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bizjournals.com/albuquerque/stories/2009/07/13/daily55.html

미국에서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대학 졸업자들의 초임은 거의 줄지 않았다는 기사. 2009년에 졸업하고 취직한 대학졸업생의 임금은 작년 졸업생들과 비교해서 임금이 1% 이하로 줄었다. 평균 초임이 올해는 $49,307, 작년에는 $49,693.

잘나가는 엔지니어링 전공자들은 6만불대의 임금을 받은 반면, 리버럴 아트 전공자들은 3만불대의 낮은 임금을 받는다. oTL

임금, 고용 등은 한 번 고정되면 잘 바뀌지 않는 성향이 있는데, 이를 stickiness라고 한다. 한 번 임금 수준이 정해지면 외부의 충격이 있더라도 단기간에 잘 변하지 않는다는 거고, 한 번 고용되면 외부의 충격이 있더라도 단기간에 잘 안 짜른다는 거다.

가장 자유경쟁시장에 가깝다는 미국도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임금 수준은 단기간에 변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대졸 초임을 낮춰서 신규 모집 정원을 늘리자는 "압력운동"이 있었는데, 대졸 초임을 낮췄다는 얘기는 들리지만, 신규 모집 정원이 그에 비례해서 늘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임금을 낮춰서 고용을 늘리자"는 아이디어는 좋지만 이 아이디어가 "사회적 합의"차원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반짝 아이디어로 집권층에 의해 강요될 때, 공기업 대졸초임의 임금을 낮추는 압력 이상의 효과는 없다. 한국 사회에서 부족한 것은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과 주체, 이들을 총칭하는 제도(institution)이지 아이디어 자체는 아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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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ro라는 신생 토론게시판에서 "하하하"라는 아이디를 쓰는 분이 "경청하는 사람"이라는 분에게 남긴 댓글을 두고 분란이 생겼다. 분란의 소지가 된 하하하님의 댓글은 "그냥 이 짐승에게는 제가 먹이를 주고 끝내는 것이 어떨까요?"

이 댓글이 욕은 맞는데, 좀 역사가 있는 욕이다.

"DNFTT"

인터넷에서 쓰이는 약자로 "DNFTT"는 짐승에게 먹이를 주지 마시오라는 뜻이다. Do not feed the trolls의 약자. 미국 인터넷에서 널리 알려진 표현법이다.

이에 대한 위키피디아의 글을 번역하면, "인터넷 슬랭 중에 '짐승(트롤)'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논쟁적이거나, 선동적이거나, 주제에 벗어난 얘기를 올리는 자를 일컫는다. 이들의 주요 목적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적인 반응을 자아내거나 아니면 그 주제에 대한 토론을 방해하는데 있다."


trolls이라는 단어는 스칸다나비아 반도의 민간전설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국가별로 조금씩 단어를 바꿔 쓴단다. 일본에서는 "쓰레기"로 중국에서는 "일목(외눈깔)" 등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하하하님의 링크에서도 보이듯이 트롤을 짐승으로 표현한다.

"짐승에게 먹이를 준다"라는 표현은 인터넷에서 주제에 상관없는 댓글을 다는 방훼꾼을 상대해준다라는 일반화된 표현법이다. "내가 이 짐승에게 먹이를 주겠다:라는 말은 <훼방꾼은 내가 상대하겠다>라는 말을 인터넷 용어로 표현한 것.

이 말이 널리 퍼진 것은 재작년인가, 여성 블로거에 대해서 살인 위협까지하는 "짐승"들에 대한 일대 파문이 미국 블로거들을 강타한 이후, 트롤(짐승)무시하기가 블로거들이 갖추어야할 소양의 하나로도 꼽히기 때문일 거다. (참조: 오라일리의 블로거 행동 강령 제안.) 이 사건은 BBC 뉴스에도 나왔다. 여기에 대해 연구해서 나온 책도 있단다.

