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낭만주의

경제사회학 2009. 10. 19. 01:57
잘은 모르지만, 한국사회의 나아갈 바로 기존 좌파들이 주장하던 민주주의나 평등이 아니라 "공정한 경쟁"을 드는 분들이 있는가 보다. 사회적 한계선으로 밀려나는 사람들이 공정한 경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

재벌이 득세하고 중소기업이 몰락하는 것, 교수들이 안정된 수입을 올리고 비정규직 강사들이 빈곤한 삶을 사는 것, 거대 수퍼가 구멍가게를 몰아내는 것, 고급인력이 재벌에만 몰려드는 것 등등이 공정 경쟁의 부족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믿는 듯 하다.

미안한 얘기지만, 실력대로 경쟁하면, 중소기업보다는 재벌, 비정규직 강사보다는 교수들, 구멍가게보다는 거대 수퍼가 훨씬 생산성도 높고, 실력도 좋고, 경쟁력이 강해서 이들의 일방적 승리로 끝날 것이다.

한국의 상류층, 중산/중상층이 불공정 경쟁으로 저 자리에 올랐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그들의 학력, 실력이 객관적으로 (평균을 따지만) 서민층보다 좋다는 걸 알아야 한다. 조선일보에서 학교 격차 까자는게 실력대로 평가받자는 얘기 아니던가. 문제는 실력격차의 여부가 아니라 그에 따른 보상의 격차가 어느 정도나 되어야 하는가 이다.

공정 경쟁은 주로 구조조정의 수단이다. 저부가가치 중소기업, 구멍가게를 정리하여 자영업자의 비율을 낮추고 자본고도화를 이룩하는게 목표일 때 내세울 구호이다.

꼭 적합한 사례는 아니지만, 스웨덴에서 중소기업이나 대기업이나 같은 직종은 같은 임금을 받게한 적이 있었다. 인재들이 굳이 대기업에 가지 않아도 같은 임금을 받으니 중소기업으로 가고 산업 내 회사간 격차의 축소를 기대했었다. 하지만 결과는 중소기업의 융성이 아니라 중소기업의 몰락이었다.

생산성 낮은 중소기업과 업종에 투자했던 자본이 몰락하고 그 자본이 모두 생산성 높은 대기업과 업종으로 구조조정되었다. 결과적으로 고수익 업종으로의 전반적 구조조정이 이루어졌고, 추가적 평등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요구는 대기업과 경쟁력 높은 노동자들의 연합에 의해 버로우.

공정 경쟁이란 용어가 "공정"성에 방점이 찍히고 경쟁에서 밀리는 행위자를 보호, 보상격차의 축소를 목표로 한다면 레토릭으로 의미가 있겠지만, "경쟁"에 방점이 찍힌다면 오히려 지난 10년간 지속된 불평등의 증가에 기여하고 말 것이다. 경쟁에서 승리한 분들이, 서민층에게 미안함을 느낄 필요도 없이, 자신들의 정당한 승리에 대한 자심감만 더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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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brain.net에 누군가 퍼온 글인데 공감가는 내용도 많고, 두고 새기기 위해 (이러면 저작권 위반에 걸리는건 아닌지 모르겠지만) 제 블로그에 전재합니다. 생산적 학자가 되기 위해서 매일 30분은 꼭 논문 작성 글쓰기를 하라는 충고도 어디서 들었는데, 그것도 쉽지 않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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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교육학회 뉴스레터 260호(2009.9)

제목: 학문을 직업으로 삼으려는 젊은 학자들을 위하여

이화여대 오욱환

인생은 너무나 많은 우연들이 필연적인 조건으로 작용함으로써 다양해집니다. 대학에 진학한 후에는 전공분야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생길로 접어든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을 겁니다. 전공이 같았던 동년배 학우들이 각기 다른 진로를 선택함으로써 흩어진 경험도 했을 겁니다. 같은 전공으로 함께 대학원에 진학했는데도 전공 내 하위영역에 따라, 그리고 지도교수의 성향과 영향력에 따라 상당히 다른 길로 접어들었을 겁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저는 한국교육학회나 분과학회에 정회원으로 또는 준회원으로 가입한 젊은 학자들에게 학자로서의 삶이 행복하기를 기원하며 몇가지 조언을 하고자 합니다. 이 조언은 철칙도 아니고 금언도 아닙니다. 학자로서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노하우라고 생각하시고 편하게 읽기를 바랍니다. 이 조언은 제가 젊었을 때 듣고 싶었던 것들입니다. 젊은 교육학도였을 때, 저는 이러한 유형의 안내를 받지 못했습니다.

