의 노동시장 현상은 50대 부모의 경제적 지원과 연결해서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블로그에서 여러 번 얘기했지만, 한국에서는 20대 때의 노동시장 불이득이 30대의 추가 불이익으로 연결되는 누적적 불이익(cumulative disadvantage) 효과가 보이지 않는다. 시사직격 프로그램에서는 이 중의 부양책임을 진 60년대생들의 애환으로 그렸지만, 보다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하는 사회 현상이다. 

 

 

 

Ps. 그나마 가장 쉬운 노인빈곤 해결책이 보편적 노인기초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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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테일 사건

인구 통계 2023. 5. 11. 10:11

미국 속담으로 "번개는 같은 곳을 두 번 때리지 않는다 (Lightning never strikes twice in the same place.)"라는 말이 있다. 불행이 연속해서 찾아오지는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건 아니다.

 

아주 드물게 확률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가르켜 롱테일 사건이라고 한다. 벼락이 같은 곳을 두 번 치는 일은 드물지만 확률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사건이다. 오늘 그 증거를 아주 직접적으로 얻었다. 

 

9년 전 뒷마당 나무에 벼락 맞아서 큰 가지가 쓰러졌었는데, 오늘 같은 나무가 두 번째 벼락을 맞았다. 다르다면 큰 가지가 쓰러진 방향이 반대라는 것.  

Ps. 저게 작은 나무가 아니다. 단독 주택 가정의 필수품으로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는 도구 중 하나가 전기톱이 아닐까 싶다. 

Pps. 저 낮은 확률의 사건이 왜 로또 당첨 같은게 아닌, Lightning never strikes twice in the same place의 반증 사건에 일어나는지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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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 행복보고서만 나오면 한국이 얼마나 불행하게 느끼는지를 보도하는게 연례행사다. 거의 매년 OECD 국가 내에서 가장 낮은 편이라는 기사가 쏟아진다. 전세계로 치면 그렇게 순위가 낮지 않으니까, OECD로 한정하는거다. 

 

그런데 한국인의 행복관련 응답 중 가장 큰 특징은 나는 행복한데, 남은 불행하다고 답하는거다. 아래 그래프(출처는 요기)는 World Value Survey (WVS) 에서 현재 행복하다고 응답한 비중과 Ipsos 조사에서 남들은 얼마나 행복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어서 행복할거라고 응답한 비율을 대비한 것이다. 

 

보다시피 한국에서 자신이 행복하다는 비율이 딱히 높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WVS 조사 국가들 중에서 낮은 편도 아니다. 근 90%에 이르는 응답자가 자신은 매우 행복하거나, 다소 행복하다고 답했다. WVS 조사만 보면 독일, 네덜란드, 캐나다보다 한국인의 행복지수가 높다. 2021년 WVS 조사에서만 이상하게 나온게 아니다. 원자료를 직접 체크해봤는데, 2000년대 이후 자신이 행복하다고 응답한 한국인 비율은 지속적으로 85~90%에 달한다.  

 

행복관련 한국인이 유독 튀는 지표가 있으니, 이는 남들도 행복할거라는 응답한 비율이다. 전체 국가 중에서 가장 낮은 편이다. 모든 국가의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도보다는 사회전반적 행복도를 더 낮게 평가하지만, 한국은 그 정도가 크다. 한국인의 인식은 자신은 불행하지 않지만, 남들은 내지는 한국 사회 전반은 불행하다는거다. 

 

일반적 인식과 달리 한국인이 선진국 중에서 가장 불행한지는 지표와 설문에 따라서 그렇게 나오기도 그렇지 않은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확실한 것은 한국인은 사회 전반적으로 불행할거라고 생각한다는거다.

 

행복지수에서도 한국은 실제와 인식의 괴리가 가장 큰 국가다. 

 

 

행복과 관련해서 묻는 방법은 (a) 현재 행복하냐를 묻는 것과 (b) 전반적인 삶의 만족도를 묻는 것 두 가지인데, 그 중 후자를 더 신뢰할만한 지표로 친다.

 

아래 그래프는 1인당 GDP와 삶의 전반적 만족도 좌표를 모든 국가별로 찍은 것이다. 한국 사회가 비슷한 소득 수준의 다른 국가에 비해서 삶의 만족도가 떨어지기는 한다. 하지만 절대적인 수치가 낮은건 아니다. 한국보다 소득이 낮아도 한국보다 삶의 만족도가 높은 국가도 많지만, 대부분의 한국보다 가난한 국가는 한국보다 삶의 만족도가 낮다. 

