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발표된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가 다음 대선 이전, 현정부의 재분배 정책을 평가할 수 있는 마지막 공식 불평등 지표다.  

 

아래 포스팅에서도 언급했듯이 2011년 이후 한국의 가처분소득 불평등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이런 전반적 추세선에서 볼 때 현정부의 재분배 정책이 과거와 다른 성과가 있는지 점검해보고자 한다. 가처분 소득은 시장소득에서 세금과 각종 부담금을 제외하고, 정부보조금을 포함하여 최종 가구소득을 계산한 것이다. 

 

 

 

아래 그래프는 가처분소득 50% 이하를 빈곤층, 50~150%를 중산층, 150% 이상을 상층으로 규정하고 2011년을 기준으로 각각의 비율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준다. 보다시피 중산층은 증가하였고, 빈곤층과 상층은 감소하였다. 문재인 정부 기간이나 그 이전이나 방향성의 차이는 없다. 다른 점은 변화의 정도이다. 

 

2012년부터 2016/17년까지 4.5년을 박근혜 정부 기간 (2016년과 17년의 단순평균), 그 이후 3.5년을 문재인 정부 기간으로 설정하여 비율 변화를 살펴보면, 문재인 정부 3.5년 동안 중산층은 57.9%에서 62.0%로 4.1%포인트 증가한다. 연간 대략 1.2%포인트씩 증가했다. 박근혜 정부 4.5년 기간동안 56.2%에서 57.9%로 전체 1.7%포인트, 연간으로는 0.4%포인트씩 증가했다. 문재인 정부의 중산층 증가 정도가 박근혜 정부보다 약 3배 높다.  

 

빈곤층은 박근혜 정부 4.5년 동안 18.3%에서 17.5%로 0.8%포인트 감소하여, 연간 0.2%포인트 정도 줄었는데, 문재인 정부 3.5년 동안에 다시 15.3%로 낮아져 2.2%포인트 감소하였다. 연간 0.6%포인트씩 줄었다. 박근혜 정부 대비 문재인 정부에서 3배 정도 빈곤층이 더 빨리 줄어들었다. 

문재인 정부 기간 동안 중산층이 증가하고 빈곤층은 줄었지만, 상층은 축소하였다. 박근혜 정부 기간동안, 상층은 25.5%에서 24.7%로 0.8%포인트만 줄었는데, 현 정부에서는 2.0%포인트가 줄었다. 상위 20% 언저리의 중상층이 불만을 가질만한 변화다. 

 

 

 

문재인 정부에서 중상층이 불만을 가질 수 있다는 증거는 소득 10분위별 가처분소득 상승율을 보면 더 명확히 드러난다. 아래 표는 소득분위별 두 정권의 연간 가처분소득 변화율이다. 

 

두 정권 모두에서 연간 가처분소득 상승률은 하위 분위가 상위 분위보다 높다. 두 정권 모두에서 불평등은 줄어들었다. 그런데 변화율에어 세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첫번째 차이는 연간 가처분 소득 상승율에서 6분위 이하는 문재인 정부가 박근혜 정부보다 높다. 아래 분위로 갈수록 그 차이가 더 크다. 즉, 문재인 정부 기간동안 하층의 소득이 박근혜 정부 기간동안 보다 더 급격히 늘었다. 

 

둘째, 중상층이라고 할 수 있는 7-9분위에서 문재인 정부의 연간 가처분 소득 상승률이 박근혜 정부보다 낮다. 중상층의 입장에서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보다 소득 증가율이 낮다. 공시적으로 하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낮을 뿐만 아니라, 통시적으로 박근혜 정부시절보다 문재인 정부 시절의 소득 증가율이 낮아졌다. 

 

셋째, 최상위 분위의 소득상승률은 박근혜 정부에서 연간 0.6%에 불과했지만, 문재인 정부에서는 2.4%로 높아졌다. 박근혜 정부 기간 동안 최상위층의 가처분소득은 그 절대액이 줄어들기도 했었다. 상위 10%의 입장에서는 박근혜 정부보다 문재인 정부가 더 살만했다. 

 

표 1. 소득분위별 박근혜, 문재인 정부의 연간 가처분소득 변화율

  박근혜 정부 
(2012-2016/17)
문재인 정부
(2016/17-2020)
격차
최하위 분위 5.9% 10.0% 4.1%p
2분위 4.7% 6.6% 2.0%p
3분위 4.4% 5.3% 0.8%p
4분위 4.2% 4.7% 0.5%p
5분위 4.0% 4.4% 0.4%p
6분위 3.7% 3.9% 0.2%p
7분위 3.6% 3.4% -0.2%p
8분위 3.5% 3.2% -0.3%p
9분위 3.3% 2.7% -0.7%p
최상위 분위 0.6% 2.4% 1.8%p

 

종합하면, 문재인 정부들어 전정권 대비 가처분 소득이 가장 크게 증가한 집단은 최하 2개 분위이고, 그 다음은 최상층이다. 3-6분위의 중간층과 중하층의 입장에서도 문재인 정부가 박근혜 정부보다 상대적으로 낫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7-9분위의 중상층은 문재인 정부에서 소득 증가율이 박근혜 정부보다 절대 증가율에서 낮아졌고, 상대적으로도 하층 뿐만 아니라 최상층 대비에서도 박근혜 정부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중상층이 여론지배층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현재의 문재인 정부에서 대한 언론의 극단적 반감은 중상층의 경제적 처지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강남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가장 크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집단도 이 계층이리라.  

 

 

 

불평등 관련해서 현정부가 처한 상황은 비록 상대적일지라도 중상층의 경제적 처지를 희생하며 불평등을 완화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보여준다. 빈곤층 축소, 불평등 약화라는 면에서 문재인 정부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객관적인 수치로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성과는 여론주도층인 중상층의 상대적 처지 악화 속에서 이루어졌다.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에 비해 세제헤택을 줄이지 않았다. 세금보다는 사회보장 부담금을 늘렸다. 아마 중상층의 반발을 염두에 둔 조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론의 지지를 얻는데는 실패했다. 부동산 가격 상승은 안그래도 소득 측면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중상층의 박탈감을 극대화했으리라. 코로나 정국이라는 위기를 맞이하여, 경제공동체 여론몰이를 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나마도 하지 않았다. 