직업에 따라 상당히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직업이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결정적이기 때문에, 저는 직업을 생업(生業)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학문은 권력이나 재력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학자로서의 성공은 학문적 업적으로만 판가름됩니다. 자신의 직업을 중시한다면, 그 직업을 소득원으로써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치로 받아들여야 맞습니다. 아래에 나열된 조언들은 제가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조언들은 제 자신에게도 적용됩니다.

•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면, 그에 걸맞은 일자리는 있다”고 확신하십시오.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은 구직난을 호소하지만,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구인난으로 애를 태웁니다. 신임교수채용에 응모한 학자들은 채용과정의 까다로움과 편견을 비판합니다만, 공채심사위원들은 적합한 인물을 찾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공정한 선발 과정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공정하게 진행되기를 기원하면서 요구한 조건을 충분히 갖추는 데에 더 힘쓰십시오.

• 학문에 몰입하는 학자들을 가까이 하십시오. 젊은 학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모형이 되어줄 스승, 선배, 동료, 후배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를 때에는 따라해 보는 방법이 효율적입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스타일을 갖추면 됩니다. 학문에의 오리엔테이션을 누구로부터 받느냐에 따라 학자의 유형이 상당히 좌우됩니다. 학문을 직업으로 삼으려면, 반드시 학문에 혼신을 다하는 사람들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존경할 수 없는 학자들을 직면했을 경우에는, 부정적 기준으로 삼으십시오. 다시 말해서, 그 사람들과 다르기 위해 노력하면 정도(正道)로 갈 수 있습니다.

• 시․공간적으로 멀리 있는 위대한 학자보다 ‘자신보다 조금 더 나은, 그렇지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모형으로 삼으십시오. 의식을 해야만 인식되는 사람은 일상적인 모형이 될 수 없습니다. 수시로 접하고 피할 수 없는 주변의 학자들 가운데에서 모형을 찾아야 합니다. 그 모형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될 때에는, 여러분이 이미 그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그 때, 눈을 들어 조금 더 멀리 있는 모형 학자들을 찾으십시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여러분이 훌륭한 학자에 가까워집니다.

• 아직 학문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가능한 조속히 결정해야 합니다. 이 길이 아니다 싶으면, 곧바로 이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습니다. 학문은 적당히 해서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택하지 않은 일에 매진할 리 없고, 매진하지 않는 일이 성공할 리 없습니다. 학계에서의 업적은 창조의 결과입니다. 적당히 공부하는 것은 게으름을 연습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게으른 학자는 학문적으로 성공할 수 없으며, 학계는 지적 업적을 촉구하기 때문에, 일상적으로도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 읽고 쓰는 일보다 더 오래 할 수 있고 더 즐거운 일을 가진 사람은 학문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읽었는데도 이해되지 않아서 속이 상하고 글쓰기로 피를 말리는 사태는 학자들에게 예사로 일어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읽고 씁니다. 이 일을 즐기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일은 어렵고 힘들수록 더 가치 있고 즐거울 수 있습니다. 읽고 쓰는 일을 피하려고 하면서도 그 일에 다가간다면, 학자로서 적합합니다.

• 학문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부족하다면, 대인관계를 줄여야 합니다. 학문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학문에 투입하는 시간은 다른 업무에 할당하는 시간과 영합(zero sum)관계에 있습니다. 학문을 위한 시간을 늘리려면 반드시 다른 일들을 줄여야 합니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대인관계를 정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개인 전화번호부가 보험설계사의 전화번호부처럼 다양하고 많은 인명들로 채워져 있다면, 학문하는 시간을 늘릴 수 없습니다. 물론 대인관계도 사회생활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학문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학문을 직업으로 선택하면 불행해집니다.

