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arch] 논문을 쓰는 고등학생들에 대해 알아봅시다

언더스코어 강태영 선생과 시카고대 강동현 선생의 협업 연구. 

 

2000년 이후 고등학생이 참여하여 작성한 해외학술논문 게재 수가 꾸준히 증가했는데, 2014년에 논문 학생부 기재 금지 이후 작성 수가 급감했다. 또한 고등학생 때 해외 논문을 작성했던 분들 중 70%가 대학 진학 이후 논문 작성 이력이 없다. 

 

아래 그래프는 2014년 정책 변화 이후 논문 작성 빈도수 변화를 그래프로 그린 것이다. 2014년 전후로 기울기가 이렇게 명백하게 변화하게 나온건 고등학생의 논문 작성이 대학입시 수단이었다는 매우 신빙성 높은 증거이다. 이런 명백한 그래프는 SSCI 논문 한 편을 보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육부 정책이 2018년에 또 한 번 바뀌어서 자기소개서에도 논문을 언급하지 못하게 했다. 연구자들은 2018년 정책 변화의 효과는 조민 변수, 코로나 변수와의 혼합(compounding) 효과 때문에 보여주지 않았는데, 2018년 이후 고교생의 논문 작성 숫자는 더 감소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연구자들은 결론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학술 장(academic field)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어떻게 대학 입시 글로벌화와 계층화된 중등교육이 결부되어 사회적 문제를 낳을 수 있는지에 대한 생산적 논의의 계기가 된다면 좋겠"다고 제안한다. 

 

이 글을 읽고 여러 감상이 있는데, 가장 먼저 이 연구는 한국 사회에서 입시와 관련된 "계층적 적응과 배제의 법칙"이 어떻게 관철되는지 보여준다. 그 함의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이 연구에서 고교생 논문이 가장 많았던 연도도 100명을 넘지 않는다. 대부분의 고교생 논문이 1편이라는걸 감안하면, 해외 논문 작성으로 입시에 영향을 끼치는 고교생은 1년에 100명 이하라는 의미다. 이 중 상당수가 영재고 재학생 등 명문대 진학 확률이 높은 후보라는걸고려하면, 논문을 통해 입시에서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경우는 많아야 30-40여명일 것이다. 국가적 난리를 치는 정책 변화의 실효가 30-40명이다. 정책 변화로 고교생 논문 숫자가 격감하는 것도 놀랍고, 그 변화의 실제 영향력이 50만명의 전체 입시생 중 30-40명이라는 것도 놀랍지 않은가? 

 

그래서 이런거 신경쓰지 말자는 주장이냐고 물으면 당연히 아니다. 연구자들이 결론에서 얘기하듯 논문 소동은 계층화된 중등교육 시스템에서 파생된 한 사건이다. 상위계층은 언제나 교육의 질적 차별화를 추구한다. 시스템이 바뀌면 그에 맞춰서 차별화 전략을 수정할 뿐이다. 이러한 수정을 "적응의 법칙"이라고 칭한다. 정시에서는 쪽집게 과외로, 논문이 중시되면 교수 부모가 나서서, 인턴쉽이 중요해지면 기업간부 부모가 나서는 식으로. 고교생 논문 작성을 장려하는 정책은 상위계층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책을 이용하는 문제와 고교생 논문 장려를 통한 교육적 효과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선택될 수 밖에 없다.  

 

여러 번 얘기했지만, 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완벽한 공정 입시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그렇게 돌아간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왜 이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한국만 그런게 아니다. 

 

과정의 공정을 추구하는 모든 정책은 궁극적으로 실패할 것이다. 어떤 정책을 도입해도 상위계층이 더 많은 기회를 차지할 것이다. 급격한 변화는 간혹있는 역사적 격변기에 상위계층의 구성이 바뀌는 정도일 것. 성공하는 진보 정책은 과정의 공정이 아니라 결과의 평등이라는걸 잊지 말아야 한다. 진보 정권은 결과의 평등을 가져오는 과정의 공정은 추구하고, 그런게 없는 뭔가 불합리한 과정을 바꾸기 위해 동력을 소모할 필요가 없다. 

 

이 글을 읽고 드는 두 번째 감상은 새로운 사회과학의 등장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그래프가 이렇게 선명하게 나오면 이건 무조건 성공하는 논문이다. 논문 아이디어 생성에서 최종 결과가 나오기까지 보통 2-3년 정도 걸린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논문이 나오기 앞서 결과를 공유한다. 아마 여러 사람들의 반응을 취합하여 논문을 작성하리라. 사회과학적 내용의 공유를 통해 사회적 기여를 먼저 하고 논문 작성으로 개인적 업적은 나중에 추구하는 새로운 모델이다. 

 

위 연구의 작성자인 강태영 선생은 얼마 전 이준석-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토론에 나왔던 혐오댓글 분석툴(Hatescore)을 만든 사람이다. 사회과학 분석에서 새로운 도구가 생겼다는 것을 실감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저자인 강태영, 강동현 선생 모두 사회학을 전공했다는 점이다!!! 사회적 기여가 큰 학술적 연구를 할려면 사회학을 전공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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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ckson & Kim (2022, Social Forces). Tied Staying on the Rise? 

