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그림은 한국의 소득 지니계수이다. 한국사회체제 논쟁의 참여자 중의 한명인 은수미 노동연구원 연구원의 글에서 발췌한 그래프다. (원본은 http://socialsystem2009.textcube.com/16/)


다 아는 얘기지만 민주진보세력이 정치공학적 득표전략을 넘어서 고민해야할 부분은 민주정부 10년간 한국의 분배 수준이 전두환 초기 시절로 돌아갔다는 거다. 1980년 앞의 그래프가 없지만 내가 알기로는 70년대 동안에도 분배 수준은 꾸준히 개선되었다.

사람들이 나에게 느끼는 모순점, 또는 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균형적 시각은 바로 저 그래프의 불편함에 기인한다.

저 추이를 꺾을려면 그래프가 저 모양이 된 원인에 대한 연구가 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가 생각보다 간단치 않다.

가장 선명하지만 아무것도 설명하는게 없는 이론은 신자유주의론. 상태기술론으로는 의미가 있지만, 원인을 설명하는 이론적 설명으로는 별로다. 검증가능한 가설조차 세우기 어렵다. 

우파들의 무기는 숙련편향 기술사회론, 한마디로 경쟁이 보편화되고, 똘똘한 놈들이 잘사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거다. 미수다의 루저론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발언이다. 덕분에 사회적 효율성이 높아졌는데, 뭐가 문제? 효율성 깎아먹는 시위만 막으면 된다.

김대호 소장의 주장은 경쟁의 보편성이 아직 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 경쟁의 투명성이 보장되면 저 그래프가 꺾일거라는 얘긴데, 그렇다면 경제위기 이후 경쟁의 투명성이나 사회정의가 약화되었을까? 오히려 그 반대일거라고 생각된다.

좀 더 학술적으로 얘기하면 김대호 소장의 주장은 위치(position)결정론이다. 사회학의 Social Closure 이론에 따른 주장이다.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1980년대 이후의 불평등 증가는 position 내부에서의 불평등, 즉, 그룹 내 불평등이 더 크다. 한국은 특이하게 그룹 간 불평등이 훨씬 중요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한국사회 체제논쟁도 중요하겠지만, 은수미 연구원의 발제처럼, 우선은 미시적 영역에서의 각각의 요인에 대한 효과를 좀 따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노조가 강성이고, 파업이 많았던 산업에서 불평등이 더 커졌는지. 학력간 격차가 커졌는지, 학력 내 격차가 커졌는지, 영어능통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격차는 얼마나 커졌는지, 부모의 소득과 자녀의 소득 간의 상관관계는 어떻게 달라졌는지, 30대 초반부터 40대 중반까지 지속고용되는 비율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등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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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dows 7, ubuntu 9.10

기타 2009. 11. 4. 11:34
최근에 윈도우를 써야만 하는 노트북 하나는 비스타에서 윈도우즈 7으로 업그레이드했고, 2002년에 산 오래된 노트북하나는 민트7을 쓰다가 ubuntu 9.10로 바꾸었다. 비스타의 악명이야 말할 필요도 없고, 민트7은 보기에는 좋은데, 무선 인터넷 잡는게 영 불안정했던게 이유다.

윈7은 추천할만하다. 비스타는 쓰면 입이 거칠어질까봐 겁날 정도였는데, 윈7은 xp에서 바로 넘어가기에도 별로 부담이 없다. 속도도 비스타에 비해 훨씬 빠르고, 인터페이스도 괜찮다. 보안문제로 사람 너무 귀찮게도 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가끔씩 배경 화면이 검게되는 문제가 있다. 프로그램을 실행시키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그래도 보기에 안좋다.

우분투 9.10은 깔았다가 바로 지우고 우분투 하위 버젼으로 다운그레이드했다. 내 컴에서 그래픽 카드와 문제를 일으키는지 화면에 여러군데 가로 줄이 가고, 네트워크 카드도 인식하지 못해서 인터넷이 안잡힌다. 네트워크 카드 문제는 해결하는 방법을 아는데, 전자는 방법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도 네트워크 카드 문제와 사운드 카드 충돌을 많이 보고하는 편이다. 우분투 9.04에서는 없었던 문제다. 9.10은 건너뛰고 10.4가 나오면 업그레이드할 생각이다.

