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얼마 전에 출간 된 책의 일부.

숫자는 아버지 직업의 좋은 정도(여러가지 지수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Duncan SEI 지수라는게 있다)와 자식 직업의 좋은 정도의 상관관계다. 숫자가 높을수록 아버지 직업이 아들 직업을 결정한다는 것.

미국에서 1980년대 이후 불평등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였고, 그와 더불어 세대간 계층이동은 심각하게 줄어들었다.

미국의 불평등 증가를 능력에 따른 소득의 증가, 메리토크라시의 결과로 보는 분들이 있는데, 무엇이되었든, 그 결과는 보다싶이 다음 세대의 기회평등의 박탈이다.



지나친 불평등은 능력있는 다음 세대가 부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막음으로써 실질적인 신분제 사회로 퇴화하는 효과가 있고, 이는 사회 전반의 경쟁력을 떨어뜨려, 그 사회의 장기적 발전에 방해가 된다. 현시점의 지나친 불평등은, 설사 그것이 능력에 따른 성과 격차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흥청망청 과소비를 하고 저축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Posted by sovidence
,

중도, 친서민

정치 2009. 9. 30. 03:52
명박통의 중도, 친서민 노선 덕분에 지지율이 크게 올라가고, 이 이미지를 명박통에 뺏긴 민주당에 대한 아쉬움 내지는 비난도 많다.

이 노선의 실질 효과에 대해서 약간의 의문이 있다. 작동 메카니즘에 대한 좀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지배적인 설명은 중도, 친서민 노선이 진짜로 먹힌다는 거다. 사람들의 니즈가 바로 이것이고 명박통이 이 노선을 천명하자 마자 쏠렸다는 것. 이 경우 민주당이 이 노선을 뺏긴 건 실책이 된다.

이 분석이 옳다면, 명박정부의 중도 친서민 노선이 실질적인 친서민적 결과를 가져오지 못할 경우 조만간 말짱 꽝으로 돌아갈 수 있다. 대부분의 분석과 비판은 이 가설에 기반한 듯 하다. 오마이뉴스 한겨레의 비판도 온통 이것이다. 친서민 외치면서 서민 예산은 감축하는 모순에 대한 것.

결국 어떻게 결말이 날지는 몰라도 이 경우 명박정부의 노선 전환은 (나같은 사람은 설사 배가 약간 아프더라도) 서민층으로써는 환영할 일이다. 친서민 노선경쟁 붙어서 손해볼 서민이 누가 있겠는가.

두 번째 가설은 친서민 노선이 실질적 니즈를 반영했다기 보다는 수도권 중산층의 핑계거리로 작용했을 가능성이다. 경기의 회복과 수도권의 지가/집값 상승으로 경제적 이득을 취한 중상층이 친서민 노선으로 심리적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경제적 이득에도 불구하고 명박통과 그 노선을 지지하기 무척 꺼림직하지만 친서민이라면 봐줄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경제적 이득과 심리적 편안함을 결합하여 서민층이 아닌 수도권 중상층이 명박정부를 지지할 수 있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써 친서민 노선이 주로 기여하게 될 가능성. 회창옹이 과거에 천명했던 "따뜻한 보수", 부시의 "compassionate conservatism", 영국보수당의 "박애(fraternity)"를 "친서민"이라는 친숙한 구호로 내건 셈이다. 이 구호의 대상은 "서민"의 물질적 요구가 아니라 불평등의 증가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중상층"의 도덕적 안위다.

후자가 맞을 경우 명박정부로써는 실질적인 친서민적 결과에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수도권 중상층의 경제적 이득을 지켜주는 것이 현재의 지지도를 유지할 수 있는 핵심이기 때문에 현재의 정책 노선, 예산 배정 등에 변화를 주어서는 안된다.

핵심 지지기반을 수도권 중상층으로 삼는다면 4대강 사업을 통한 이익을 호남을 포함한 지방 세력과 일정부분 공유하고, 중대선거제 도입을 통한 영남잠식을 허락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 된다. 호남 배제를 통한 영남 권력 유지라는 메카니즘이 파괴되었는데, 반대세력이 결집될 수 있는 불씨를 살려둘 필요가 없다.