 

미국 얘기라 트위터에 간단히 언급하고 말았는데, 제1 저자인 Matt Erickson 선생이 이 논문으로 IPUMS 대학원생 연구 논문상을 받았고, 연구 결과가 한국에 주는 함의도 없는건 아니니, 블로그에도 포스팅.  

 

개척시대, 흑인들의 남부에서 북부로의 대이동 (the Great Migration) 등 미국의 역사는 국가 간 이민 뿐만 아니라 국가 내 지역이동에 의해서도 특징지워진다. 그런데 미국에서 지역이동 비율이 점점 떨어진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역이동 비율이 떨어지는 원인 중 하나로 양성평등 의식의 확대에 주목한 것이 이 논문이다. 인구학에서 지역이동과 성별 불평등의 관계를 지칭하는 용어로 Tied Moving이라는게 있다. 부인은 자신의 필요가 아니라 남편의 일자리를 따라 이동하기 때문에 지역이동이 남성의 소득은 높이고 여성의 소득은 낮추는 효과가 있다는 것. 여성의 소득이 낮아짐에도 불구하고 이사를 가는 이유는 전체 가구소득이 증가해서 family utility가 증가한다는게 논리다.

 

그런데 고학력자를 중심으로 부부 모두의 커리어를 중시하는 의식이 높아짐에 따라, 부부의 가구소득 기여분이 비슷한 맞벌이 가정일수록 지역이동 확률이 낮을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이렇게 부부가 서로의 커리어를 중시해서 현재 지역에서 타지역으로 옮기는 것을 꺼려하는 현상을 Tied Staying이라고 칭한다. 

 

Tied Staying이 증가하는데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남성이 생계를 모두 책임지는 남성생계부양자의 비중이 줄어들고, 부부가 비슷하게 가구소득에 기여하는 비중이 늘어나는 구성효과다. 남성생계부양자, 양성생계부양 가족 각각의 의식에는 변화가 없지만, 생계부양 형태의 비중 변화로 인하여 Tied Staying이 증가한다는 거다.  다른 하나는 부부가 비슷하게 가구소득에 기여하는 사람들 중에서 서로의 커리어를 모두 중시하는 의식이 증가해서 상대방의 커리어에 방해가 되는 지역이동을 꺼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성생계부양자, 양성생계부양 가족 간의 지역이동 확률 격차가 확대된다는게 두 번째 설명이다. 맞벌이 부부의 인식 변화가 Tied Staying이 증가하는 이유라는게 두 번째 설명이다. 이를 비율효과라고 칭하였다. 

 

그래서 두 효과 중 어는 것이 큰지 25-39세의 젊은 커플을 대상으로 분석했더니, 양성생계부양 가구가 증가하는 구성효과보다는 남성생계부양 가족과 양성생계부양 가족 간의 격차가 증가하는 비율효과가 지배적이고, 이러한 부부 모두의 커리어를 중시하는 의식 변화가 지난 20여년간 젊은 부부의 지역이동 감소 중 약 1/3을 설명한다는게 논문의 결론이다. 

 

아래 그래프가 이 논문의 핵심 주장이다. 가구 소득 중 부인의 기여분과 지역이동 확률의 관계를 보면 부부의 기여분이 비슷할수록 지난 1년간 지역이동 확률이 떨어지는데, 그 격차가 1990년대보다 2010년대에 크게 확대되었다.

그래서 이 연구가 한국 사회에 주는 함의는 무엇인가? 

 

수도권 집중을 줄이고, 지방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부부 모두에게 일자리를 주는 지역 정책이 필요하다. 한국에서 부부 모두가 일자리를 가지기 위해서는 수도권에 사는게 최선의 선택이다. 일부 직종을 제외하고는 서울의 평균 임금이 더 높고, 지방보다는 수도권의 여성차별이 덜 심하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지방에 공기업을 이전하고 혜택을 줘도 젊은 부부는 수도권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주말 부부를 하는게 합리적 선택이다. 둘 중 한 명은 수도권에 일자리가 있을 확률이 높은데, 뭐 때문에 지방으로 근거지를 옮기겠는가. 지역 활성화를 위해서 spousal hire 제도를 도입하고, 부부가 모두 일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그래야 전체 가구소득도 늘고, 근거지도 옮길 수 있다.

 

 

Ps. 안철수 부부가 유학 후 카이스트에 자리 잡을 때와 서울대로 옮길 때도 spousal hire가 작동했다. 이 분들만 예외적으로 그 혜택을 받을 필요는 없다. 

 

Pps. 미국은 자신의 커리어 뿐만 아니라 배우자의 커리어도 중시하는 쪽으로 의식이 변화하고 있는데 한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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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소스는 기억나지 않는데 2000년대 초반에 미국에서 네오콘이 아프칸, 이라크 점령할 때 읽었던 인구학 관련 글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앞으로 인구 고령화로 지상군 규모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물리적 점령이 불가능하다고. 심지어 중국도 점령이 가능한 병력 유지가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현재 징병 대상을 대부분 징집하는 실질적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는 아래와 같다. 확실한거 아니고 대충 따져본거다. 나머지 국가는 명목적 징병제지만, 여러 이유로 징병 대상자의 대다수가 군복무를 하지 않아서 실질 징병제가 아니다. 