오라일리의 블로거 행동강령 4번째: "트롤을 무시하라"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돼지와 같이 싸우며 뒹굴지마라. 둘 다 더러워질 뿐이지만, 돼지는 그걸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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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여성 고용 측면에서 OECD 국가 중 꼴찌에서 1-2위를 다툰다는 건, 더 이상 뉴스도 아니다. 여성 고용율은 OECD 국가 중에서 꼴찌지만, 여성의 고위직(국회의원, 기업임원, 정부고위직 등) 진출 비율은 전세계에서 바닥을 기고 있다.  몇 년 전에 본 통계로는 거의 이슬람 국가 수준이었다. 최근의 경제 위기에 가장 실직의 위기에 내몰린 계층은 30대 여성이라는 보도도 얼마전에 있었다.

캘리에 있는 페퍼다인 대학교의 Alder & Conlin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기업 차원에서도 여성의 승진율이 높은 기업의 이윤이 높다고 한다.

Miller McCune 기사.

2001년부터 포츈 500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는데, 여성 승진율이 높은 25대 기업의 전반적 이윤은 포츈 500의 평균보다 34% 높단다. 이 결과는 2004, 2005, 2006, 2007, 2008년 자료에서도 동일하게 관찰된다.

Alder & Conlin교수는 이런 현상이 관찰되는 이유로, 성별에 관계없이 가장 능력있는 사람을 승진시키는 회사에서 이윤이 높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한다.

여성 사회 진출의 확대는 한국사회의 긴급한 요구 중의 하나다. 예비역 병장들의 억울함을 달래는게 발톱 사이에 낀 때를 청소하는 문제라면, 여성 사회 진출 확대는 간에서 자라고 있는 암을 제거하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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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언론에 글쓰는 한국의 정치학자 중에 가장 참신한 얘기를 많이 하는 사람은 경희 사이버대 미국학과의 안병진 교수 같다.

프레시안에 쓴 오바마 집권은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미국 민주당과 진보세력 전체의 역량 때문이라는 글(프레시안 칼럼)도 괜찮았고,

한겨레 21에 요약 정리되어 나온 노무현 정권을 매디슨적 공화주의와 마키아벨리적 공화주의로 나누고, 양자의 모순에서 노무현 정권 몰락의 원인을 찾는 시도(한겨레21 기사)도 참신하다. 아래 일부만 인용하면, 


예컨대 노무현식 공화주의에 주목한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의 발표는 ‘초기 노무현’과 ‘후기 노무현’의 간극을 설명하는 참신한 잣대다. 공화주의는 소수에 의한 ‘자의적 지배’를 배척하는 태도다. 권력기관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이를 구현하는 게 핵심이다. 안 교수가 보기에 노 전 대통령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공화주의적 가치를 초보적 형태로나마 구현하려” 했다....


그런데 공화주의에도 두 종류가 있다. 엘리트 사이의 이성적 대화와 타협을 강조하는 태도가 있고, 시민들에 의한 엘리트 견제를 강조하는 태도가 있다. 앞의 것을 안 교수는 ‘매디슨적 공화주의’로 불렀다.... 뒤의 것은 ‘마키아벨리적 공화주의’로 부를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통치 기술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곧잘 오해되지만, 실은 민중의 역량에 주목한 선구적 정치학자였다...


안 교수는 노 전 대통령이 “선거에서는 마키아벨리적 공화주의에 기댔고, 국정운영에서는 매디슨적 공화주의에 집착했다”고 본다. 한나라당을 향해 대연정이나 개헌을 제안한 것은 “메디슨적 정치 구현”에 매달린 결과다. 이런 태도는 결과적으로 핵심 지지 기반을 침식했다. 특권층을 비판하는 대중의 지지를 얻고서도, 오히려 지배 엘리트와 타협하는 데 많은 정력을 기울였다는 진단이다...


