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환 (2022) 가족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대학원 진학 확률의 성별 격차. 한국사회학. 

 

며칠 뒤에 논문이 kci나 dbpia에 올라오고나서 포스팅하는게 정도겠지만 (이제 나와서 위에 링크 삽입), 현시점에서 젠더 이슈가 구조적 문제인지 아닌지 판단하는데 눈꼽만큼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걍 지금 올립니다.    

 

 

 

아래 그림은 부모의 소득 수준에 따른 4년제 대졸자의 대학원 진학 확률 기대값이다. 대졸자직업경로이동조사(GOMS)를 이용해서 분석한거다. 지역 등 인구학적 변수, 출신 학부 학교의 위세, 전공, 출신 고교, 부모의 교육 수준, 직업도 모두 통제한 결과다. 

 

부모 소득 거의 전영역에 걸쳐서 남성의 대학원 진학 확률이 여성보다 높다. 그런데 성별격차가 부모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일정한게 아니고, 부모 소득이 낮을수록 격차가 크고 부모 소득이 높을수록 격차가 작다. 부모소득 상위 10% 이상에서는 성별 격차가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게 된다. 소득 중위점을 기준으로 남성의 대학원 진학 확률이 여성보다 대략 20% 정도 높다. 

 

한국의 중상층 이하에서는 대학이 교육의 마지막 단계로 인식된다. 대학 교육까지는 자녀의 성별에 따른 가족투자의 격차가 없어졌을지 몰라도, 대학원 교육처럼 마지막 단계를 넘어선 추가적 교육에서는 여전히 가족 교육투자의 성별 격차가 존재한다. 가족 소득이 낮아서 자녀 모두를 지원하기 어려울수록 여전히 딸보다는 아들의 교육에 더 투자한다. 

 

이 연구에서는 대학원 진학만 봤지만, 대학에서도 딸보다 아들에게 더 투자한다고 의심할만한 기술통계가 있다. 부모의 소득 수준을 보면 평균적으로 여성 대졸자 부모의 소득 수준이 남성 대졸자보다 높다. 부모의 학력 수준도, 직업 위세도 여성이 더 높다. 딸이 있는 집안이 더 잘산다거나, 잘사는 집안만 딸을 낳는게 아니라면, 이런 경향은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가족의 자녀 교육 투자가 성별로 상이할 가능성을 제기한다.   

졸업 후 소득이 높은 전공에서는 성별로 대학원 진학 확률에 차이가 없고, 평균 소득이 낮은 전공에서는 남성의 확률이 여성보다 높다. 남성은 학부에서 경제적 리턴이 작은 전공을 선택했을 경우 대학원 진학으로 노동시장 소구점을 높이는 경향이 여성보다 강하다. 이 경향이 동원 가능한 자원의 성별 격차에서 발생하는지, 성별 교육/노동시장 전략의 선호도 차이에서 발생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출신 학교별로는 상위 20권 대학은 성별 격차가 없는데, 그 이하에서는 남성의 대학원 진학 확률이 더 높다. 특히 상위 20위권이 아닌 서울소재 사립대 출신은 남성의 대학원 진학 확률이 여성보다 상당히 높다. 

 

이상의 결과를 종합하면 사회경제적 지위 중상층 이하의 자녀가 중위권 대학, 그 중에서도 비인기 전공을 선택해 진학했을 때, 성별 대학원 진학 확률의 격차가 크다. 

 

최상위나 차상위 대학에 진학하면 남녀 모두 동일한 대학원 진학 확률을 보이지만, 중위권 대학에서는 성별 격차가 있다는 발견의 함의는 (대학원을 학벌의 하나로 보면) 학벌성취에서 남성은 대학 진학과 대학원 진학 두 단계에서 기회를 가지는데 여성은 기회가 한 번 밖에 없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다는거다. 성별로 학벌성취 기회의 구조적 격차가 존재한다. 