 

- 미주: 쿠바, 콜롬비아

- 아시아: 남한, 북한, 베트남, 라오스

- 유럽: 핀란드, 오스트리아, 그리스, 터키, 스위스

- 중동: 시리아, 아르메니아, 이란, 이스라엘, 투르크메니스탄, 쿠웨이트, 카타르, 아랍에미레이트, 

- 아프리카: 이집트, 에리트레아, 앙골라

 

이 중에서 남녀 모두를 징병하는 국가는 세 개다: 북한, 이스라엘, 에리트레아. 빠진 곳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남녀를 모두 실질적으로 징병하는 국가의 수가 매우 적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나마 이들 세 개 국가도 성별로 요구되는 복무기간이 다르다. 북한 여성도 징집 조건이 남성과 다르다. 

 

전세계에서 남녀를 모두 어떠한 차별도 없이 공평하게 징집하는 국가는 최근에 읽은 글에 따르면 두 개다. 노르웨이와 스웨덴. 스웨덴은 남성만 의무징집하다가 2018년부터 남녀 공평하게 징집하기 시작했다. 스웨덴의 양성평등 징집 역사는 진보와 여성 측에서 여성의 군대 내 지위 획득을 요구하고, 남성이 이에 저항한 기록이다. 여성은 전투나 특정 지위에 맞지 않다고 거부했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스웨덴은 50년 동안 논쟁했다. 웃기는건 2010년에 양성평등 징집법이 통과되었는데, 이 때 딱 징집을 중단했다. 평화시 징집 중단. 남자만 징집할 때는 스웨덴 남성의 최대 85%가 군복무를 했다. 2010년에 중단했던 징집을 2018년에 남녀 평등하게 다시 시작했는데, 2018년 징집 인원은 연간 4천명에 불과하다. 징집 대상의 5% 미만이다. 노르웨이도 말이 좋아 징집이지 안가면 그만이다.

 

그러니까 징집 대상 남녀 모두를 전투병 지원병 구분없이 동등하게 실질적으로 징집하는 국가는 전세계에 하나도 없다. 그나마 이스라엘과 북한이 가장 가까울려나. 그런데 이스라엘은 건국서부터 남녀 모두 징집했다. 남성 징집에서 양성평등 징집으로 바꾼 사례가 아니다. 북한이 작년인가에 처음 실시했고. 

 

미국은 모병제지만, 법률적으로는 징병이 가능하다. 18-26세 남성은 드래프트에 등록해야 하고, 35세까지는 필요할 경우 군복무를 해야 한다. 사실상의 모병제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남성만 드래프트에 등록하는게 위헌이라는 소송이 있었다. 1980년대에는 합헌 판결이 났고 2019년에는 하위 법원에서 위헌판결이 났다가, 다시 뒤집어졌다. 대법원까지 갔는데, 대법원에서는 의회에서 검토 중이니 우리는 검토안한다고 2021년에 판결했다. 한마디로 결정을 미루었다. 징병 제도를 바꾸어도 실제로 징집하지 않고 행정 등록 대상만 바뀌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질질 끈다. 제 느낌적 느낌으로는 언젠가 남녀 모두가 드래프트에 등록하도록 법률이 개정되기는 할 것 같다. 

 

제가 짐작하는 남녀 모두를 징병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원래 안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군대는 남성 위주였는데, 남녀를 모두 징병할려면 추가해야 할 제도적 조건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훈련, 배치, 조직 구조, 시설, 배급 등등. 갑자기 절반의 사병이 여성이 되는 이행이 혼란 없이 진행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군에서 선후임의 관계는 훈련, 노하우 전달, 암묵지 학습의 제도인데, 여군 내에서 이를 구축하는데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이다. 초기에 대규모 징집된 여성을 어떻게 훈련시키고 군인으로 만드는지 모르면 배워오면 되는데, 배울 수 있는 사례도 마땅치 않다. 

 

여성 징병의 시작 연령이나 출생연도를 어떻게 할지도 고민이다. 이행 초기에 군대 내에서의 성희롱등 여성 인권 문제는 오히려 부차적일 것이다. 남성 징병에서 양성평등 징병으로의 이행은 상당히 큰 정치적 리스크를 짊어져야 한다. 어떤 정치세력이 무슨 이득이 있다고 리스크를 감수하고 이런 수고를 하겠는가. 점령을 염두에 둔 군사목적이 아니면 지상군 규모 유지의 필요성도 점점 떨어지는데. 차라리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하는 정치, 경제, 사회적 비용이 싸게 먹힐거다. 

 

한국은 통일이 헌법조항인데, 이는 유사시 대규모 지상군을 통한 점령을 필요로 한다. 이에 반해 징집 가능 인구는 줄어들고 있다. 그런 면에서 양성평등 징집의 실질적 필요성을 얘기할 수 있다. 북한에 이어 전세계에서 두 번째로 남성 징집에서 실질적 양성 징집으로 군역체제를 바꾼 국가가 될 수도 있을지. 하지만 방어가 아니라 통일을 위한 징병제 확대를 얘기하면 얼마나 먹힐지 모르겠다. 