• 학문 외적 업무에 동원될 때에는 맡겨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에 헌신하지는 마십시오. 젊은 학자들은 어디에서 근무하든 여러 가지 업무―흔히 잡무로 불리는 일―에 동원됩니다. 선택할 수 있을 때에는 이러한 일을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만, 대부분의 경우는 선택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마련입니다. 그 일을 부탁한 사람들은 젊은 학자들보다 직위가 높고 영향력이 더 큽니다. 그리고 그들은 젊은 학자들이 일하는 자세를 눈여겨봅니다. 잡무를 부탁하는 사람들은 젊은 학자들에게 평생 직업을 제공하거나 추천하거나 소개하는 위치에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기 싫지만 피할 수 없을 때에는 성실해야 합니다.

• 시작하는 절차를 생략하십시오. 논문을 쓸 때 가장 힘든 시기는 시작할 때입니다. 시작하지 않으면, 결과가 나올 리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하면 될 일을 시작하는 절차에 구태여 의미를 부여하고 길일(吉日)이나 적일(的日)을 찾다가 실기(失機)합니다. 신학기에, 방학과 함께, 이 과제가 끝나면 시작하려니까 당연히 신학기까지, 방학할 때까지, 과제가 끝날 때까지 미루게 되고 정작 그 때가 되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새로운 변명꺼리를 만들어 미루게 됩니다. “게으른 사람은 재치 있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가 더 지혜롭다고 생각한”답니다(성경 잠언 27:16). 논문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즉시 그리고 거침없이 많이 기록해두어야 합니다. 적기를 기다리다가는 아이디어를 놓칩니다. 사라진 아이디어는 천금을 주어도 되찾을 수 없습니다.

• 표절은 학자에게 치명적인 오명이 됩니다. 표절은 의식적으로도 그리고 무의식적으로도 일어납니다. 표절에의 유혹은 게으름과 안일함에서 시작됩니다. 표절을 알고 할 때에는 자신에게 관대하고 유리한 변명이 충분히 만들어집니다. 표절하지 않으려면 자신에게 엄격해야 합니다. 모르고 표절할 수 있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발표하기 전에 다른 사람들에게 점검을 받아야 합니다. 글쓰기에 엄격한 사람들을 가까이 해야 하고 정중하게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발표된 후에 표절로 밝혀지면, 감당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 시간과 돈을 어디에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도서구입에 인색하고 음주나 명품구매에 거침없다면 학자로서 문제가 있습니다. 읽을 책이 없으면 읽어야 할 이유까지도 사라집니다. 책을 구입하고 자료를 복사하는 데 주저하지 마십시오.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더라도 앞으로 필요할 것으로 판단되면 구입해야 합니다. 꼭 필요한지를 따지는 것은 책을 사지 않으려는 이유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그 문헌들을 읽거나 가까이 두고 보아야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됩니다.

• 새 책을 구입했을 때나 새 논문을 복사했을 때에는 즉시 첫 장을 읽어두십시오. 그러면 책과 논문이 생경스럽지 않게 됩니다. 다음에 읽을 때에는, 시작하는 기분이 적게 들어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구입한 책과 복사한 논문을 도서관 자료처럼 대하지 마십시오. 읽은 부분에 흔적을 많이 남겨두십시오.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반론이 생각나면, 그 쪽의 여백에 적어두십시오. 그것이 저자와의 토론입니다. 그 토론은 자신이 쓸 글의 쏘시개가 됩니다.

• 학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십시오. 학회의 주체로서 활동하고 손님처럼 처신하지 마십시오. 학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긍정적 모형들과 부정적 모형들을 많이 접해보십시오. 좋은 발표들로 모범 사례들을 만들어가고 실망스러운 발표들을 들을 때에는 그 이유들을 분석해보십시오. 학회에 가면 학문 활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학회에 가면 필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감성적 자극도 받을 수 있습니다.

• 지도교수나 선배가 여러분의 인생을 결정해주지 않음을 명심하십시오. 학위논문을 작성할 때 지도교수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배의 조언은 학위논문을 완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도와 도움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그들에게 종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홀로서기가 시련이듯이, 학자로서의 독립도 어렵습니다. 은사나 선배에의 종속은 그들의 요구 때문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젊은 학자들이 스스로 안주하려는 자세 때문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 걸작(傑作)이나 대작(大作)보다 습작(習作)에 충실하십시오. 논문을 쓰지 못하는 학자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걸작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들은 다른 학자들의 논문들을 시시하다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찮게 평가한 논문들과 비슷한 수준의 논문을 쓰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논문을 쓰는 데 엄청난 압박을 느낍니다. 걸작에 대한 소망은 학자로서 당연히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걸작은 쉽게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걸작을 지향한 논문이라고 해서 걸작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논문을 쓸 때마다 최선을 다하고 그 논문들이 쌓여지면서 걸작과 대작이 가능해질 뿐입니다.