 

 

 

Ps. 2021년의 지표도 위의 변화와 같은 방향을 보인다면, 소득재분배 측면에서 차후의 평가는 좋아지긴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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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 2021년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

 

며칠 전 2020년 가금복 결과가 발표되었다. 불평등이 크게 증가했다는 결과가 없어서인지, 언론에서 비중있게 보도하지는 않더라. 빚이 늘었다는 기사 정도만 나오고. 

 

통계청 결과에는 많은 정보가 있지만 두 가지 정도를 주의깊게 볼 필요가 있다. 

 

첫번째는 빈곤율의 변화다. 아래 그래프는 전반적인 소득 불평등 변화를 매우 잘 정리하여 보여준다. 처분가능소득의 지니계수, 5분위배율, 상대빈곤율은 모두 하락하고 있다. 시장소득의 불평등 감소가 없는 상태에서 처분가능소득의 불평등이 줄어든다는 점은 한국에서 세금과 재분배로 인한 불평등 감소 효과가 지속적으로 커지고 있다는 의미다. 재분배의 지니계수 감소 효과가 2011년에 0.03포인트에 불과했는데, 2020년에는 0.074포인트로 2배 이상 커졌다. 

 

코로나로 인한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소득불평등이 크게 증가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만, 18-65세 노동연령층만 보면 상황이 다르다. 크지는 않지만 시장소득 지니계수가 0.003포인트 증가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시장소득 지니계수가 커진 이유는 빈곤층의 증가 때문이다. 위 그래프에서 상대적 빈곤율이 2019년과 2020년에 급증하는걸 볼 수 있다. 그런데 빈곤층 증가 이유가 2019년과 2020년이 다르다. 이전 연도의 가금복 결과를 살펴보면, 2018-2019년의 빈곤층 증가는 주로 노인인구의 증가와 노인층의 빈곤율이 커졌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2020년에는 노인층의 빈곤율은 줄었다. 2020년의 빈곤층 증가는 노동연령층의 빈곤율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2020년에 코로나로 인해 노동연령층 가구 하층의 시장소득이 급감했음을 알 수 있다. 다행히도 재난지원금 등 정부의 재분배 정책으로 처분가능소득의 빈곤율은 줄어들었지만. 

 

빈곤율 추이에서 추정할 수 있는 또 한가지는 최저임금의 효과다. 최저임금이 급등한 2018년에는 노동연령층의 시장소득 빈곤율이 0.5%포인트 줄었다. 2018년의 0.2%포인트 빈곤율 증가는 순전히 노인층의 빈곤율 증가 때문이다. 하지만 최저임금 인상율이 낮아진 2019년에는 노인연령층 빈곤율이 0.3%포인트 증가하였고, 2020년에는 0.8%포인트 높아졌다. 최저임금 인상이 소득하층의 소득을 오히려 낮춘다면, 인상률이 높았던 2018년에는 노동연령층 가구의 빈곤율이 낮아지고, 인상률이 낮았던 2019년과 2020년에 빈곤율이 높아진 이유가 무엇인가?

 

앞으로 세금인상과 재분배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노동연령층 소득하층의 소득을 높일 수 있는 1차 분배 개선 정책 필요성이 증가할 것이다. 노인빈곤은 국민적 공감대를 끌어내기 쉽지만, 노동연령층의 빈곤은 나태의 결과라든가 본인의 선택의 결과라는 공격에 취약하다. 한국 빈곤과 불평등의 가장 큰 문제인 노인빈곤 해결에 자원을 더 투입하기 위해서 노동연령층 빈곤문제를 개선할 정책이 필요하다.  

 

소득 관련 한 가지 덧붙이자면, 가구주 연령대별로는 60대+를 제외하고 봤을 때, 2019년 대비 2020년에 30대의 소득증가율(4.8%)이 가장 높고, 그 다음은 20대(3.3%)다. 평균소득의 측면에서 40대가 가장 낮고, 그 다음이 50대. 중위소득으로 보면 50대가 가장 낮다.

 

 

 

 

두번째로 가금복 결과에서 자산불평등 변화도 상당히 흥미롭다. 아래 표는 소득 5분위별 자산보유액과 점유율의 변화다. 보다시피 소득 하위 20% 가구의 자산이 가장 크게 증가했고, 소득 상위 20%의 자산은 상대적으로 덜 증가했다. 그 결과 소득 상층의 자산 점유율은 줄어들고 소득 하층의 자산 점유율은 늘었다. 

 

경제적 불평등이 자산과 소득의 종합이라는 측면에서 소득 분위와 자산 증가율의 불일치는 경제적 자원의 분배가 더 좋아졌다는 의미다. 일부에서는 소득이 높아져봤자 소용없다는데 그거 아니다. 소득과 자산의 지위불일치는 경제적 역동성을 나타낸다. 자산 상위계층이 소득도 상층을 점유하면 계층이 공고화되지만, 양자가 불일치하면 계층 변화가 더 크다. 한국은 지난 10여년간 이러한 역동성이 지속적으로 커졌다. 

전년 대비 전반적인 자산불평등은 증가했는데, 그 이유는 자산 최상층의 점유율이 늘었기 때문이 아니다. 아래 표에서 보다시피 8분위와 9분위의 점유율이 늘었다. 부동산 가격 폭등은 최상층보다는 중상층의 자산을 늘렸다. 2018, 2019년에도 자산불평등이 증가했는데, 그 때는 최상층의 자산이 늘었다. 아이러니하게 들리겠지만, 자산불평등은 2020년이 아니라 그 전에 더 크게 증가했다. 한국은 중산층의 부동산 보유율이 높아서, 부동산에 의한 자산 불평등 증가는 중상층도 이득을 공유한다. 