 

저도 뭔가를 알아서 하는 얘기는 전혀 아니고, 규범적 차원을 벗어나 따지기 시작하면 양성평등 징집이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는거다. 타 국가의 사례도 마땅치 않고. 그래서 이건 진지한 정책적 고려 대상이 되기 보다는 그냥 떡밥으로 머물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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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에 발표한 논문 때문에 성별 소득 격차 얘기만 나오면 많은 분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여러가지 질문을 하시는데, 그 논문이 3년전에 나온 것이고, 그 동안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블로그에서도 수 많은 논의와 답변이 있었습니다.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것보다는 이 전에 이루어진 논의들을 본 후에 뭔가 새로운 것이 있으면 추가적으로 논의하는 것이 생산적일 것입니다. 2019년 논문 발표 이후 성별 소득 격차와 관련된 많은 포스팅 중에서 핵심적인 것들의 리스트를 링크와 함께 아래 적어 두었습니다. 이 글들을 읽으면 여러 분의 의문 해소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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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력단절 이전 20대 여성은 차별받지 않는가? 

- 2019년 한국사회학 발표 논문 요약. 스펙 통제 후 경력단절 이전 대졸 여성의 소득이 남성보다 18% 낮다는 발견. 

- 논문 원본은 요기

 

2. 여성차별 논문: 뜨거운 성원에 감사드리며 

- 위 논문 포스팅 후 제기된 여러 질문에 대한 답변.

- 미국 자료를 분석한 내용도 여기서 소개. 

 

3. 여성의 서울 선호 때문에 소득이 적다? 

그나마 여성의 수도권 선호 때문에 전체 여성불이익이 줄어드는 것 

- 여러 질문 중 성별 지역 선호 격차 (= 여성이 남성보다 더 서울에 살고 싶어한다) 때문에 성별 소득 격차가 큰 것은 아닌지에 대한 답변.

 

4. 군복무 기간 동안의 성별 소득 격차 

- 남성의 군복무로 인한 노동경력 초기 누적 소득 격차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

 

5. 성별 노동시간 격차가 20대 대졸 성별 소득 격차에 끼치는 효과 

- 위 경력단절 논문이 노동시간을 통제하지 않아서 추정이 편향되었다는 비판에 대한 답변.

- 노동시간을 통제해도 결과에 거의 변화가 없다. 

 

6. 한국 성별 소득 격차의 1/3~1/4은 여성 혐오에 기인 
- 영어로 쓴 후속 논문. 성별 소득 격차의 발생 원인이 여성혐오에 기반함을 통계적으로 증명하는 논문. 

- 성별 소득 격차의 세 가지 원인 (= 성별 선호, 통계적 차별, 여성 비선호(혐오)) 중에서 마지막이 차지하는 비중에 대한 검증 논문. 
- 이 논문을 완성하기 전에 불평등학회에서 발표했던 초안 소개
- 논문 원본은 요기


7. 대학원 진학 확률의 성별 격차
- 성별 격차가 구조적 문제임을 다시 한 번 드러내는 논문. 이 번에는 소득이 아닌 대학원 진학의 성별 격차를 검증. 

- 논문 원본은 요기

 

8. "채용시 응시·합격자 성비 공시해야…임금도 공개하자" 
- 구조적 채용차별이 있을 때 어떻게 하면 법적으로 이를 해결하는지 미국의 사례와 이론적 배경을 소개. 

- 전체 보고서는 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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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1, 6, 7은 논문 요약이고, 8은 전체 보고서에서 제가 쓴 파트에 대한 요약. 나머지는 추가적 답변입니다. 

 

이 외에 남성, 그 중에서 명문대 출신 남성들이 과거보다 더 기회가 적다가 느낄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요 포스팅을 참조하십시오. 

 

 

Ps. 

이렇게 링크를 달아줘도 안읽는 분들이 상당히 많죠. 안읽고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이 하는 얘기는 거의 똑같습니다. (1) 성별 기호(선호)의 차이다, (2) 성별 노동공급의 차이다, (3) 차별은 엄격한 의미의 동일노동 하에서 임금격차가 있을 때만 성립한다. 위 링크된 글의 본문과 댓글에 답이 모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다시 한 번 요약을 해드리면, 

 