• 학자의 길을 선택한 후에는 곧바로 연구업적에 대한 압박이 시작됩니다. 교수직을 구하려면 반드시 연구업적을 충분히 갖추어야 합니다. 많은 대학에서 연구보고서는 연구업적으로 평가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공저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번역서에 대한 평가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낮습니다. 번역보다 창작에 몰두하십시오. 번역은 손쉬워 보이지만 아주 어려울 뿐만 아니라 생색도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역했을 경우에는 지적 능력을 크게 의심받습니다.

• 학자가 되고 난 후에는 저서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압박도 만만치 않습니다. 도서관이나 서점에 들러 책을 찾을 때 다른 학자들이 쓴 책들만 보이면 상당히 우울해집니다. 여기에 더하여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동료들이 교과서와 전공서를 출판할 때에는 뒤처지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학자들이 젊었을 때부터 교과서 집필을 서두릅니다. 교과서 집필은 생각과는 다르게 아주 어렵습니다. 교과서에 담길 내용은 대부분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쓸 수 있을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논문과는 다르게, 교과서 집필은 다른 학자들도 알고 있는 내용들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구성하는 작업이어서 표절의 가능성도 아주 높고, 오류가 있을 경우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학자로서 최소 10년은 지난 후에 교과서 집필을 고려하십시오.

• 학회에 투고한 논문이 게재되지 않더라도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학회에서 발행되는 정기학술지에의 게재 가능성은 50퍼센트 수준입니다. 까다로운 학술지의 탈락률은 60퍼센트를 넘습니다. 그리고 학계의 초보인 여러분이 중견․원로 학자들과의 경쟁에서 유리할 리도 없지 않습니까? 아이디어를 짜내어 논문을 작성한 후 발송했더니 투고양식에 맞지 않는다고 퇴짜를 맞거나, 자세히 읽어보지도 않고 게재불가 판정을 한 심사평을 받을 수도 있으며, 최신 문헌과 자료를 사용했는데 이에 대해 문외한인 심사자를 만나 거부될 수도 있습니다. 게재불가를 받은 자신의 논문보다 훨씬 못한 논문들이 게재되는 난감한 경우도 겪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문을 투고해야 합니다. 학회에 투고하기 전에 학회 편집위원회보다 더 까다로운 사람들로부터 예비 심사를 받기를 권합니다.

• 학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학문 활동을 쉽게 생각합니다. “앉아서 책만 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학문은 소일거리처럼 책만 보는 일이 아닙니다. 논문작성은 피를 말리는 작업입니다. 이 일을 오랫동안 해 온 저도 논문을 작성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논문은 다른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글이 아닙니다. 인문사회계에는 깜짝 놀랄 일이 많지 않습니다. 논문의 주제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분야에서 찾아야 합니다. 논문은 새로운 것을 밝히는 작업이라는 점에 집착함으로써 낯선 분야에서 주제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 논문을 쓰려면 책상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논문의 아이디어는 직감(hunch)에서 나올지 몰라도 논문 글쓰기는 분명히 인내를 요구하는 노역입니다. 책상에 붙어 있으려면 책상에 소일거리를 준비해 두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늘리십시오. 컴퓨터는 최상의 제품을 구비하십시오. 프린터는 빨리 인쇄되는 제품을 구비하고 자주 인쇄하십시오. 퇴고는 반드시 모니터보다는 인쇄물로 하십시오. 퇴고할 때에는 다른 사람의 논문을 심사하듯 비판적으로 살펴보십시오. 논문의 초고를 작성했을 때쯤이면 내용을 거의 외우게 됩니다. 그래서 오류를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아무리 세심하게 작성하더라도 초고에는 오류가 아주 많습니다. 이 오류들을 잡아내려면 그 논문을 남의 논문처럼 따져가며 읽어야 합니다. 앞에서부터도 읽고, 뒤에서부터도 읽어야 하며, 중간부터도 읽어야 할 뿐만 아니라 오래 묵혔다가 다시 읽어보기도 해야 합니다. 자신이 쓴 글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방법은 모두 동원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이유는 학회에 투고했을 때 심사위원들이 남의 글을 비판하듯 읽기 때문입니다. 논문심사자들은 심사대상 논문에 대해 호의적이 아닙니다. 이들은 익명이기 때문에 객관적이며 탈락률을 높여달라는 요구를 받을 때에는 아주 냉정해집니다.