어떤 효과인지를 정확히 판단하기 위해서는 계층별 지지율의 변동에 대한 시계열적 비교와 수도권 중상층에 대한 FGI 등을 통한 정성조사가 필요하겠지. 그냥 찍으라면 후자라고 생각된다.


ps. 공주님이 아닌 명박통의 대선진출이 거시적 측면에서 한국 사회 경제적 갈등 축의 이동을 상징하는 정치적 사건이 아닐지.

pps. 후자가 맞다면 "우리가 진짜 친서민이에요" 노선은 명박통의 무늬만 친서민 노선을 깰 수 있는 위력이 전혀 없다.
Posted by sovidence
,
개학을 해서 약간 정신이 없고, 마감이 다가오는 몇 개 논문도 있고, 요즘 들여다보고 있는 주제들이 "임금의 측정오차가 분산추정에 끼치는 영향"이라든가 "오하카 요소분해의 준거그룹의 동일화 문제" 같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하품나오는 것들이라 블로그를 잘 들여다보게 되지를 않는다. 그게 무슨 사회학이냐고 물으시는 분들에게는 미국 사회학회에 "수학사회학"이라는 분과도 있다는걸 알려드리고 싶다.

하여튼 주말이 되어 토론사이트를 조금 둘러보니 아크로에 올라온 "공론사이트의 논쟁자 분석" 이 재미있고, "논쟁 참여자의 소셜네트워크 그림"도 쌈빡하니 눈에 띈다. 고재열 기자의 트위터 개설기도 재미있다.

공론사이트도 그렇고, 트위터나 사이월드같은 미디어를 소셜미디어라고 부른다. 소셜미디어의 발전과 더불어 사람들의 네트워크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도 잘 알려져 있다. 인터넷의 발전과 더불어 사람들의 관계가 단절될지 알았더니만 그렇지 않다라는건 워낙 여러 사람들이 열심히 얘기했다.

미국에 있는 나도 토론사이트와 블로그 등 덕분에 한국에 계신 분들과 쉽게 의견을 나눌 수 있고 같은 사회적 사건에 대해 공감할 수 있다. 나는 오프에 나가본 적이 없지만 온의 모임이 오프로도 확산된다. 온에서 만난 동호회 모임이 오프에서 잘 꾸려지는 것도 많이 들어봤다.

하지만 Social Captital에 관심있는 분들은 Putnam이 쓴 "혼자 볼링치기"라는 책에 대해서 들어보셨을 거다. 미국에서 사람들의 관계가 점점 줄어들어서 볼링도 같이 안치고 혼자 친다는 거다. 소셜미디어의 발전과 더불어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과는 모순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냥 아는 사람"과 "진정한 친구"는 구별하는 편이다. 소셜미디어가 그냥 아는 사람은 늘려주지만 진정한 친구를 늘리는 지는 의문이다. 2006년에 McPherson, Smith-Lovin 그리고 Brasheras 라는 세 사회학자가 ASR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미국에서 중요한 문제를 진지하게 상의할 수 있는 진솔한 친구(confidant)의 숫자는 1985년에 2.94명에서 2004년에는 2.08명으로 1/3이 줄었다.

동 기간에 진솔한 친구가 1명도 없다고 대답한 사람의 숫자는 1985년 10%에서 2004년에는 25%로 늘었다. 여기서 진솔한 친구는 가족을 뺀 숫자가 아니라 배우자와 부모까지도 포함한 숫자다. 미국 사람 4명 중 한 명이 가족을 포함해서 단 1명도 솔직히 자신의 어려운 고민을 터놓고 얘기할 수 없다는 거다.

