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은 소득의 누적이기 때문에 일국 내에서는 자산과 소득은 정의 상관관계를 가진다. 그렇다고 상관관계가 1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소득은 평균적으로 40대가 정점이지만, 자산은 60대가 더 많다. 

 

하지만 국가 간에 소득불평등과 자산불평등의 관계를 비교하면 둘은 정의 상관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아래 그래프는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최신호에 실린 Pfeffer & Waitkus 논문의 일부다. Luxembourg Wealth Study에서 가구별 소득과 자산 자료가 제대로 있는 13개 국가를 대상으로 자산과 소득의 상관관계를 본 것이다. (SK는 South Korea가 아니라 슬로바키아다.)

 

보다시피 미국을 제외하면 국가별 비교에서 자산과 소득불평등은 정의 상관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부의 상관관계다. 무려 -0.451이다. 소득과 자산 모두 불평등이 큰 미국이 예외적인 경우이다. 지니계수가 아니라 상위 5%의 소득과 자산 집중도로 봐도 마찬가지로 자산 집중도와 소득 집중도는 국가별 상관관계가 없다. 

 

이 결과의 함의는 소득불평등을 이해하는 논리로 자산불평등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은 다르다. 정책적으로도 두 불평등에 대한 접근이 달라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상황도 있다. 코로나 위기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자산불평등 증가를 감수하고 소득 보존에 중점을 둔 경우다. 

 

 

소득불평등과 자산불평등이 일치하지 않는건 국가 간 비교 뿐만 아니라, 일국 내 통시적 변화에서도 관찰된다. 한국이 그 사례의 하나이다.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 소득불평등은 상층에 속하는데, 자산불평등은 가장 낮은 편이다. 자산불평등은 소득불평등보다 측정이 어렵고 부정확한 경우가 많아서 다양한 소스로 유사한 결과가 나오는지 확인해보는게 필수다. UN의 자료를 보면 한국은 170여개 자산불평등 자료가 있는 국가 중에서 168위다. 스위스 크레댓 은행의 조사에서도 비슷하게 한국은 자산불평등이 낮다.

 

그 비결은 집 때문이다. 상당수의 가구가 자가를 보유하고 있고, 자가가 없더라도 전세에 산다. 전세는 집이 없어도 자산이 있다는 의미다. 다른 국가는 집이 없는 가구는 자산이 전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 거주와 관련해서 자산 축적을 강제하는 사회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자산불평등도 낮다. 

 

한국에서 자산 불평등이 가장 크게 증가한 시점은 김도균 교수의 학위 논문인 <한국 복지자본주의의 역사>에 따르면 1980년대다. 그런데 1980년대는 한국에서 국민 소득이 크게 증가하면서 동시에 소득불평등이 상당히 하락한 시기다. 한국의 소득불평등은 1990년대초까지 지속적으로 하락한다. 1990년대초가 한국 소득불평등의 최하점이다. 그 후 2009년까지 소득불평등이 20년 가까이 증가한다.

 

한국에서 소득불평등 증가가 가장 빨랐던 시기가 아시아 경제 위기를 겪었던 1990년대다. 그런데 이 시기는 한국에서 자산 불평등이 가장 크게 감소한 시기일 것이다. 노태우 정부의 부동산 공급으로 소득 대비 주택의 가격이 급격히 하락했고 동시에 전국적으로 집값이 올랐다. 중산층의 자가 소유가 늘었고, 집값이 전국적으로 상승했으니 자산 불평등은 감소하였다. 

 

자산 불평등의 변화가 감지하기 어려운 것은 최근의 변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2010년대 초반에 수도권 외 부동산 가격이 증가함녀서 자산 불평등이 감소하는데 그렇다고 느꼈던가? 최근 몇 년 강남 중심으로 집값이 증가하여 자산불평등이 늘어났을텐데, 올해 벌어지고 있는 강북, 경기, 부산 등의 부동산 가격 상승은 자산불평등을 낮추는 요인이다. 그래서 올해 자산 불평등이 감소하고 있다고 느끼는가? 