 

 

 

당연히 기대하듯이 같은 대학, 같은 전공이라도 가족 사회경제적 배경 상층 자녀의 대학원 진학 확률이 하층보다 높다. 무려 2배가 넘는다. 부모의 소득, 교육, 직업 모두 그렇다. 가족배경 세 변수를 동시에 통제해도 각 변수가 모두 통계적으로 유의하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몇 가지 재미있는 점이 있다.  

 

우선, 자산의 경우, 단순 상관을 보면 자산상층과 대학원 진학이 정의 관계를 보이는데, 부모의 소득, 교육, 직업을 통제하면 자산은 대학원 진학과 음의 상관으로 바뀐다. 다른 조건이 동일할 경우 자산 상층의 자녀는 대학원에 진학하기보다는 노동시장에서 괜찮은 일자리를 취득하는 확률이 높다. 대학원 진학은 소득/교육 수준이 높지만 자산은 높지 않은 가정 출신이 많이 한다. 

 

교육은 부모 각각의 수준이 모두 중요한데, 딸의 대학원 진학 확률은 모친이 대학원 교육을 받았는지 여부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어머니가 대학 학력자일 경우 자녀 모두의 대학원 진학 확률이 비슷하게 높아지는데, 어머니가 대학원 학력자일 경우 아들보다 딸의 대학원 진학 확률이 특히 더 높아진다. 

 

 

 

 

이 결과의 한 가지 함의는 남성과 여성의 출신 배경을 비교할 때, 대학에서 대학원으로, 대학원에서 괜찮은 일자리로 갈수록, 여성의 가족배경이 남성보다 좋을 확률이 높다는거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올라갈수록 여성 동료의 출신 집안 경제적 사정이 남성인 자기보다 나은 것으로 보일거다. 남자는 없는 집 출신으로 어렵게 노력해서 올라 왔는데, 동료인 여성은 집안 사정이 좋아서 편하게 살아온 것으로 보이는 그런 상황. 상대적 박탈감 느끼기 딱 좋다.

 

하지만 그 이유는 사회경제적 상층이 아니면 여전히 딸보다는 아들에게 상대적으로 더 많은 투자를 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달리 말해 성별 기회의 구조적 격차로 여성이 남성보다 더 긍정적 선택편향을 가지게 된 결과 남성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되는 아이러니. 

 

 

 

 

 

 

Ps.

(1) 고등학교는 이공계인데 대학에서 인문계로 바꾼 사람의 대학원 진학 확률이 고교와 대학 모두에서 인문계를 선택했던 사람보다 높다. 출신대학과 학과를 모두 통제해도 인문사회계 학부 전공자 중 과학고/외고 출신의 대학원 진학 확률이 일반고 출신보다 높다. 

 

(2) 서울 다른 지역 출신보다 강남3구 출신자의 대학원 진학 확률이 가족의 사회경제적 배경(소득, 자산, 부모교육, 부모직업)을 모두 통제해도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높다. 

 

(3) 출신 대학별로는 다른 모든 변수를 통제해도 "서연고 카포 서성한"로 표현되는 최상위 대학(진학률 28.4%)과 차상층 (그 다음 상위 20위권 대학은 16.3%)의 격차가 가장 크고, 차상층과 그 다음 랭크 대학(14.7%)의 격차는 그렇게 크지 않다. 

 

(4) 대졸 직후 가장 대학원을 많이 가는 전공은 공대를 제외한 순수 자연과학(26.7%)이다.

 

(5) 대졸 직후 가장 대학원을 안가는 전공은 사회과학(6.0%)이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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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노동시간 격차에 대해서도 모두 얘기했는데, 여전히 제대로 읽지 않고 불만을 가지는거 같다. 그러려니 한다. 

 

지난 주 불평등연구회 세미나에서도 청년들의 장시간 노동시간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전반적인 노동시간은 줄었지만, 입사 직후 OJT 기간 중에는 장시간 노동이 유지되었을 가능성, 그래서 청년층의 장시간 노동은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는거다.