참고로 윈7을 깐 컴은 8인치 바이오 P시리즈 노트북이고, 우분투를 깐 컴은 13인치 후지쯔 S 시리즈 노트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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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남녀 평등 등수가 전세계 134개 국 중 115 등이라는 기사는 다들 보셨을테고, 115등 근방에서 한국이랑 수준이 비슷한 국가들의 면면을 한 번 감상해 보시기 바란다.

105 Kuwait
106 Angola
107 Zambia
108 Nigeria
109 Tunisia
110 Nepal
111 Guatemala
112 United Arab Emirates
113 Jordan
114 India
115 Korea, Rep.
116 Bahrain
117 Algeria
118 Cameroon
119 Mauritania
120 Burkina Faso

아프리카, 인도, 중동 등 친숙한 국가들의 이름이 보인다. 앞으로 인도에서 여성을 채찍으로 때렸다는 기사가 나와도, 우리랑 비슷한 수준의 국가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너무 놀라지는 마시라.

이 보고서를 만든 WEF에서 소득에 따라 국가를 4개로 분류했는데, 한국은 그 중에서 고소득 국가 군에 든다. 44개 고소득 국가 중 7개가 100등 밖인데, 아래 보다싶이 아랍권 국가 아닌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105 Kuwait
112 United Arab Emirates
115 Korea, Rep.
116 Bahrain
123 Oman
125 Qatar
130 Saudi Arabia

이 보고서에서는 2006-2009년 사이의 시계열적 변화도 보여주는데, 4개년 데이타가 모두 있는 115개 국가 중 16개 국가만 상황이 나빠졌고, 나머지 99개 국가는 그래도 상황이 개선되었다.

한국은 불행히도 상황이 나빠진 16개 국가에 속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2000년 이후 약간의 진동은 있었지만 꾸준히 남녀불평등이 개선되어 오다가, 명박정부가 들어선 후 2년 연속으로 나빠졌다. 여성부에서 한식의 세계화에 힘쓰겠다는 판이니 크게 기대하긴 힘들지만, 그나마 낮은 점수를 더 낮추는 건 그래도 좀 너무하지 않나 싶다.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길래 여성의 사회진출도, 남녀평등 정도가 중동국가 수준일까? 절대적인 교육수준이 낮은 것도 아니고, 차도르를 씌우는 것도 아닌데...  문화적 요인, 제도적 요인, 개인의 선택과 구조적 요인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뭔가 좀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해 보인다. 여성 할당 정도로 해결될 것 같지 않다.


보고서 전문은 http://www.weforum.org/pdf/gendergap/report200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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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를 보니 민노당 이정희 의원이 노동패널을 분석해서 상위 10%가 전체 (거주 주택 제외) 자산의 75%를 차지하고 있어 자산 불평등이 심각하다고 국회에서 보고하였다.

1차 자료를 분석해서 새로운 사실을 보고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찬사를 보낸다. 진보세력은 이런 실증 분석 능력이 부족한데, 조금씩 채워지는 것 같다. 통계와 실증 분석의 발전없이 진보 정책의 발전 없다.

어쨌든 어느 나라나 자산 불평등은 소득 불평등 보다 크다. 저축은 소득의 비율대로 하는게 아니라, 먹고 마시고 놀고 쓰고, 남는 돈으로 하는 것이고, 잉여소득의 누적분이 자산이기 때문에 그렇다.

자산 불평등에 대한 연구는 자료의 부족으로 인하여 잘 발전되지 않았다. 비교 연구는 최근에야 겨우 시작했다. 이제 겨우 한 두 편의 논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자산 불평등에 대한 비교 연구의 자료는 LWS (Luxemburg Wealth Survey)에서 구할 수 있다.

상위 10%가 전체 자산의 75%를 차지하고 있다는 이정희 의원의 보고에 대해서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해서 (계층간) 불평등 정도가 비교적 낮은편에 속한다"고 했단다.

윤 장관이 보는 다른 선진국이 도대체 어느 나라인지 모르겠다.

LWS의 첫 Working Paper Series에 따르면 상위 10% 가구의 자산점유율은, 비록 거주주택 제외 문제 때문에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다음과 같다.