 

소득불평등과 자산불평등의 변화가 일치하지 않는게 어떤 동일한 정책의 양면적 결과인지 순수한 우연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둘은 다르다. 

 

이 경우 정책 목표는 자산이 아니라 소득에 맞춰져야 한다. 집값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과 같은 목표는 제시하지 않는게 나을 것이다. 자산의 중요성 증가가 문제라면, 고연령층 모두에게 기초연금을 지급하고 재산세를 높이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면 소득은 없는데 집 한 채가 전재산이라서 재산세 인상이 부당하다는 식의 저항도 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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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평등의 특이점 중 하나가 상위 50%에서의 불평등 보다는 하위 50%의 불평등이 더 증가했다는 것이다. 여러 번 얘기한 사실. 아래 그림은 요기서 포스팅했던 것. 

 

그런데 한국의 또 다른 변화 중 하나가 재분배에 대한 지지가 꾸준히 감소한다는거다. 아래 그래프는 KGSS의 일부 항목이다. 각 기술에 대해서 동의하는 응답자의 비율. 보다시피 불평등하다거나 불평등 문제가 심각하다는 응답, 정부가 불평등을 줄여야 한다는 응답이 줄었다.

 

이 항목들 뿐만 아니다. KGSS의 복지 관련 항목의 통시적 변화를 모두 체크해 봤는데 전반적인 복지 정책에 대한 지지가 감소 추세다. 

 

 

그런데 위에 언급한 두 경향이 사실은 연결되어 있다. Lupu & Pontusson의 2011년 논문에 따르면 상층에서의 불평등이 클 때 국가는 재분배에 사회정책에 더 신경을 쓰고, 하위 불평등이 클 때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중산층과 하층의 격차가 벌어지면, 중산층이 재분배를 오히려 덜 지지한다. 재분배해봤자 자신들에게 떨어질 몫이 없으니 어떤 면에서는 합리적 선택이다. 중산층과 하층의 격차가 벌어지면, 사람들이 자신들의 위치가 오히려 올라갔다고 느낀다.  

 

작년에 출간된 Condon & Wichowsky의 책에 따르면 똑같은 경제적 지위를 가지고 있더라도, 사고실험으로 상층과 자신을 비교하면 social spending을 더 지지하고, 상상만으로도 하층과 자신을 비교하면 재분배와 사회정책을 덜 지지하게 바뀐다. 

 

한국은 지난 30년간 중산층과 하층의 격차가 크게 벌어지고, 상층과 중산층의 격차를 상대적으로 별로 벌어지지 않았다. 중산층이 복지를 덜 지지하고 경제적으로 보수화될 객관적 조건이 형성되어 왔다. 

 

청년층에서 보수화가 더 진행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리라. 청년층이 경제적 처지가 더 궁핍해져서 화가 난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부모 세대가 중산층이라 실질 생활수준에서) 최하층으로 떨어지지 않은 대부분의 청년층과 궁핍화가 진행된 노인을 중심으로 한 빈곤층의 격차가 더 벌어졌기 때문에 보수화된 것이다. 일베가 약자를 찾아서 공격하고 조롱하는게 우연이 아니다. 

 

복지의 실질적 혜택을 받는 소득하층에게 돌아가는 파이를 늘리고 재분배를 촉진하기 위해, 하층의 처지가 얼마나 안좋은지 보여주는게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 재분배를 하면 마치 중산층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 하층에게 실질적으로 혜택이 가게끔 정책을 짜야만 한다. 