노무현 정부가 서툴렀던 점이... 집권 초기, 4대 입법 등 거대한 정치 의제보다는 사소하지만 작은 곳에서 성과를 얻으면서 민심을 확인해나가는 민생 의제를 추진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적 공화주의로 특권층을 견제하면서도 매디슨적 공화주의로 지배 엘리트를 적절히 설득하는 전략이 그 요체다.



안교수는 80년대 학생운동할 때는 제헌의회 쪽에 가까웠고, 사노맹에도 관련되었던 걸로 알고 있다. 한국에서 석사하고 미국으로 유학가더니 뉴욕의 뉴스쿨에서 클린턴 선거전략가 딕 모리스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예전에 하킴님이 지난 미국 대선에서 Ayer를 둘러싼 논란을 보고 미국에서는 60년대 과격 운동권이 유의미한 사회활동에서 완전히 배제되었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안교수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든다. 지식인 숫자가 작기 때문에 배제 전략을 쓸 수 없었을 수도 있지만, 이런 면에서는 미국보다 한국이 더 개방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한겨레 21 기사의 일독을 권한다. 최장집 원로 교수의 일관성 없는 얘기(오돌또기님의 "속보" 참조)보다는 알찬 내용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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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사회학 공부할 때는 폴라니에 대해서 하도 날라리 학생이라 별로 들어보지 못했는데, 미국에 오니까 폴라니를 읽힌다. 요즘 한국에서 유행인 폴라니는 미국에서는 이미 10년도 전에 유행이었다.

현대 경제사회학 재발견의 콜럼버스라 해도 과언이 아닌 그라노베터가 "Economic Action and Social Structure: The Problem of Embeddedness"이라는 논문을 발표한게 1985년이다. 그 후 사회학에서 산업사회학(industrial sociology)이 거의 없어지고, 경제사회학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다. 개인적으로 그리 선호하는 이론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도 대유행하고 있는 네트워크 이론도 경제사회학의 한 가지다. 요즘은 경제사회학과 계층론을 융합하려는 시도가 많다.

어쨌든 그라노베터가 차용한 "embeddedness"라는 개념은 폴라니가 바라보는 시장관계와 사회관계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 개념은 요즘에 너무 광범위하게 쓰여서 오히려 무슨 뜻인지 불명확하게 되어버렸다. 그 탓인지, 얼마 전에 그라노베터는 자신은 더 이상 embeddedness의 학자라 아니라고까지 얘기했었다.)

하도 여기저기서 폴라니 폴라니 하다보니 프레시안에서 폴라니 제대로 알기 캠페인을 벌였다. 홍기빈 박사가 강연을 한단다.

두 번의 강연 요약이 올라왔는데, 첫번째 강연은 경제조직원리로써 market; redistribution; reciprocity라는 개념을 이해하기같고, 두번째 강연은 market이 전일적인 경제조직원리로 등장하는 역사적 과정에 대한 얘기다. 첫번째 강연 요약은 재미있고, 두번째 강연 요약은 너무 많은 얘기를 짧은 시간에 해서인지 그저 그렇다. 일독을 권한다.

강연요약 1: 인간과 시장
강연요약 2: 자기조정시장 개념

참고로 아직 홍기빈 박사의 강연에서 언급되지는 않았는데, 폴라니는 파시즘의 탄생을 영국의 빈민구호법에서 찾는다.

그럼 왜 요즘 갑자기 폴라니인가? 홍기빈 박사의 강연은 여기에 대한 답을 주는 것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혹시 홍박사가 언급하지 않으면 나중에 한 번 얘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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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병철의 자격요건

기타 2009. 7. 19. 03:41
어떤 조직을 무력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마도 해당 분야에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로 그 조직을 채우는 것일게다. 해당 조직의 행동양식이나 목표를 바꾸겠다는 생각이면 그 조직의 수장으로 어떤 굳건한 신념을 가진 사람을 임명하겠지만, 조직을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만들려면 무능한 사람이 최적이다.