미국 71-64%
영국 45%
스웨덴 58%
이태리 42%
독일 54%
핀란드 45%
캐나다 53%

이 데이타말고 더 정확한 국가별 비교가 가능한 자산 불평등 데이타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은 소득불평등의 수준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높은 편이라 할 수 없지만, 자산 불평등은 비정상적으로 높다. 이렇게 된 이유는 한국에서 자산의 축적은 절약과 저축의 미덕을 발휘한 결과가 아니라 땅투기의 소치이기 때문이다. 

윤 장관의 답변은 그 말의 잣구대로 하면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 없지만, 자산불평등 얘기하는데 소득불평등에 대한 인식만 가지고 동문서답한거다. 기획재정의 책임자가 그렇게 섞으면 곤란하다.


ps. 참여정부 시절 흘러다니던 얘기로는 다주택 소유자를 정확히 파악한 (과거) 내무부의 자료에 따르면 자산 불평등은 이정희 의원이 보고한 것보다 더 심각한 걸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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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국적 허용

인구 통계 2009. 10. 19. 10:47
명박정부에서 병역의무를 마친 남자들은 이중국적을 허용할 계획이라고 조선일보가 보도했다. 조만간 이중국적이 허용될 것으로 예측했었기 때문에 놀라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가 뜬금없다.

조선이 보도한 이중국적 허용의 주 근거는 저출산 고령화 대책의 하나라는 거다. 저출산 고령화의 이유가 이중 국적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 이중국적을 허용하면 출산이 늘어나거나 이민이 늘어날 어떤 이유가 있나? 견강부회가 너무 심하다.

이중국적 허용이 저출산 고령화 대책의 하나로 효과를 가질려면 단일민족 정체성을 포기하고 적극적인 이민 유입 정책을 써야하는데, 그런 신호는 전혀 없다. 들어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도 쫓아내는 판이다.

현재 이중국적 허용의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60대 이상 먹고살만한 분들의 손자,손녀 사랑. 다른 하나는 국가의 고급 인력 조달 문제.

전자는 요즘 기득권층의 손자 손녀 중에 한 명 쯤 미국 국적자가 아닌 사람이 없다. 아예 삶의 기반이 미국이면 맘 편하게 미국 국적자가 되면 좋은데, 속지주의 덕분에 미국 국적자가 된 손자손녀의 삶의 기반은 한국이다. 시민으로써의 참여는 한국, 국적은 미국인게 상당히 불편하다. 이중국적해소는 이런 민원 해결 차원이다. 강남 민원이 국가 의제화한 것.

두번째 이유는 한국 대학보다 미국 대학 가는걸 더 중시하는 문화가 된 덕택에 고급인력의 상당수가 미국과 한국 중 택일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있고, 한국에서 잘 나간다는 보장이 없는 한, 미국을 조국으로 택하는 고급 인력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 두뇌유출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써의 이중 국적 허용이다.

성공할까? 글쎄다. 추가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고급인력이 누구일지. 미국거주자는 어차피 도움 안되고, 이중국적이 허용되지 않을 때는 미국을 택하지만, 허용되면 한국거주를 택하는 인력이 늘어나야 효과가 있는데, 그 보다는 한국에 있으면서 미국 국적을 유지하는 사람만 늘릴 것 같다. 정운찬의 아들같은 케이스가 한국에서 활동하며 미국 국적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고, 공직 진출 장애도 없애자는 것. 결국 강남 민원 해결인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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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 낭만주의

경제사회학 2009. 10. 19. 01:57
잘은 모르지만, 한국사회의 나아갈 바로 기존 좌파들이 주장하던 민주주의나 평등이 아니라 "공정한 경쟁"을 드는 분들이 있는가 보다. 사회적 한계선으로 밀려나는 사람들이 공정한 경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

재벌이 득세하고 중소기업이 몰락하는 것, 교수들이 안정된 수입을 올리고 비정규직 강사들이 빈곤한 삶을 사는 것, 거대 수퍼가 구멍가게를 몰아내는 것, 고급인력이 재벌에만 몰려드는 것 등등이 공정 경쟁의 부족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믿는 듯 하다.

미안한 얘기지만, 실력대로 경쟁하면, 중소기업보다는 재벌, 비정규직 강사보다는 교수들, 구멍가게보다는 거대 수퍼가 훨씬 생산성도 높고, 실력도 좋고, 경쟁력이 강해서 이들의 일방적 승리로 끝날 것이다.