• 학자의 길을 선택한 후에는 반드시 지적 업적을 갖추어야 합니다. 연구업적이 부족하면, 학계에서 설 땅이 별로 없습니다. 부족한 연구업적을 다른 것들로 보완하는 일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떳떳하지도 않습니다. 쫓기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불안하고 우울해집니다. 자신의 전공영역에서 발간되는 국내외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들을 체계적으로 점검하고 관심이 끌리는 논문들은 복사하여 가까운 데 두십시오. 그 논문들을 끈기 있게 파고들면, 여러분이 써야 할 글의 주제와 소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젊은 교육학자들이 학자로서의 일상을 즐거워하기를 기원합니다. 여러 가지 학술모임에서 이들의 행복한 미소를 보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이들의 즐거움과 행복으로 한국의 교육학이 발전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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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박정부에서 대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융자해주고 졸업 후 취업하여 최장 25년에 걸쳐 나눠갚는 제도를 시행한다고 한다.

환영한다. 좋은 제도라고 생각한다.

이로써 돈이 없어서 대학 교육을 못받는 불평등은 상당히 시정될거라는 예측들이 많다. 그러나 만약 타국의 경험이 한국에도 적용된다면 불행히도 그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미국에서 1990년대에 대학 장학금을 대폭 확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저소득층의 대학진학률은 개선되지 않았다. 장학금 확대의 혜택은 저소득층이 아닌 중산층 자녀들에게 속속 들어갔다.

이유는 학력격차의 발생은 대학에 들어가기 훨씬 이전에 부모의 소득에 의해서 영향을 받기 때문에, 대학에 들어갈 시점에서는 이미 돈이 문제가 아니라 기초 학력 격차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학자금 융자해주면 뭐하나 대학갈 실력이 안되는데, 대학에 가면 또 뭐하나 좋은 대학 갈 실력이 안되어서 괜히 돈만 쓰고 남는 것도 없는데.

어린 시절에 비슷한 학습 환경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다. 남는 방법은 저소득층 자녀 특별전향 밖에 없게 된다. 서민층에게 보다 절실한 교육 대책은, 초등학고, 중학교 단위에서의 저소득층 자녀, 저소득층 학교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이다.

명박정부의 학자금 융자는 좋은 제도임에 틀림없지만, 주혜택 계층은 서민이 아닌 중산층이 될 것이다.



ps. 한국의 기성세대는 자신들이 없는 돈에 공부했고, 세대 간 계층 상향 이동을 했기 때문에 후대도 약간의 조건만 갖춰지면 이게 가능할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기성세대가 계층 상향 이동을 하던 시절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하던 시점이다. 이 때는 어느 나라나 계층 상향 이동이 지배적 계급 이동 패턴이다. 부모의 부유함이 자녀의 부유함을 결정하는 영향력이 낮다. 그러나, 일단 산업사회가 정착된 후에는 부모 경제력의 영향력이 증대한다. 산업사회 정착 이후의 저소득 계층에 대한 대책은 그 전과는 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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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얼마 전에 출간 된 책의 일부.

숫자는 아버지 직업의 좋은 정도(여러가지 지수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Duncan SEI 지수라는게 있다)와 자식 직업의 좋은 정도의 상관관계다. 숫자가 높을수록 아버지 직업이 아들 직업을 결정한다는 것.

미국에서 1980년대 이후 불평등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였고, 그와 더불어 세대간 계층이동은 심각하게 줄어들었다.

미국의 불평등 증가를 능력에 따른 소득의 증가, 메리토크라시의 결과로 보는 분들이 있는데, 무엇이되었든, 그 결과는 보다싶이 다음 세대의 기회평등의 박탈이다.