 

 

 

Ps. 가구주 연령별로는 20대의 증가율이 가장 높고, 50대가 가장 낮은 편이다. 소득과 자산 모두 코로나 위기 상황에서 86세대가 더 큰 이득을 누리는 그런 결과는 없다. 

 

Pps. 가구주 연령별 순자산 보유 증가율이 39세 이하는 12.8%인데, 더 세분해서 30대와 20대이하를 나누면 전자는 13.6%, 후자는 18.6%다. 20대와 30대를 합친 숫자가 두 숫자의 중간이 아니라 그보다 크게 낮다. 이런게 통계의 착시인데, 그 이유는 틀림없이 20대 가구주의 급증일 것이다. 2020년에 20대 가구주가 왜 급증한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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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영 교수 칼럼: [열린세상] ‘개천용’ 학파 vs ‘대통영’ 학파/김종영 ‘서울대 10개 만들기’(예정) 저자

 

입시 기회균등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분들을 '개천용'학파로, 지방대를 키워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원하는 분들을 ‘대통영(대학통합네트워크를 위해 영혼을 끌어모은 사람)' 학파로 명명했다. 

 

"SKY 또는 인서울 대학의 독점을 유지한 채 그 좁은 자리에 계층이 낮은 학생들이 더 선발되거나 이들의 계층 이동을 돕는 정책을 제시하는 학파가 ‘개천용’(개천에서 용 나기) 학파다. ‘개천용지수’를 개발한 주병기 교수는 엘리트 대학에 농어촌·중소도시 학생들을 위한 ‘지역균형선발’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창환 교수는 엘리트 대학 입시에서 공정한 순서는 학생부종합전형, 정시전형, 논술전형이라고 밝혔다. ... 정의의 철학자들은 ‘개천용’ 학파가 개혁을 가장한 채 사악한 교육체제를 영속시키는 데 기여한다고 비판한다."

 

개천용 학파의 일원으로 제가 호출되었는데, 이건 그냥 오독이다. 

 

이 블로그 꾸준히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의 지론이 "기회균등 기획"의 한계다. 김종영 교수가 문제삼은 그 논문도 입시제도 아무리 바꿔봤자 기회균등은 달성하기 어렵다는 것이 주요 주장이다. 어떤 입시제도가 하위계층에 눈꼽만큼 유리한지 보여주는 것이 주요 목적이 아니다. 정책적으로 기회균등보다 결과평등에 초점을 맞추라는게 모든 논문과 그 동안 썼던 글들의 일관된 주장이다.  

 

"개혁을 가장한 채 사악한 교육체제를 영속시키는 데 기여"하는 학파로 누군가를 지칭하려면 적어도 주장의 내용을 알아야 한다. 주장의 내용도 모르고 험한 말로 비판만 하면 어쩌나.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기회균등이나 SKY 독점 권력 타파가 아니라 지방균형발전 측면에서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획으로 뭔가 질적으로 다른 정의로운 일이 벌어질 것으로 상상하는 이유는 이해하기 어렵다. 

 

우선 한국 사회의 변화를 회고해보자. 한국 사회에서 SKY의 독점이 과거보다 강화되었나? 포항공대(87년 첫 신입생), 카이스트(대학원 밖에 없다가 86년 첫 학부생 선발) 등 이공계 명문대가 생기고, 성균관대나 한양대, 가끔 경희대나 중앙대가 SKY를 앞서는 결과도 나오고 있지 않나? 입시 전형이 다양화되면서 "학력고사" 점수에 맞춰서 대학을 가던 시절에 비해 각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의 선별성(selectivity)이 과거보다 적어도 집중화 완화라는 측면에서 평등화되지 않았나? 통계적으로 각 대학 진학자 수능시험의 분산이 과거보다 커졌을 것 같은데 말이다. 교수 임용에서도 서울대 출신 집중이 줄어들고, 여러 상위권 대학으로 확대되었다. 과거보다 상위권 대학의 경쟁이 치열해졌다. SKY가 아니라, 상위 10개 대학 정도로 경쟁이 확대되었다. 

 

그래서 정의로워졌나?

 

SKY에서 서울 소재 10개 대학으로 경쟁이 확대되는건 "개혁을 가장한 채 사악한 교육체제를 영속"시키는 것인데, 지방 국공립대 10개를 명문대로 만들어 경쟁을 확대하는건 왜 "개혁을 가장한 채 사악한 교육체제를 영속"시키는 것이 아닌가? 

 

서울대가 10개가 되면, 이 10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학생들은 이 체제를 정의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서울대 정원이 약 3천명인데, 10개면 3만명이다. 다음 정부 정책이 한참 실현될 2025년에 대학에 입학할 2007년생의 총출생아수가 약 50만명이다. 열 개 서울대에 진학하는 인원은 학력 상위 6%다. 상위 6%가 "서울대"를 나오면 정의로운 사회인가? 서울에 있는 기존 명문대까지 합치면, 한 10% 정도가 명문대 출신이 된다. 나머지 90%는 어쩌라는건가?

 

아마,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지방대 육성이라 차원이 다르다고 할 것이다. 의대가 인기를 끌면서 지방의대의 인기가 크게 높아졌다. 지방의대가 서울대 이공계 전공보다 경쟁률이 더 높다. 그래서 의대는 유독 정의로워졌나? 의대는 지방대의 위상이 높아져도 중상층의 이익강화로 귀결되지만, 다른 전공은 아닌가? 그렇게 예측하는 근거는 뭔가? 과거에 부산대, 경북대, 전남대가 지금보다 훨씬 더 명문대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그 때는 "사악한 교육체제"가 아니었나? 그 때 서울대의 위상이 지금보다 낮았나? 