 

 

한국이 불행하다는 근거가 되는 OECD 보고서에서도 행복을 결정하는 첫번째 요인은 1인당 GDP, 즉 경제발전이다. 통시적 추적이 가능한 국가를 보면 경제발전과 더불어 행복도가 높아졌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아래 그래프는 국가지표체계에 나오는 연도별 삶의 만족도 변화다.  보다시피 2013년 이후 삶의 만족도는 꾸준히 좋아지고 있다. 2013년 5.7에서 2022년에는 6.5로 높아졌다. 연령별로 차이도 없다. 20-30대의 젊은층의 삶의 만족도가 50대와 다르지 않다. 헬조선에서 586보다 더 고통받는 MZ 세대 같은 건 없다. 

 

 

한국인의 불만은 자기 자신의 삶보다는 사회를 향해있고, 이런 사회적 불만이 시스템을 개선시키는 방향으로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이 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한국인의 행복지수를 높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전반적인 경제수준을 더 높이는거다. 그러면 확실히 더 행복하다고 느낄 것이다.

 

경제발전없이 주어진 상황에서 행복 수준을 높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빈곤을 줄이는 것이다. 아킷슨 지수니 엔트로피 지수니 하는 불평등 지수의 기본 철학도 1-2차적 분배를 개선해 효용을 높이자는거 아니겠는가. 국가 내에서도 경제수준과 삶의 만족도는 매우 강한 정의 상관을 가지고 있다. 

 

행복이나 삶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한 대책이 따로 있는지 모르겠다. 정공법이 최선이 아닐까 싶다. 

 

 

Ps. 그런 면에서 반도체와 전기차 관련 미국으로 부터 압박을 받고 있는 현재의 외교적 상황은 경제적 문제이자 행복지수 개선에 끼인 도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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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 Kim (2023) "Is hyper-selectivity a root of Asian American children's success?" SSR (논문은 무료 다운로드)

 

작년 말 한국 트위터에서도 한차례 인기를 얻었던 글로 Jennifer Lee의 NYT 칼럼이 있다. 아시아계 학생들의 학력이 높고 엘리트 대학에 많이 진학하는 이유는 hyper-selectivity라는 구조적 이점이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hyper-selectivity라는게 뭔고 하니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이중의 긍정적 선택편향이 있어서 모국에서도 상대적 상층이고 미국본토 백인과 비교해서도 학력이 더 높은 층이 이민을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중상층의 문화를 미국에 가지고 왔고, 이민거주지에서 이민자들에게 특화된 학원이나 네트워크를 형성했는데, 이 문화가 고학력 아시아계 이민자와 그 자식들 뿐만 아니라, 저학력 아시아계 이민자와 그 자식들에게도 영향을 끼쳐서, 아시아계 학생들은 가족 배경과 관계없이 학력이 더 높다는 거다. 

 

이에 반해 hyper-selectivity라는 구조적 이점을 가지지 못한 다른 소수인종들은 아시아계 학생같은 이점을 누릴 수 없다는게 Jennifer Lee와 그의 동료인 Min Zhou의 핵심 주장이다. <Asian American Achievement Paradox>라는 질적 연구에 기반한 책에서 했던 주장이고, 이 주장은 사회학계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사회학의 지위획득모델(status attainment theory)에 따르면 가족 배경이 자녀의 학력 취득에 크게 영향을 끼치는데, 아시아계는 그 영향력이 다른 인종보다 훨씬 약하다. 여기에 대한 전통적 설명은 아시아계의 "문화"다. 실제로 아시아계 학생들은 다른 인종에 비해서 학습 시간이 더 길고, 부모들도 더 많이 재원을 투자하고, 노력을 중시하고, 부모들의 교육 기대도 높다. cultural scheme라고 표현되는 행동 선택의 toolkit이 다르다. 

 

hyper-selectivity도 이렇게 아시아계 학생들의 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대신 이 문화의 기원이 hyper-selectivity라는 구조에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학계에서 큰 호응을 얻었지만, 모두가 이 주장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일군의 학자들이 이 주장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예를 들면 요기, 요기). 하지만 이 주장을 직접 검증한 논문은 없었다. 그 이유는 아시아계 학생들의 태도와 행동에 대해서는 문화론자와 hyper-selectivity론자의 의견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시아계 학생의 태도, 행동, 문화에 대한 변수로는 두 주장 중 어느게 맞는지 검증이 안된다.