지나친 불평등은 능력있는 다음 세대가 부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막음으로써 실질적인 신분제 사회로 퇴화하는 효과가 있고, 이는 사회 전반의 경쟁력을 떨어뜨려, 그 사회의 장기적 발전에 방해가 된다. 현시점의 지나친 불평등은, 설사 그것이 능력에 따른 성과 격차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흥청망청 과소비를 하고 저축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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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 친서민

정치 2009. 9. 30. 03:52
명박통의 중도, 친서민 노선 덕분에 지지율이 크게 올라가고, 이 이미지를 명박통에 뺏긴 민주당에 대한 아쉬움 내지는 비난도 많다.

이 노선의 실질 효과에 대해서 약간의 의문이 있다. 작동 메카니즘에 대한 좀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지배적인 설명은 중도, 친서민 노선이 진짜로 먹힌다는 거다. 사람들의 니즈가 바로 이것이고 명박통이 이 노선을 천명하자 마자 쏠렸다는 것. 이 경우 민주당이 이 노선을 뺏긴 건 실책이 된다.

이 분석이 옳다면, 명박정부의 중도 친서민 노선이 실질적인 친서민적 결과를 가져오지 못할 경우 조만간 말짱 꽝으로 돌아갈 수 있다. 대부분의 분석과 비판은 이 가설에 기반한 듯 하다. 오마이뉴스 한겨레의 비판도 온통 이것이다. 친서민 외치면서 서민 예산은 감축하는 모순에 대한 것.

결국 어떻게 결말이 날지는 몰라도 이 경우 명박정부의 노선 전환은 (나같은 사람은 설사 배가 약간 아프더라도) 서민층으로써는 환영할 일이다. 친서민 노선경쟁 붙어서 손해볼 서민이 누가 있겠는가.

두 번째 가설은 친서민 노선이 실질적 니즈를 반영했다기 보다는 수도권 중산층의 핑계거리로 작용했을 가능성이다. 경기의 회복과 수도권의 지가/집값 상승으로 경제적 이득을 취한 중상층이 친서민 노선으로 심리적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경제적 이득에도 불구하고 명박통과 그 노선을 지지하기 무척 꺼림직하지만 친서민이라면 봐줄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경제적 이득과 심리적 편안함을 결합하여 서민층이 아닌 수도권 중상층이 명박정부를 지지할 수 있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써 친서민 노선이 주로 기여하게 될 가능성. 회창옹이 과거에 천명했던 "따뜻한 보수", 부시의 "compassionate conservatism", 영국보수당의 "박애(fraternity)"를 "친서민"이라는 친숙한 구호로 내건 셈이다. 이 구호의 대상은 "서민"의 물질적 요구가 아니라 불평등의 증가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중상층"의 도덕적 안위다.

후자가 맞을 경우 명박정부로써는 실질적인 친서민적 결과에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수도권 중상층의 경제적 이득을 지켜주는 것이 현재의 지지도를 유지할 수 있는 핵심이기 때문에 현재의 정책 노선, 예산 배정 등에 변화를 주어서는 안된다.

핵심 지지기반을 수도권 중상층으로 삼는다면 4대강 사업을 통한 이익을 호남을 포함한 지방 세력과 일정부분 공유하고, 중대선거제 도입을 통한 영남잠식을 허락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 된다. 호남 배제를 통한 영남 권력 유지라는 메카니즘이 파괴되었는데, 반대세력이 결집될 수 있는 불씨를 살려둘 필요가 없다.

어떤 효과인지를 정확히 판단하기 위해서는 계층별 지지율의 변동에 대한 시계열적 비교와 수도권 중상층에 대한 FGI 등을 통한 정성조사가 필요하겠지. 그냥 찍으라면 후자라고 생각된다.


ps. 공주님이 아닌 명박통의 대선진출이 거시적 측면에서 한국 사회 경제적 갈등 축의 이동을 상징하는 정치적 사건이 아닐지.

pps. 후자가 맞다면 "우리가 진짜 친서민이에요" 노선은 명박통의 무늬만 친서민 노선을 깰 수 있는 위력이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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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학을 해서 약간 정신이 없고, 마감이 다가오는 몇 개 논문도 있고, 요즘 들여다보고 있는 주제들이 "임금의 측정오차가 분산추정에 끼치는 영향"이라든가 "오하카 요소분해의 준거그룹의 동일화 문제" 같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하품나오는 것들이라 블로그를 잘 들여다보게 되지를 않는다. 그게 무슨 사회학이냐고 물으시는 분들에게는 미국 사회학회에 "수학사회학"이라는 분과도 있다는걸 알려드리고 싶다.