 

보수가 괜히 선별적 복지 강조하는게 아니다. 그렇게 강조해야 복지를 안할 수 있다. 또한 보수 신문들이 괜히 정용진의 일상을 시시콜콜 보도하는게 아니다. 그렇게 해야 최상층과 중산층의 심리적 거리를 좁혀서, 중산층이 복지보다는 상층에 심리적으로 동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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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am Tooze의 The Atlantic 칼럼. 칼럼이라기보다는 조만간 나올 책의 요약 본. 

 

투즈 글을 연속 소개하는데, 이 번 글은 정말 풍부한 새로운 정보를 담고 있다. 한국도 두 번 언급되고. 일독을 강력히 권한다. 

 

글의 핵심 내용은 2020년 3월의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임박한 경제위기를 미연방은행의 무제한 현금 공급으로 넘겼다는 것이다.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연방은행이 시장에 개입해 커다란 역할을 한게 인상적이다. 정부의 역할, 불평등, 민주주의 등등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 중에서도 불평등에 대해서 좀 얘기해보자.

 

무제한 현금 공급은 경제시스템의 붕괴를 막았고,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막았다. 일부에서는 기업을 지원하는 연방은행의 대처가 서민과는 무관하다고 불만이지만, 경제시스템의 붕괴는 2008년 경제 위기에서 목도했듯이 부자들에게는 자산가치의 하락을, 중산층 이하 모든 인구에게는 당장 먹고살 수입이 없어 빈곤층으로의 추락을 초래한다. 미국 연방은행의 조치가 한국과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세계 경제는 연결되어 있고, 세계 경제 신용은 달러를 위주로 돌아간다. 위 투즈의 칼럼에서도 한국이 두 번 언급된다. 미연방은행의 조치가 타국가의 안정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경제 붕괴가 부자의 자산가치 하락을 초래하는데, 이에 반대되는 무제한 현금 공급은 자산 가격의 폭등을 초래한다. 전세계적으로 자산불평등이 크게 증가했다. 한국도 당연히 예외가 아니다. 작년의 부동산 가격 폭동은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코로나의 또 다른 대응은 재난지원금이다. 연방은행의 무제한 현금 공급이 자산불평등을 늘렸지만, 재난지원 수표는 소득불평등을 줄였다. 미국에서 최근 4차 재난지원금 수표가 발행되기 시작했는데, 작년 3차례의 지원금이 자녀 1명 포함 3인 가족의 경우 가구 소득이 $120,000이하면 $8,900에 달한다. 미국의 중위소득이 $55,000 정도 되니까 중위 소득이 16% 오른 셈이다. 가구 소득이 빈곤선에 있으면 재난지원금만으로 소득이 무려 45% 오른다. 가구 소득 12만불 이상은 재난지원금 수령규모가 줄기 때문에 재난지원금의 소득불평등 완화효과가 상당히 크다. 

 

즉, 코로나 위기에 대한 미국의 통화, 재정 두 가지 대응조치는 경제 붕괴를 막아서 수많은 사람들의 위기를 막은 것에 더해, 자산불평등의 증가와 소득불평등의 감소를 동시에 초래했다. 한국은 재난지원금 지급을 망설이면서, 자산불평등은 증가하는데, 소득불평등은 감소하지 않는 결과를 낳았다. 

 

현재 위드코로나가 진행되고 있는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또 다른 현상은 일자리는 많은데 일할 사람은 부족한 labor shortage다. 이 현상에 대해서 David Autor가 NYT에 매우 훌륭한 칼럼을 썼다. 코로나로 삶의 의미를 재발견한 분들이 꽤 있는 듯하다. labor shortage는 임금과 서비스 가격의 인상, 고임금 피하기 위한 자동화 도입으로 인한 생산선 향상을 동시에 초래할 것이다. 

 

자산불평등과 소득불평등은 이 번 사례에서 봤듯이 반드시 같이 가는게 아니다. 국가 간 비교에서도 자산불평등과 소득불평등의 상관관계는 zero다. 소득불평등을 설명하는 원리로 자산불평등을 설명할 수 없다. 서민의 삶은 자산불평등보다는 소득불평등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자산불평등의 증가는 사회이동에 대한 박탈감을 초래한다. 부유층과 중산층 이하의 정치적 영향력 차이도 확대시키고. 