(1) 성별 선호: 여기서 선호는 피고용주, 즉 취준생의 선호를 의미합니다. 이 용어는 고용주의 성별 선호를 의미하는 선호기반차별과 혼돈을 일으킬 수 있어서 피하고 싶은데 마땅히 다른 용어가 떠오르지 않네요. 그런데 대졸자 노동시장에서 개인의 선호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변수가 대학의 전공과 노동시장에서는 직업입니다 (이것도 의심스러우면 연구해서 논문을 발표하십시오. 교과서에 실리는 얘기인데 교과서를 바꿔야할 만큼 중대한 발견이 될겁니다). 한국도 성별 전공 분리가 명백합니다. 성별로 다른 개인 선호가 소득 격차를 견인했다면 적어도 전공과 직업 통제 전후에 성별 소득 격차가 상당히 크게 달라져야 합니다. 분석을 해보면 별로 안달라집니다. 전공 대분류를 나누고 세부 전공을 통제해서, 전공 대분류에 따라 성별 격차를 별도로 측정하면 성별 소득 격차가 오히려 커집니다. 성별선호가 중요했으면 전공별 분석에서는 격차가 작아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한 연구에서 성별 선호 차이가 설명할 수 있는 소득 격차는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상당히 작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2) 노동공급: 경력단절은 노동공급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인적자본의 격차를 성별 격차의 메인 원인으로 보는 이론입니다. 제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유가 이 논리에 대한 의심 때문입니다. 노동공급과 인적자본이 성별 소득 격차의 가장 중요한 이유라면 경력단절이 없는 대졸 직후 노동시장에서는 성별 소득 격차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졸 직후 노동시간의 성별 격차는 차별과 선호 두 요인의 복합적 작용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성도 대기업 정규직으로 일하고 싶은데 차별로 인해서 취업이 안되어서 취준생으로 단시간 알바를 하면 이건 차별의 결과입니다.  경력단절 논문의 분석(표3, 모델5)에서 통제한 노동시장 변수 중 가장 설명력이 큰 것은 노동시간이 아니라 대기업 취업과 정규직 취업 여부입니다. 모두가 선호하는 일자리인데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변수죠. 대기업이나 정규직은 노동시장의 공급 요인이 아니라 주로 수요 요인입니다. 노동시간을 통제해도 성별 소득 격차의 극히 일부만 설명됩니다. 그래서 노동시장 할당이 성별 소득 격차의 주요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3) 동일노동 동일임금: 위의 리스트에는 포함하지 않았는데, 동일노동 동일임금에 대해서도 별도의 포스팅을 한 바 있습니다. 차별 여부를 따질 때 그 원인은 몇 가지로 분해할 수 있습니다. (a) 노동시장 진입 이전 인적자본 축적 기회의 차이, (b) 인적자본을 통제한 후 포지션의 차이, (c) 포지션이 동일할 때의 지급 임금의 차이. 이 중 (a)는 노동시장의 차별이 아닌 사회구조적 문제이거나 차별입니다. 이것도 심각한 문제지만, 노동시장 연구자들은 이 부분은 따지지 않습니다. 이유가 뭐가 되었든, 노동시장의 보상은 노동 기여분에 대한 보상이기 때문에 생산성에 영향을 끼치는 인적자본은 통제변수입니다. 하지만 (b)와 (c)는 노동시장 차별의 두 가지 기제(=메카니즘)입니다. 차별은 양자의 총합이지, 후자만이 차별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런 황당한 차별적 시스템을 생각해보죠. 똑같은 의대를 나와도 대부분의 여성은 간호업무만 종사하게끔하고, 대부분의 남성은 의사가 되게 하는거죠. 이 경우 직위를 통제하면 성별 격차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차별이 없는건가요? 그래서 차별이 없다고 결론내리면 전형적인 과잉통제(over-control)의 오류죠. 노동시장 연구에서 노동시장의 결과(=직위)를 통제하면 안됩니다. 미국에서 아시안들이 관리자가 되지 못해서 아시안 차별이라고 하는데, 누군가 관리자 여부를 변수로 통제하고 아시안과 백인 간에 차이가 없다고 말하면 바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겠죠. (b)와 (c)의 구분은 차별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차별이 발생하는 기제를 나눌 때 의미가 있는 겁니다. 

 

더 궁금하신 분들은 위에 링크한 글을 읽어보십시오. 성별 격차 문제를 워낙 여러번 얘기했기 때문에 다른 글들도 많습니다. 찾아보면 꽤 나옵니다.

 

그렇게 해도 궁금증이 가시지 않으면, 사회학과 대학원 입학 원서를 어떻게 쓰는지 알아보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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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하는 논문을 쓰기도 했지만, 이철승 교수의 <불평등의 세대>에 이런 주장이 나온다. 한국의 세대는 30년대생, 60년대생이 장기 세대를 형성했다는 것. 30년대 전쟁 세대의 자장 속에 그 다음 20년이 포괄되어 있고, 60년대생 86세대의 자장 안에 70-80년대생의 다수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세대 30년 주기설 비슷하다. 그렇다면 다음 세대는 90년대생이 주축이 되어서 형성된다. 

 

장기 386 시대라는 진단에 경기를 일으키는 분들이 많은데, 86세대에 대한 선호와 관련없이, 장기 386 시대는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30년대생 이후 세대의 영향력이 그렇게 쉽게 없어지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 

 

이 번 선거에서 60대 이상과 20대 남성의 연합으로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되었는데, 고연령층과 청년층의 세대 연합으로 86세대를 포위하자는 아이디어를 처음 낸 사람은 조갑제다. 20년 전의 일이다. 조갑제는 2002년에 당시 40년대생인 50대가 돈의 힘으로 자식뻘인 당시 70년대생인 20대를 "교육"시켜서 86세대인 30대를 고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40대인 70년대생은 가장 강력한 민주당 지지 집단이니 조갑제의 기획이 원안대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86, X, M, Z 등 10년 단위로 세대를 나누는 것은 의미없지만, 30년 장기 세대로 나누면 연령, 시대 효과와 독립적인 세대 순효과가 있다고 주장해볼 수도 있다. 세대 간 연대는 부모-자식 세대가 연대해서 삼촌-고모 세대를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조부모-손자 연대해서 조부모 입장에서 자식세대를 손자 입장에서 부모 세대를 고립시키는 것. 그리스 로마 신화의 크로노스 vs. 제우스부터 시작해서 권력은 부모-자식 간에 가장 나누기 어려운게 아니겠는가. 