 

굳이 예측해 본다면,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중상층의 자기 이익 챙기기 프로젝트로 변질될 것이다. 명문대 진학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최상층은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원래 풍부하고, 해외유학 등 다른 출구를 모색하는데 반해, 중상층은 수시확대의 혜택도 못받는 등 자기 자리가 위협받으니, 자신들의 기회를 확충하기 위해서 생각해낼 수 있는 기획이다. 그런 면에서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상위 1%가 아닌 상위 10%의 이익챙기기 프로젝트로 변화할 것이다. 

 

미국에서 리차드 리브스가 쓴 Opportunity Hoarding이라는 책이 있다 (요기서 소개). 상위 1%가 아니라 상위 10%가 어떻게 자기 이익 챙기기를 하는지 비판한 책이다. 한국의 상위 10%라고 다르지 않다. 상위 10%는 상위 1%와 자신을 차별화하며 희생자 코스프레를 하고,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를 도모한다. 다만 미국과 한국의 처한 상황이 다르니 대응이 다를 뿐이다. 이게 김종영 교수가 언급한 논문에서 제가 말한 "적응의 법칙"이다. 대학입시 제도 변화에 따른 상위계층 적응의 법칙이 서울대 10개 만들기에서 갑자기 멈출 이유가 뭔가? 

 

지역 균형 발전의 측면에서, 수도권 집중 완화 정책의 일환으로 지방대 육성은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걸 기회균등 정책을 넘어선 뭔가 대단히 정의로운 일로 착각하지는 마시라. 지방대 10개 육성도 기회균등 기획의 일부이다. 서울대에서 SKY로, SKY에서 서울 소재 10개 명문대로, 서울소재 명문대에서 지방포함 명문대로, 명문대의 범위만 바꾸는 마이크로 칼리브레이션이다. 이런 걸로 세상 좋아지는 정도가, 적어도 평등을 촉진하는 측면에서, 미미하다는 것이 저의 주장이다. 

 

저의 지론을 다시 한 번 반복하자면, 기회균등 기획은 (법적 명시적 차별을 시정하는 것 외에) 지금까지 성공한 케이스가 없다. 지방대 육성은 지방발전 차원에서 고려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뭔가 다른 기회균등이나 결과 평등을 가져오지 못한다. 기회균등 프로젝트보다는 결과의 불평등을 축소시키는 기획이 훨씬 더 쉽고, 타 국가의 사례를 봤을 때 성공적이었다.  

 

 

 

Ps. 그렇다고 기회균등 기획 모두 폐기하라는 얘기 아니다. 정책의 중심은 결과평등에 맞추어야 한다는거지. 

 

Pps. 제가 관련이 있다면, '개천용'학파가 아니라, 충남 계룡에 기반한 '계룡"학파 아닐까 싶다. 모 교수님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계룡대가 짱이라 서울대가 필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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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대 간 불평등 문제에 대한 이해가 좋아지면서, 슬슬 청년 세대 내 계급 문제로 이슈가 전환되는 것 같다. 얼룩소에 올라온 계급의 재발견도 그런 변화 조짐의 하나일 것. 

 

각 세대 내에서 불평등이 있다는 건 뉴스가 아니다. 세상에 안 그런적이 어디있었나. 항상 같은 세대 내에 상당히 큰 불평등이 존재하지. 진짜 질문은 청년 세대 내 불평등이 시계열적으로 더 커졌는지, 다른 연령대와 비교해서 다르게 변화했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아래 표는 앞으로 발간될 것으로 기대하는 책에 실릴 챕터의 일부이다 (2019년에 썼는데 아직도...). 영어책이라 별로 보는 분들이 없을텐데, 청년 세대 내 불평등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요즘, 한 번쯤 소개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가구단위 자료인 가계동향조사 자료를 개인단위 자료로 전환해서 노동시장에 있는 인구의 세대 내 불평등 변화를 추적한 것이다. 

 

<표 1> 연령대별 세대 내 개인소득 불평등 변화 (타일 인덱스)

  2006-2010 2011-2015 2016-2019 변화
18-29 .159 .158 .175 +.016
30대 .191 .149 .145 -.046
40대 .248 .223 .198 -.050
50대 .312 .279 .258 -.054
60대  .370 .330 .305 -.065

다른 모든 연령대는 세대 내 불평등이 줄어드는데 18-29세에서만 늘어나고 있다. 그럼 계급의 재발견이 확인된 것?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아래 표는 학력별로 나누어서 청년층 내부의 불평등 변화를 살펴본 것이다. 각 학력 내에서는 청년 층 내부의 불평등이 줄었다. <표1>에서 나타난 18-29세 청년층의 내부 불평등 증가는 고졸이하와 대졸이상의 격차 증대 때문이다. 대학 나와도 소용없다고 주장하신 분들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고졸대비 대학 졸업의 상대적 경제 가치는 청년층에서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커졌으면 커졌지. 

 

<표 2> 청년층 (18-29세) 내부 학력별 개인소득 불평등 변화, 고졸 이하 학력자 vs. 대졸 이상 학력자 (타일 인덱스)

  2006-2010 2011-2015 2016-2019 변화
고졸 이하 .163 .146 .150 -.013
대졸 이상 .141 .112 .102 -.039

 

그런데 문제가 더 복잡한게 이게 또 스토리의 전부가 아니다. 개인소득이 아니라 가구 균등화 소득으로 보면 20대 청년층 내부에서 불평등이 더 커지는 경향이 없다. 가구 균등화 소득이 삶의 질을 나타낸다고 봤을 때, 생활의 퀄러티 면에서 20대 청년층에서 다른 세대보다 딱히 더 균열이 심해지는 조짐이 없다. 2006-10년 대비 2016-19년의 변화가 0.0이다. 둘이 똑같다. 20대 청년층 내부의 개인소득 불평등은 커졌지만, 부모 세대의 내부 불평등이 줄어들면서 청년층 그 혜택을 봐서, 균등화소득 측면에서 불평등이 증가하지 않았다. 