 

노동시간 같은 사회 전반적 문화와 관련된 현상이 청년층에서만 뭔가 다르게 통시적으로 진행될 가능성을 저는 낮게 본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체크해 보았다. 

 

아래 그래프가 GOMS(대졸자직업이동경로조사)의 4년제 대졸자 노동시간 변화다. GOMS는 대학 졸업 후 1-1.5년이 지난 시점의 노동시간이다. 보다시피 장시간 초과노동자는 대졸 청년층에서도 크게 줄었다. 2008년에는 52시간 초과 근무자가 21%였는데, 2019년에는 8%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35시간 미만 노동자의 비율은 큰 변화가 없다. 

 

52시간 노동제가 2018년에 시행되었으니까, 2018년과 2019년 자료는 52시간제의 영향을 받은 후다. 다른 연도보다 2017-19의 2년 사이에 주당 45시간 이상 장시간 노동자의 비율이 8%포인트가 줄어들었다. 52시간 근무제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노동시간의 감소는 장기 추세다. 2008년과 2017년을 비교하면 장시간 노동자 비율이 10%포인트 줄어들었다. 10여년전에 비해서 장시간 노동의 비율은 확실히 줄었다. 15년 전의 대졸 직후 청년 노동자에 비해 현재의 대졸 직후 청년 노동자가 더 많은 임노동 외의 시간을 누리고 있다. 

한 편으로 이 결과는 워라밸을 개선하면 청년들의 인구행동이나 삶의 만족도 문제가 해소될 것이라는 진단에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work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은 확실히 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애, 혼인, 출산이 증가했다는 얘기는 없다.  

 

이러한 추세를 보고 드는 생각이 워라밸에서 work가 아니라 life의 의미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을 분석할 때 크게 3가지 범주로 나눈다. 돈벌이 노동, 돈벌이가 안되는 노동 (가사, 돌봄 등), 그리고 레져.

 

일반적으로 워라밸의 라이프는 돈벌이가 안되는 노동과 레져를 합친 개념이다. 예전에 한 번 쓴 적이 있는데, 그래서 남성의 돈벌이 노동시간이 줄어들 때, 레져 시간이 반드시 증가하는게 아니다. 미국의 경우는 남성의 돈벌이 노동 시간이 줄어들면서, 레져 시간이 증가한게 아니라, 돈벌이가 안되는 가사 노동시간이 늘었다. 20세기 동안 미국에서 여성의 가사노동이 43시간에서 28시간으로 15시간 줄어들 때, 남성의 가사노동은 4시간에서 16시간으로 11시간 늘었다. 대략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이 남성보다 75%많다.

 

워라밸은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이 줄고 돈벌이 노동시간이 늘어나는 것과 남성의 돈벌이 노동시간이 줄고 가사노동시간이 늘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한국은 2019년 현재 기혼자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이 남성보다 250% 많다. 한국도 다른 국가의 추세를 따른다면 여성의 노동시장 진입이 늘고, 남성의 임노동 시간이 줄어들고,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이 증가할 것으로 저는 예측했었다.

 

"돈벌이 노동 vs 다른 시간"의 균형이 워라밸이니까.

 

그런데, 최근에 느끼는 점은 한국은 "돈벌이 노동 vs 다른 시간"의 균형에서 워라밸의 의미를 찾는게 아니라, "모든 노동 vs 레져 시간"으로 워라밸의 의미를 찾는게 아닌가 싶다. 자기개발은 워라밸이 아니라 레져를 깎아먹는 워라밸의 방해 요소다. 

 

이러한 대립점 변화의 또 다른 의구심은 워라밸에서 라이프의 의미가 가족이 아니라 개인이 되었다는거다. 가족은 가사노동의 포션을 늘려서 워라밸에 방해가 된다. 다른 국가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과격한 개인주의로의 이행. 증거가 제대로 없는 가설적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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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걸 참는 능력

교육 2022. 2. 16. 09:10

종교 현상은 사회과학의 대상이지만, 신의 존재 같은 건 사회과학의 대상이 아니다. 지금은 너무 당연하게 들리는 이 말이 원래 그랬던건 아니다. 철학에서 사회과학이 뭔가 다른 분야로 독립한 이후에나 성립되었다.  