 

진지하게 하는 주장 아니고, 그냥 재미있자고 한 얘기다. 

 

 

 

 

세대론만 얘기하면 나오는 약방의 감초, 만하임은 같은 세대 내부의 격차로 "세대 단위(unit)"라는 개념을 내세운다. 같은 객관적 세대에 위치해 있더라도 다른 세대 단위를 형성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19세기 초 독일의 낭만-보수파와 리버럴-합리주의파가 같은 세대 내의 다른 세대 단위라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20대에서 형성되고 있는 1번남 vs 2번남, 페미니즘 여성 대 공정원칙 남성은, 한국에서 같은 세대 위치 내 서로 다른 세대 단위가 등장한 것이 아닌가 싶다. 같은 연령 세대 내에서 서로 적대적이고 대립하는 세대 단위의 형성이다. 

 

한국에서 서로 대립하는, 비슷한 인구 규모의, 복수의 세대 단위가 형성되는 것은 현재의 20대가 근현대 역사상 처음이 아닐까 싶다. 윤석열-나경원-오세훈도 모두 86세대지만 이들은 86세대 내에서 하나의 세대 단위를 형성하지 못했다. 고립된 소수라 해야 마땅할 것이다. 86세대는 그 내부에서 적대적 성향을 가지는 두 개 이상의 단위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하나의 커다란 세대가 있고, 고립된 자들은 이 전 세대와 자장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반해 현재의 20대는 성별이라는 생물학적 변수를 중심으로 두 개의 경쟁하고 대립하는 단위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만하임의 세대론도 짧은 글이지만, 그 중에서 세대 단위의 형성은 더 짧다. 그 짧은 글에 여러 얘기가 나오지만, 그 중에서 세 가지가 생각난다. 하나는 고립되어 있던 이 전 세대 위치의 인물들이 새로운 태도 형성의 중핵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인물도 중요하지만 고립된 전 세대 인물들이 가졌던 사상은 더욱 중요하다. 페미니즘도 능력주의도 현재 20대에게 갑자기 새로운 사상은 아니다. 만개하지 않았을 뿐 이전에도 존재했다. 이 전 세대 인물이 새로운 세대의 중핵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한국은 86세대를 형성한 노무현이 대표적 사례가 아닐까 싶다. 

 

다른 하나는 세대 단위를 형성하는 힘이다. 세대 단위 이해에서 아마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만하임의 표현을 빌리자면 "근본적으로 통합적인 태도와 구성적 원칙"이 있어야 한다. 어렵게 말했지만, 삶의 태도를 형성해 나가는 원칙이 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세계관이 있어서 새로운 세대 단위가 형성된다. 공정과 능력주의로 대표되는 이십대 남성의 주장과 페미니즘으로 대표되는 20대 여성의 주장이 바로 이러한 세계관이리라. 86세대는 민주주의, 평화, 상식 등 선과악의 대립이었지 2개의 사상적 대립은 아니었다. 그러니 86세대의 내부는 대립하는 두 개 이상의 단위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 세대단위와 주변화된 일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에 반해 현재의 20대에서 형성되고 있는 두 개의 세대 단위는 "근본적으로 통합적인 태도와 삶을 구성하는 원칙"이 되는 대립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한국 근현대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소집단과 세대 단위의 관계를 만하임은 얘기한다. 한국에서 능력주의에 기반한 보수 세대 단위의 시작으로 일베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인터넷의 퇴행적 놀이로 시작했던 집단이 내재한 잠재성을 실현해서 하나의 실제 세대로서 단위를 형성한 역사적 계기는 조국 사건과 인천공항 정규직화 사건이 아닐까 싶다. 페미니즘을 중심으로 한 다른 세대 단위는 맹아가 된 소집단이 없었다.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으로 잠재성으로 펴져 있었다. 하지만 이 번 선거를 계기로 n번방을 추적했던 불꽃이 새로운 세대 단위의 구체적 표현을 제공하는 소집단이 되지 않았나 싶다.  

 

현상적으로 86세대가 노무현이라는 이 전 세대 인물을 핵으로 "근본적으로 통합적인 태도와 삶을 구성하는 원칙"을 가진 장기 세대를 형성했다면, 현재의 20대는 이준석과 박지현이라는 동세대 인물을 대표로 세계관이 다른 두 개 단위의 장기 세대를 형성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실제 그렇게 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이렇게 보면 세대론은 세대 간 불평등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관의 등장과 세대 내 충돌을 이해하는 틀이 된다. 즉, 세대론이 지적기획에 기반한 사회변동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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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율 기자의 alookso 대선 라이브 업데이트

 

이 번 대선이 인물이 아니라 정책 선거였다고, 링크된 글의 5번에 나오는 진단이다. 