 

문제는 노동시장에서 벌어들이는 개인 소득 불평등의 증가, 특히 학력에 따른 격차 증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다. 한 가지 실마리는 18-29세가 아니라 25-29세로 청년층의 범위를 좁혀서 보면 개인 소득의 측면에서도 청년층 내부의 계층 격차가 벌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아래 표는 변수용 선생과 같이 작업한 <교육 프리미엄>책에 실린 <표 5.3>의 일부이다. 시기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보다시피 25-29세 전체의 내부 불평등은 지난 10년간 줄어들었다. 

 

<표 3> 개인소득 타일 불평등 지수 변화, 25-29세

  2009-10 2014-15 2018-19 변화
25-29 .113 .120 .100 -.014

 

그러니까, 청년층의 개인소득 불평등 증가는 (1) 20대 초반과 20대 후반의 격차 증대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노동시장 활동을 시작하는 20대 후반만 보면 내부 불평등은 오히려 줄었다. (2) 20대 초반과 후반의 격차 증대는 고졸이하 학력과 대학이상 학력의 격차 증가와 일치한다. (3) 개인소득이 아닌 삶의 질을 나타내는 가구 균등화 소득으로 보면 청년층 내부에서 계층 격차가 확대되는 경향은 보이지 않는다. 

 

이상을 종합하면 학업을 이수하지 않은 20대 초반 청년층의 개인 소득이 줄어든게 변화의 핵심이다. 그 이유가 대부분의 청년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20대 초반에 노동시간 공급이 줄어들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20대 초반 숙련형성 이전 저학력 노동자의 소득이 낮아졌기 때문인지는 명확하지는 않다. 20대 후반에서 청년 내부 불평등이 줄어든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전자의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하지만, 구체적인 확인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 계급의 재발견, 청년 내부의 불평등도 좀 세밀히 들여다봐야 한다. 현실은 늘상 그렇듯 한 두 가지 구호로 정리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특히 청년 문제는 가족 구성 문제, 학력변화 문제까지 얽혀있어 더욱 복잡하다.  

 

 

Ps. 시대별 변화와 세대 내 시대별 변화가 불일치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에 둘이 일치한다. 불일치 현상이 나타나면 자세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복잡한 연구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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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w: What Makes Life Meaningful? Views From 17 Advanced Economies

 

다들 한마디씩 한 조사 결과. 처음에 이 결과를 보고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우선 질문하는 내용이 모호하다. "삶을 의미있거나 (meaningful), 충만하거나(fulfilling), 만족스럽게(satisfying) 만드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물었다.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걸(life meaning) 독립변수로 설정하고 종속변수인 삶의 만족도(life satisfaction)에 끼치는 영향을 파악한 연구는 봤어도, 이 모든걸 같은 질문항목으로 한꺼번에 물어보는 조사는 처음봤다. 이런 조사에서 나온 답변의 의미가 무엇인지,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모르겠더라.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요인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물어도 되는건가? 개방형 질문을 한건데, 심층적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 이렇게 한건지, 물어보는 내용이 모호하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버린건지. 아니면 뭔가 다른 기법이 있는건지. 

 

그것도 아니면, 마케팅 조사에서 사용하는 unaided awareness recall의 의미로 받아들여서 각 국가의 사람들이 얼마나 삶의 의미와 만족도에서 대해서 생각하며 사는지 awareness를 파악하는걸로 봐야하는지. 

 

여러 의견을 봤지만, 그 중 마지막 의미인 awareness로 해석한 것이 "오하이오의 낚시꾼"님의 페북 포스팅이다. 

 

여전히 남는 문제는 한국은 어쨌든간에 물질적 항목에 대한 응답이 다른 국가보다 비율적으로 높다는 점이다. 응답의 갯수가 많지 않을 때, 다른 무엇보다 물질적 요인을 첫번째로 꼽는다는건 뭔가 한국의 다른 특성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려웠다. 다른 국가와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그래도 뭔가 한국적 특색을 드러내는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더라. 

 

이걸 설명하기 어려우니까, 많이들 하는 얘기가 이런 서베이는 국가 간에 비교해서는 안된다는 무용론이다. 문제가 있다는건 알겠는데, 그래도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래서 항목들을 다시 묶어봤다. 퓨 리서치의 전체 보고서를 보면 물질적 항목의 풀네임은 "material well-being, stability, and quality of life"다. 제가 주목한 것은 이 항목이 한국에서 retirement나 occupation and career와 구분되지 않고 얘기되었을 가능성이다. 퓨 리서치의 전체 보고서를 보면 비록 (not just having money)와 다르다고 표시되어 있지만, earning money가 occupation & career로 material well-being, stability, and quality of life와 다르게 분류되어 있다. 과연 한국인들이 이 둘을 구분했을까? 

 

마찬가지로 가족, 배우자, 친구, 애완동물도 모두 관계의 문제라고 보고 하나로 묶었다. 건강과 Covid도 하나로 묶고, 여행은 취미에 포함해서 하나의 카테고리로 만들었다. 

 

그런데 퓨 리서치 결과를 보면 특이한 두 개 항목이 있는데, 하나는 general positive고 다른 하나는 general negative다. 후자는 웹 보고서에는 Challenges로 분류되어 있어서 마치 인생의 여러 도전을 즐긴다는 느낌을 주지만, 전체 보고서를 보면 그냥 모호하게 "아무것도 의미없다" "만족감을 못느낀다"와 같이 인생이 뭐같다고 얘기하는거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모호한 응답을 묶었다. 

 

여기서 묶는다는건 단순 합을 낸다는 것이다. 원자료가 없기 때문에 코딩을 다시 할 수는 없고, 가족, 친구를 모두 응답했으면 양자의 %를 단순히 더하였다. 그 다음에 전체 응답 %의 단순합으로 각 항목별 응답 %를 나누어서 상대적 분포를 봤다. 그랬더니 결과가 아래와 같다. 짙은 분홍색이 1위 응답이고, 옅은 분홍색이 2위 응답이다. 옅은 녹색은 다른 국가와 달리 특이하게 응답 비중이 높은 항목이다. 