 

앞으로 세계는 두 불평등의 충돌에서 생기는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게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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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am Tooze의 가디언 칼럼

 

이재명이 충청에서 압승한 것을 두고 여러 분석이 있는데, 코로나 시대 문재인 정부의 대응방식에 대한 비판적 대안을 제시하는건 아이러니하게도 여당의 후보로 유력한 이재명. 

 

예전에 서울신문 인터뷰(기사는 요기, 전체 인터뷰는 요기)에서도 말한 적이 있는데, 한국은 2008년 세계적 경제위기 때의 대응과 이 번 코로나 위기의 대응이 매우 다른 국가다. 2008년 이명박 시절에는 위기에 대응해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돈을 쓴 국가 중 하나지만, 이 번 코로나 위기에는 상대적으로 돈을 가장 적게 쓴 국가다. 

 

아담 투즈의 칼럼에서도 나오듯 2008년의 세계경제 위기에서 전세계가 배운 것 중의 하나가 위기 때 정부의 역할 확대다. 상대적으로 많은 정부 예산을 투여한 국가의 경제 충격은 상대적으로 작았고, 돈을 아낀 국가의 경제적 충격은 상대적으로 컸다. 예산을 꽤 투자한 미국은 상대적으로 빨리 2008년 경제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유럽은 그러지 못했다. 

 

이 블로그에서 이명박 정부의 위기 대응에 상대적으로 후한 점수를 주는 이유다. 대운하나 4대강 사업 자체는 별로지만, 무슨 핑계를 써서라도 재정을 확충한 것은 2008년의 위기를 맞이한 이명박 정부의 적절한 대응이었다. 작은 정부를 기치로 내세웠던 이명박 정부가 재정지출 면에서 가장 큰 정부였다. 

 

정확한 원인이 무엇인지는 모르고, 우연의 일치일수도 있지만, 2008년에 재정을 확충한 직후부터 한국에서 1990년대초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던 소득 불평등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2010년대 초반에 한국 통계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불평등이 줄어드는걸로 통계가 나와서 통계청 공무원들이 당황한적도 있었다. 4대강이 그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고 했을 때 아무도 안믿긴 했지만. 

 

이 번 코로나 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락다운이라는 개인 자유를 크게 침해하는 조치가 취해졌고, 마스크가 강제되었고, 엄청난 자금이 풀렸다. 바야흐로 위기 대응 방식의 일대 전환이 일어났다. 작은 정부, 규제완화 등으로 문제를 해결하는게 아니라, 큰 정부로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방식이 전세계적으로 동시에 출현했다. 2008년 위기에서 시작된 큰정부를 통한 문제해결 방식이 코로나 위기로 세계화되었다고나 할지.

 

그런데 한국에서 문재인 정부는 2008년 이명박 정부의 대응방식도, 전세계가 그 때 배운 교훈도, 코로나 위기 다른 국가의 대응방식도 모두 잊거나 무시하고 재정건전성이라는 원칙에 충실했다. 홍남기 장관에게 무한 신뢰를 주었고, 자영업자에게 엄청난 고통을 초래했다. 불평등을 줄이고, 재정을 확충하고, 공동체적 가치를 고조시킬 수 있는 기회였지만, 적극적 조치를 취하는걸 꺼려했다. 한편으로는 방역의 성공 때문에 취할 수 있는 조치였지만, 당하는 사람에게는 고통스러운 조치였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세계적 변화의 조류와 일치하는 주문을 한 야당이나 진보가 없다. 대놓고 큰 정부, 재정의 적극적 역할을 주문하는 후보는 이재명 밖에 없는거 아닌지. 정책적 야당 역할은 여당에서만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창시절 3.1운동이 주변국가에 끼친 영향에 대한 교과서의 기술을 보면서도 무슨 말인지 몰랐다. 한 국가의 변화가 이상하리만큼 타국가의 변화, 세계사적 흐름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 메카니즘이 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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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익 논란을 두고 경기도판 인국공이라고 이낙연 전총리가 비난했단다. 전에도 한 번 언급했는데, 제가 한국 사회에 대해서 충격을 받은 두 사건이 하나는 용산참사고 다른 하나가 인국공 논란이다. 