하여튼 주말이 되어 토론사이트를 조금 둘러보니 아크로에 올라온 "공론사이트의 논쟁자 분석" 이 재미있고, "논쟁 참여자의 소셜네트워크 그림"도 쌈빡하니 눈에 띈다. 고재열 기자의 트위터 개설기도 재미있다.

공론사이트도 그렇고, 트위터나 사이월드같은 미디어를 소셜미디어라고 부른다. 소셜미디어의 발전과 더불어 사람들의 네트워크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도 잘 알려져 있다. 인터넷의 발전과 더불어 사람들의 관계가 단절될지 알았더니만 그렇지 않다라는건 워낙 여러 사람들이 열심히 얘기했다.

미국에 있는 나도 토론사이트와 블로그 등 덕분에 한국에 계신 분들과 쉽게 의견을 나눌 수 있고 같은 사회적 사건에 대해 공감할 수 있다. 나는 오프에 나가본 적이 없지만 온의 모임이 오프로도 확산된다. 온에서 만난 동호회 모임이 오프에서 잘 꾸려지는 것도 많이 들어봤다.

하지만 Social Captital에 관심있는 분들은 Putnam이 쓴 "혼자 볼링치기"라는 책에 대해서 들어보셨을 거다. 미국에서 사람들의 관계가 점점 줄어들어서 볼링도 같이 안치고 혼자 친다는 거다. 소셜미디어의 발전과 더불어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과는 모순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냥 아는 사람"과 "진정한 친구"는 구별하는 편이다. 소셜미디어가 그냥 아는 사람은 늘려주지만 진정한 친구를 늘리는 지는 의문이다. 2006년에 McPherson, Smith-Lovin 그리고 Brasheras 라는 세 사회학자가 ASR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미국에서 중요한 문제를 진지하게 상의할 수 있는 진솔한 친구(confidant)의 숫자는 1985년에 2.94명에서 2004년에는 2.08명으로 1/3이 줄었다.

동 기간에 진솔한 친구가 1명도 없다고 대답한 사람의 숫자는 1985년 10%에서 2004년에는 25%로 늘었다. 여기서 진솔한 친구는 가족을 뺀 숫자가 아니라 배우자와 부모까지도 포함한 숫자다. 미국 사람 4명 중 한 명이 가족을 포함해서 단 1명도 솔직히 자신의 어려운 고민을 터놓고 얘기할 수 없다는 거다.

가벼운 친구는 늘지만, 고민을 진지하게 상담할 수 있는 진솔한 친구는 줄어드는 추세. 인터넷 소셜미디어 헤비유저들은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소중하다는 걸 가끔 상기하는게 좋을 듯.
Posted by sov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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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에서 계층론을 공부한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게 상식인데 일반적으로는 철떡같이 그렇다고 믿는 잘못된 사실 인식 중의 하나가 미국의 부모 자식간 계층 이동이 다른 사회보다 훨씬 높다는 것이다.

사실 미국의 부모 자식간 계층 이동은 다른 선진 자본주의국가에 비해서 낮다. 아래 그래프에서 elasticity가 높을수록 부모, 자식 간의 소득의 상관성이 높다는 의미다. 소득 상관성이 높다는 건 계층 이동이 낮다는 것, 달리 말해 개천에서 용이 안난다는 의미다. 반대로 계층이동이 높아야 개천에서 용이 난다.

덴마크, 노르웨이 등의 전반적 불평등이 낮은 social democratic welfare capitalism 사회에서 부모 자식 간 계층 이동이 높고, 미국, 영국 등 전반적 불평등 수준이 높은 liberal welfare capitalism 사회에서 계층 이동이 낮다.


전에도 얘기했듯, 결과적 평등 없이 기회의 평등은 없다. 개천에서 용나는 사회를 만들려면 인위적으로 현재의 불평등을 줄여야 한다.



그래프 출처는 아래:
http://www.americanprogress.org/issues/2006/04/b1579981.html

위 그래프 출처를 알려준 블로그 포스팅은:
http://understandingsociety.blogspot.com/2009/08/social-mobility.html
Posted by sov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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