 

현대 사회과학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연구의 바탕이 되는 이론이 "중범위 이론"이라는거다. 거의 모든 사회현상에 대한 일관된 설명을 제공하는 이론이 아니라 특정 현상에 특화된 이론을 사용한다. 사회현상이란게 따지고 보면 모두 연결되어 있지만, 그 모든 연결을 다 고려하지 않는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사회현상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과학 연구 결과를 보고 세상 이치를 깨우치고자 하는 분들은 답답하게 느낄거다. 

 

이런 분들에게 해드리고 싶은 얘기는 엉뚱하게 완성된 논리를 세우지 말라는거다. 인간본성에 따라 성별로 원하는 바가 어떻게 같느니 다르니 하는 주장을 강하게 하면 아무도 안처준다. 그런 주장에 반응하는 정상적인 사회과학자는 한 명도 없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 본성서부터 시작해서 연역으로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논리가 별 의미없다는걸 깨닫고 주류 사회과학에서 그런 소리 안한지 오래되었다. 

 

예를 들어, 아래보니까 가부장제적 남성부양자 모델에 대한 페미니즘의 반발을 얘기하더라. 여성들이 이 모델에 대해 반감을 가지면서도 이 모델에 의존한다고 불만이던데, 지배적 사회모형은 항상 그런 양가적 태도를 동반한다. 그리고 남성부양자 모델은 여전히 작동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모델이 전사회에 걸쳐서 일관되게 작동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한국만 그런게 아니고 어느 사회나 그렇다. 

 

한국에서 혼인율이 낮아진 원인 중의 하나로 20대 후반 30대 초반 남성의 경제적 부가 충분하지 않다고 인터넷에서 많이 얘기한다. 가부장제적 남성부양자 모델이 되기에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다는거다. 하지만 최선영, 장경섭(2012)의 연구를 보면 1930년대 출생 코호트 남성의 결혼 시점 직업이 무직인 경우가 21%였다. 현재보다 지금은 80대인 1930년대 출생자들이 결혼할 당시가 가부장적 남성부양자 모델이 더 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는 새신랑의 1/5이 무직인데도 결혼을 했다. 가부장의 경제적 능력이 결혼의 전제조건이 아니었다는 의미다. 그 때는 여성들이 남성의 경제력 능력을 안따졌나? 세상에 그럴리가. 남성부양자 모델보다 생애사에서 누구나 거쳐야 하는 사회적 제도로써의 혼인의 강제력이 더 컸을 따름이다. 개인 선택의 자유가 낮았기에 가능했던 사회현상이다. 

 

그러니 과거에는 남성부양자 모델에 기반해서 가족 경제가 작동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혼인율이 낮아졌다는 단순한 설명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사회적 제도로써의 혼인의 의미가 변화하고, 결혼의 경제적 조건이 변화하고, 여성의 사회진출로 인한 기회비용이 변화하고... 등등등. 혼인은 성욕이라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 욕망, 경제적 능력으로 채워지는 식욕과 다른 물질적 욕망과 연결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그 욕망에서 부터 혼인 제도나 패턴을 유추할 수 있는게 아니다. 

 

사회과학적 이해란 이런 복잡한 관계를 알도록 노력하는거다. 