한국의 상류층, 중산/중상층이 불공정 경쟁으로 저 자리에 올랐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그들의 학력, 실력이 객관적으로 (평균을 따지만) 서민층보다 좋다는 걸 알아야 한다. 조선일보에서 학교 격차 까자는게 실력대로 평가받자는 얘기 아니던가. 문제는 실력격차의 여부가 아니라 그에 따른 보상의 격차가 어느 정도나 되어야 하는가 이다.

공정 경쟁은 주로 구조조정의 수단이다. 저부가가치 중소기업, 구멍가게를 정리하여 자영업자의 비율을 낮추고 자본고도화를 이룩하는게 목표일 때 내세울 구호이다.

꼭 적합한 사례는 아니지만, 스웨덴에서 중소기업이나 대기업이나 같은 직종은 같은 임금을 받게한 적이 있었다. 인재들이 굳이 대기업에 가지 않아도 같은 임금을 받으니 중소기업으로 가고 산업 내 회사간 격차의 축소를 기대했었다. 하지만 결과는 중소기업의 융성이 아니라 중소기업의 몰락이었다.

생산성 낮은 중소기업과 업종에 투자했던 자본이 몰락하고 그 자본이 모두 생산성 높은 대기업과 업종으로 구조조정되었다. 결과적으로 고수익 업종으로의 전반적 구조조정이 이루어졌고, 추가적 평등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요구는 대기업과 경쟁력 높은 노동자들의 연합에 의해 버로우.

공정 경쟁이란 용어가 "공정"성에 방점이 찍히고 경쟁에서 밀리는 행위자를 보호, 보상격차의 축소를 목표로 한다면 레토릭으로 의미가 있겠지만, "경쟁"에 방점이 찍힌다면 오히려 지난 10년간 지속된 불평등의 증가에 기여하고 말 것이다. 경쟁에서 승리한 분들이, 서민층에게 미안함을 느낄 필요도 없이, 자신들의 정당한 승리에 대한 자심감만 더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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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brain.net에 누군가 퍼온 글인데 공감가는 내용도 많고, 두고 새기기 위해 (이러면 저작권 위반에 걸리는건 아닌지 모르겠지만) 제 블로그에 전재합니다. 생산적 학자가 되기 위해서 매일 30분은 꼭 논문 작성 글쓰기를 하라는 충고도 어디서 들었는데, 그것도 쉽지 않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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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교육학회 뉴스레터 260호(2009.9)

제목: 학문을 직업으로 삼으려는 젊은 학자들을 위하여

이화여대 오욱환

인생은 너무나 많은 우연들이 필연적인 조건으로 작용함으로써 다양해집니다. 대학에 진학한 후에는 전공분야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생길로 접어든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을 겁니다. 전공이 같았던 동년배 학우들이 각기 다른 진로를 선택함으로써 흩어진 경험도 했을 겁니다. 같은 전공으로 함께 대학원에 진학했는데도 전공 내 하위영역에 따라, 그리고 지도교수의 성향과 영향력에 따라 상당히 다른 길로 접어들었을 겁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저는 한국교육학회나 분과학회에 정회원으로 또는 준회원으로 가입한 젊은 학자들에게 학자로서의 삶이 행복하기를 기원하며 몇가지 조언을 하고자 합니다. 이 조언은 철칙도 아니고 금언도 아닙니다. 학자로서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노하우라고 생각하시고 편하게 읽기를 바랍니다. 이 조언은 제가 젊었을 때 듣고 싶었던 것들입니다. 젊은 교육학도였을 때, 저는 이러한 유형의 안내를 받지 못했습니다.

직업에 따라 상당히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직업이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결정적이기 때문에, 저는 직업을 생업(生業)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학문은 권력이나 재력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학자로서의 성공은 학문적 업적으로만 판가름됩니다. 자신의 직업을 중시한다면, 그 직업을 소득원으로써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치로 받아들여야 맞습니다. 아래에 나열된 조언들은 제가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조언들은 제 자신에게도 적용됩니다.

•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면, 그에 걸맞은 일자리는 있다”고 확신하십시오.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은 구직난을 호소하지만,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구인난으로 애를 태웁니다. 신임교수채용에 응모한 학자들은 채용과정의 까다로움과 편견을 비판합니다만, 공채심사위원들은 적합한 인물을 찾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공정한 선발 과정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공정하게 진행되기를 기원하면서 요구한 조건을 충분히 갖추는 데에 더 힘쓰십시오.