 

이렇게 제대로 검증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hyper-selectivity론이 큰 호응을 얻은 것은 아시아계 성공의 원인을 아시아계 학생들의 남다른 노력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아시아계 학생들의 성취를 낮게 보려는 어떤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hyper-selectivity론은 이 분위기에 맞는 이론적 기반을 제시했다는 느낌이다. 

 

2015년에 Lee & Zhou의 책이 처음 나왔을 때부터 이 주장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는지 고민했었는데, 마땅한 데이터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난 아이디어가 학력성취를 취득 학력이 아니라 고등학교와 대학교 재학 여부로 측정하는 것이다. 이 변수는 American Community Survey이라는 대형 데이터에 있고, 아시아계 학생들의 샘플수가 충분하다. 

 

아시아계 이민자 중 특정 계급의 문화가 계급도 뛰어넘고 서로 다른 민족 그룹도 뛰어넘는 범아시아계 인종 문화가 되는 메카니즘은 Lee & Zhou의 주장에 따르면 local communities에서의 리소스(방과후 학원, 네트워크 등등)다.

 

그렇다면

(1) 아시아계 미국인의 hyper-selectivity 정도가 높은 지역 사회에서는 아시아계 학생의 고등학교, 대학 재학율이 더 높아야 할 것이다. 

(2) 특히 저학력 부모 아시아계 학생의 고교/대학 재학율은 지역별 hyper-selectivity와 긍정적 상관을 가질 것이다. 

(3) 아시아계 학생들의 높은 재학율이 hyper-selectivity 때문이라면, hyper-selectivity 통제 후에는 아시아계 학생들의 다른 인종대비 상대적 이점(=높은 고교/대학 재학율)이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 검증했는데, 

 

결과는 위 세 가지 가설 중 어느 하나도 지지가 안된다.

 

아시아계 미국인의 hyper-selectivity 정도가 높은 지역 사회에서는 아시아계 학생의 고등학교, 대학 재학율이 더 높기는 한데, 부모의 학력을 통제하면 이 효과는 완전히 사라진다. 그러니까 지역별 hyper-selectivity와 개별 학생의 학력이 연관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아시아계 이민자의 평균 학력이 높은 지역의 개별 부모의 효과 때문이지 hyper-selectivity라는 사회자본의 효과는 없다. 

 

아시아계 미국인의 hyper-selectivity 정도가 높은 지역 사회에서 저학력 부모를 둔 아시아계 학생의 학력 성취가 더 높아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hyper-selectivity 정도가 높은 지역 사회에서 고학력 부모를 둔 학생과 저학력 부모를 둔 학생의 성과 차이는 더 벌어진다. cross-class culture로써 기능하는 hyper-selectivity는 없다. 

 

Lee & Zhou의 책은 중국계와 베트남계를 많이 비교하는데,  hyper-selectivity 정도가 높은 지역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부모의 학력 수준이 낮은 아시아계 민족그룹의 자녀들이 더 학력성취가 높다는 증거도 없다. 아시아계 학생들은 지역의 사회자본인 hyper-selectivity 정도와 무관하게 부모의 학력 통제 후 다른 인종보다 더 높은 고교/대학 등록율을 보였다. 

 

hyper-selectivity 통제가 아시아계 학생의 높은 학력 성취를 설명하지도 못한다. 부모의 학력과 인종별 hyper-selectivity가 모두 같은 조건을 설정했을 때, 아시아계 학생의 81%가 대학에 등록했을 것으로 예측되는데, 히스패택계는 71%, 백인은 59%만 등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시아계 학생의 학력 성취가 다른 인종보다 높은 이유는 그들의 행동, 태도, 선택이 다른 cultural scheme 때문이고, 그 이유는 hyper-selectivity 때문이 아니다. 

 

 

 

 

사회학계에서 워낙 인기있는 이론을 비판한 논문이라 어떤 반응이 있고 비판을 받을지 모르겠다. "cultural scheme"으로 아시아계 학생의 학력성취를 검증한 논문이 AJS에 실렸는데도, 문화적 설명은 인종주의라는 사회학자도 있더라. 