 

(사회)과학적 사고란 새로운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 어설픈 논리로 설명하려들지 않고 모르는 체로 참는 능력이기도 하다. 미시적 심리와 거시적 사회현상을 모두 포괄하는 완결적 설명은 없다. 근원이라는 환원주의적 설명은 매력적으로 들리지만, 현실 세계의 검증테스트를 통과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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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기사: 이대녀는 40대만큼 진보인데···이대남은 대한민국 최강 보수 [본지·정당학회 분석]

 

올해 1월25일자 기사인데 꽤 화제가 되었다. 이 조사의 의미에 대해서 크게 덧붙일게 있는건 아니고, 기사가 나온지 몇 주 지났으니, 기사의 직접적 해석을 넘어, 이 조사와 지난 번에 생난리가 났었던 KBS 조사를 연결해서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중앙일보 기사는 20대 남성의 정치적 성향이 재분배 영역을 포함해서 전반적으로 보수적이라는걸 다시 한 번 드러낸다. KBS 조사와 중앙일보 조사 결과는 하나의 일관된 스토리로 연결될 수 있다. KBS 조사 결과로부터 20대 남성의 인식이 독특하다는 정보를 수용하기를 거부했던 분들은 이제 뭐라고 할 것인가? KBS 조사가 소음이라기보다는 정보값이 컸던 신호라는걸 이제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경제성장과 복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성소수자 대응 등 모든 측면에서 20대 남성은 보수적이고, 20대 여성은 진보적이다. KBS 조사는 성별 분화의 한 축이 계급일 것이라는 신호를 제공한다. 

아마 방법론적으로 중앙일보 기사와 KBS 기사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변명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중앙일보 기사도 방법론적으로 그렇게 깔끔해 보이지 않는다. 전연령대 2천명 조사했으니까, 성(2집단)*연령대(5집단)의 10개 집단별로 샘플수는 200명 남짓이다. 그 숫자로 위와 아래 그래프와 같이 스무스한 분포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나? 

 

기사에 나온 그래프를 보면 0점이하 10점 이상에도 음영이 있다. 응답이 0~10이니까 당연히 이 값은 불가능하다. 대략적인 분포를 엄청나게 smoothing해서 만들었거나, 모수통계로 정치 성향의 기대값을 계산했더니 설정된 바운더리를 넘어간 경우, 또는 두가지 방법론의 결합일 것이다. 하지만 이 번에는 누구도 디테일을 무시하고 대략적 경향을 보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정보에서 신호를 포착하지 못하는 때가 바로 자신의 편견이나 이념이 객관적 인식을 가리는 지점이다. 저 자신을 포함 누구나 이 지점이 있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고 조심하도록 노력하는게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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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인터뷰 기사: 급한 건 잡았지만 중요한 건 놓쳤다… K방역 2년의 명암.

강국진 기자 자작나무 통신: 취재 뒷 이야기

 

2주 전에 나왔던 인터뷰 기사. 내용인 즉, 방역의 성공은 자영업자의 희생에 바탕한 것인데, 이에 대한 보상이 너무 미흡하다는 점이다. 일부를 아래 옮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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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역 대응만 놓고 보면 한국은 확진자나 사망자 추이를 보더라도 외국과 비교해 굉장히 잘하고 있다고 본다. 성과를 거둔 원동력이 뭘까. 결국 국민들의 참여와 협조다. 특히 자영업자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희생 뒤에 보상이 없다. 자영업자들은 정부 방침에 협조했다는 이유만으로 빚에 허덕이고 폐업을 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를 희생했으면 보상을 해준다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 통하질 않고 있다. 소수를 희생양삼아 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좋지 못한 선례를 만드는데 정부가 앞장서고 있다. 방역 성공을 위해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 유지를 희생하는 셈이다...

자발적인 협조가 가장 좋은 방식이라고 본다. 불가피하게 강제조치를 해야 할 때는 보상이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중국같은 방식으로 전면봉쇄하고 통제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본다. 한국은 중국처럼 전면적인 봉쇄나 통제를 하진 않지만 손실보상을 제대로 해주지 않고 일방적인 희생에 근거했다는 점에서 보면 중국적 요인이 없다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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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터뷰를 하고 문대통령이 "긴급지원은 속도가 생명"이라며 신속 처리를 당부한다는 기사를 보니, 너무 남얘기 하듯이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하위 80% 보상도 좋고, 90% 보상도 좋은데, 이런 커트라인에 대한 논의는 부차적이다. 방역협조로 손실을 보면 보상을 해야 한다. 그 나마 선거가 있어서 추경이라도 하는건지. 