• 학문에 몰입하는 학자들을 가까이 하십시오. 젊은 학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모형이 되어줄 스승, 선배, 동료, 후배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를 때에는 따라해 보는 방법이 효율적입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스타일을 갖추면 됩니다. 학문에의 오리엔테이션을 누구로부터 받느냐에 따라 학자의 유형이 상당히 좌우됩니다. 학문을 직업으로 삼으려면, 반드시 학문에 혼신을 다하는 사람들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존경할 수 없는 학자들을 직면했을 경우에는, 부정적 기준으로 삼으십시오. 다시 말해서, 그 사람들과 다르기 위해 노력하면 정도(正道)로 갈 수 있습니다.

• 시․공간적으로 멀리 있는 위대한 학자보다 ‘자신보다 조금 더 나은, 그렇지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모형으로 삼으십시오. 의식을 해야만 인식되는 사람은 일상적인 모형이 될 수 없습니다. 수시로 접하고 피할 수 없는 주변의 학자들 가운데에서 모형을 찾아야 합니다. 그 모형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될 때에는, 여러분이 이미 그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그 때, 눈을 들어 조금 더 멀리 있는 모형 학자들을 찾으십시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여러분이 훌륭한 학자에 가까워집니다.

• 아직 학문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가능한 조속히 결정해야 합니다. 이 길이 아니다 싶으면, 곧바로 이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습니다. 학문은 적당히 해서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택하지 않은 일에 매진할 리 없고, 매진하지 않는 일이 성공할 리 없습니다. 학계에서의 업적은 창조의 결과입니다. 적당히 공부하는 것은 게으름을 연습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게으른 학자는 학문적으로 성공할 수 없으며, 학계는 지적 업적을 촉구하기 때문에, 일상적으로도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 읽고 쓰는 일보다 더 오래 할 수 있고 더 즐거운 일을 가진 사람은 학문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읽었는데도 이해되지 않아서 속이 상하고 글쓰기로 피를 말리는 사태는 학자들에게 예사로 일어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읽고 씁니다. 이 일을 즐기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일은 어렵고 힘들수록 더 가치 있고 즐거울 수 있습니다. 읽고 쓰는 일을 피하려고 하면서도 그 일에 다가간다면, 학자로서 적합합니다.

• 학문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부족하다면, 대인관계를 줄여야 합니다. 학문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학문에 투입하는 시간은 다른 업무에 할당하는 시간과 영합(zero sum)관계에 있습니다. 학문을 위한 시간을 늘리려면 반드시 다른 일들을 줄여야 합니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대인관계를 정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개인 전화번호부가 보험설계사의 전화번호부처럼 다양하고 많은 인명들로 채워져 있다면, 학문하는 시간을 늘릴 수 없습니다. 물론 대인관계도 사회생활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학문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학문을 직업으로 선택하면 불행해집니다.

• 학문 외적 업무에 동원될 때에는 맡겨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에 헌신하지는 마십시오. 젊은 학자들은 어디에서 근무하든 여러 가지 업무―흔히 잡무로 불리는 일―에 동원됩니다. 선택할 수 있을 때에는 이러한 일을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만, 대부분의 경우는 선택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마련입니다. 그 일을 부탁한 사람들은 젊은 학자들보다 직위가 높고 영향력이 더 큽니다. 그리고 그들은 젊은 학자들이 일하는 자세를 눈여겨봅니다. 잡무를 부탁하는 사람들은 젊은 학자들에게 평생 직업을 제공하거나 추천하거나 소개하는 위치에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기 싫지만 피할 수 없을 때에는 성실해야 합니다.

• 시작하는 절차를 생략하십시오. 논문을 쓸 때 가장 힘든 시기는 시작할 때입니다. 시작하지 않으면, 결과가 나올 리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하면 될 일을 시작하는 절차에 구태여 의미를 부여하고 길일(吉日)이나 적일(的日)을 찾다가 실기(失機)합니다. 신학기에, 방학과 함께, 이 과제가 끝나면 시작하려니까 당연히 신학기까지, 방학할 때까지, 과제가 끝날 때까지 미루게 되고 정작 그 때가 되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새로운 변명꺼리를 만들어 미루게 됩니다. “게으른 사람은 재치 있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가 더 지혜롭다고 생각한”답니다(성경 잠언 27:16). 논문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즉시 그리고 거침없이 많이 기록해두어야 합니다. 적기를 기다리다가는 아이디어를 놓칩니다. 사라진 아이디어는 천금을 주어도 되찾을 수 없습니다.