그런 면에서 현병철 교수의 인권위원장 임명은 인권위 무력화 시도라는 "오해(?)"를 사기에 충분하다. 실무 경험이 없으면 이론적 바탕이라도 튼튼하면 좋을려만 현 교수의 논문 목록에서는 그런 면을 찾기 어렵다.

현 교수 스스로 돌아보기에도 인권과 관련된 연구나 실무경험이 없는 사람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덜커덕 맡는 것을 볼 때, 그가 얼마나 인권에 대해서 안일하게 생각하는지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를 낙마시키기 위해서 논문표절을 문제 삼는 건 별로 훌륭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학문은 외국에서 배운 것을 물려주는 교육(티칭)이었지, 새로운 내용을 밝혀내는 연구(리서치)가 아니었다. 논문을 쓰는 연구는 장식물에 가까웠다. 바꿔야할 잘못된 관습임에 틀림없고, 많이 바뀌었지만, 이걸 문제삼아 공직 진출의 기회를 박탈하는게 옳은 일인지는 의문이다.

참여정부 때 보수주의자들이 억지에 가까운 논문표절의 잣대를 들이대서 여러 사람을 물먹였지만, 굳이 똑같이 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학문적 발전을 위해 표절을 금지하고 그런 문화를 만들었는데, 정치적 동원의 논리만 되어서야 쓰겠는가. 표절이 교수직을 유지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안되지만, 공직에 진출할 때만 문제가 되는 상황은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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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통신혁명이 20세기와 같은 비약적인 생산력을 가져오지는 않을거라는 신경제 비판론자들의 요지는 간단하다. 정보통신혁명이 서비스산업의 비약적 생산력 발전을 "아직은" 동반하지 않는다는 거다.

컴퓨터 사용은 60년대부터 꾸준히 늘었다. 90년대에 퍼스널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사람들이 컴퓨터를 피부로 느끼지 시작했을 뿐이다. 중요산업에 중앙컴퓨터는 우리가 PC를 쓰기 이전부터 이미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그래도 컴퓨터 칩의 용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고, 컴퓨터의 연산속도도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고 있지 않냐는 의구심이 들 것이다. 맞다, 컴퓨터 용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기하급수적 발전이 생산력의 기하급수적 발전을 가져오지는 않을 것으로 보는 이유는 인간의 능력이 그에 맞춰서 늘지 않기 때문이다. 수백가지 저널이 출간되자마자 도서관에 갈 필요없이 내 이메일로 출간 사실을 통보해 오고, 인터넷 접속 만으로 논문을 받아볼 수 있지만, 내가 그 저널을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컴퓨터가 없을 때와 마찬가지로 궁둥이 붙이고 앉아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내가 어떤 쌈빡한 아이디어가 있을 때 가지고 있는 데이타를 이용하여 상대적으로 단시간 내에 복잡한 모델을 돌려볼 수 있지만, 그 내용을 논문으로 쓰기 위해서는 옛날에 타자기로 썼던 것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은 시간만큼을 라이팅에 보내야 한다.

인간이 손과 머리로 직접 해야 하는 서비스를 기계와 로봇이 대신해주는 발전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즉 제조업이 아닌 서비스업에서 인간이 만족할만한 자동화, 로보트화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20세기에 봤던 급속한 생산력 발전을 신경제로 다시보기는 어렵다는 주장이다.



ps1. 전기모터는 1800년대 초에 발명되었지만, 전기가 일상의 삶을 바꿔놓은건 20세기 중반이다.

ps2. 오트론 대신에 스타크래프트하는 게 발전인 건 분명한데, 자치기 하다가 오트론하는 발전만 못하다.

ps3. 아이팟이 워크맨보다 훠~얼씬 좋기는 하지만, 라이브 연주회가 아니면 음악이 없었던 시절에서 워크맨 듣던 것과 비교해서 훠~얼씬 덜 혁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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