가벼운 친구는 늘지만, 고민을 진지하게 상담할 수 있는 진솔한 친구는 줄어드는 추세. 인터넷 소셜미디어 헤비유저들은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소중하다는 걸 가끔 상기하는게 좋을 듯.
Posted by sovidence
,
사회학에서 계층론을 공부한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게 상식인데 일반적으로는 철떡같이 그렇다고 믿는 잘못된 사실 인식 중의 하나가 미국의 부모 자식간 계층 이동이 다른 사회보다 훨씬 높다는 것이다.

사실 미국의 부모 자식간 계층 이동은 다른 선진 자본주의국가에 비해서 낮다. 아래 그래프에서 elasticity가 높을수록 부모, 자식 간의 소득의 상관성이 높다는 의미다. 소득 상관성이 높다는 건 계층 이동이 낮다는 것, 달리 말해 개천에서 용이 안난다는 의미다. 반대로 계층이동이 높아야 개천에서 용이 난다.

덴마크, 노르웨이 등의 전반적 불평등이 낮은 social democratic welfare capitalism 사회에서 부모 자식 간 계층 이동이 높고, 미국, 영국 등 전반적 불평등 수준이 높은 liberal welfare capitalism 사회에서 계층 이동이 낮다.


전에도 얘기했듯, 결과적 평등 없이 기회의 평등은 없다. 개천에서 용나는 사회를 만들려면 인위적으로 현재의 불평등을 줄여야 한다.



그래프 출처는 아래:
http://www.americanprogress.org/issues/2006/04/b1579981.html

위 그래프 출처를 알려준 블로그 포스팅은:
http://understandingsociety.blogspot.com/2009/08/social-mobility.html
Posted by sovidence
,

인동초

기타 2009. 8. 19. 06:54
장사익 1집 하늘가는 길, 찔레꽃























2009년 여름은 사람 참 막막하게 하네요...
Posted by sovidence
,
http://www.miller-mccune.com/news/immersion-in-nature-makes-us-nicer-1430

사무실에 화분이 있거나, 자연을 그린 사진이 있는 등, 자연 속에 사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타인에게 관심을 보이고 친절한 사람이 되는 반면, 인공구조물 속에서만 있는 사람은 이기적이거나, 자기 목적에만 관심을 보인다는 새로운 연구가 나왔다.

로체스터대 심리학자 Netta Weinstein 교수팀의 연구에 따르면, 한 그룹은 자연의 사진을 다른 그룹은 도시 사진을 보여준 후, 사회성과 개인적 목표 추구의 가치에 대한 동의 정도를 묻는 설문을 한 결과, 자연 사진을 본 그룹이 공동체와 사회적 관계에 더 가치를 둔 반면, 도시 사진을 본 그룹은 경제적 성공이나 명예욕에 더 가치를 두었다.


ps. 이게 다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남들 염장 지르기 위한게 아니고^^
pps. 촛불시위는 청계천으로 자연을 접하게 된 시민들이 공동체적 가치를 더 중시한 결과로 명박통이 제 발등 찍은 것?

Posted by sovidence
,
남북관계 경색이 완화되는 조짐을 보이는 굳뉴스임에도 불구하고, 부자세습으로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친지김동과 입사해서 3년만에 평사원에서 전무가 된 모녀세습의 재벌3세가 국가지대사를 좌우하는 모습을 보니 짜증부터난다. 

저 자리에 자신의 실력으로 대중의 신뢰를 얻은 정치인들이나 자신의 실력으로 기업을 이끌어가는 최고경영자들을 기대하면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의 넋두리가 되나?


자본주의에서는 금융권력의 세습이 사회주의에서는 정치권력의 세습이 두드러진다. 남북한의 모습도 여기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다만 그 정도가 다른 사회주의나 다른 자본주의보다 유달리 심하고, 한국 자본주의는 금융권력을 넘어 전체 기업경영의 권력도 모두 세습된다는게 좀 차이가 날 뿐..

부의 세습, 직업의 세습, 권력의 세습. 모두 사회학에서 계층론의 중심 분야다. 해서 이 포스팅의 분류는 "불평등"이다. 정치, 외교, 남북관계 등이 아니라.
Posted by sovidenc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