• 표절은 학자에게 치명적인 오명이 됩니다. 표절은 의식적으로도 그리고 무의식적으로도 일어납니다. 표절에의 유혹은 게으름과 안일함에서 시작됩니다. 표절을 알고 할 때에는 자신에게 관대하고 유리한 변명이 충분히 만들어집니다. 표절하지 않으려면 자신에게 엄격해야 합니다. 모르고 표절할 수 있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발표하기 전에 다른 사람들에게 점검을 받아야 합니다. 글쓰기에 엄격한 사람들을 가까이 해야 하고 정중하게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발표된 후에 표절로 밝혀지면, 감당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 시간과 돈을 어디에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도서구입에 인색하고 음주나 명품구매에 거침없다면 학자로서 문제가 있습니다. 읽을 책이 없으면 읽어야 할 이유까지도 사라집니다. 책을 구입하고 자료를 복사하는 데 주저하지 마십시오.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더라도 앞으로 필요할 것으로 판단되면 구입해야 합니다. 꼭 필요한지를 따지는 것은 책을 사지 않으려는 이유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그 문헌들을 읽거나 가까이 두고 보아야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됩니다.

• 새 책을 구입했을 때나 새 논문을 복사했을 때에는 즉시 첫 장을 읽어두십시오. 그러면 책과 논문이 생경스럽지 않게 됩니다. 다음에 읽을 때에는, 시작하는 기분이 적게 들어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구입한 책과 복사한 논문을 도서관 자료처럼 대하지 마십시오. 읽은 부분에 흔적을 많이 남겨두십시오.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반론이 생각나면, 그 쪽의 여백에 적어두십시오. 그것이 저자와의 토론입니다. 그 토론은 자신이 쓸 글의 쏘시개가 됩니다.

• 학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십시오. 학회의 주체로서 활동하고 손님처럼 처신하지 마십시오. 학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긍정적 모형들과 부정적 모형들을 많이 접해보십시오. 좋은 발표들로 모범 사례들을 만들어가고 실망스러운 발표들을 들을 때에는 그 이유들을 분석해보십시오. 학회에 가면 학문 활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학회에 가면 필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감성적 자극도 받을 수 있습니다.

• 지도교수나 선배가 여러분의 인생을 결정해주지 않음을 명심하십시오. 학위논문을 작성할 때 지도교수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배의 조언은 학위논문을 완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도와 도움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그들에게 종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홀로서기가 시련이듯이, 학자로서의 독립도 어렵습니다. 은사나 선배에의 종속은 그들의 요구 때문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젊은 학자들이 스스로 안주하려는 자세 때문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 걸작(傑作)이나 대작(大作)보다 습작(習作)에 충실하십시오. 논문을 쓰지 못하는 학자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걸작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들은 다른 학자들의 논문들을 시시하다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찮게 평가한 논문들과 비슷한 수준의 논문을 쓰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논문을 쓰는 데 엄청난 압박을 느낍니다. 걸작에 대한 소망은 학자로서 당연히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걸작은 쉽게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걸작을 지향한 논문이라고 해서 걸작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논문을 쓸 때마다 최선을 다하고 그 논문들이 쌓여지면서 걸작과 대작이 가능해질 뿐입니다.

• 학자의 길을 선택한 후에는 곧바로 연구업적에 대한 압박이 시작됩니다. 교수직을 구하려면 반드시 연구업적을 충분히 갖추어야 합니다. 많은 대학에서 연구보고서는 연구업적으로 평가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공저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번역서에 대한 평가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낮습니다. 번역보다 창작에 몰두하십시오. 번역은 손쉬워 보이지만 아주 어려울 뿐만 아니라 생색도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역했을 경우에는 지적 능력을 크게 의심받습니다.