 

한국의 자영업자 비율이 타국가보다 높고, 구조조정의 필요성도 충분히 공감하는데, 그 구조조정을 팬데믹을 핑계로 정부의 강요로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자영업자가 현정부를 지지하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될 지경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인천, 경기 지역의 직업별 지지율 변화를 보면 세금현실화 등으로 자영업자가 지지층에서 대거 탈락했다. 비슷한 양태가 반복되고 있지만, 그 때는 지금보다 명분이 있었다. 공동체의 위기를 특정 계층의 희생으로 극복하면, 당연히 각자도생의 기운만 높아진다. 

 

한국은 경제가 발전하면서 중산층 이상의 복지 필요성에 대한 공감도가 지속적으로 낮아지고 있다. 조만간 복지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해서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으면 젊은 세대의 보수성과 중산층 이상의 반복지가 결합해서 복지백래쉬가 도래할 가능성이 있다. 가장 중요한 복지는 세대간 협약이다. 현재의 노동인구가 번 돈으로 현재의 노인인구가 괜찮은 삶의 질을 누리는게 가장 중요한 복지다.

 

이 복지를 한국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현재 노인 인구의 국민연금 노령연금 수급률은 40%(현재 노동하는 고령인구의 국민연금 가입률은 10%)가 안된다. 국민연금 가입률이 70%에 이르는 현재의 50대가 은퇴할 때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노후 생활이 복지에 의해서 지탱되는 첫 시대가 열린다. 복지란 일단 시작해서 궤도에 오르면 되돌리기 매우 어렵다. 

 

코로나 후 복지 확대, 공동체 유지보다 각자도생의 분위기가 커져서, 중산층 노인이 복지에 기반해 삶을 영위하는 첫 세대가 나오기도 전에 복지백래쉬가 도래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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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기사: 이재명 닷페이스 인터뷰, 채용시 응시·합격자 성비 공시해야

 

기사에 달린 댓글 보니, 한 명이라도 여성이 많으면 어떻게 하겠다는거냐라고 비아냥되던데, 이 제안은 당연히 전문가 의견을 반영한 것이다. 이론적 근거와 타국의 사례도 확실하고. 제가 알기로 요즘 이 주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누가 조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제안의 의미를 조금 설명하고자 한다.

 

채용시 응시, 합격자 비율을 파악해서 성이나 인종별로 지나치게 차이가 나면 차별이라고 판정하고 제재를 가하는 것은 자유주의의 첨병, 미국에서 채택한 방법이다. 미대법원 판례로 지원자와 합격자의 성별, 인종별 격차가 크면 차별로 간주한다. 

 

차별의 의도를 실증하지 않고, 차별의 구체적 메카니즘이나 제도도 밝히지 않고, 기업이나 조직의 전반적 문화나 반복행위에서 차별이 없으면 생길 수 없는 결과를 보고 차별이라고 판정한다. 이런 차별을 "구조적 차별"이라고 한다. 반복되어서 패턴화되고 정형화되어 나타나는 차별이다. 

 

이 때 차별의 판정은 (잠재적) 후보군과 실제 합격자(내지는 승진자) 간의 차이가 "충분히" 커야 하는데, 충분하다는 것의 기준은 "2-3 표준편차 이상의 격차"라고 통계적 기준까지 떡하니 대법원 판결로 박혀있다. 