 

저 역시 문화 효과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던 사람인데, 연구를 하다보니 그걸 무시할 수는 없더라. 중국의 과거 제도가 아직도 중국 지역별 학력 성취에 영향을 끼친다는 논문이라든가, 이철승 교수의 중국 내 쌀문화 논문이라든가, 문화 효과를 검증하려는 노력은 앞으로 더 커질 것 같다. 이에 대한 반발도 함께. 

 

 

 

 

Ps. 혹자는 hyper-selectivity는 1965년에 통과된 Hart-Celler Act라는 역사적 기원이 있기 때문에 지역별 격차를 이용한 이 분석은 한계를 가진 검증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올 8월 미사회학 대회에서 후속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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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 교수의 놀이공원 매직패스 발언이 핫해지길래 많은 사람들이 헬러와 살츠만의 저서 <마인: 남의 것도 내 것으로 만드는 소유의 법칙>을 언급할 것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책이 동일한 이슈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도 그 얘기를 안하는 듯하니 여기서 잠깐 소개. 

 

선착순은 인류가 고래로부터 사용한 소유권 원칙 중 하나다. 심지어 왕위도 장자 상속으로 선착순 상속이다. 국가지대사도 선착순이었던 것. 발명과 특허권도 먼저한 사람에게 권리를 준다. 선착순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공정에 대한 직관적 감각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먼저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데, 시간은 누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기 때문에 선착순은 민주주의와 평등주의 원칙에도 맞다. 

 

먼저 온 사람에게 권리가 있다는 이 원칙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지만, 유럽이 타국을 식민화할 때도 먼저가서 깃발을 꽂는 국가가 소유하는 선착순 원칙이 적용되었다. 원주민은 권리가 없고 "최초의 기독교 유럽인"에게만 선착순의 권리가 주어졌다. 선착순 소유권은 우주개발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1960년대초에 "발견과 정복을 기준으로 최초를 논하지 않는다"고 합의하였기 때문이다. 미국이 달에 처음으로 깃발을 꽂았지만 달이 미국 소유는 아니다. 

 

이러한 선착순 원칙이 적용되지 않거나 비틀려서 적용되는 여러 사례를 저자들은 <마인>에서 논하는데, 그 중 하나가 디즈니랜드의 "패스트패스플러스" 상품이다. 

 

이 상품은 돈을 내고 예약을 하면 3개 놀이기구는 정해진 시간에 바로 탈 수 있게 해줘서, 기다리는 시간을 줄여주었다. 그 결과 자신이 좋아하는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을 덜게되었고, 고객들은 남는 시간에 더 많은 기념품을 쇼핑하고 이것저것 사먹는다. 고객은 자신이 타고 싶은 기구를 쉽게 타고, 놀이기구별로 방문객도 분산시키고, 디즈니랜드는 돈도 더 벌었다. 윈윈 마케팅 사례. 

 

그런데 디즈니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슈퍼듀퍼 패스트패스플러스" 상품을 개발한다. 이전 패스트패스플러스는 3개만 줄을 안섰는데, 이 상품은 온종일 줄을 건너뛰어서 탈 수 있는 상품이다. 그런데 이렇게되면 선착순으로 기다리는 고객들이 짜증이 나게 된다. 그래서 디즈니는 얼마나 많은 돈을 받아야 사람들의 원성을 사지 않으면서 돈을 벌 수 있을까 연구했다. 그랬더니 미화 3~5천불, 한화로는 3백5십만원에서 6백만원 정도가 최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저자들은 이를 "최적의 새치기 요금대"라고 표현했다. 정재승 교수의 새치기 표현은 여기서 빌려왔을 것이다. 

 

이렇게 비싼 돈을 받는데도 디즈니는 이 패스를 구입하지 않고 선착순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의 심정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 패스트패스플러스 전용줄과 일반 대기줄을 분리해서 최대한 노출을 시키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나.

 

선착순 원칙이 적용될 때 부자들이 돈을 내고 사람을 고용해서 줄서기 대행을 시키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줄서기 알바 대행업체도 횡행했다. 미국의 사우스웨스트 항공은 좌석을 지정하지 않고 줄서서 들어가는 순서로 아무 자리나 앉는 정책을 시행했는데, 지금은 돈을 더 내면 먼저 들어갈 권리를 준다. 모든 항공사가 퍼스트클래스, 비지니스 승객은 먼저 입장하도록 조치한다. 이코노미 승객 중에서도 이코노미+같은 좌석을 구입하면 다른 이코노미 승객보다 먼저 들어갈 권리를 살 수 있다. 