 

시험 성적으로 줄세우는게 공정이라고 착각하는데, 미국에서 고용 차별의 기준을 세운 역사적 판결 중에 Griggs 대 Duke Power Co.라는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의 핵심 논란은 불필요하게 시험을 보는게 차별이라는 거다. 시험 성적으로 줄세워서 사람 뽑는, 한국에서 가장 공정하다는 방식이, 차별이라고 판결을 내린 사건이다. 

 

1955년부터 듀크 에너지 회사에서 고교 졸업장이 있는 사람은 임금이 높은 부서에 그렇지 않은 사람은 낮은 부서에 배치했다. 그리고 1965년부터는 IQ 검사를 실시해서, 시험 성적이 높은, 그러니까 IQ가 높은 사람은 고소득 부서로 옮기도록 조치했다. 당시 백인의 고교 졸업율이 흑인보다 2배 정도 높았고, IQ 검사도 흑인보다 백인이 높았다. 이 정책이 흑인을 차별하려는 "의도"는 없었고, 학력과 시험 성적이라는 동일한 잣대를 적용했지만, 결과적으로 흑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한국의 공정 논리라면 매우 필요한 기준일 것이다. 

 

그런데 미 대법원에서 이 행위가 차별로 판결이 났다. 

 

논리는 이렇다. 고교졸업장과 IQ 검사가 직무 수행에 필요하고 관련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인종간 격차를 낳는 학력과 시험 성적 적용은 차별행위로 민권법 위반이라는 것. 

 

인천국제공항공사의 보안요원을 정규직 전환할 때 직무 필요성이 명확하지 않은데 시험을 보고, 그 때문에 특정 학력이나 집단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면 그게 바로 차별이다. 때로는 시험보자는 주장이 바로 차별의 논리. 

 

인국공의 정규직 전환을 불공정으로 연결시키면 어쩌자는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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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 말 아니고, 이 칼럼(Quit the millennial bashing – generationalism is bad science)에 나오는 말. 

 

"세대 아이디어는 실제로는, 조직, 제도, 사회전체를 괴롭히는 병리적 문제를 손쉽게 설명하는, 현대판 뱀기름(주, 예전에 미국에서 만병통치약으로 팔리던 가짜약)이다. the idea of generations is really a modern form of snake oil –an easy way to explain the ills that plague organisations, institutions and society as a whole."

 

이런 글 보면 얼마 전에 제가 세대론은 마케팅용 컨셉이고 MZ 세대 개념을 뒷받침하는 사회과학적 진실은 없다고 했던 비판은 매우 온건한 표현인듯.  

 

어쨌든 요즘 미국 학계에서 세대론 비판하는 논문 (요기, 요기, 요기), , 성명서들이 계속 나오는 중이다. 

 

세대(내지는 코호트) 효과가 엄밀한 방법론을 적용했을 때, 순효과가 거의 없다는건 인구학하는 분들은 대부분 알고 있던 내용이다. 수 많은 연구들이 세대 효과는 연령 효과의 착시거나, 시대 효과의 착시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보여줬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이름을 붙인 세대론이 마치 무슨 시대를 이해하는 직관인양 통용된다. 