 

실제 응시자와 합격자를 비교해서 성별이나 인종별로 차이가 나면 차별이라고 판정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잠재적 응시자군과 합격자를 비교해서 차이가 나면 차별로 판정한다. 가장 유명한 사례 중 하나가 1977년의 Hazelwood School District 판결이다. 헤이즐우드라는 지역의 학교에서 흑인 교사의 수가 적어서 차별이라고 소송이 걸렸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대부분 백인이라 교사도 그렇게 된거라고 차별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에서는 차별로 판결이 났다. 그런데 이 차별 판정의 방법이 사회과학적으로 매우 흥미롭다. 왜냐하면 응시자의 인종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헤이즐우드가 미국 중부 세인트루이스 지역에 있는 곳이다. 미법원에서는 센서스로 이 지역의 교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들의 백인과 흑인 비율을 추정해서, 이를 잠재적 응시자 비율로 간주했다. 추정된 잠재적 응시자 대비 헤이즐우드 지역 흑인 교사의 비율이 너무 적어서 차별이 아니면 이런 결과가 생길 수 없다는거다. 차별이 없다면 세인트루이스 지역의 흑백 교사 자격증 소지자의 비율과 헤이즐우드 지역의 흑백 교사의 비율이 크게 차이날 수 없다는게 논리의 핵심이다. 

 

미법원은 차별 판정에서 어떤 통계방법론을 쓸지는 특정하지 않았지만, 어떤 방법이든 사회과학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방법으로 2-3 표준편차 이상 차이가 나면 차별이라고 구체적인 숫자까지 제시했다. 이 기준은 여러 법원 판결에서 인용되었다. 2-3 표준편차라는 건, 소위 말하는 95% ~ 99.9% 유의수준과 비슷하다. 헤이즐우드 판결에 사용된 통계는 두 모집단 표본 비율의 차이 검증이라는 기초통계 수업에 배우는 수준이다. 복잡하게 여러 변수를 통제하지 않았다. 이 판결만 그랬던게 아니고 다른 많은 재판에서도 기초통계학 수준의 통계방법론으로 차별 판결이 이루어졌다. 잠재적 응시자든 실제 응시자든, 응시자의 성별, 인종별 격차는 없다는게 기본적 가정이다. 

 

이러면 당장 여성은 이공계가 적은데 엔지니어 뽑는데 남녀 비율을 맞추라는거냐라는 식의 질문이 나올거다. 당연히 그런거 아니다. 기업은 성별 격차가 나는 합리적 이유를 소명하기만 하면 된다. 잠재적이든 실질적이든 응시자의 조건에 차이가 있을만한 이유와 근거가 있으면 된다. 

 

여기서 핵심은 기업이 소명을 해야 한다는거다. 

 

확실하게 차별이라고 걸리지만 않으면 괜찮은게 아니라, 결과에서 차이가 있으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고용주가 해명하는게 핵심이다. 결과적 차이가 있을 때, 이 차이에 대한 입증의 책임이 고용주측에 있다!

 

이 방법을 한국에 적용하는데 발생하는 큰 난관 중 하나는 미국에서 사용한 "잠재적 응시자" 컨셉을 한국에서 사용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미국의 잠재적 응시자는 많은 경우 지역노동시장에 기반한다. 하지만 한국은 지역노동시장 컨셉이 약하다. 특히 대졸자는 노동시장이 기본적으로 전국이다. 한국 통계청은 센서스 지역 정보도 제대로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의 차별 시정을 위해서는 응시자 정보를 수집하는게 반드시 필요하다. 얼마 전부터 한국에서 "공정"한 채용을 위해서 블라인드 채용을 실시하는데, 저는 블라인드 채용이 그렇게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차별은 과정 곳곳에서 발생할 수 있다. 작은 차별이 누적되면 결과는 커진다. 기업 입장에서는 여러 방식으로 차별을 해도 우리는 블라인드 채용해서 응시자 정보가 없다고 하면 그만이다. 

 

저의 개인적 선호는 그렇다는 거고, 일반적으로 블라인드 채용의 선호는 상당히 크더라. 하지만 블라인드 채용을 유지하면서도 응시자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역시 미국에서 사용한 EEO Self-identification form과 같이 응시자의 인적 정보를 별도로 수집하면 된다. 미국은 이 정보 수집이 의무다. 

 

어떠한 방식이든 기업이 응시자의 정보를 수집하고, 합격자 대비 비율을 공시토록 하는 것은 차별 수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제가 생각하기에, 성별 고용/승진차별을 해결하기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제도적 장치가 바로 정보의 수집이다. 