 

국가 평균
응답수
material
+career
+retire
family
+friends
+pets
health
+covid
society
+civic
religion hobby
+travel
general
negative/
positive
others
미국 3.1 16% 34% 7% 9% 6% 6% 8% 14%
캐나다 2.2 25% 34% 8% 10% 1% 6% 6% 9%
벨기에 2.3 24% 29% 13% 7% 0% 6% 10% 10%
프랑스 1.8 25% 28% 14% 5% 1% 8% 11% 8%
독일 2.0 23% 28% 15% 4% 1% 4% 14% 10%
그리스 1.9 21% 40% 12% 4% 1% 9% 6% 7%
이태리 2.5 31% 29% 11% 9% 1% 4% 10% 5%
네델란드 2.5 25% 31% 17% 9% 1% 5% 6% 6%
스페인 2.5 33% 21% 20% 9% 1% 4% 7% 5%
스웨덴 2.6 25% 31% 12% 7% 0% 8% 6% 10%
영국 2.1 17% 40% 9% 4% 1% 13% 5% 12%
호주 2.6 22% 37% 6% 10% 2% 9% 4% 10%
일본 1.4 24% 28% 12% 5% 0% 8% 15% 8%
뉴질랜드 2.4 22% 38% 6% 10% 2% 9% 4% 10%
싱가폴 1.8 29% 24% 7% 17% 1% 3% 12% 7%
한국 1.2 23% 18% 16% 8% 1% 3% 23% 9%
대만 1.7 20% 15% 8% 28% 1% 7% 8% 13%

 

보다시피 대부분의 국가에서 가족+배우자+친구+애완동물 등 친밀한 관계가 1위이고, 그 다음이 물질적 웰빙, 직업/경력, 은퇴 등 경제적 만족도다. 한국은 친밀한 관계보다 물질적 항목이 더 중요한 4개 국가 중에 하나지만, 한국만 너무나 특이하게 물질적 만족도에 집중되었다고 얘기하기 어렵다. 

 

한국의 가장 특이한 점은 삶의 의미, 충족도, 만족의 요소를 물어봤는데도, 구체적 내용없이 "사는게 힘들다", "사는게 좋다" 등으로 응답하는 모호한 응답이 매우 높다는 사실이다. 답변을 거부한 응답자를 제외하고 응답자 중에서 평균 응답 항목이 1.2개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항목을 답변하지 못했다. 

 

응답갯수로 이 조사의 결과는 한국인은 삶의 의미나 만족을 주는 항목에 대한 사고 자체가 없다고 추정한 오하이오의 낚시꾼님의 분석을 실제 응답 비율로 뒷받침하는 결과라 할 수 있다. 

 

이 응답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한국의 특징은 "가족, 친구, 배우자"와 "사회, 공동체, 시민적 참여'를 합친 뭔가 공동체적인 항목의 응답이 눈에 띄게 낮다는 점이다. 두 항목의 합이 조사 대상 국가의 평균이 39%고, 한국을 제외한 최하 30%(스페인), 최고 47%(뉴질랜드)인데, 한국만 26%로 20%대다. 

 

한국인은 다른 국가의 시민들보다 삶의 의미를 주는 요인을 찾지를 못하고 있고, 설사 찾는다 할지라도 공동체적 요인의 중요성이 다른 국가보다 낮은게 이 번 조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국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Ps. 굳이 찾는다면 그렇다는 얘기다. 여전히 이런 복합적 질문이 서베이 항목으로 적절한지, 국가 간 비교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잘 모르겠다. 

 

Pps. Pew Research에 이메일이라도 보내야 하는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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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호 교수, 교수신문 칼럼

"진정 과도한 비난 받아야 할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철학연구회입니다. 학문적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함량 미달의 저질 텍스트에 학문의 권위를 부여하고, 그를 통해 ‘보이루’라는 표현의 의미에 대한 윤지선의 근거 없는 주장이, ‘한남충’이나 ‘한남유충’과 같은 혐오표현이 학문적 활동이라는 미명 하에서 유포되고 전파되는 결과를 초래한 책임이 바로 철학연구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 윤지선 박사의 논문이 『철학 연구』의 심사를 통과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가 이끌어내야 할 교훈은 『철학 연구』의 심사 절차 자체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연구회"의 심사 절차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데, 어떤 결함이 있다는건지? 한국 학술지의 심사 절차는 거의 똑같지 않은가? 철학연구회는 뭔가 다른 절차를 채택하고 있나? 그렇다면 그 절차가 무엇인지 명시적으로 짚어줘야 하지 않나? 

 

이런 논문이 나오면 (하도 유명해서 저도 훑어는 봤다) 그 책임은 "철학연구회"가 아니고, 논문 심사 당시의 『철학 연구』 편집장이 져야하지만 대부분의 학회 규정에 따르면 편집장도 아무 책임이 없다. 한국에서 학술지 편집장은 행정직원에 가깝지 논문의 가치를 판단하지 않는다. 리뷰어들이 잘못한거지만, 그렇다고 리뷰어 탓을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엉터리 논문이 나와도 책임질 주체가 분명하지 않다. 최대한 문제삼으면 좋은 리뷰어를 구하지 못한 편집자 탓이겠지만, 권한은 없고 책임만 지라는 꼴이 된다. 리뷰어 구하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이 문제의 재발 방지책과 책임을 생각한다면, 한국 학계 논문 심사 방식의 기계적 결정 과정을 문제 삼아야 한다. 아래는 <한국사회학>지의 판정 기준이다. 학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논문이 아무리 수준 이하라도 두 명의 리뷰어가 "수정게재" 의견을 내면 논문은 대부분의 경우에 나온다. 두 명의 리뷰어가 "수정게재" 이상의 의견을 냈고 그에 맞춰 수정했는데도, 논문이 근본적으로 수준 이하라서 싣지 않으려면, 편집자가 학회 판정 기준을 무시하고 월권을 행사하는 무리수를 둬야 한다. 그런 분이 없는건 아니다. 직접 보기도 했다. 하지만 매우 드물다.  