 

기존 연구를 봤을 때, 단순 코호트 기술이 아니라, 현재의 X세대, MZ세대와 같이 뭔가 질적 차이를 가진 집단으로써의 세대론이 정당화 될려면 두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1) 연령효과와 시대효과로 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 

 

APC 방법론이라고, 방법론적으로 실체적으로 수 많은 논쟁이 되었다. 세대는 연령과 시대의 조합이기 때문에 연령과 시대 효과로 부터 독립적인 세대 효과를 identify하기 매우 어렵다. 어떤 APC 방법론이 가장 좋은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연령과 시대 효과를 통제한 후에 독립적인 세대 효과를 산출해야 세대는 의미를 가진다. 

 

(2) 연속적 변화가 아니라, 단속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

 

앞의 포인트는 APC 방법론 들어본 분들은 모두 알텐데, 두 번째 포인트는 좀 더 설명할 필요가 있다. 매 해 새로운 birth cohort가 탄생하는데, 각 birth cohort별로 연속적 변화가 일어나면, 10년 코호트로 나누었을 때 두 코호트 간에 차이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이 차이가 MZ 세대와 같은 컨셉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산업화 세대, 민주화 세대, X세대, MZ세대만 나누어도 4개 변수다. 그런데 이렇게 세대를 나누지 않고 birth year 연속 변수를 쓰면 변수가 1개다. 1개 변수보다 4개 변수의 설명력이 높아야, 세대 변수가 유의하다. 그렇지 않으면 세대를 어떻게 나누더라도 세대는 유의미해진다.

 

예를 들어 60년대 태어나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86세대가 아니라, 88 올림픽을 20대에 겪은 1959-68년 사이 출생 세대가 진짜 세대라고 하면 뭐라 할건가. 이 세대와 2002년 월드컵을 20대에 겪은 1973-82년 출생자 간에 진짜 세대 격차가 존재한다. 그 다음 세대는 평창 올림픽을 20대에 겪은 1989-1998년 사이 출생자다. 즉, 세대는 올림픽이나 월드컵 개최 연도에 따라 결정된다. 86세대가 등장한 이유는 순전히 88 올림픽 때문이지 민주화 운동과 무관하다. 80년대에 대학 진학율이 30% 밖에 안되지만, 86세대가 하나의 세대가 되는 이유다. 문재인 정부에서 갑자기 세대론이 뜨고 90년대 출생자는 전과 다르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는 평창올림픽의 효과다. 86세대, X세대, MZ세대 모두 일관된 기준이 없지만, 월드컵/올림픽 세대론을 적용하면 한 가지 기준으로 현재의 세대론이 모두 규정된다. 86세대 이전은 모두 하나의 세대다. 앞으로 태어난 세대도 모두 하나의 세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코로나의 충격이 커서, 코로나 시대에 일본에서 개최된 2021년 올림픽도 세대 형성에 기여할 가능성이 있다. 과거와 달리 좀 더 세밀한 세대가 등장할 개연성이 높다. 평창 올림픽만 20대에 겪은 1989-1991년생, 평창과 도쿄를 모두 20대에 겪은 1992-98년생, 도쿄만 20대에 겪은 1999-2001년생으로 세대 등. 쓰다보니 이게 맞는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우야튼, 코호트의 연속적 변화로써 시대상이 변화하면 어떻게 규정해도 세대론은 유의미하게 통계적으로 분석된다. 세대론이 실제 유의할려면 연속적 변화가 아니라 단속적 변화라는 근거가 제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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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의 사회학

여성 인종 2021. 7. 30. 09:15

제가 지어낸 말 아니고 실제 사회학 학술 논문에 쓰인 용어. 1987년 BJS에 실린 학술 논문의 제목이 "Shame and Glory: A Sociology of Hair"다. 

 

안산 선수의 숏컷들 두고 성차별주의자들이 황당한 공격을 자행했는데, 이 기회에 털의 사회학을 간단히 소개하는 것도 좋을 듯.

 

영어로 hair가 머리카락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털을 의미. 머리카락은 그냥 hair, 수염과 온갖 얼굴에 난 털은 facial hair, 몸에 난 털은 body hair.  