 

놀이공원 매직패스만 특정해서 어린이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준다고 하기에는, 선착순 줄서기 원리를 비틀어서 상품으로 개발한 사례가 너무 많다. 이슈도 훨씬 복잡하고. 

 

어쨌든 잘모르는 분야라, 이 책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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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기사: '월급' 8000만 원 받아야 0.1% 직장인... 얼마 벌면 중간일까

 

한국일보의 이 기사 트윗은 다음과 같다: "2021년 귀속 근로소득 1천 분위 자료 분석 결과 0.1% 최상위 고소득자의 월급이 1000만 원 넘게 뛰는 동안 중위소득자는 10만 원도 늘지 않았습니다."

 

1년 만에 불평등이 급등한 것처럼 보인다. 

 

국회의원이 국세청에 요청해서 근로소득 1천분위 자료를 받고 그에 근거해서 불평등이 얼마나 늘었는지 보고하는 기사들이 연례 행사로 이어지고 있다. 관련된 다른 변수에 대한 아무런 고려없이 소득 자료만으로 계산해서 분석하고 보도하는 이런 행태를 그만 멈추어야 한다.

 

개인 근로소득 분포는 노동자의 연령 분포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기사에 나온 것과 같은 연도별 비교는 같은 그룹을 비교하는게 아니다. 통계적으로 평균소득은 상위소득층의 급격한 소득 증가에 민감하고 중위소득은 그렇지 않지만, 다른 한 편으로 중위소득은 노동자의 구성변화에 따른 순위 변동에 민감하다. 동일한 집단 내에서는 소득분포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도, 새로운 집단이 노동시장에 들어오면 순위에 변동이 생기고 중위소득이 바뀐다. 

 

2000년에 전체 노동자 중 60세 이상의 비중은 9%에 불과했다. 그런데 2022년에는 21%에 달한다. 60세 이상 노동자의 소득은 핵심노동인구의 소득보다 크게 낮다. 정부에서 노인층 가구 소득을 높이기 위해서 노인알바 일자리를 창출하고 이런 일자리에 더 많은 노인층 인구가 참여하면 저소득 노동자의 숫자는 늘어나고, 중위소득자의 소득은 내려간다. 최상층 소득층과 중위소득층, 내지는 중위소득층과 하위소득층의 격차는 벌어진다. 하지만 실제 삶의 질을 결정하는 가구소득을 기준으로 보면 노인층 가구의 소득이 늘면서 불평등은 줄어든다. 

 

마찬가지로 성별 노동시장 참여 격차를 줄여서 더 많은 여성이 노동시장에 참여하는데, 평균적으로 이들의 소득은 기존 풀타임 남성노동자보다 낮다. 그러면 노동시장의 성별 격차 축소가 중위소득과 상층소득의 격차 확대를 이끄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다. 

 

이 모든 변화는 노동시장의 참여자 구성이 바뀌는 것을 통제하지 않아서 생기는 착시다. 과거에는 소외되었던 계층이 노동시장에 참여하면서 실제로는 불평등이 줄어드는데, 분포상에서는 불평등이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 

 

다른 국가에서는 노동시장 참여자의 구성이 통시적으로 안정적이기 때문에 이런 착시가 거의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은 급격한 노동층의 고령화로 노동시장 참여자 구성이 급변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구성변화를 통제하지 않은 통계는 큰 의미가 없다. 

 

 

 

 

기사에서 보도한 구체적 내용으로 돌아가서, 국세청 자료에서 제시한 2021년 최하위 1%의 월노동소득은 1만8천원이다. 이 소득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노동소득이라고 생각하는가? 하위 10%분위에서의 월평균 소득은 56만원이다. 이런 분들까지 다 포함해서 계산한게 국세청 분위 자료다.