 

철학연구회의 절차에 문제가 있다면, 논문이 함량 미달일 때 학회 판정 기준을 무시하고 월권을 행사하는 무리수를 둘 편집장을 선출하지 못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제출만 하면 다 실어줘서 실제로는 심사라는게 없다는건가? 도의적 책임이라는 실체가 모호한 책임으로는 철학연구회를 비난할 수 있겠지만, 연구회라는 조직이 구체적으로 뭘 잘못했는지는 최성호 교수의 글을 읽어봐도 잘 모르겠다. 

 

 

예전부터 한 번 얘기하고 싶었는데, 한국학술지의 판정표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방식은 편집장의 자의성을 배제하지만, 동시에 학술지 편집장을 맡은 경험많은 학자의 판단을 무력화시킨다. 잘못된 논문이 게재되었을 때의 책임소재도 없애버린다. 저는 윤지선 논문 사건을 이러한 제도적 문제의 산물로 이해한다. 이런 문제를 막는 한 가지 방법은 학술지 편집장에서 권한을 주고 잘못되었을 때 책임을 묻는 것이다. 

 

미국학회지들은 편집장이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리뷰어들의 판단이 중요하지만, 최종 판단은 편집장의 몫이다. 리뷰어들이 조금 비판적이어도 편집장이 논문을 수용할 수도 있고, 2명이 긍정적으로 평가해도, 비판적인 1명의 논리가 타당하면 편집장이 리젝 결정을 내린다. 극단적인 예로, 예전에 Sociology of Education 제출 논문을 리뷰했는데, 저를 포함한 3명의 리뷰어가 모두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논문의 방법론이나 논지가 아니라 연구 주제 자체가 올드하고 발전 가능성과 추가적 기여도가 없다고 편집장 본인이 나서서 장장 5쪽에 걸쳐 해당 주제의 논쟁사를 빽빽히 개괄하면서 평가결정문을 써서 리젝하는걸 본 적이 있다. 진짜 놀랐다. 이 분야는 자신이 최고 전문가라는 그 자신감에 혀를 내둘렀다.

 

물론 이런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편집장의 자의적 판단이 과도한 경우도 상당히 많다 (개인적으로 억울한 감정이 드는 경우도 몇 번 당해봤다). Social Science Research라고 사회학에서 꽤 괜찮은 학술지가 있는데, 여기서 Mark Regnerus라는 학자의 2012년 논문이 크게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동성 커플의 자녀교육을 문제삼는 내용으로 언론에도 대서특필되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자료도 이상하고 논문 심사 과정도 황당했던 것. 미사회학회에서 유명했던 사건이다. 이 문제로 난리가 나서 SSR의 논문 리뷰 과정이 audit을 받았고, 1978년 부터 2014년까지 무려 36년간 이 저널 편집장을 맡은 저명학자이자 고인물 중의 고인물 James Wright 교수는 연구윤리를 위반했다고 사임 요구까지 받았다. 2019년에 돌아가셨으니, 커리어에서 이 논문 사건이 최대 오점이리라.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의 권한은 "명성"에 근거해 주어질 수 밖에 없다. 학문은 동료평가 외의 다른 외부평가가 불가능한데, 동료 간에는 명시적인 위계가 없다. 편집장으로 엉터리 판단을 자꾸 내리면 자신의 명성을 스스로 갉아먹는다.  

 

엉터리 논문의 출간을 절대적으로 막을 수 있는 시스템은 없다. 리뷰어의 1차 판단과, 이를 종합한 편집장의 최종 판단, 두 단계 시스템을 도입하는게 그나마 낫다고 생각한다. 편집장의 자의적 판단이 걱정이라면 문제의 소지가 있는 논문은 편집장과 편집위원 2인 이상이 추가로 판단하게 하는 방식도 있다. 어떤 형식이든 엉터리 논문 게재의 책임은 편집장이 지게끔 시스템을 만드는게 낫지 않을지. 

 

조직에서 절차의 합리성을 최대한으로 추구하면 그 조직이 추구하는 실체적 합리성에 문제가 생긴다. 어떤 절차도 완벽할 수 없다. 자의적 판단 영역을 배제하는 극단적 객관화는 정형화하기 힘든 새로운 문제 해결의 효율성을 감소시킨다. 베버가 혁신을 막는 아이런케이지라고 비판한 관료제는 가장 효율적 조직 형태라는걸 잊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얘기하지만, 어쩌면 한국의 시스템은 학문적 명성이라는 묵시적 위계의 부재에서 생겨난 문제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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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din. 2021. <Career & Family>. Princeton Univ Press. 

 

한국어로는 <커리어 그리고 가정>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여러 언론에도 소개되었고 (예를 들어 한겨레). 미국의 발매 일자가 10월12일이었는데, 한국에서 번역판이 10월12일 같은 날짜에 나왔다. 사회학과 경제학을 모두 공부하고, 언론사에 있었던 김승진 선생이 번역했으니 번역도 훌륭할 것으로 기대한다.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 책에 대해서 독후감을 남긴다. 

 

하나는 형식이다. 누구의 도움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경제"학자"가 쓴 책이 아니다. 내용은 당연히 골딘의 것이지만, 형식은 대중서를 작성하는 전문가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것에 틀림없다. 에필로그를 포함한 본문 237페이지에 인용이 하나도 없다. 논문 형식으로 괄호 안에 참고문헌이 없는 정도가 아니다. 아예 각주도 없다. 대신 "Notes"라는 책 말미에 붙은 appendix에 각 페이지와 그 페이지의 문장을 볼드체로 소개하고, 각주를 달듯이 참고문헌과 추가 설명을 기재하였다. 