 

털의 사회학은 저같이 노동시장 불평등 문제 연구하는 사람이 하는게 아니고 권력의 상징 문제, 몸의 지배 문제 같은걸 연구하는 분들이 주로 하는 분야다. 사회학보다는 인류학자들이 더 많이 알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털과 관련된 규범과 권력은 주로 여성의 문제였다. 헤밍웨이는 "그녀의 머리카락 없이 소녀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다"라고도 하였다. 그런데 아시아계 미국인 남성에 대해서 연구하다 보면 아주 가끔 털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소체, 소추 문제 뿐만 아니라 소털도 아시아계 남성의 남성성을 낮게 보는 이유 중 하나다. 털은 개인적이며 사회적이며, 털의 형태는 또한 권력적이다. 

 

BJS 논문을 쓴 Anthony Synnott는 털의 사회학을 3가지 차원의 대비로 분석했다. 특이하게 털은 장단이 항상 대비를 이룬다. 

 

(1) 남성 vs 여성: 여성의 털이 긴 곳은 남성은 짧고 (머리털), 여성의 털이 짧은 곳은 남성이 길다 (가슴털, 다리털). 

(2) 머리 vs 다른 몸: 남성과 여성의 대비에서 설명했듯, 머리가 길면 몸의 털은 짧고, 머리가 짧으면 몸의 털은 길다.

(3) 주류 vs 비주류: 주류의 털이 길면 비주류는 짧고, 비주류의 털이 길면 주류는 짧다. 남성이라도 헤비 메탈은 머리가 길고, 스킨헤드족은 극단적으로 머리가 짧다. 깔끔하게 머리 단정하게 깎은 히피가 있던가. 적당한 털길이에서 벗어나면 비주류나 이단이 된다. 

 

주류 백인 남성은, 길지 않은 머리, 말끔하게 면도한 얼굴, 길고 덟수룩한 가슴털이 norm이다. 요즘은 분야에 따라 면도한 얼굴이 아니라 멋있는 수염이 남성성의 상징이다. 아시아계 남성은 머리털은 따라할 수 있지만, 수염과 가슴털이 없어서 주류 남성성이 아니라 여성성에 가깝게 분류된다. 

 

그렇다고 가슴털이 항상 남성성의 상징인 것도 아니다. 보디빌딩, 휘트니스 같은 분야에서는 남성도 털 하나 없이 매끈한 몸을 가져야 한다. 근육 덩어리 자체를 드러낼 때는 털은 없어야 한다. 가장 남성성을 드러내는 대회에서, 남성도 왁싱을 한다. 

 

역사적으로 털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는 항상 그 사회 주류의 norm이 있었다. 한국사회 개화의 상징 중 하나가 단발령이 아니던가. 남성의 긴머리가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손으로 효지시야였던 시대가 가고, 사회 비주류의 상징이 되었다. 긴 털이 규범일 때는 짧은 털로 저항하고, 짧은 털이 규범일 때는 긴 털로 저항하는 형태가 역사적으로 여러 사회에 걸쳐서 발견된다. 

 

비주류의 털은 사회적으로 통제의 대상이 된다. 흑인 여성들이 자연스러운 머리가 아니라 백인처럼 곧게 핀 머리카락을 인위적으로 가지는게 요즘 가장 대표적으로 얘기되는 문화 권력에 의한 털의 지배다. 여성이 어떤 머리카락을 가져야 하는지는 항상 사회적 통제의 대상이었다. 

 

이 번 사태 역시 반사회적 성차별주의적 남성들이 자신의 이념대로 사회적 통제를 하려고 했던 시도 중 하나다. 

 

자유민주주의 얘기들 많이 하는데, "자유"는 신체의 자유가 출발점이다. 내 몸의 소유주는 나 자신이라는게 자유의 시작점, 근대의 출발이다. 

Posted by sov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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