 

 

 

Ps. 이 방법과 관련된 여러 이슈와 고려점들이 있는데 그건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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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계층론에서 종속변수를 직업으로 할지, 소득으로 할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소득보다 직업에 주목한 이유 중 하나는 소득은 변동이 크지만, 직업은 변동이 작고 평생소득의 대리 변수로 더 잘 작동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직업이 개인의 "life chance"를 잘 나타낸다는 거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다. 소득은 서베이에서 물어보기 어렵고, 기억의 부정확성이나 프라이버시 이슈 때문에 생기는 측정 오차도 크고, 실제 자료도 부족하다. 한국 센서스에서도 소득을 묻지 않는다. 예전에 물어볼려고 시도한 적이 있는데 결과가 워낙 엉망이라 포기했다고 하더라. 

 

이론적으로 "life chance"는 계층론에서 베버리안의 핵심 컨셉이다. 평생소득의 대리변수로써의 직업은 사회학 계층론의 거두인 Hauser가 논문에서 주장하였고, Sociology of Education 편집장을 지낸 Rob Warren, 현재 스탠포드 교수인 Torche가 사회학과 경제학 계층론 비교 논문에서도 언급한 것이다. 베버리안 사회학 계층 구분(소위 EGP classes)의 창시자인 Goldthorpe도 그 주장을 명시적으로 하였다.

 

베버리안만 직업을 중시하는게 아니다. 맑시스트인 Wright의 계급구분도 기본이 직업이다. 뒤르켐 계급론이라 할 수 있는 Grusky & Weeden의 마이크로클래스는 베버리안이나 맑시스트보다 직업의 중요성을 더 강조한다. 베버리안처럼 life chance라는 개념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맑시스트는 묵시적으로 생애 내 계급의 연속성을 가정(그러니까 흙수저가 노력하면 재벌이 되는게 아니라고 전제)하고, 뒤르껨주의자도 세부직업이 객관적 경제적 조건 뿐만 아니라 생활양식, 이데올로기도 비슷한 Gemeinscahft(=공동체)와 같은 실제 계급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에서도 사회이동 논문의 절대 다수가 직업 이동을 연구한다. 

 

근데 정말 직업이 평생소득과 life chance의 더 나은 대리변수인지는 경험적으로 검증이 안되었다. 최근까지는 말이다. 며칠 전 온라인판이 올라온 European Sociological Review (ESR)에 출간된 논문에서 스웨덴 1940년대 출생자 전원의 평생 소득 세금 자료를 이용해서 검증을 해보니, 직업이나 계급보다 특정 시점의 연간소득이 평생소득의 대리변수로 더 잘 작동하더란다. 다만, 노동경력 초기와 말기에는 소득보다 직업이 평생 소득과 더 연관이 있다고. 광범위하게 공유된 사회학의 전제가 잘못되어 있었다.  

 

이 논문이 왜 중요하냐면, 논문의 출발점이 2018년에 미국 자료를 이용해 출간한 다른 논문에서 제기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사회학적 상식에 반기를 들었던 2018년 논문의 주장을 이론적 셋팅으로 삼고, 전국민의 평생 소득 기록이 있는 스웨덴 행정 자료로 검증해 보니 기본적으로 옳다는거다. 이 논문의 주저자가 바로~~ 

 

저도 안다. 후안무치한 자기 자랑인거. 

 

하지만 이 번 아니면 언제 이런 자랑 해보겠는가. ESR급 논문에서 제 주장을 검증하는걸 목적으로 삼고 그게 옳다고 결과를 제시하는건 이 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소득을 연구하는 사회학자들이 더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소득은 합리적 행위자의 생산성에 기반한 결정이라고 하기에는 훨씬 더 많은 사회적 요인들이 개입한다. 

 

 

Ps. Goldthorpe가 반박 논문 준비 중이라고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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