 

황당하다고 느끼실 분들도 있겠지만, 저는 동의한다. 이 번 대선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얘기한적이 한 번도 없는데, 해외 거주 관찰자로서 이 진단에 동의하는 이유에 대해서 얘기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대의제에서 정책 노선 선거는 사실 매우 피곤한 일이다. 아래 글, 이념적 일관성에서도 얘기했지만, 오래 단련된 정치인이나 사상가가 아니면 이념적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렵다. 각각의 사안에 대한 정책적 판단은 골치아프고 힘들다. 사회과학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전문가도 자기 분야만 안다. 이럴 때 어떤 인물에 대한 인상에 기반해서 투표하면 취득해야 할 정보량을 줄여줘서 효율적이다. 

 

진영에 기반해서 투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대략적인 지향점은 있는데, 각 정책에 대한 지식은 부족할 때 진영에 기반해서 투표하면 실패할 확률이 낮다. 

 

 

 

물론 투표하는 이유가 정책적 선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집권 세력에 대한 불만의 표시도 한 의견이고 충분한 선택 이유다. 특정 정책에 대한 선호 때문에 스윙보트가 되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고 싶은 얘기는, 이러한 스윙보트가 진영 기반 투표 대비 도덕적으로나 정책적으로 더 나은게 아니라는거다. 오히려 진영 기반 투표가 스윙보트보다 더 일관된 정책적 선호에 기반한다. 달리 말해, 도덕성 이슈가 아닌 정책 이슈에서는 진영논리가 평균적으로 더 낫다.  

 

한국에서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 중에서 후자의 두 개를 강조한다. 그런데 정치인의 첫번째 자질은 대의에 헌신하는 열정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치인이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번째 자격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이걸 우습게 안다. 마치 이 자격조건의 미달이 미덕인줄 착각한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이 번 선거에서 한국의 과거 어떤 선거보다 양당 후보 간 정책적 이질성이 크게 드러났다. 이전에는 이 번 선거 대비 이질성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진보와 보수의 가장 큰 차이는 경제, 사회정책이라기보다는 권력 집행의 방식이었다. 이명박 정권 시절의 민주주의 후퇴는 심각했다. 국정원 직원이 댓글 알바로 활동하다 걸렸으니 오죽 했겠는가.

 

민주당이 퍼주기 복지 공약을 한다고 하지만, 박근혜 후보 시절에 가장 중요한 공약이 기초연금이었다.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여의도 연구소에서 어떻게 페미니즘을 당내에서 정책적으로 구현할 것인지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토건의 기수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청계천을 복원할 때 친환경을 그 이유로 꼽았다. 외국의 보고서에서 가장 친환경 지도자로 가카가 선정되기도 했다.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 버스노선을 개편하고 욕먹고 있을 때, 노대통령이 어중간하게나마 옹호한 사실도 있다. 이민자를 처음으로 국회의원으로 추대한 것도 박근혜대통령이었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에 연말정산 공제혜택을 줄여 세금을 인상할려고 했을 때, 당시 야당 대표였던 문재인 대통령이 결사 반대했던 것도 상기하길. 제가 기억하는 정치인 문재인의 가장 큰 삽질이 이거다. 광범위한 세원에 대한 과세로 복지국가를 앞당긴다는 원칙에 역행했다. 단기 정치 이득이 아니라 일관된 이념에 입각해서 판단했다면 취하지 못했을 노선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 누구보다 국방을 강화했다. 한국이 강고한 군사강국이 되었다. 동남아 정책을 보고있자면 새끼 제국주의자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립서비스가 아니라 힘에 기반한 평화 노선에 가장 충실했던게 문재인 정부다. 

 

이렇게 정책적 격차가 크지 않으니 인물 위주의 선거, 권력행사 행태를 둘러싼 도덕성 위주의 선거가 된다. 그런데 정책이 실종된 인물 위주의 선거는 역설적으로 정책적 격차가 작아서 정책적으로 국론이 분열되지 않았다는 긍정적 의미다. 86세대의 기여 중 하나를 찾는다면 저는 이것을 꼽고 싶다. 여야 모두 정치 중심이 86 운동권 세대가 되면서 여야의 지향점이 상당히 비슷했다. 정책이 실종되고 도덕성 위주의 논리가 판을 치는게, 뒤집어 생각하면 국론 통일의 현상이다. 단단한 관료제에 기반한 국정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이런 국론 통일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와 대비해서 운동권 출신 86세대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새로운 세대의 선호가 충돌한 이 번 대선이 얼마나 큰 정책적 분열을 드러냈는지 생각해보라. 한국에서 노동조건 악화와 복지 축소, 성별 평등 약화를 명시적으로 표명한 첫 정치세력의 등장이다. 권력 구사 행태에 정책적 격차가 더해졌다.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는 잘 모르겠다. 윤석열-오세훈으로 이어지면서 정책적으로 진영 격차가 확산되는 전기가 될지, 여전히 부족한 복지와 다양성 관련 정책에서 외국의 사례를 좌표로 삼아 앞으로도 비슷한 방향으로 변화할지. 

 

조만간 핵심노동인구의 축소를 경험할 한국은 (1) 외국인 수용, (2) 여성의 사회 진출 확대, (3) 정년 연장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번 선택은 이 세 가지와 모두 배치되지만, 위 세가지 노선 외의 길은 국가적 자살인데, 설마 그 길을 가랴 싶다. 

 

 

 

마지막으로 최선의 정책은 "중산층에게 이득이 되는데 빈곤층이 묻어가는" 것이라는 얘기를 또 하고 싶다. 투표를 하는 중산층의 지지를 받는데, 그 혜택이 빈곤층에게도 돌아가야 한다. 