 

2020년과 비교하면 최하위 1%의 월평균소득은 1만300원에서 1만8천원으로 무려 75%가 올랐다. 그래서 하위 계층의 불평등이 엄청 줄어든건가? 2020년이 아니라 2019년과 비교하면, 상위 0.1%의 소득은 14.7% 올랐는데, 하위 1%의 소득은 108% 올랐다. 그야말로 최하층 소득이 폭등한거다. (그래봤자 월 8천7백원에서 1만8천으로 바뀐거다)

 

2020년대 2021년은 기간이 너무 짧다. 국세청 자료에서 가장 옛날 자료인 2015년과 2021년을 비교해 보자. 상위 0.1% vs 중위소득는 너무 극단적이니 상위 1% vs 중위소득으로 비교를 바꿔보자. 그랬더니 6년 사이에 상위 1%의 소득은 29% 상승하였고, 중위소득의 소득도 29% 상승하였다. 소숫점 단위에서 중위소득 증가율이 상위 1% 증가율보다 높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소득이 있는 노동자수는 15.1% 증가하였다. 동기간 동안 전체 인구는 0.2% 증가했을 뿐이다. 6년 사이에 노동소득이 전혀 없는 인구의 비중이 줄어들고, 노동소득이 있는 인구의 비중이 크게 늘었다. 과거에 소득이 없다가 새로 노동시장에 유입되는 인구의 소득은 당연히 그리 높지 않다. 그러니 노동소득이 있는 인구 내부에서의 소득 분포는 바뀔 수 밖에 없다. 

 

노동인구의 구성이 급격한 변화를 겪는 시점에서 노동자의 성, 연령 분포를 표준화하지 않은 자료는 그야말로 추후 연구와 분석을 위한 참고자료로만 삼아야 한다. 이 때문에 국세청 집산자료에만 근거해서 실제로 큰 변화가 있었다고 결론내리는 보도와 연구들은 지켜보기에 좀 짜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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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기사: 선진국보다 올려놓더니…10명중 1명, 최저임금도 못받았다

 

2022년 최저임금도 받지 못한 노동자가 12.7%로, 최저임금 미달율이 2001년 대비 3배 늘어났고, 그 이유가 "최저임금 고율 인상에 따라 우리나라 최저임금 수준이 높아져 진게 원인"이라는 기사.

 

전형적인 통계 왜곡, 선동 기사다. 

 

2015년에 OECD에서 Employment Outlook 책자를 낼 때 각국의 최저임금 수준과 최저임금 미달율을 보고한 적이 있다.

 

그 때 한국의 통계는 2013년 자료에 근거했는데, 최저임금 미달율이  14.7%였다. 경향신문 기사의 제목이 <7명 중 1명꼴 최저임금 이하 ‘OECD 최악’>이었다. 매일경제도 2015년에 비슷한 기사를 냈었다. 

 

그 후 2013년에 비해 2022년에 최저임금은 4,860원에서 9,160원으로 88.5% 증가하였지만, 그 기간 동안 최저임금 미달율이 늘어나기는 커녕 14.7%에서 12.7%로 2%포인트, 비율로는 13.6%가 감소하였다. 최저임금이 근 두 배 가까이 늘었지만, 최저임금 미달율은 줄어든 것이다. 2010년대부터 한국의 최저임금 미달율은 OECD 최악이었다. 그나마 지난 10년간 조금 개선된 것이다. 

 

경총 리포트에서 비교한 2001년에는 최저임금이 2,000원 미만이었고, 최저임금의 영향을 받는 노동자는 3% 미만이었다. 워낙 최저임금이 낮았기 때문에 미달율도 적었다. 2000원 미만이었던 최저임금이 2013년에는 4,860원으로 2.5배 가까이 증가하였고, 최저임금의 영향을 받는 노동자가 15%로 늘었다. 그러면서 미달율도 높아졌다. 

 

그 이후 2022년에는 최저임금의 영향을 받는 노동자 비율이 16.4%로 더 높아졌지만, 최저임금 미달율은 오히려 줄었다.  경총과 매경의 논리를 따르자면 2013년 이후 최저임금을 88.5% 올려서 미달율이 13.6% 줄어든거 아닌가? 

 

 

 

Ps. 예전에도 말했지만, 한국은 최저임금의 수준이 아니라 최저임금을 강제하는 행정조치가 미흡해서 더 문제였다. 문재인 정부에서 최저임금 1만원 목표에 매달리기 보다는 최저임금 미만율을 줄이는데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하고 노력을 경주했다면 노동자가 받는 실제 혜택은 더 늘었을 것이다. 

Posted by sov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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