• 학자가 되고 난 후에는 저서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압박도 만만치 않습니다. 도서관이나 서점에 들러 책을 찾을 때 다른 학자들이 쓴 책들만 보이면 상당히 우울해집니다. 여기에 더하여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동료들이 교과서와 전공서를 출판할 때에는 뒤처지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학자들이 젊었을 때부터 교과서 집필을 서두릅니다. 교과서 집필은 생각과는 다르게 아주 어렵습니다. 교과서에 담길 내용은 대부분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쓸 수 있을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논문과는 다르게, 교과서 집필은 다른 학자들도 알고 있는 내용들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구성하는 작업이어서 표절의 가능성도 아주 높고, 오류가 있을 경우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학자로서 최소 10년은 지난 후에 교과서 집필을 고려하십시오.

• 학회에 투고한 논문이 게재되지 않더라도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학회에서 발행되는 정기학술지에의 게재 가능성은 50퍼센트 수준입니다. 까다로운 학술지의 탈락률은 60퍼센트를 넘습니다. 그리고 학계의 초보인 여러분이 중견․원로 학자들과의 경쟁에서 유리할 리도 없지 않습니까? 아이디어를 짜내어 논문을 작성한 후 발송했더니 투고양식에 맞지 않는다고 퇴짜를 맞거나, 자세히 읽어보지도 않고 게재불가 판정을 한 심사평을 받을 수도 있으며, 최신 문헌과 자료를 사용했는데 이에 대해 문외한인 심사자를 만나 거부될 수도 있습니다. 게재불가를 받은 자신의 논문보다 훨씬 못한 논문들이 게재되는 난감한 경우도 겪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문을 투고해야 합니다. 학회에 투고하기 전에 학회 편집위원회보다 더 까다로운 사람들로부터 예비 심사를 받기를 권합니다.

• 학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학문 활동을 쉽게 생각합니다. “앉아서 책만 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학문은 소일거리처럼 책만 보는 일이 아닙니다. 논문작성은 피를 말리는 작업입니다. 이 일을 오랫동안 해 온 저도 논문을 작성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논문은 다른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글이 아닙니다. 인문사회계에는 깜짝 놀랄 일이 많지 않습니다. 논문의 주제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분야에서 찾아야 합니다. 논문은 새로운 것을 밝히는 작업이라는 점에 집착함으로써 낯선 분야에서 주제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 논문을 쓰려면 책상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논문의 아이디어는 직감(hunch)에서 나올지 몰라도 논문 글쓰기는 분명히 인내를 요구하는 노역입니다. 책상에 붙어 있으려면 책상에 소일거리를 준비해 두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늘리십시오. 컴퓨터는 최상의 제품을 구비하십시오. 프린터는 빨리 인쇄되는 제품을 구비하고 자주 인쇄하십시오. 퇴고는 반드시 모니터보다는 인쇄물로 하십시오. 퇴고할 때에는 다른 사람의 논문을 심사하듯 비판적으로 살펴보십시오. 논문의 초고를 작성했을 때쯤이면 내용을 거의 외우게 됩니다. 그래서 오류를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아무리 세심하게 작성하더라도 초고에는 오류가 아주 많습니다. 이 오류들을 잡아내려면 그 논문을 남의 논문처럼 따져가며 읽어야 합니다. 앞에서부터도 읽고, 뒤에서부터도 읽어야 하며, 중간부터도 읽어야 할 뿐만 아니라 오래 묵혔다가 다시 읽어보기도 해야 합니다. 자신이 쓴 글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방법은 모두 동원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이유는 학회에 투고했을 때 심사위원들이 남의 글을 비판하듯 읽기 때문입니다. 논문심사자들은 심사대상 논문에 대해 호의적이 아닙니다. 이들은 익명이기 때문에 객관적이며 탈락률을 높여달라는 요구를 받을 때에는 아주 냉정해집니다.

• 학자의 길을 선택한 후에는 반드시 지적 업적을 갖추어야 합니다. 연구업적이 부족하면, 학계에서 설 땅이 별로 없습니다. 부족한 연구업적을 다른 것들로 보완하는 일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떳떳하지도 않습니다. 쫓기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불안하고 우울해집니다. 자신의 전공영역에서 발간되는 국내외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들을 체계적으로 점검하고 관심이 끌리는 논문들은 복사하여 가까운 데 두십시오. 그 논문들을 끈기 있게 파고들면, 여러분이 써야 할 글의 주제와 소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젊은 교육학자들이 학자로서의 일상을 즐거워하기를 기원합니다. 여러 가지 학술모임에서 이들의 행복한 미소를 보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이들의 즐거움과 행복으로 한국의 교육학이 발전하기를 기대합니다.
Posted by sov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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