 

글의 소스를 확인하려면, (1) Notes에서 쪽번호를 찾고, (2) 확인하려는 본문 내용의 문장을 찾은 뒤, (3) Notes의 내용을 읽어서, 예를 들어, (Goldin, 2014)를 확인한 후, (4) References에 가야 한다. 그래야 최종적으로 원소스 논문을 찾을 수 있다. 본문에서 제시된 테이블이나 그림의 소스를 확인하려면, Figures and Tables Appendix를 찾아본 후, Source Appendix를 또 찾아봐야 한다. 

 

본문의 소스를 확인하는 학문적 글읽기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학술 논문 쓰기에 익숙한 학자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형식이다. 하지만 학문적 글읽기가 아니라 책 전체의 논지를 쫓아가는게 주목적인 글읽기를 하는 분들에게는 문장이 끊기거나 각주를 왔다갔다할 필요없이 매끄럽게 글을 읽을 수 있는 매력적인 형식이다. 

 

책은 이보다 더 쉬울 수 없을 만큼 쉽게 썼다. 예를 들어 직업분리(occupational segregation) 개념을 자세히 설명한다. 저에게 이 개념을 설명하라고 하면 두 줄 정도 쓸 것 같다. 최대한 길게 쓰면 두 문단 정도 쓰고. 그 이상 설명하라고 하면, segregation index 공식을 쓸 것 같다. 하지만 골딘은 이 개념을 두 쪽에 걸쳐서 설명하고 또 설명한다. 

 

책 전체에 걸쳐서 비슷한 얘기를 여러 번 반복한다. 머리 속에 안들어올래야 안들어올 수가 없다. 처음에는 책을 읽다가 237쪽이 아니라 100쪽 내외의 팜플렛을 만들 내용을 뻥튀기했다는 생각이 들더라. 자고로 대중서는 이렇게 써야한다는것, 그리고 이게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걸 동시에 배웠다. 자기 전문 분야에 빠져있으면 어떤 개념은 자세히 설명해야하고, 어떤 개념은 그럴 필요가 없는지 감이 없어진다. 전문용어인 아카데믹 쟈곤이 제일 편한 언어가 된다. 이 책은 그렇지 않다. 전문 대중 아케데믹 서적 편집자가 상세히 읽고 코치를 해준 듯 하다.  

 

이 책을 소개하는 다른 하나의 이유는 당연히 내용이다. 골딘의 논문을 평소에 읽던 분들이 이 책에서 뭔가 새로 배울 내용은 거의 없다. 골딘의 1990년대 후반 작업과 2010년대 작업을 같이 엮은 책이다. 했던 얘기를 저널리스틱하게 또했다.

 

그런데 골딘이 30년에 걸쳐서, 그 중 10년 정도는 작업을 중단해서 불연속성을 가지는 여성의 커리어에 대한 별도의 논문들을 하나의 거대 서사로 엮었다. 한국으로 치면 은퇴하면서 논문집을 내는데, 이걸 논문들의 단순 묶음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수미일관된 이야기가 있는 드라마틱한 서사로 재탄생시킨거다. 공식과 숫자로 들어찬 경제학 논문을 서사로 가득한 스토리 텔링으로 재탄생시켰다. 

 

어제 올렸던 사회과학과 사회과학 저널리즘의 구분을 적용하자면, 이 책은 경제학 전문가가 대중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 경제학자가 아닌 경제학 저널리스트로써 쓴 책이다. 매우 잘쓴 책이다. 일생에 걸친 골딘의 경제학 업적에 강력한 스토리 텔링을 얹은 사화과학 저널리즘의 끝판왕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책이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원천은 골딘이 한 가지 커다란 주제에 대해서 꼬리에 꼬리를 잇는 질문을 일생에 걸쳐서 논리적으로 연구했기 때문이다. 일생에 걸친 연구도 이렇게 서사가 있게 하고 싶다는, 평범한 연구자가 쉽게 성취하기 어려운 욕망이 생기더라.  

 

내용에 대해서는 물론 동의하는 부분과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이 섞여 있다. 예를 들어,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을 "조용한 혁명(Quiet Revolution)"이라고 부르는데, 이 용어는 한 편으로는 1960년대 중반 이후 다수 여성노동자의 지속적 사회진출을 일컫는 말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60년대에 요란했던 사회운동과 여성의 사회진출을 분리시키려는 이데올로기적 시도이기도 하다. 마치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과 성별 소득 격차 축소가 여성운동과는 무관한 일인양 보이게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 책 이전에 논문을 읽었을 때도 느꼈지만, 골딘이 제시하는 성별 소득 격차를 줄이기 위한 "last chapter"가 대기업이라는 관료제적 통제를 필요로 한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변호사와 약사를 대비시키면서 정부의 개입보다는 기술과 시장에 의한 해결책을 선호하지만, 이를 위한 전제 조건이 "정부"의 시스템인 관료제적 통제다.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보이는 손이 있어야 해결된다는, 시장에 의한 해결과는 거리가 멀어도 많이 먼 해결책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싶은 것은, 골딘이 책에서 두어번 언급한 사실이다. 바로 미국은 대졸 직후 노동시장에서 성별 소득 격차가 없다는 것. 골딘이 주장하는 성별 소득 격차가 차별보다는 "가정"의 분업과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핵심 근거 중 하나다. 하지만 한국은 대졸 직후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소득이 남성보다 18% 작다

 

한국은 골딘이 말하는 greedy work 때문에 발생하는 가정의 분업과 여성에 대한 차별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걸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고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미국의 비동시성이 한국에서는 동시성으로 존재한다. 그러니 이 책을 읽고 한국의 성별 격차도 미국처럼 해결해야겠다고 깨달아서는 곤란하다. 미국은 과거의 문제가 되어버린 명백한 차별을 한국은 아직도 해결하지 못했다. 차별을 줄여서 미국 정도의 성별 격차라도 도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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