 

여러 번 얘기했지만, 한국 불평등은 상위 1%, 10%의 상층이 차상층보다 훨씬 많이 버는 상위 불평등이 아니라 빈곤층 20%가 차하위층보다 심각하게 더 가난한 하위 불평등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문재인 정부는 하위 20%의 처지를 개선해서 빈곤을 줄이고, 불평등을 축소하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 성과는 중상층의 소득이 늘지 않고, 부동산 문제가 악화되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런 정책은 지속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최저임금 1만원을 지지하는양 떠들었지만, 막상 정책적으로 문제되니 그 누구도 나서서 옹호하지 않았다는걸 기억하라. 최하층은 정치적으로 조직되지 않는다. 

 

 

 

Ps. 트럼프 대통령 시절에 그토록 제도로서의 정부 기관이 망가지고 혐오가 극심했지만, 의외로 인종 간 경제 격차는 상당히 줄었다. 흑인의 빈곤이 상당히 크게 감소했다. 백인 대비 감소폭이 더 크다. 흑인만 그런게 아니다. 히스패닉계, 아시안계, 기타 인종의 소득 증가율이 거의 전 분위에 걸쳐서 백인보다 더 높다. 최근 목도되는 소수 인종의 보수화에는 이러한 경제적 배경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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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적 일관성

교육 2022. 3. 8. 13:55

페북 포스팅을 보고 드는 생각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사안에 대해서 일관된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견지하지 않는다. 때로는 이러한 이념적 다양성을 자랑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러 사안에 대한 자신의 의견이 정치적 스펙트럼의 어느 한 분파에 일관되게 속하지 않고 다양하다면 셋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철학이 부재하거나, 사안별로 잘 모르거나, 둘 다거나. 저 자신도 진보-보수의 스펙트럼에서 사안별로 의견이 뒤섞여 있는데, 저의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가장 먼 의견을 가진 사안은 제가 가장 잘 모르는 분야다. 예를 들면 환경이나 원자력 등. 

 

정치인들이 당파에 따라 일관된 의견을 가지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분들의 철학적 깊이와 사안 이해의 넓이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이 경지에 이르기 어렵다. 특정 분야 전문가들이 스카웃되어서 정치할 때 황당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자기 분야 외에는 모르기 때문이다. 정치혐오는 어설프게 아는 분들이 가장 세다. 세상만사에 대한 이해의 일관성, 이념적 일관성을 확보하는건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렵다. 

그렇다고 모든 입장이 정해져 있다는 얘기는 당연히 아니다. 모든 정치인들이 깊은 이해가 있다는건 더더욱 아니고. 비슷한 철학과 이념을 가져도 새로운 사안이나 환경이 출현하면 해석에서 차이가 날 수 있고, 철학과 이념의 일관성에 정합적인 노선을 찾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정치는 현안을 다루기 때문에 비슷한 철학과 이념을 가져도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당파별로 대립되는 주제에서 정치인이 자기 노선과 이탈된 의견을 가질 가능성은 낮다. 이건 논리의 문제다. 같은 당에서 주요 노선에 변화를 가져올려면 노선투쟁을 한다. 이념적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사안에 대한 대응을 달리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베버가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얘기한 정치인의 세가지 자질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 중 열정은 "근원(대의)에 대한 헌신"이다. 영어로 "passionate devotion to a 'cause'"라고 하는데, cause는 궁극적 진리라고 해석해도 저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논리적 일관성이 없으면 이게 안생긴다. 그러니 같은 당에 속한 사람은 두리뭉실하게 잘 지낼 수 있는 동무가 아닌 뜻을 같이 하는 "동지"가 아닌가. 

정치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협하고 절충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본다. 하나는 자신의 철학과 이념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현실 세력을 조정하고 타협하는 훈련이 잘 되어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입장이 다른 사람의 철학적 바탕도 이해하기 때문이다. 전자와 관련해서 베버는 책임윤리를 들고온다. 이념의 노예가 되지 않고 유연하다는게, 한편으로는 책임윤리의 발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의 빈곤에 기인한 기회주의, 베버의 용어를 다시 빌리면 신념윤리 부족의 특성일 수 있다. 

 

그러니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성이란, 사안별로 자신의 이데올로기와 다른 다양한 의견을 가진다는 것이 아니라, 이념적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책임윤리에 기반하여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좋은 정치인은 이념적 일관성을 정책적 유연성으로 풀어내는 사람이다. 

베버는 정치인이 피해야할 악덕 중 하나로 허영(vanity)을 든다. 허영이란 <객관성>이나 <책임감> 없이 가장 선명하게 앞장서서 자신을 드러내서 어떤 "인상(impression)"을 주는 행위를 일컫는다. 

그런데 베버는 허영은 학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직업병으로 상대적으로 해롭지 않은 질병으로 간주한다. 증거도 별로없고 알지도 못하면서 선명하게 들이밀어도 그 자체로 학문적 발전에 크게 영향을 안끼친다고. 

그러니 제가 아무런 객관성과 책임감 없이 정치적 입장을 선명히 드러내고 다른 사람을 비웃으면 학문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이려니... (후다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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